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비밀조항(祕密條項)
‘일마리 R. 바이호른’, ‘최후의 바이호른’으로 더 유명한 그는 고귀한 혈통의 기사이자 탁월한 전술가, 자애로운 통치차로 숱한 전승과 노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비로운 신화시대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근래에 들어서야 연구 성과가 발표되고 있는데, 그는 실로 신국의 보호자라 부를 수 있는 남자였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남아 있는 당시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그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신성 웰서트 왕국’의 성립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라는 데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신에게 선택받은 혈통은 끊긴 지 오래지만 남부인들은 여전히 언젠가 여신이 약속한 혈통을 이은 진정한 후계자가 바다를 건너 나타날 것이며, 그 후예가 남부를 통일할 것이라 굳게 믿는 것도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혈통이 끊긴 것은 그의 쌍둥이 동생인 ‘에이노 O. 르펜-바이호른’의 평생 동안의 기다림 탓인데 언젠가 형제가 돌아올 것을 믿은 초대 법황은 죽을 때까지도 형제를 기다렸다고 한다.
실로 대단한 우애였다.
-‘신화시대의 정수, 신성 웰서트 연합에 관해서’ 중 발췌-
***
그는 무서운 사내다.
풍요로운 계절 찰스턴은 스산함에 목을 움츠렸다.
방금 전 자신을 은밀히 찾아와 한 가지 부탁을 하고 간 남자 때문이었다.
그는 첫인상만큼이나 실제로도 보통 성격이 아니지만, 그래도 유들유들하게 사회생활을 잘 하는 남자였다.
상인으로도 성공했고, 지역 유지로 입김도 쎈 편이고, 근사한 외모에, 명석한 두뇌까지, 갖추지 못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뭐랄까…….
“보고 있자면 중요한 게 없는 느낌이지. 뭔지를 모르겠지만, 저렇게 완벽한데도 완벽하게 생각되지가 않는단 말이야.”
방금 찾아온 루벤에 관한 일이었다.
***
루벤은 살아서 함께 살고 있는 주민이지만, 일종의 도시 전설 같은 존재였다.
여자도 거리낌 없이 때린다던가, 기사 열 명을 단신으로 때려눕혔다던가, 과거에 고문 기술자였다던가, 하여간 온갖 이야기들과 소문으로 들끓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당한 우스갯소리로 여기고 넘어가고 있지마는 정보 길드장인 그는 달랐다.
찰스턴은 루벤이 수십, 수백 개씩 달고 다니는 소문의 진위를 거의 대부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찰스턴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찰스턴.”
“네?”
“네 주인님께―”
“루베에에에엔 님!”
“―그래. 뭐, 여하튼. 제안 하나 해 봐.”
“뭘 말입니까?”
“대륙 통일도 했는데, 식민지 만들 생각은 없냐고.”
“하하하하, 농담도 참.”
“난 너한테 농담 안 하는데.”
무섭도록 진지한 얼굴이 정말 농담의 ㄴ 한 자 보이지 않아 찰스턴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웰서트의 항해술과 선박 건조술, 그거 정말 가지고 싶지 않냐고 말이야.”
그게 시작이었다.
상관에게 보고하진 않았지만, 수상한 정황이 여러 번 포착되다 보니 저절로 머릿속에 남는 정보가 있었다.
루벤이나 이델이나, 어디 보통 튀는 사람들이어야지. 잊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잊어지지가 않는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둘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웰서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반응의 방향은 정반대였지만 둘 모두 남모르는 데가 있어 눈에 확 튀었다.
이델은 웰서트 출신일 거라는 추측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웰서트의 이야기에 딱 웰서트 출신다운 반응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제국이 전란에 휩싸일 때도, 그 이후에도 웰서트는 번성한 국가인 만큼 이주민들 사이에서 웰서트 출신으로 추측되는 건 그가 유일했기 때문에 그 이상은 알아낼 수 없었으나 범상치 않은 사연의 남자임은 분명했다. 찰스턴의 촉은 그가 최소 귀족, 그것도 백작 가문 이상의 출신일 거라 말하고 있었다.
반대로 루벤은 북 출신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흰 피부나 더위에 꼼짝도 못하는 점, 반대로 눈이 오면 개새끼인 양 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북보다는 웰서트라는 이름에 반응했는데 상당히 심각한 데가 있었다. 단순히 전쟁 상대라는 것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항구 문제였다. 루벤은 매일같이 항구에 들러 웰서트의 배가 기항하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웰서트의 배가 입항하는 때는 그 어떤 범죄자보다 위험한 기운을 풍기는 루벤을 볼 수 있었다. 전후로 이델을 보지 못하게 되는 건 덤이었다. 그 기간 동안 이델이 감금된다는 데 찰스턴은 제 목도 걸 수 있었다.
그래도 뭐 이 정도까지는 전쟁을 한 나라라 싫어하는가 보지,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진짜 문제는 ‘신성 웰서트 왕국’의 수장 ‘법황’에 관한 반응이었다.
공공연히 자신은 불신론자임을 드러내는 정신 나간 놈이었지만, 법황에 대한 반응은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지점에 있었다.
“말해 봤나?”
“네?”
“대륙 식민지 개척.”
“…….”
“말해 봐. 승진감이니까.”
하고 싶지 않다, 그 승진.
찰스턴은 절대로 수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찰스턴.”
“네.”
“암살 길드 같은 것, 자네도 알겠지?”
“아이고! 큰일 날 말씀을 하십니다요! 저는 대형 길드, 대형 길드! 거기다 청정한 길드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전, 혀, 모릅니다!”
“정보 정도는 있을 게 아닌가?
“아니, 왜 자꾸 큰일 날 말씀을 하십니까!”
또 불쑥 찾아와 헛소리를 하는 통에 찰스턴의 혼이 쏙 빠지고 있었다.
물론 찰스턴은 암살 길드의 이름을 몇이나 알고 있었다. 먼저 연락이 와 사업 제안을 받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쪽과 어울려서 뒷맛이 좋았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서대륙에서 한 명만 죽여주면 되는데 그것도 어려운가?”
“……그거 설마.”
“그래. 법황.”
입을 떡 벌린 찰스턴을 향해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문제도 안 생길 것 같은데.”
법황이 죽는 건 진짜 큰 문제였다.
그때쯤부터였다. 루벤의 적의가 대상을 노골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한 건.
걸핏하면 법황 살해 가능성에 대해 연구했는데, 주로 이델과의 관계에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였다.
그 미친놈이랑 사이가 안 좋으니 화풀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모양이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찰스턴은 그저 운과 감만으로 정보 길드를 일으켜 장이 된 남자가 아니었고, 그의 감이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여자도 때린다는 소문을―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다―달고 다닐 정도로 대단한 성격의 루벤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과는 거리가 대단히 먼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이델 앞에서는 웰서트의 이야기를, 특히 법황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다.
단신으로 정보 길드를 박살내고 남작가에 돌격까지 하는 남자를 ‘사슴’이라고 부를 정도로 굵은 신경줄인 주제에 이상하게 이델을 상대론 그 주제만큼은 조심스러웠다. 멋대로 이델을 끌고 가 식당 위 여관에서도 정사를 나누는 놈인데도 말이다.
깨달음은 섬광과도 같았다.
찰스턴은 고민에 빠졌다.
***
모두의 출입을 금지시킨 찰스턴은 심각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머릿속에는 역시, 설마, 하지만, 혹시가 번갈아 가며 둥둥 떠다녔다.
평소처럼 에이, 설마, 하고 웃고 넘기기엔 사안이 심각했다.
찰스턴은 어쩐지 루벤과 이델의 본래 이름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이상을 발견하는 즉시 ‘그분’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 그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만일 자신의 추측이 사실인 경우, 그러한 시도는 명줄의 나머지 부분을 전부 버리는 짓이 될지도 모른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목숨 줄이 아까우니 무조건 입을 다물어야 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이 보통이 아니라 판단되어 그는 망설이는 중이었다.
위로 올릴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종이를 편 지가 벌써 몇 시간째. 찰스턴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찰스턴.”
“으아아아아악!”
잠시 잊고 있었다. 더 이상 길드는 자신의 명에 따라 모든 출입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았다. 딱 두 사람 때문이었는데, 그 둘이 바로 현재의 고민거리였다.
“도둑질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가? 왜 그렇게 놀라?”
“집중하는 중이었습니다, 집중!”
“다름이 아니라 말이지, 루가 정기적으로 네게 지시한 사항이 있을 거다.”
“……네.”
“하지 말라는 소리는 못하지. 그것도 장사이고 신의의 문제인데. 그러니 같은 것을 하나 더 만들어서 내게 넘겨라.”
“네에?!”
방금까지 장사, 신의를 찾던 남자의 발언이라고 믿을 수 없는 요구였다. 정보 길드가 해서는 안 되는 짓의 정수이자 마찬가지였다.
그건 안 됩니다, 불가능, 양심상 안 된다, 등등등. 찰스턴 온갖 이유를 들어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루벤은 일관적으로 주장했다.
다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찰스턴이 내내 고민하고 있던 사안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루벤과의 한바탕 실랑이는 언제나와 같은 결과로 끝났고 찰스턴은 펜을 들었다.
「친애하는 주인님께
―자유도시에서 요주의가 필요하는 이는 둘입니다.
하나는 투자 전문가이자 학교 교사인 루벤,
다른 하나는 수도에서도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번역가이자 악사 이델.
전자는 북 출신으로 알려져 있고, 후자는 웰서트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 둘의 이름을 말씀드린 이유는 이들의 정체가―
이상입니다.」
오물이라도 만진 것처럼 후다닥 펜을 집어 던진 찰스턴은 잉크가 다 마르기도 전에 종이를 접어 밀랍으로 봉인하고 발송했다. 계속 가지고 있어 봤자 고민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차라리 마음이 바뀌기 전에 결정하는 게 나았다. 그렇다고 후회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찰스턴은 보고서 한 통으로 모든 기력을 소모한 듯 지친 얼굴로 의자에 늘어졌다. 정말이지 딱 죽겠다 싶었다. 잘한 짓인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무섭다고 해도 그가 나고 자란 국가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먼저 맺은 협상과 조약에 따른 결과물이었고, 대강이나마 그 실체를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자신과 관계를 맺은 건 그들이었다.
앞으로 일이 커질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이었다.
찰스턴은 이 정도면 현명하게 판단했으며, 상인으로서의 도의를 지켰다 자위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초조함에 잠도 자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래도 직접적으로 안 적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어쩐지 제 무덤을 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찰스턴은 기도하는 자세로 두 손을 꼭 모으고 다섯 번째로 바꾼 종교의 신을 찾았다.
?
Extra
이상한 사람이라 뭐라 적기가 힘들다.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만 정상은 아니다.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절대 정상은 아니다.
-‘재상의 일기 : 초기’ 중 발췌-
***
잿빛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과 고귀한 신분임을 알려 주듯 하얀 피부, 언뜻 보아선 잘생긴 미남으로만 보이는 이 남자가 바로 동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황제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자유도시에서 재미있는 보고가 왔는걸.”
나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에 대한 증명도 이미 끝난 지배자였다. 귀족파들은 숨을 죽이고 물속에서 기회를 엿보며 잠영 중이었다.
“시오젠.”
황제의 최측근들이 모인 은밀한 회동 자리에서 가장 말석에 앉은 기사가 일어났다. 그는 얼마 전 황제의 밀명을 받고 자유도시와 접경지대를 이루고 있는 비벤토 남작가에 잠입해 첩보 활동을 하고 돌아온 기사였다. 첫 임무였던 만큼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어렸고, 황제와도 가장 비슷한 연배의 수하였다.
“자유도시 길드장을 보고 왔을 텐데 어떤 느낌의 사람이었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정보 길드는 평범한 사람들이 해야 유리한 법이지. 또?”
“당시에는 딱히 누군가를 눈여겨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확인하였습니다만, 주시하고 있는 특정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고지식해서 융통성이 없는 기사를 향해 슬쩍 웃음을 흘렸다. 그런 점 때문에 부러 몸에 맞지 않은 임무를 맡겨 보냈었는데, 제법 발전하지 않았나.
뭘 숨기려고도 하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겠군.”
“……만일 그 보고가 사실이라면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
호오, 이것 봐라.
황제는 개암색 눈을 반짝거리며 빛냈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짐승 같은 눈이었다.
“그렇군. 좋다. 시오젠을 제외하곤 모두 물러가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시 앉을 것을 허락받지 못한 시오젠만 거대한 회의용 탁자 앞에 서서 정면을 응시한 채 경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보고서가 재미있었다, 시오젠.”
서류 뭉치들 사이에서 시오젠의 것을 찾아낸 황제는 자리에 앉아 그것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반듯한 글씨체에 최대한 성의 있게 내용을 꽉꽉 채운 보고서는 방금 전 자유도시에서 온 편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비벤토 남작가에 대한 개요
생각보다 많은 부를 축적한 가문. 하지만 수도의 대귀족들에 비할 바는 아님.
주요 사업은 자유도시 물건 선점을 통한 중개 사업.
비벤토 남작의 경우 상재는 있어 보이나 그 외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됨. 특히 외동딸에 대한 애정이 위험 수준이라 언젠가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임.
병력 편재부터 엉망이었으므로 만약의 경우에도 군에 도움이 될 리가 없음.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위해 이미 판이 갖추어진 황제파와 다른 귀족파에 합류한 것으로 보임. 그 외의 이유는 보이지 않음.」
팔랑, 팔랑―
사람을 세워 둔 채 느긋하게 보고서를 훑던 황제가 찾던 내용을 발견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과정에서 전소. 부상자 1, 사망자 2.
사망자 둘은 남작가에 들어온 지 일주일째로 접어들던 이주민 출신의 남자 둘.
기타 특이 사항 없음」
“이 부분. 어떻게 생각하나?”
시오젠이 서 있는 자리로 정확하게 보고서를 던진 황제가 양손 위로 턱을 괴며 물었다.
“큰 소리로 한번 읽어 봐.”
“―전소. 부상자 1, 사망자 2. 사망자 둘은 이주민 출신의 남자 둘. 기타 특이 사항 없음.”
“감상은?”
“…….”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시오젠은 눈을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정면만을 응시한 채였다. 그런 기사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도 맹금류의 것처럼 날카로웠다.
“시오젠. 나는 자네의 이번 임무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었어. 여전히 성실하고 반듯한데, 뭔가 내게 비밀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래서 나는 연애를 한 줄 알았지.”
이런 시건방진 짓이 아니라.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좋군. 기다렸어.”
빙그레 웃는 얼굴이지만 속까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 시오젠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임무 중간에 발각 당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우리 귀여운 시오젠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까 말이야. 나는 내심 그렇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
“그가 말하길, 추궁 받게 될 텐데 그때 말하라고 했습니다.”
“…….”
턱을 괸 채로 웃고 있던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남들을 제 손아귀에서 주무르는 것만 취미로 삼는 남자는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 저를 파악했다는 데서 짙은 불쾌감을 느꼈다.
“틀림없이 알게 될 거라고 영원한 비밀을 맹세하자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폐하의 첩자임이 들통 나지 않았던 것의 절반은 그 남자 덕분이었습니다.”
“계속해.”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표한 시오젠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오직 남작 저에서의 탈출뿐으로 이후에는 주인에게 돌아가 있던 모든 것을 말해도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시오젠은 사라지기 하루 전, 자신을 부른 남자를 떠올렸다. 처음으로 황제 이외의 남자가 거대해 보였던 때라 잊을 수가 없었다.
“신이 미숙하여 폐하께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시오젠은 몸을 돌려 황제가 있는 방향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이마에 댔다. 사실 신분 발각 위험성만으로 그의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다른 남자 하나가 더 결정적인 이유에서였다. 그 얄미운 남자가 내 것이라고 말하던 또 다른 남자 말이다.
“엄벌에 처해 주십시오.”
하지만 설마하니 그까지…….
완벽한 실수였다. 판단 착오였다. 만일 정말이라면, 그는 돌이키기 힘든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그 남자가 했던 말을 자세히 해 봐.”
시오젠은 처음부터 천천히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항구에서의 만남, 거기서 느꼈던 위화감과 이후의 납치와 사라지기 직전까지의 일을 전부 다.
“다른 남자는 또 어떠냐?”
“그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던 시오젠이 말을 멈췄다. 제법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었는데, 그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그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면 말할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말할 것이, 없, 습니다.”
“크하하하하하하하!”
내내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황제의 입에서 발작적으로 웃음이 터졌다. 책상을 탁, 탁 치며 정신없이 웃는 요란한 소리에도 시오젠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정신이 멍했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완전히 당했구나, 시오젠!”
이 귀여운 녀석!
“이것으로 너도 세상 무서운 줄 조금은 알았을 것이다. 너는 반듯하고 훌륭한 기사이지만 너무 정도밖에 몰라.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통치자라면 그것에 대해 이해해야지.”
“부끄럽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시오젠의 귀가 빨갛게 변했다. 여전히 얼떨떨한데 아직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히 보통 사람들은 아니군. 아직 덜 큰 강아지이긴 하나 명견이 될 시오젠의 코를 감쪽같이 속이고 말이야.”
지방 귀족의 금권과 귀족파의 야합을 조사하기 위해 내려 보냈더니 아주 뜻밖의 수확을 건졌다. 그것도 상당히 즐거운 쪽으로.
“날이 좋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창가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가을이 되면 세금 때문에 또 한바탕 난리가 나겠고.”
창을 통해 먼 곳을 한동안 지켜보던 황제가 몸을 돌리며 시오젠에게 말을 걸었다. 시오젠은 그때까지도 바닥에 엎드려 죄를 청하는 중이었다.
“벌을 내리마.”
다시 한 번 바닥에 이마를 찧어 죄를 청하는 시오젠의 뒷머리를 보며 웃은 황제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가을 추수를 맞이한 비밀 시찰을 갈 것이다.”
“…….”
“내게 밀 생산량을 거짓으로 말하는 자, 농지의 면적을 속이는 자, 제 배만 불리는 자, 모두 잡아내야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자 황제의 눈이 즐거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너도 같이 가자꾸나.”
이미 한번 가 본 곳일 테니 믿고 안내를 맡겨도 되겠지?
“폐하!”
비명과도 같은 부름에 즐겁게 웃으며 황제는 먼저 자리를 떴다.
즐거운 예감이 들었다.
모처럼, 아주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