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협상(協商) (12/15)

2. 협상(協商)

가장 큰 사상과 사상의 충돌로는 ‘북-웰서트 공방전’을 빼놓을 수 없다.

북이 낳은 걸출한 영웅 전기 북제국 황제 ‘루슬란 S. 노스웨더’와 남부의 신화적 혈통을 한 몸에 가진 은의 기사 ‘일마리 R. 바이호른’의 충돌은 그 어떤 전쟁보다도 격렬했다.

서대륙 절대왕정의 시작이 ‘루슬란 황제’임을 부정하는 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충격적인, 그야말로 폭풍 같은 등장이었다. 그는 동대륙에서 들여온 것이 아닌 독자적인 독점적 단일 지배 체제를 구축했고, 그때까지 신화에 매몰되어 있던 서대륙에 거대한 충격을 던졌다. 서대륙의 사상과 정신은 그의 출현을 기점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다.

그는 단순한 절대권력자에서 멈추지 않았다. ‘루슬란 황제’는 신이 아닌 인간을 앞으로 내세운 최초의 ‘인본주의’ 사상가였다. 사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해 북에서부터 갈라진 북방 계통의 나라들은 현재까지도 전부 그를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자신들이 진정한 후계자라 주장하고 있을 정도다.

‘폭풍의 왕’이란 별명답게 절대군주 체제는 완성하지 못한다.

서대륙의 절대군주 체제의 완성은 ‘에이노 O. 르펜-바이호른’. 신성 웰서트 왕국의 초대 법황의 업적이다.

‘루슬란 황제’는 죽은 후에 ‘신성 웰서트 연합’의 붕괴를 이룩한 것이다.

사상의 승리였다.

-‘서대륙 사상사’ 중 발췌-

***

여름을 맞이한 루벤의 가장 큰 불만은 끔찍하도록 더운 날씨가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불만이긴 했지만 더 화가 나는 건 따로 있었다.

“머리가 점점 화려해지는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긴 머리를 느슨하게 땋아 꽃으로 장식한 것을 보면 실로 미묘한 기분이다. 여자들이 모여 장난을 치는 것을 잘도 받아 주는 모양이다. 물론 잘 어울리기는 한데…….

“그거, 매일 설탕인지, 시럽인지 하는 여자가 해 주는 거 맞나?”

“이제 이름 좀 외우세요. 잼입니다, 잼. 매일 귀찮을 텐데도 정리를 해 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앞으로 내가 해 줄까?”

덥다는 핑계로 홀딱 벗은 채 소파에 늘어져 있던 루벤이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빛냈다.

“고마우면 매일 내 좆이나 좀 빨―”

쾅!

이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도시 사람들은 저거 또 시작이네, 하는 눈빛으로 루벤을 응시했다.

출신지의 영향인지 유독 더위를 타는 루벤은 근래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려웠는데, 무슨 바람이 분 탓인지 요즘은 연인의 뒤를 쫓고 있었다.

“너무 친한 것 같은데.”

“……제가 왜 또.”

“정보 길드장이 가장 확실한 거 아닌가? 그것도 무려―”

“열심히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루벤 납치―그걸 과연 납치라고 불러야 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사건 이후 신나게 이용당하는 찰스턴은 식당의 종업원인 잼과 쇼핑 중인 이델을 뒤를 쫓는 데 또 이용되고 있었다.

“나 저런 거 안 쓰는데.”

인파에 숨어 인상을 팍 쓴 루벤이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런 건 다 여자들이 쓰는 거 아닌가?”

“글쎄요.”

이델과 잼의 쇼핑은 이후로도 쭉 이어져 둘은 점심을 먹고 난 뒤 오후가 되어서야 헤어졌다.

각별한 주말의 낮 시간이 절반 이상 지나고 나자 루벤의 표정도 점점 더 심상치 않아졌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 아가씨에 대해 조사도 좀 하고, 웰서트 배의 경로도 좀 조사하고…….”

이럴 때 엮였다간 정말로 좋지 않은 일을 당한다.

찰스턴은 루벤이 자신을 보내 줄 만한 모든 사유를 꺼내 빠르게 말하고 후다닥 사라졌다. 내리쬐는 초여름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북풍한설 같은 표정을 유지하던 루벤은 한참 뒤에야 자리를 떴다.

도시 사람들은 내일부터 또 한동안 식당에 이델이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

“더위도 많이 타면서 어딜 갔다가―”

말끔하게 씻은 이델이 루벤을 반기다 바닥에 쓰러졌다. 현관 입구에서부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루벤의 힘을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헉, 허억, 갑자기 무슨.”

“하고 싶어서.”

그렇다고 사람을 현관 입구에서부터 넘어트려?

뭔가가 있다고 직감했지만 눈이 돌아 버린 남자가 제 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뭔가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때때로 루벤은 저런 불안한 얼굴로 이델을 덮쳐 왔는데, 평소 선을 잘 긋던 이델도 저 표정에만큼은 속수무책이었다. 혹시나,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해 상처를 주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그에게 워낙 잘못한 게 많아 지레 겁을 먹게 되었다.

“잠, 잠깐!”

한숨을 쉬고 등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들던 이델이 화들짝 놀라 버둥거렸다. 고개를 돌린 쪽에 거울이 있었다. 나무 바닥인 것도 모자라 거울 앞에서 살을 섞는다니. 평생 경험 부족에 시달릴 예정인 이델에겐 난이도가 높아도 너무 높았다.

“여긴 싫습니다!”

“왜?”

버둥거리는 이델의 옷을 벗기는 데만 집중하고 있던 루벤이 그 저항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어르고 달래서 안으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게 실수였다.

“흐음…….”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이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처덕, 처덕―

살갗을 밀어내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몸의 열기가 빠지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이델은 필사적으로 팔에 힘을 주고 버텼다. 바로 정면에 거울이 있었다.

“후우, 훅, 아아…….”

등 뒤에서 들리는 신음이 적나라했다. 눈을 뜨면 혹시나 제 꼴을 마주할까 감은 눈을 한 번 뜨지도 않았다. 그 때문인지 감촉과 소리가 평소보다도 크게 느껴졌다. 거울에 이마를 비비며 흥분을 옮겨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제대로 보면, 이걸로 끝내 주지.”

“싫, 싫습니다.”

자신의 정사 장면을 보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이델은 루벤의 강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더 쑤셔 줬으면 좋겠어? 응?”

음란하긴.

즐거워 죽겠다는 음성으로 놀리기에 눈을 떴다가 곧 후회하고 말았다. 온몸이 새빨갛게 변한 남자가 눈이 풀린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배에는 자신이 내보낸 정액이 번져 흐르고 있었다.

“잘했어.”

푹―

?

“흐아아아!”

넋을 놓고 있는 사이 허리가 뒤로 쑥 빠졌다. 귀두 끝까지 빠졌다 한 번에 들어오는 굵은 것에 이델이 무방비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으, 으으읏! 자, 잠깐!”

푹, 푹 안을 헤치는 소리에 머리가 어질했다.

어디까지 들어오는 건지 무서울 정도로 깊은 것에 이델은 덜덜 떨리는 한 팔로 배를 감싸 안았다.

“흡, 깊어?”

“네, 네, 깊, 깊어서, 잠시만……!”

너무 깊다고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 루벤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엔 왜 그랬을까?

쾌락에 젖어 짐승 같은 얼굴을 한 자신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지금껏 후배위를 고집했는데 얼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어떤 모습을 하든 절박한 얼굴로 자신과 눈을 맞추려 안달하는 것을 보는 게 오히려 상당히 입맛을 돋웠다.

“후우, 앞으로 우리 여기서 할까? 야한 얼굴도 보이고 좋은데?”

“읏, 으응, 아아앗!”

“좋다고?”

“흐으으!”

“응. 나도 좋다.”

어디를 찌르면 어떤 표정을 하는지, 가슴을 괴롭히면 어떻게 우는지를 살피며 루벤은 내내 느끼고 있던 불안이 조금이나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언제나 불안했다. 아무리 지금 이델과 자신의 마음이 같다 해도 둘의 처지까지 같진 않았다.

이델은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법황은 여전히 자신의 쌍둥이 형제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금발과 벽안만 보면 마음이 약해질 만큼 그렇게나 끔찍이 동생을 아끼는 사람이다. 언제고 자신을 버리고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루 님, 루 님. 이제 그만……!”

“응?”

“싸, 싸고 싶어요. 싸고 싶어서……!”

자신이 가르쳐 준 대로다. 절정에 오르고 싶으면 자신에게 고백하라고 했지.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니 정직하게.

루벤은 이델의 고개를 돌려 입술에 깊게 입 맞추며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이델의 성기를 쥐었다. 고환까지 단단하게 올라붙은 성기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했다.

퍼억―!

깊숙하게 묻었다, 완전히 물러나 단번에 꿰뚫었다. 입술을 떼고 경련을 일으키는 몸을 거울로 돌린 채 루벤은 이델이 자신의 얼굴을 외면하지 못하도록 했다.

“흐으으으, 잘 봐.”

그의 뱃속에 자신의 욕망을 가뜩 싸 내며, 루벤은 이델이 자신의 천박함을 확인하길 바랐다.

너를 이렇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거울에 튀고 흐른 이델의 정액을 거울 위 입술에 살짝 바르곤 바닥에 주저앉는 이델을 잡아다 다시 무릎에 앉혀 꿰뚫었다.

몸을 섞는 이 순간만이 완전하게 느껴졌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루벤이 그토록 불안해했을까.

막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린 이델은 침대 옆자리에 앉아 어제 오후 자신이 사 온 물품들을 유난히 살피는 루벤을 응시했다.

“이거 말이야.”

이델이 눈을 뜨는 것 정도야 기척으로 알아차리는 루벤이 말했다.

“여자들 물건 아닌가?”

“남자가 써도 됩니다.”

“그렇겠지. 근데 이게 다 뭔데 그래? 어제도 묘하게 다른 향이 나던데.”

루벤이 킁킁거리며 접근을 해 봤자 그 향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씻고 나온 보람도 없게 온갖 체액으로 아주 질퍽하게 절여졌던 뒤다.

“머리카락에 바르는 겁니다.”

“왜?”

“잼이 추천해 주더군요. 머리를 기를 땐 사용하는 것들인데 그러면 좋다고―”

“잘라.”

“―갑자기 왜요.”

“별로야, 잘라.”

“……짧은 머리를 좋아하시는 겁니까?”

“응. 맞아.”

“하지만 예전에 머리를 기르라고…….”

골이 난 표정으로 이것들을 집어 던져서 부숴 버릴까, 말까를 고민하던 루벤이지만 그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내가?”

내가 너한테 머리를 기르라고 했다고?

“언제?”

“……좀 오래되긴 했습니다. 남쪽 섬에서 만났을 때니까…….”

“…….”

“별로, 안 어울리는가 보군요.”

이델은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그럼 자르겠다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원래 긴 머리가 귀찮―”

“자르지 마!”

“―…….”

바로 말을 바꾼 루벤이 어린애가 떼라도 쓰는 것처럼 소리쳤다.

“자르지 말라고!”

“후우…….”

이델은 푹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쯤 되니 뭐가 문제였는지 알겠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그래.”

“머리카락을 좀 만진다고 해서 닳는 게 아닙니다.”

“누가 그걸 모른다고 했나?”

어제 루벤이 자신의 뒤를 쫓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얼마나 감정 변화가 극심하던지,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뭐라고 한마디를 할 생각이었지만 결국 이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짓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루벤은 때때로 불안해 견딜 수 없다는 눈을 했다. 가끔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확인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 탓이었다.

그때, 자신이 그렇게 떠나 버린 탓이다.

“루 님.”

당신은 큰 사람이다.

어깨를 망가트리고, 가슴에도 흔적을 남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을 탓하지 않았다.

자신이 망가트린 것이 분명한데도 원망은커녕 더 원해서 매달리는 남자를 보고 있자면 화낼 이유도, 의지도 전부 사라졌다.

“루슬란.”

작은 약병을 만지작거리던 루벤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이델을 응시했다. 이델은 몸을 일으켜 그를 단번에 품에 안았다.

“웰서트 이야기를 들어서 이러는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

“얼마 전에 조사를 했다는 것도 말입니다. 찰스턴에게 제가 미리 말해 둔 덕분이니 그를 뭐라고 하진 마십시오. 혹시나, 하고 생각해 대비해 둔 것이니까.”

이델은 루벤의 불안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너는 또 떠나고 말 거라는 예감에 그는 매일 크든 작든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가끔 길을 잘못 든 웰서트의 배가 이곳에 도착하면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동생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건 그 애가 포기해야 끝나는 일이니까. 맹세하는데 단 한 번도, 당신과 동생을 비슷한 눈으로라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이지.”

나는 못 주는.

이델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루벤을 탓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 잘못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바다 반대편에서 자신을 놓지 못하고 있는 동생이 있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동생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불안이 계속될지도 몰랐다.

“너는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딱 하나 못한 것이 있지. 후계를 낳는 것.”

“언젠가 동생이 낳을 겁니다. 이제는 그냥 대신관이 아니니…….”

“그거 너도 안 믿으면서 하는 소리지?”

“…….”

루벤은 이벨을 마주 안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너도 아는 사실이지. 법황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너는 모를지라도, 나는 알아. 확신하고 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더운 날씨에 맞대고 있는 살갗 사이에서 땀이 흘렀지만 누구도 먼저 팔을 풀지도 않았다.

“내 문제로 너를 괴롭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닙니다.”

“아니, 내 문제가 맞아. 과거를 그냥 과거로 묻어 두면 되는데, 나는 그걸 하지 못하거든.”

“……믿음을 주지 못한 제 탓입니다. 제가 잘못한 일에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너는 스스로를 용서했나?”

루벤은 살짝 고개 들어 이델의 팔을 제 오른쪽 어깨에 옮기며 물었다. 움찔, 반사적으로 놀라는 이델의 몸에 흐흐흐, 웃음을 흘리며 루벤은 다시 이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거봐라.”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루 님이 이해해 주셨다고 해도 이건―”

“나는 네가 또 도망가는 꿈을 꾼다.”

이번에는 내가 쫓아가지 못하게 팔이 아니라 내 다리를 망가트리고 가는 꿈이지. 너를 더 이상 쫓지도 못하게.

“사슴처럼 얼마나 잘 뛰어가는지.”

루벤이 웃었지만 이델은 그를 꽉 끌어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꿈을 꾸고 나면 나는 네 다리를 부러트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몇 번이나 고민도 했지.

자신에게 시달리다 지쳐 나가떨어진 이델을 보고 있으면 아직도 음습한 욕망이 고개를 치켜들 때가 있다.

가슴의 텅 빈 곳은 다 메웠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오래된 깊이의 어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메운 자리는 다른 곳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그냥 하나 정도는 잘라 버릴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

“나를 봐주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면 도망가진 않을 것 아닌가?”

살짝 고개를 들고 이델의 안색을 확인한 루벤이 미소 지은 채 말했다.

안다. 이게 올바른 생각은 아니야.

이델이 루벤을 밀어냈다. 예상치 못한 동작에 루벤이 힘없이 떨어지고 나자 이델이 루벤에게 다리를 내밀었다.

“자르는 건 곤란합니다. 이제는 내가 당신을 지켜야 하니까.”

“…….”

“부러트리는 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을 테니까.”

멍하니 다리와 이델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루벤을 한동안 내버려 두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델은 이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믿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

“전부 다 괜찮아질 겁니다.”

언젠가 당신은 내가 다시는 사라지지 않을 거란 확신을 얻을 것이고, 악몽을 꾸지도 않을 테고, 동생은 나를 포기하고, 나는 당신에게 화를 낼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을 겁니다.

“……루.”

“악몽을 꾸고 나면 무슨 짓이든 해도 좋습니다. 다리를 부러트려도 좋고, 사지를 묶어 매달아 놔도 좋고, 분을 못 참아 채찍질을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불안할 때면 불안하다고 말해 주세요.

“제게 사과할 기회는 계속 주셔야 합니다. 그것만 약속하면 됩니다.”

루벤이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이델은 그 커다란 포옹을 거절하지 않았다.

가슴이 뛰는 소리가 일정한 속도로 쿵, 쿵 울렸다. 아마 자신의 심장 역시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소리를 내며 뛰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지금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다. 그 역시 이름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어쩌면 아직 이러한 것에 대한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둘 다 처음이니 괜찮을 거란 확신이 든다.

“그래. 약속할게.”

이러면 된 것이 아닌가.

이델은 루벤의 어깨 위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벤이 나른히 짓는 한숨 소리가 너무나도 좋았다.

“이번엔 저도 놓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가끔 그를 ‘루슬란’이라고 부르게 됐듯 언젠가 이 일도 그렇게 말하고 넘어갈 때가 올 것이다.

이델은 그렇게 믿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