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6 ------------------------------------------------------
드래곤 루나모스
일단 일을 시키려면 옷이 중요했다. 다른 건 몰라도 옷만 그럴싸해도 사람들이 받는 인식 자체가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비서하면 역시 검은 스타킹과 하이힐, 맵시 좋은 정장이었다.
시황은 콘즈를 불러 방을 옷으로 가득한 방으로 변화시켰다.
“으힛?”
여러 번 겪었으면서도 프린은 적응이 안 되는지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낸 반면 미나는 케즈론의 성에 왔을 때부터 그 어떤 걸 보더라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시황은 옷장에서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옷을 골랐다. 옷을 고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얼마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가였다.
케즈론의 옷장에는 명품 매장에 있는 평범한 옷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디자인적으로, 기능적으로 뛰어난 옷이 평생 입어도 다 못 입을 만큼 존재했다. 결정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옷을 골라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헤맬 정도로 아름답고 맵시 있는 옷이 가득했다.
마음에 드는 옷을 일단 다 꺼냈다. 그 중에서 제일 괜찮아 보이는 스타일의 정장을 프린과 미나에게 건네주었다.
“입어봐.”
“네! 주인님.”
시황이 옷을 건네주자 프린은 입고 있던 옷을 바로 벗었다. 브래지어를 차지 않은 얇은 티를 벗자 몸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이 튀어나왔다. 흔히 게임에서 표현되는 어색한 가슴의 흔들림과 다르게 완벽한 물리적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자연스러운 출렁거림이 프린의 가슴에서 나타났다. 게임에서 느낄 수 없는 현실감이라는 게 프린의 가슴을 통해 넘칠 정도로 표현되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프린은 자연스럽게 블라우스를 입고 검은 치마를 입었다.
“미나는 왜 안 입어?”
“옷을 갈아입을 곳은 없는가?”
“탈의실은 저쪽에 있어.”
“알겠다. 갈아입고 오지.”
여기서 프린처럼 그냥 갈아입으라고 말하는 건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였다. 처음에 느끼는 인상이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마치 미나의 몸에 관심이 있다는 듯한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자연스럽게. 천천히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중요했다. 서두른다고, 강요한다고 안 되는 일이 되지 않는다.
“어때요? 주인님? 예뻐요?”
미나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어느새 프린이 옷을 다 입고 시황을 불렀다.
시황이 프린을 바라보는 순간 매력적인 검은 스타킹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나치게 검지 않고 여자의 매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적절한 투명함이 시황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검은 도트무늬가 박힌 하얀 블라우스와 H라인 스커트도 잘 어울렸지만 검은색의 하이힐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누가 봐도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처럼 보였다.
이내 미나도 옷을 다 갈아입고 나왔지만 미나같은 경우엔 아름다워도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 때문에 옷의 매력이 조금 반감되는 건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때까지 미나가 뭘 입었는지 전혀 신경조차 안 쓰고 있었다. 얼굴이 지나치게 예쁘면 이런 점에서 곤란한 것일까?
“좋아. 둘 다 잘 어울리네.”
어떻게 구색은 갖춰졌다. 모습은 둘 다 비서 같지만 전혀 비서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비서처럼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젊고 아름다운 비서와 육체적 관계를 가지는 건 남자들이 가진 꿈 중 하나 아니겠는가?
이후로 마치 패션쇼를 하듯 미나와 프린은 몇 벌의 옷을 더 입었고 시황이 만족하는 옷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집어넣었다.
방을 다시 침실로 바꾸고 시황은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평범한 스키니 팬츠에 티를 입었음에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미나를 바라봤다. 저 아름다운 모습을 평범하게 만드는 건 시황이 견딜 수가 없었다. 적절한 조절이 필요했다.
“미나가 가진 존재감을 내가 원하는 만큼 줄일 수 있어?”
“가능하다.”
“그러면 조금씩 줄여봐봐.”
시황의 말에 따라 미나가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얼굴과 몸매는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매력이 점점 감소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초월적 아름다움에 시황조차 견디기 어려웠는데 존재감이 점점 감소하더니 아루나 은비 정도의 존재감과 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좋아. 그 정도가 딱 좋아. 앞으로는 딱 그 정도로 유지하라고. 너무 예쁘면 나를 제외한 다른 남자들이 정신을 못 차리니까.”
“껍데기뿐인 외적인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인간들이란. 한심하군.”
“인간 자체가 그런 걸 어쩔 수가 없지. 종족 번식을 위해, 더 나은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 무조건 욕하기 보다는 그런 특성을 감안해서 이해해주는 게 더 올바른 생각이 아닐까?”
“……일리는 있군. 알겠다. 인간의 특성, 이해해보지.”
미나가 수긍을 하며 말했다. 의외로 완전히 꽉 막힌 건 아닌 듯 했다. 저러면 율나르가 원하는 바를 어떻게든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수란하고 이미지가 약간 겹치는 거 같았다. 수란의 상위 호환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도 수란은 공주라는 그 희소한 가치 덕분에 미나의 아름다움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하루 종일 집에서 아루랑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고 인터넷이나 하는 방구석 폐인처럼 변해버렸지만 어쨌든 공주는 공주였다.
“프린은 이제 이 성에서 여기서 슬슬 나가야지.”
이제 프린을 한국으로 데리고 가도 될 거 같았다. 프린이 관리하던 라롤린이 조금 문제이긴 했지만, 미리 라롤린을 많이 따서 창고에 넣어놨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시황과 프린이 함께 와서 따면 될 듯했다. 나중에 레벨이 오르면 자동 수확기 같은 걸 얻을 지도 모르고.
“주, 주인님 자, 잘못했어요. 제발 쫓아내지만 마세요.”
그런데 프린은 시황의 의도를 잘못 이해했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굳더니 벌벌 떨면서 빌기 시작했다. 미나라는 새로운 여자가 들어와서 시황이 자신을 쫓아내려고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 패션쇼를 하면서 좋았던 분위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삽시간에 공기가 냉랭해졌다.
시황을 유혹해 이 성과 재산을 다 가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시황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집도 돈도 권력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길거리를 전전하며 도둑질을 하든가 도둑질 하다 걸려서 노예가 될게 분명했다. 프린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옛날엔 그게 불행이라는 걸 몰랐다. 당연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시황과 함께 지내며 아무런 눈치도 안 보고 고급스런 침대에서 질 좋은 음식을 먹으며 원하는 대로 살고 있으니 옛날의 삶이 너무나 불행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황과 함께 살며 아이도 가지고 평범하고 편안한 삶을 가지고 싶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주인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전부 다 할게요. 흑…….”
프린은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몰랐지만 무조건 시황에게 용서부터 구했다.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쫓아내는 게 아니야.”
저렇게 벌벌 떨면서 용서해달라는 모습을 보니 시황은 장난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까지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으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저렇게 용서를 구하는 걸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시황은 프린의 커다란 가슴이 짓눌릴 정도로 꼭 안아주었다.
“흑…….”
“쫓아내는 게 아니고 나랑 같이 가지는 거야.”
“같이요?”
“그래. 같이.”
시황은 프린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정말요?”
눈물을 흘려서일까? 코와 볼이 발그레진 프린이 다시 물었다. 커다란 눈에서는 금방 눈물이 흘러나올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어려운 일을 도와줘야 하니까, 지금보다 더 힘들 거야.”
“흑……. 정말 감사합니다. 주인님. 시키시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시황의 말을 들은 프린은 다시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그리고 시황을 끌어안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시황이 쫓아내는 건 아닌가 했지만 역시 시황은 다른 귀족들과 달랐다.
“프린의 나쁜 버릇을 고치려면 벌써 쫓아내면 안 되지.”
“히잉, 앞으로는 도둑질도 안 하고 욕도 안하고 착하게 살게요.”
이제 기분이 다시 풀렸는지 프린은 시황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대답했다. 방금 전에 울어서인지 눈과 코, 볼이 빨간 채로 웃고 있으니 프린에게서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앞으로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알겠지?”
“네! 주인님이 시키는 일이면 독약을 먹으래도 먹을게요.”
“그래? 그러면 이 약 먹어.”
“네? 야, 약이요?”
프린은 자신의 믿음이 어떤지 보여주기 위해 한 말인데 갑자기 시황이 정체모를 이상한 약을 꺼내 주자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시황이 죽으라고 약을 준 건 아니겠지만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먹기 싫어?”
“아, 아니에요! 먹을게요. 지금 바로 먹을게요. 에잇!”
프린은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시황이 건네준 약을 단번에 삼켰다. 순간 머리가 찌릿하고 아프자 설마 진짜 독약인가 하는 불안감이 생겨났지만 금세 괜찮아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이제 프린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됐어. 다만, 완벽이라 해도 원래 가진 어휘력과 문장 구사 능력에 따라 그 수준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네? 영어가 뭐에요?”
“지금 내가 쓰는 언어.”
시황은 영어로 프린에게 말했는데 프린은 완벽하게 알아듣고 오히려 영어로 되물었다. 그렇다. 방금 먹인 약은 언어습득용 알약이었던 것이다. 일부러 한국어가 아닌 영어를 익히게 만들었다. 아직까지 프린은 미흡한 부분이 많아 한국어를 쓰게 하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많았다. 일단 영어로 상황을 지켜보고 차후에 한국어를 익히게 해줄 생각이었다.
“어? 진짜 내가 이상한 말을 쓰네?”
프린은 자기가 말하면서도 신기하지 계속 말을 했다. 금발의 프린이 오피스룩을 입은 상태로 영어로 말하자 아무런 위화감 없이 세련된 외국인으로 느껴졌다. 언어가 바뀐 것만으로도 이미지가 상당히 변한 것이다.
“자, 이제 도서관으로 가자.”
“네! 주인님! 저 또 재밌는 책 볼래요.”
시황과 프린이 방을 나가자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미나가 고개를 흔들며 따라 나갔다. 아무리 봐도 인간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 도착한 시황은 지구에 관해 대략적인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을 뽑아 프린에게 건네주었다. 어쨌든 프린은 아루보다는 아는 게 많고 눈치도 빨랐기 때문에 조금만 교육시키면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
“이쯤하면 프린은 됐고. 이제 미나랑 대련을 해볼까? 괜찮아? 할 수 있어?”
“상관없다.”
미나가 허락하자 시황은 미나를 데리고 대련실로 갔다. 시황과 미나가 대련을 하는 동안 프린은 침실에서 책을 보기로 했다.
[대련실. 상처 없이 대련이 가능한 방. 어떤 무기로 서로를 공격하더라도 원래보다 크게 감소된 타격만 받을 뿐 상처는 나지 않는다. 서로의 실력을 확인해보기 좋다.]
넓은 방에는 아무런 장치도 가구도 없었다. 그저 하얀 벽과 딱딱하고 평범한 바닥뿐이었다. 대련을 하는데 있어 부족함은 없었지만 케즈론이 만든 대련실이 상처를 안 입는다는 것만 있을 정도로 평범할 리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글을 파바박! 써서 매일 올리고 싶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컨디션은 아닌지라 한편 쓰는데 시간이 상당히 걸립니다. 그래도 페이스가 점점 돌아오고 있어서 조만간 하루에 한편, 아니면 그 이상 써서 올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