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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좋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도장을 찍어주시면 됩니다.”
시황은 준비해둔 간단한 계약서를 꺼내며 말했다.
은지의 아빠는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도장을 꺼내 계약서에 찍었다. 안도와 걱정이 교차되는 복잡 미묘한 표정이었다. 시황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한 장은 은지의 아빠에게 주고 한 장은 자신이 가졌다.
“바로 입금해드리겠습니다. 계좌번호하고 금액을 말씀해주세요.”
“후……. 1억 5천에…….”
은지의 아빠는 계좌번호와 1억 5천만 원이라는 금액을 말했다. 크다면 클 수도 있는 돈이었지만 시황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스마트폰으로 간단하게 계좌이체를 해주었다. 옛날이야 1억 원이라는 돈이 감히 가질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까마득해보였지 지금의 시황에게는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니었다.
“확인해 보세요.”
“고맙네.”
일단 1년이라는 시간을 번 은지의 아빠는 아까전과 다르게 꽤나 가벼워진 표정으로 말했고 옆에 있는 은지의 엄마와 은지의 표정도 이전과 다르게 확연히 좋아졌다. 순식간에 공장이며 집이며, 모든 것이 다 사라질 판국이었으니 충분히 그런 표정을 지을만 했다.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시황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애초에 이런 효과를 기대하고 한계까지 기다리긴 한 거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는 점이 만족스러웠다. 이정도면 이제 마음 편하게 수능을 치고 서울로 대학을 가도 될 듯 하다.
“그리고 화장품은 어머님께서 쓰세요. 써보시고 괜찮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홍보도 좀 해주시고요.”
“어머, 이렇게 비싼 걸 그냥 주는 거야? 시황아, 고마워. 잘 쓸게.”
은지의 엄마는 시황의 말에 기쁜 얼굴로 말했다. 첫인상부터 행동거지, 능력 등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은지와 결혼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고 하니 좀 더 기다려야 할 듯 했다. 어디서 저런 괜찮은 남자를 구했는지 그저 흐뭇할 따름이다.
시황은 고마워하는 은지 부모님과 함께 화기애애하게 점심식사를 했다.
“은지는 계속 학교 다닐 거냐?”
식사 중에 은지의 아빠가 은지에게 물었다.
“아니. 올해는 휴학하고 오빠 카페에서 알바하면서 지내게.”
“그러면 계속 그 오피스텔에서 지낼 거냐?”
“좀 싼 곳으로 옮길까 생각 중이야. 집 형편도 안 좋은데 비싼데서 있을 수는 없잖아.”
“미안하구나…….”
“미안하긴……. 지숙이랑 얘기해보고 내가 알아서 할 게 걱정하지 마.”
“그래. 우리 은지가 편한 대로 해.”
은지의 엄마는 시황을 살짝 쳐다보면서 말했다. 지금은 괜히 집에 들어오라고 하는 것보다 시황과 잘 되게 해주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저런 남자가 흔치 않은 걸 알았기 때문에 은지의 엄마는 은지가 꼭 시황과 잘됐으면 하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친 시황은 은지의 부모님과 조금 더 이런 저런 대화를 하고 오후 늦게 돼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배웅해주는 은지의 부모님을 뒤로하고 BMW M6를 탄 시황과 은지는 집으로 향했다.
“오빠,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제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뭐, 그 정도 가지고. 크게 부담 갖지 마.”
시황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은지가 부담을 안 가질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숙이는 어때? 연락을 해본다는 게 요즘 바빠서 연락을 못했네.”
“지숙이도 아직 어떻게 할지 모르겠대요.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지숙이네 공장도 조금 어려운 거 같았거든요.”
“집은 정말 다른 데로 이사 가게?”
“고민 중이에요.”
해가 서쪽으로 저물고 있었다. 아침에 차를 타고 부산에 있는 집으로 갈 때보다 은지의 표정이 많이 밝아져있었다. 돈이라는 게 단순한 물질적 가치를 넘어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한다. 시황 자신만 하더라도 드래곤의 유산을 받기 전에 살던 삶과 지금 사는 삶은 비교가 안 될 정도니까.
“그러면 오피스텔에 계속 지내. 괜히 먼 곳으로 갈 필요 없잖아.”
“저도 그러고 싶기는 한데…….”
시황은 잠시 고민했다. 한 달에 50만 원 집값 내주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 이유 없이 돈을 주는 건 은지가 싫어할 게 분명했다. 보통의 된장녀라면 남자에게 한 푼이라도 더 긁어내려고 난리겠지만 은지는 그런 여자들 하고 달랐다. 자신이 괜히 은지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런 된장녀라면 애초에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월급을 더 올려줄게. 은지가 멀리 안 갔으면 좋겠어.”
“오빠……. 그런데 일은 똑같이 하는데 월급만 오르는 건 너무 죄송해서……. 제가 오빠 빨래하고 청소라도 해드릴까요?”
“아니. 빨래는 아루가 다 해줘서 그건 괜찮아. 아! 그러면 아루랑 수란이한테 하루에 2시간 정도 과외 해줄래? 사실 아루랑 수란이가 어릴 때 해외에 살아서 한국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거든. 은지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면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은데 어때?”
“아, 그 정도면 저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오빠 정말 고마워요.”
“고맙긴.”
이걸로 은지의 문제는 나름 깔끔하게 해결이 됐다. 은지는 이전과 같은 평화로운 삶을 살 수가 있게 되었고 자신은 고심하던 공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1억 5천만 원이라는 돈이 들기는 했지만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직접 공장을 차리고 직원을 뽑고 하려면 그 돈을 넘어서는 노력과 노하우가 필요했으니 말이다.
시황은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을 했다. 이제 다음으로 해야 할 건 만화를 그리는 것과 수능 준비다. 5레벨이 까마득하게 남아있기는 했지만 차근차근 나아가야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하루하루가 크게 다를 건 없었지만 만화 그리는 노하우도 상당히 많이 생겼고 수능에 대한 자신감도 상당히 생긴 상태였다.
10월 중순. 수능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기. 슬슬 쌀쌀해지는 날씨에 고등학생 3학년들은 한창 공부한다고 정신이 없었겠지만 시황은 카페에서 느긋하게 소진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오빠, 예리 언니가 제 그림 보고 누가 그렸냐고 꼭 좀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죠?]
[예리? 한예리 말이야?]
[네.]
살짝 놀란 듯한 시황의 말에 소진이 대답했다. 한예리라면 30대 연기자 중에서 상당히 유명한 연예인이었다. 주로 공중파 저녁 드라마에 출연하다보니 그 인지도로만 따지면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어떡하죠? 오빠.]
[그려줄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이건 귀찮지만 소진이 얘기해서 그려주는 건 아니었다. 그런 유명 연예인이 그림을 탐낼 정도면 SNS나 주변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자랑을 할 테고 그러면 그만큼 인지도가 오르게 될게 분명했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 아니다.
[죄송해요. 오빠 바쁘실 텐데 이런 부탁해서…….]
[아니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시황은 별다른 생색을 내지 않고 말했다. 안 그래도 미안해 죽으려는 소진이한테 바쁜데 너 때문에 해준다는 등의 얘기를 해봐야 별로 의미가 없다. 이렇게 쿨하게 행동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은 인상을 준다. 다만 소진 같은 애가 아니라 어장관리 하는 여자에게 걸리면 그냥 호구가 되는 거지만 말이다.
[그러면 그분한테 어떤 그림을 그려줄지 물어보고 소진이가 사진 보내줘.]
[정말 고마워요. 오빠.]
소진은 거듭 고맙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같은 연기자 선배이다 보니 그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던 거 같았다.
컴퓨터로 예리의 관한 정보를 찾았다. 30대 연기자다 보니 꽤나 많은 남자 경험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차피 자신과 별로 상관없는 문제였다. 성관계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유명 연기자답게 30대임에도 피부가 굉장히 좋았고 그 만개한 아름다움은 20대의 풋풋한 여자들이 가지기 어려울 정도였다. 연예인이라 그런지 확실히 보통의 30대 여성과 현저한 차이를 보여줬다.
예리에 관한 정보를 찾는 와중에 은비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전 그 호텔 일 이후로 거의 매일 문자가 오고 전화도 상당히 자주 왔다. 그런데 딱히 특별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너 소진 언니랑 전화했지! 내가 다 봤어.]
[어떻게 아셨어요?]
[흥, 소진 언니 전화할 때 표정만 보면 뻔하지.]
은비와의 통화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독특한 즐거움이 있었다. 특유의 까칠한 말투가 너무 귀엽다.
[어머, 네. 그냥 잠시 통화만 하고 있어요. 제 차례가 되면 말씀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누가 은비에게 말이라도 걸었는지 은비가 특유의 가식어린 말투로 상냥하게 얘기를 한다.
[그건 뭐에요?]
[뭐, 뭐. 바보야. 다른 사람이 말 거니까 대답한 건데.]
은비도 부끄러운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 귀여운 반응에 옆에라도 있었으면 당장에라도 끌어안았겠지만 몸이 너무 떨어져 있어 그저 마음속으로 상상만 해야 하니까 안타까울 뿐이다.
[녹화하고 있는 거에요?]
[진짜 완전 힘들다니까. 빨리 녹화 끝나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 아아…….]
은비는 시황에게 징징거리면서 얘기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런 내색도 못하고 항상 웃고만 있으니 힘들만도 하다만.
[많이 힘드신가 봐요. 안마라도 해드리고 싶은데 만날 수가 없으니……. 하하]
[아, 그래. 너 서울 언제 올 거야? 나 또 그 약 필요한데.]
[지금 힘들고 수능 끝나고 나면 서울로 올라가서 살 거 같아요. 대충 한달 정도 뒷면 서울에 가겠네요.]
[진짜? 서울에서 산다고?]
시황이 서울에서 산다는 말에 은비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진다. 약은 둘째 치고 시황과 너무 만나고 싶어 지방에 내려갈까 하고 스케줄까지 살펴보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기쁜 소식이 있다니! 정말 너무 기뻐서 참을 수가 없다.
[네. 그쪽에서 카페도 열고 대학도 다녀야 하니까요.]
[어디? 어디로 이사 올 건데?]
[고민 중이에요. 카페 낼 곳이랑 학교랑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하니까요.]
[아아, 그렇구나.]
그 뒤로도 시황은 신이 나서 얘기하는 은비와 한참동안 통화했다. 스마트폰의 열기로 귀가 뜨거워질 정도였지만 은비는 전화를 끊을 기미가 전혀 없었다. 벌써 1시간이 넘도록 이런저런 아주 사소한 은비의 얘기들을 시황은 적절히 대답해가며 흥미롭게 들어주고 있었다.
[오늘 목걸이하고 그런 거 협찬 받았는데 전에 그 비싼 다이아를 보고 나서 그런지 진짜 안 예뻐 보이더라. 이것도 엄청 비싼 건데. 다 너 때문이잖아. 그렇게 예쁜 걸 보여주니까. 힝.]
[하하. 다음 시상식 때는 더 예쁜 걸로 드릴게요.]
[진짜? 얼마나 예쁜 거?]
시황의 말에 은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얘기를 한다. 전에 그 다이아도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예뻤는데 그것보다 더 좋은 거라니!
[훨씬요.]
[진짜지? 소진 언니 거 보다 더 좋은 걸로 줘야 돼. 알겠지?]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헤헷. 아, 그리고 오늘 내가 아침을 먹는데…….]
정말 끝이 없었다.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계속 무언가를 얘기했다. 주변에 많은 여자들이 있지만 은비처럼 전화를 오래하는 여자는 정말 처음이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 요즘 날이 쌀쌀해져서……. 아, 이제 제 차례에요?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
또 뭔가 아주 사소한 부분을 얘기하려다가 옆에서 누가 말을 걸었는지 은비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대충 보아하니 은비가 녹화를 해야하는 타이밍인 듯 했다.
[아으, 녹화하러 가야하네. 힘들다.]
[녹화 열심히 하세요.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진짜? 소진 언니만 보는 거 아니지? 인터넷에 보니까 막 자기 좋아하는 연예인 부분만 잘라가지고 보던데 너도 그러는 거 아니야?]
[어떻게 아셨어요? 그런데 소진이 거 말고 은비 씨 거 돌려보는데.]
[뭐, 뭐야. 바보같이. 진짜 바보라니까.]
옆에서 들었으면 엄청 오글거릴법한 시황의 대답에 은비는 엄청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부터가 아까와 달라져있었다. 확실히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이 견디기 힘든 오글거리는 말에 감동받고 좋아했다.
[나, 난 간다.]
[네.]
은비와 전화를 끊고 시황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냥 통화만 했는데 지치는 기분이었다.
잠깐 쉰 뒤에 카페 일을 도와주고 찬미의 집에서 과외를 했다. 이젠 찬미가 가르쳐 줄 것도 없어서 그냥 문제나 몇 개 풀어보는 게 다였지만 말이다.
카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시황은 저녁에 소진이 보내준 예리의 사진을 보고 단번에 그림을 그렸다. 처음 능력을 발현할 때보다 그림이 더욱 정교해지고 아름다워졌다. 그림을 그리는 스킬이 늘어난 것이다.
이제 슬슬 때가 무르익고 있었다. 본격적인 카페 사업부터 화장품 사업, 만화 등 그 날개를 펼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본격적인 마무리. 이제부터 또 다른 삶이 펼쳐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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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