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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유산-232화 (23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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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헐, 오빠 오늘 완전 멋있네요.”

문을 열자 세련된 코트를 입은 시황이 양손에 커다란 종이가방과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평소에도 옷을 잘 입고 다녔는데 오늘은 머리도 신경 써서 만진데다 제대로 차려입으니 젊은 전문직 종사자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자, 이거.”

시황은 유미에게 과일 바구니를 전해줬다. 어른들이 집에 방문하면 보통 이런 선물을 들고 가는 게 통상의 매너였다.

“엄마, 아빠 오빠가 과일 사왔어. 내가 부엌에 가서 잘라올게.”

유미가 평소보다 유난히 더 호들갑을 떨며 과일 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부모님들은 평소보다 더 활기찬 모습의 유미를 보며 왜 저러나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찬미의 남자 친구라는 시황을 쳐다봤다.

“음…….”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당한 호감이 느껴졌다. 순수하고 깔끔하게 생긴 얼굴하며 바른 몸가짐, 적당히 균형 잡힌 몸 등 이보다 더 나은 인물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호감이 있는 눈으로 보는 찬미의 엄마와 다르게 찬미의 아빠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약간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시황이라고 합니다.”

시황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뒤쪽에 놔두고 찬미의 옆에 앉았다. 찬미의 집은 평범한 서민의 집이었기 때문에 다들 조그만 소파가 아닌 카펫이 깔린 거실에 앉아 있었고 집이 조금 오래 되다 보니 외풍이 세어 탁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가정용 가스난로가 켜져 있었다.

“오빠, 코트 벗으세요.”

“고마워.”

가스난로 덕분에 거실이 훈훈하게 따듯했기 때문에 찬미가 직접 시황의 코트를 벗겨 옆에 있는 소파에 올려두었다. 마치 결혼한 부부가 하는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

“어머어머.”

“어흠…….”

찬미에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이지만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엄마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아빠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찬미가 자기가 한 일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살짝 붉힌다.

“어흠, 둘이 사귄지는 얼마나 됐나?”

머리가 살짝 까지고 배가 나온 평범한 40대 중년인의 모습을 한 찬미의 아빠가 시황을 보며 물었다.

“찬미가 봄에 헬스클럽에 다닐 때 처음 봤습니다. 헬스를 하다 제가 찬미한테 실수를 했는데 마음씨 넓은 찬미가 이해를 해줘서 그걸 계기로 만나게 됐습니다.”

시황이 찬미를 보며 살짝 웃으며 말하자 찬미가 그때 일이 생각났는지 부끄러움에 눈을 살짝 피했다. 그때 시황에게 소리치고 화를 냈던 것과 술을 먹고 온갖 이상한 짓을 했던 건 생각이 날 때마다 너무 부끄러워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찰 정도였다.

뭔가 둘 사이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찬미의 아빠가 그다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황이라는 애가 괜찮아 보이기는 했지만 저런 말쑥한 얼굴로 찬미를 꼬셨을 수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머, 찬미 너는 그렇게 오래 사겨놓고 어떻게 엄마한테 말도 안 해줬니. 아빠한텐 비밀로 하더라도 엄마한테는 말해줬어야지.”

“제대로 사귄지는 얼마 안 돼서…….”

찬미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일단 엄마는 시황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감이 가득한 표정이 짓고 있었다. 사실 시황의 얼굴 자체가 엄청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적절하게 잘생긴데다 깨끗한 피부, 그리고 부드러운 전체적 얼굴 인상은 호감도의 극을 느낄 정도로 순수한 매력이 가득했다.

“어흠, 자네 하는 일은 뭔가? 듣기로는 이제 27살이라던데 아직 학생인가?”

“얼마 전까지 근처에 있는 지방대에 다니다 자퇴했습니다.”

지방대에 자퇴라는 말을 듣자 아빠의 얼굴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아무것도 없는 놈팡이가 얼굴로 딸로 꼬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어서 얼마 전 다큐멘터리에서도 아무것도 없는 남자가 여자랑 사고 쳐서 애는 낳았는데 분유 살 돈도 없어서 부모님한테 손을 벌린 던 게 떠오른다. 그땐 혀를 차면서 재미로 봤었는데 실제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자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시황이라는 놈을 찬미에게서 떼어놔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럼 자퇴하고 일이라도 하고 있니?”

호감이 있던 찬미의 엄마도 약간 표정이 안 좋아져서 시황에게 물었다.

“카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카페라니. 나이가 27살인데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면 앞으론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시황의 대답에 아빠가 약간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단번에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얼굴은 번드르르한데 27살에 지방대 자퇴하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심한 놈을 데려왔다는 생각에 속에서 열불이 났다.

“아빠 그게…….”

찬미가 단순히 카페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사장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순간 시황이 손을 잡더니 고개를 살짝 젓는다. 그러자 도중에 말을 끊은 찬미가 왜 그러냐고 약간은 불안한 표정으로 시황을 쳐다봤다.

“쨘! 과일 내가 다 깎았어. 엄청 잘 깎았지? 응? 분위기가 왜 이래?”

과일을 탁자에 놓은 유미가 뭔가 이상한 분위기에 눈치를 채고 시황과 부모님을 번갈아보며 말했지만 굳은 표정의 부모님은 얼굴이 펴질 줄을 몰랐다.

“과일이라도 먹어. 오빠, 자요. 과일 먹어요.”

“고마워.”

그럼에도 유미는 부모님 옆에 앉아 포크로 과일을 찍어 시황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엄마와 아빠가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유미까지 이러나 싶어 어이가 없는 눈으로 시황을 쳐다봤다. 보니까 저 얼굴로 여자 꽤나 꼬신 듯 싶었다. 그것도 모르고 순진한 자신의 딸이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말문이 막혀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부모님은 뭐하시나?”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시다가 얼마 전에 다치셔서 일은 쉬고 계십니다.”

“하…….”

옷을 괜찮은 걸 입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던 건데 시황의 대답에 찬미의 아빠가 한숨을 내쉬었다. 재산도 능력도 없는 놈이 고려대까지 다니는 자신의 딸을 넘보고 있다는 거에 기가 막힌다.

“내가 얼마 전에 보고 안마도 해드렸어. 나 완전 좋아하시던데. 히힛.”

“유미, 넌 조용히 하고 있어.”

그런데 분위기도 모르고 유미가 신나서 얘기하자 엄마가 유미를 조용히 시킨다.

“자네는 학벌도 안 되고 일도 그런 거 하면서 우리가 찬미랑 사귀는 걸 허락해 줄 거라 생각했나?”

“학벌? 오빠 이번에 서울대 수석 합격했는데. 오빠가 학벌 안 되면 누구 데려오라는 거야?”

“뭐?”

“유미야 그게 무슨 말이니?”

갑작스런 유미의 말에 아빠와 엄마의 눈이 커다래졌다. 분명 아까는 지방대 자퇴했다고 했는데 뜬금없이 서울대 수석 합격이라니?

“오빠 이번에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합격했어. 저번에 오빠 수능 만점 받아서 뉴스도 나오고 그랬는데.”

“저, 정말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한 거니?”

유미의 말을 들은 찬미의 엄마가 시황을 보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서울대 입학만으로도 대단한데 전체 수석이라니까 얼굴이 단번에 달라 보인다. 방금 전 얼굴로 찬미를 꼬신 놈팡이 같았는데 지금은 전형적인 엘리트의 지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난다.

“네. 며칠 전에 합격 통보 받았습니다.”

“그, 그런데 왜 지방대 자퇴했다고 말한 거니?”

“아직 입학한 게 아니라서 말씀 드리긴 좀 이른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

시황은 죄송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생각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 상당히 만족했다. 사실 지금 한 말은 변명일 뿐이고 합격까지 한 마당에 숨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숨긴 건 이런 극적인 대비효과를 위해서였다. 아무리 자신이 능력이 좋고 대단하더라도 찬미와 유미를 자신과 같이 살게 한다는 건 상당히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잔뜩 실망감을 줄만한 말을 했다가 서울대 수석 입학이니 서울에서 카페를 운영하니 어쩌니 하면 단순히 처음 그런 사실을 밝혔을 때보다 호감도가 더 많이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서울대 전체 수석이면 1등이란 말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늦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좀 더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싶어서 지방대는 자퇴하고 서울대를 가기 위해 찬미에게 공부를 배웠습니다. 찬미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빠가 열심히 했는걸요.”

시황의 말에 이제야 오해가 풀린 거 같아 찬미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렸다.

“둘이 참 잘 어울리네. 자기도 그렇지 않아?”

“험험.”

찬미의 엄마는 방금 전만 해도 시황과 찬미가 좋은 분위기인 것만 봐도 혈압이 상승할 정도였는데 서울대 수석 입학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좋은 한 쌍이라는 생각만 가득하다. 역시 자신의 딸답게 남자 보는 눈이 있었다.

“그러면 입학하면 카페 일은 그만 둘 건가?”

“카페를 왜 그만둬. 오빠가 벌써 서울 청담동에 큰 카페 계약까지 했는데. 아빠는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또 유미가 끼어들어서 말한다.

“계약? 그게 무슨 말인가? 아르바이트하는 거 아니었나?”

“아…….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서울에 가는 김에 부모님께 여기 있는 카페는 맡기고 서울에 새로 카페를 하나 더 낼 계획입니다.”

시황은 차분하고 예의바르게 설명했다. 원래 성격도 그렇진 않지만 촐싹거리는 인상이 아니라 진중하고 생각이 깊어 보인다는 느낌을 갖ㄹ 수 있도록 노력했다.

“자네가 그냥 카페에서 일한다고 해서 아르바이트인지 알았지 뭔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이래서 조심해야 한다니까. 허허.”

시황이 카페까지 가지고 있다는 걸 알자 아까의 그 무겁던 분위기가 단번에 풀려버렸다. 찬미의 엄마 얼굴엔 다시 웃음이 생겨났고 찬미의 아빠는 이제는 시황을 인정한 듯 너그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딸과 아들, 특히 딸을 가진 부모의 마음이라는 게 이런 거기도 했다. 남자가 능력이 없으면 결국 고생하는 건 자기 딸이니까.

이후로는 거실의 온도만큼이나 분위기가 훈훈하게 흘러갔다. 시황에 관해 궁금한 점을 물으면 시황이 성심성의껏 대답했고 찬미의 부모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사실 제가 오늘 여기 온 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유미에 관한 일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미? 우리 유미가 무슨 일이라도 했니?”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분위기가 되자 시황은 슬슬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일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찬미의 엄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제가 이번에 케즈론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할 예정인데 모델로 유미를 쓰고 싶어서 인사도 드릴 겸 해서 왔습니다.”

“자네 아버지가 막노동하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처음엔 쥐뿔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 얼굴로 찬미를 홀린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평범한 청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대 수석 입학을 한 것도 모자라서 젊은 나이에 커다란 카페를 운영하고 브랜드 런칭까지 할 예정이란다. 스케일이 자신과 같은 서민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떻게 하면 헤어지게 만들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아예 찬미의 결혼감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단순히 잘난 놈이 아니라 예의바르고 나쁜 짓 따윈 전혀 안하게 생긴 얼굴이 굉장히 큰 플러스 요인이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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