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6 ------------------------------------------------------
서울로
이젠 시황이 싫다고 해도 지숙을 시황과 같이 서울에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질적인 부분이 큰 영향을 끼친 게 맞기는 하지만 인성도 대단히 뛰어난데다 외모도 흠잡을 곳 하나 없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지숙이 그야말로 대어를 낚아온 것이다.
“네. 아무래도 장사하기에는 그쪽이 좋을 거 같아서요.”
“그렇구나. 그런데 은지 부모님은 은지가 서울에 가는 거 아시니? 내가 은지 엄마랑 친해서 아는데, 은지를 쉽게 서울에 보낼 사람이 아니라서…….”
지숙 엄마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든 서울에는 지숙과 시황 둘만 보내고 싶었다. 아무래도 은지가 지숙보다 인물이 나은데다 훨씬 더 여성스럽고 애교도 있다 보니 자신의 오랜 경험상 은지랑 같이 가게 되면 분명 시황은 지숙보단 은지에게 눈이 갈게 분명했다.
“아직 서울에 간다고 말은 안했는데 조만간 제가 직접 말할 생각이에요.”
“그러니? 내 생각엔 은지 엄마가 허락을 안 해줄 거 같구나. 혹시라도 허락 안 해주면 일단 지숙이랑 먼저 서울 올라가렴. 나랑 친하니까 내가 전화로 설득을 해보마.”
“아, 네. 감사합니다.”
시황은 지숙 엄마의 말에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이유로 저런 말을 하는지는 뻔했지만 그렇다고 표정으로 그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어찌됐든 지숙 엄마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은지도 가면 좋을 텐데……. 그죠. 오빠?”
“응. 나도 같이 갔으면 좋겠네.”
“…….”
은지의 엄마를 몇 번 만나 본 지숙은 혹시라도 은지가 같이 서울로 못 올라갈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전에야 시황을 차지하니 마니 하면서 티격태격했지만 지나고 보니 너무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오랫동안 은지를 보지 못해서 많이 그립기도 했다.
그런데 지숙은 시황과 얘기를 하느라 미처 못 봤는데 지숙 엄마는 쓸데없는 소리 한다는 표정으로 지숙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은 암만 친한 친구라도 남자관계가 엮이면 친구에서 원수 되는 것도 한순간인데 저 순진하고 바보 같은 지숙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아, 맞다. 어머니 이거 쓰세요.”
“응? 뭐 말이니?”
시황은 가방에서 케즈론 화장품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이때까지 이 화장품을 보고 반하지 않은 여자가 없었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지숙의 엄마도 화장품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정말 예쁘다.”
시황은 이게 어떤 화장품이며 어떤 효능이 있는지 말해줌과 동시에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는 점을 은근슬쩍 어필했다. 그러자 지숙의 엄마는 물론이고 지숙조차 호기심에 가득차서 화장품의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손등에 발라보기도 했다.
“우왕, 이거 냄새도 좋고 보습도 잘 되고 진짜 좋다.”
“시황아, 고마워. 잘 쓸게.”
지숙의 엄마가 활짝 웃으며 시황에게 말했다. 남편의 공장이 부도나고 이런 허름한 집으로 오고 나서 하루하루가 힘겹고 고통밖에 없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아무런 근심 없이 웃을 수 있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없었다. 저렇게 괜찮은 남자를 지숙이 데려온 것도 정말 기적이고 더 나은 남자를 지숙이 만날 가능성이 없다는 건 지숙의 엄마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꼭 지숙이 시황과 이어져야만 했다.
“엄마, 그러면 나 이제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그만 둔다고 말하러 갈게.”
“그래. 그래. 빨리 그만두고 시황이랑 같이 올라가. 알겠지?”
지숙의 말에 지숙의 엄마가 얼른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라고 얘기했다. 일단 지숙이 시황과 같이 지내야 쌀이 밥이 되든 죽이 되든 할 게 아닌가? 다만 지숙이 너무 숙맥에다 남자에 관해 아는 게 없다보니 어떻게 시황을 유혹해야 할지 가르쳐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그래. 시황아. 선물도 너무 고맙고 오늘 즐거웠어. 다음에도 지숙이랑 놀러와 알겠지?”
“네. 어머니.”
“엄마, 나도 갈게.”
“지숙아 잠깐 엄마한테 와볼래?”
“응? 왜?”
이제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는데 엄마가 손짓을 하며 부르자 지숙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까이 갔다. 그러자 엄마가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바보야, 지금처럼 어색하게 있지 말고 좀 더 가까이 붙고 팔짱도 끼고 하란 말이야. 그리고 혹시 시황이 밤 늦게 집에 놀러오라든가, 라면 먹으러 오라고 말하면 꼭 가야 한다. 또 막
“아, 알았어.”
항상 조신하고 남자를 조심하라고 말하던 엄마가 대놓고 시황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라는 말에 지숙은 살짝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엄마야 자신이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응? 알았어. 그럼 간다.”
인사를 하고 떠나는 시황과 지숙을 마중 나갔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 지숙 엄마는 바로 은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머, 지숙 엄마 오랜만이야. 요즘 뭐해?]
은지 엄마가 전화를 받고는 살짝 놀란 목소리로 묻는다. 지숙이네 공장이 망하고 떠났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 전화를 할지는 몰랐던 것이다.
[나야 그냥 그렇지. 그런데 은지엄마, 혹시 강시황이라고 알아?]
목적이 있는 전화였기 때문이 지숙 엄마는 쓸데없는 잡설은 전혀 하지 않고 시황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어머, 지숙 엄마가 우리 시황이를 어떻게 알아?]
[우리 시황이라니?]
은지 엄마가 자연스럽게 우리 시황이라고 말하자 지숙 엄마가 살짝 날카롭게 말했다. 혹시 시황이라는 존재를 모르면 약간 부정적인 말로 은지를 같이 서울로 못 데리고 가게 할 작정이었는데 이미 은지 엄마와 만난 적이 있는 듯 했다.
[우리 은지가 전에 데리고 왔거든. 어찌 그리 늠름하던지……. 우리 은지랑 참 잘 어울리더라. 그런데 지숙 엄마는 우리 시황이를 어떻게 아는 거야?]
[사실 오늘 지숙이랑 같이 시황이가 왔거든. 우리 지숙이랑 같이 서울에 가서 카페를 맡길 거라고 허락 받으러 왔지 뭐야.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호호.]
자꾸 은지 엄마가 우리 시황이라고 하자 지숙 엄마가 조금 짜증이 났다. 안 그래도 바보 같은 지숙이 은지랑 같이 서울 가니 마니 하더니 이러다간 정말 은지랑 같이 서울에 갈 것만 같다.
[지숙이랑 서울에? 그게 무슨 말이야. 지숙엄마. 좀 더 자세히 얘기해봐.]
은지 엄마가 약간 움찔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당연히 은지랑 시황이 잘 돼서 장모님 소리 들을 수 있을지 알았는데 뭔가 돌아가는 게 이상하다. 뜬금없이 지숙이랑 서울에 간다니?
[몰랐어? 지숙이가 오늘 시황이 데려와서 같이 서울 갈 거라고 허락해 달라는데 참 고민되지 뭐야. 아무리 그래도 외간 남자랑 어떻게 서울에 같이 보내겠어. 그러다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어떡해.]
어떡하긴 당장 결혼을 시켜야지. 지숙이 제발 시황의 아이를 임신해서 은지 같은 다른 여자가 넘보지 못하게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 본심을 그대로 내보인다면 시황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은지 엄마가 뭔가 수를 쓸 게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같이 보내기 싫다는 투로 말을 했다.
[어머, 임신이라니. 설마. 우리 시황이는 아무 여자한테 손대고 그럴 애 아니거든?]
[우리 지숙이가 아무 여자라는 말이야?]
은지 엄마가 시황을 너무나 신용을 하는데다 시황이 지숙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을 거라는 말에 화가 나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시황이 은지도 같이 간다는 말이 상당히 거슬렸는데 결국 이런 사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은지 엄마는 시황을 은지랑 엮어줄 못된 속셈이 가득해 보였는데, 만약 이대로는 간다면 남자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순진한 지숙이 요망한 은지에게 시황을 빼앗길 게 분명했다.
사실 지숙 엄마는 자신의 딸을 너무 순진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흔히 자기 아들이 담배도 안 피고 술도 안 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엄마처럼 지숙 엄마도 지숙이 남자 손 한 번 못 잡아봤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순진하다고 생각하는 지숙이 시황을 유혹하려고 먼저 알몸으로 달려들었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 궁금하다.
[어머,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난 우리 시황이가 지숙이랑도 그렇게 친한지 몰랐네.]
[시황이가 나한테 값 비싼 명품 화장품을 선물해줄 정도인걸. 이정도면 우리 지숙이랑 사귀는 거랑 다름없지.]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 같이 보내는데 고민되니 어쩌니 하더니 이젠 오히려 지숙이 시황과 더 깊은 사이라고 자랑을 하듯 말을 했다.
[그 화장품 나도 받았거든. 내가 지숙 엄마보다 훨씬 더 빨리 받은 건 몰랐지?]
[뭐, 뭐라고?]
처음엔 그래도 나름 괜찮은 분위기에서 대화하던 은지 엄마와 지숙 엄마가 어느 기점을 넘자 서로 자기 딸이 시황과 더 깊은 관계라고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평범하게 생긴 지숙이보다 우리 은지가 훨씬 더 예쁘고 남자 내조 잘하지. 지숙이는 너무 드세 가지고 남자 내조는 잘 하겠어?]
[흥, 우리 지숙이고 오늘 시황이한테 직접 과일 먹여준 거 모르지? 은지보다 훨씬 내조 잘하거든?]
은지를 시황과 서울로 못 가게 한다는 생각은 이미 뒷전이고 지숙 엄마는 은지보다 지숙이가 시황과 어울린다고 소리를 치며 싸우고 있었다. 자신의 딸인 지숙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지만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면 남자를 끄는 매력은 은지 쪽이 더 강했다.
이대로라면 아까 불안해하던 게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은지 엄마에게 전화를 건 건 천만다행이었다. 잘못했으면 뭣도 모르고 요망한 은지에게 당할 뻔 했다.
지숙 엄마는 은지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지숙에게 어떤 식으로 남자를 유혹해야할지 가르쳐 주기로 했다. 뜨거운 의지로 가득 찬 눈빛. 이 눈빛은 과거 지숙이 시황을 유혹하고자 다짐했을 때를 보는 것 같았다. 확실히 모녀가 맞긴 맞는지 지숙과 지숙 엄마는 무서울 정도로 닮아있었다.
은지와 지숙이 시황을 쟁취하려는 게 어느새 그녀들의 엄마까지 개입되고 말았다. 여복이라 할까 여난이라 할까……. 시황이 자초하기는 했지만 그 어느 것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싸움이 현실에서 일어나버린 것이다!
시황은 지숙을 따라서 같이 가게로 들어갔다. 아직 12시가 조금 되지 않은 오전이라 손님은 하나도 없었고 아르바이트 몇 명만 가게에 있을 뿐이었다.
슬쩍 둘러보니 어제 지숙에게 찝쩍댔던 남자가 눈에 띤다. 순간 시황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남자가 피하기는커녕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본다. 어제 밤에야 무서워서 도망쳤지만 하루가 지나고 나니 왜 자신이 도망을 쳤는지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제 밤 너무 분해서 시황을 다시 만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까지 했다.
“오빠, 저 사장님이랑 얘기 좀 하고 올게요.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응. 갔다 와.”
지숙은 종종걸음으로 카운터에 있는 사장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남자의 눈이 지숙을 쫓아가더니 슬쩍 아래위로 훑어본다. 욕정으로 차 있는 젊은 남자의 눈빛이다. 잠깐 지숙을 응시하던 남자가 다시 시황을 무서운 눈길로 쳐다봤다. 두꺼운 옷을 입었음에도 저렇게 꼴리는 지숙을 먹지 못해서 화가 난 것이다.
“어?”
그런데 아까와 다르게 시황과 눈이 마주치자 두려움이 스물스물 일어난다. 어제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다. 마치 산 속에서 맨몸으로 곰이나 호랑이를 만난 것처럼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몸을 살짝 떨고 있는데 시황이 점점 다가왔다. 동시에 남자가 두려운 표정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어느새 벽에 닿아버려 더 이상은 뒤로 물러나지 못했고 순식간에 시황과 거리가 좁혀졌다.
단순히 가까이 있을 뿐인데 너무나 두려워 말조차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어째서 방금 시황을 노려봤는지 정말 후회가 됐다.
“방금 지숙이를 본 건가?”
“아……. 아…….”
마치 금방이라도 살해당할 것만 같은 눈빛에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가 않았다. 너무나 두려 오줌까지 찔끔 나와버렸다.
“죽고 싶은가 보지?”
시황은 남자의 귀에 나직이 속삭였다. 마기를 잔뜩 피어 올려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이 견딘다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다 그 기세가 용맹한 패기 같은 게 아닌, 적을 죽이고자 하는 살기였기 때문에 남자가 이처럼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주변에 있던 아르바이트생 몇 명이 슬쩍 이쪽을 보기는 했지만 괜히 이상한 일에 엮일까 싶어 금세 고개를 돌렸다.
“사, 사, 살려주세요……. 제, 제발…….”
남자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면서 사정했다. 살인마가 내뿜는 살기만 느껴도 보통 사람은 두려움에 벌벌 떨 정도인데 시황이 내뿜는 살기는 그것과 비교를 불허했다. 그러다보니 나름 깡이 있어 보이는 이 양아치 같은 남자가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완벽하게 시황에게 굴복해버린 것이다. 어제의 그 두려움은 ‘다음에 만나면 죽여버린다.’라는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약간은 어설픈 두려움이었다면 지금 이 두려움은 ‘다음에 만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각인시켜 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내 눈 앞에 한 번만 더 보이면 그땐 가만 두지 않겠다.”
“네……. 네……. 가, 감사합니다…….”
시황의 말에 남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런 남자를 시황이 한 번 더 강렬하게 쳐다 본 뒤에 몸을 돌려 가게의 문 앞으로 갔다. 그러자 남자가 허물어지듯 쓰러진다. 그런데 아까 전까지는 어떻게 오줌을 참고 있었는데 시황이 가버리고나자 긴장이 풀려버렸고 쓰러짐과 동시에 오줌이 터져 나와 바닥을 가득 적셔 버렸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