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Extra
HIDDEN TRACK 1. DREAM
충격으로 파도치는 눈에 왜 움직일 수 없을까.
언젠가 들었던 얼어붙은 겨울 바다가 갈라지는 모습이 바로 그러할 듯했다.
계획은 완벽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이루어졌다.
단 한 가지만 바이호른 대공의 예상을 빗나갔다.
“……루 님.”
웃고 있는 입술이 마지막이었다.
칼을 들고도 휘두르지 못한 건 루슬란이 아니라 바이호른 대공, 그 자신이었다.
***
“네 형제다.”
약속된 시간, 약속된 장소는 아니었으나 결과물은 약속과 같았다.
비헤른 성채 중앙에 높은 단을 쌓고 왕좌를 얹어 앉은 루슬란은 대신관 클로타르와 독대하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다치지 않게 하라고 내가……!”
“나보다 네 형제를 잘 모르는군. 그렇게 사정 봐 가며 상대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야.”
루슬란은 자신의 뺨에 남은 상처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하마터면 내가 저 꼴을 당할 뻔했지. 그렇게 되면 대신관은 가지고 싶은 것을 못 가졌을 테고. 숨을 붙여서 가져왔으니 된 거 아닌가? 숨만 붙어 있으면 누구든 회복시킬 수 있는 대신관이 아닌가.”
바이호른 대공이 쓰러졌다! 볼모로 사로잡혀 고문을 당하고 있다!
삽시간에 퍼진 소문에 초반만 치열하던 전투는 삽시간에 정리되었다. 이제 와서 보니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여태껏 하지 못했나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성에 입성한 직후 루슬란은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실로 황제다웠으며 이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등한 협력자였던 대신관 클로타르의 가치 역시 격하되었다. 루슬란은 더 이상 클로타르에게 공대하지 않았다. 철저한 아랫사람을 대하는 예로 그를 다루고 있었다.
클로타르 역시 루슬란의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으나 항의할 수 없었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형제는 시체 같은 꼴로 황제의 발치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당장 다가가고 싶었으나 상대는 맹수 같은 남자였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단칼에 목이 잘려 죽을 것이다.
“그럼 약속대로 형제를 제게 주십시오.”
?
“그럼 약속대로 형제를 제게 주십시오.”
“여기 갖다 놓지 않았나? 치료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물건을 지칭하는 듯한 말에 클로타르의 눈에 불이 튀었다.
“덤으로 내 얼굴의 상처도 말이다. 한 번 써 보니 좋더군, 대신관의 능력은 내가 유용하게 쓸 수 있겠어.”
연이어지는 모독에도 클로타르는 웃는 얼굴을 망가트리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을 시험할 속셈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럼 먼저―.”
“이리로 와서 치료해라. 내가 너에게 부탁하기 위해 움직이고, 몸을 숙여야 하는 그런 지위인가? 착각을 하면 곤란하지, 대신관.”
“…….”
그의 말이 맞았다. 이제 저 높은 곳에 있는 남자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자신이 의도한 일이긴 하나 얌전히 당하자니 속이 끓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더러운 천으로 대충 묶어 어깨를 지혈해 둔 형제의 모습이 보인다. 형제가 아직 제 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참아야 했다. 우리 둘만 함께 있다면 나머지 인간들이 무슨 꼴을 당하는가는 자신과 상관없었다.
나를 봐준 것도 너 하나뿐인데 내가 왜 다른 것들까지 신경 써야 하는데?!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페하.”
제대로 된 호칭에 루슬란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마음 같아서 달려가고 싶지만 조심스럽게 단을 올라가 다시 한 번 절을 하고 난 다음에야 형제의 상처를 살필 수 있었다.
“아……!”
클로타르의 몸이 휘청거렸다.
“루, 루델……! 안 돼!”
다급하게 피 묻은 천을 벗겨 내자 남은 것은 뚜렷한 고문의 흔적이었다. 거적으로 대충 싸 놓은 피투성이의 몸, 어깨는 뼈가 드러난 채였고, 성한 곳은 단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루델, 루델……!
클로타르의 손에서 새파란 빛이 쏟아졌다.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눈은 사물을 제대로 비추지 못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나중이 어떻게 되는가는 생각지도 않고 힘을 퍼부었다.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나 버리고 가지 마아!
어떻게 숨이 붙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몸을 붙들고 울고 힘을 쓰고, 나중에는 식어 가는 몸에 엎어진 채 기운을 불어넣었다.
죽지 마. 내가 잘못했어. 루델……!
정신이 나간 클로타르는 자신의 머리 위에 누가 있는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도 잊었고, 사실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클로타르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고문들을 저질렀으며, 그 온갖 위명들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의 형제가 그렇게 보호해 왔다.
“수고했군.”
왜 형제가 알몸인지, 속옷 한 장 걸치지 못했는지, 피비린내 사이로 어떤 다른 냄새가 나는지 클로타르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소문으로 돌았던 고문은 사실이었고, 그 고문의 주체는 다름 아닌 루슬란, 황제 그 본인이었다.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써 오던 침실에 누워 보드라운 침구를 덮고 누워 있었다.
꿈이었나.
너무 오래, 깊이 잠이 들었나. 머리가 둔하게 둔통을 울리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것도 꿈인가.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했다.
바이호른 대공은 한참 동안이나 눈을 깜빡이며 자리를 지켰다.
“루.”
“루 님?”
자신을 루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뿐이다.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웃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오래도 자는군.”
“…….”
“3일이나 잠들어 있었다.”
꿈과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대체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둔해지는 머리를 깨우기 위한 노력도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푸스스 부서져 내렸다.
“네가 일어나면 대관식을 하려 했지.”
“……대, 관식, 이라니…….”
더듬더듬 머릿속에 떠오르는 파편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바이호른 대공의 눈꺼풀이 파르르, 빠른 속도로 깜빡였다.
전쟁, 전투, 지하실, 그리고―
바이호른 대공의 눈에 웃고 있는 미소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 깊은 곳에서 자신에게 지독하게 웃던 그 남자―!
“오노레!”
아, 졌다. 전쟁에서 졌다.
“오노레, 오노레! 오노레!”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닥에 굴러떨어졌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자신이 네발로 바닥을 기듯이 문을 향해 달렸다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 내 동생!”
간단하게 문에서 자신을 떼어 내는 루슬란의 행동에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느끼지 못했다.
“내, 동생! 오노레! 오노레!”
쉬이이―
등 뒤에서부터 자신을 얽어맨 손이 가슴을 도닥이며 숨을 고르게 했다. 한 번씩 가슴에 그 손이 스칠 때마다 돌이 얹어진 듯 숨 쉬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대관식을 치른다 하지 않았나.”
대관식, 대관식…….
바이호른은 눈물이 줄줄 떨어지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다정한 미소로 그가 웃고 있었다.
“대관식을 집전하는 것은 누구지?”
“……대, 신관.”
“현 대신관은?”
“오노레.”
침을 꿀꺽 삼킨 바이호른 대공은 눈물을 털어 내며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노레, 오노레입니다. 내 동생.”
정신이 들자 상황 판단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지금부터 매달려야 했다. 이 남자에게.
같은 사내의 성기를 빠는 행위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숨이 막혀 켁켁거리면서도 그는 입안에 든 성기를 뱉어 내지 않았다.
다리를 벌리고, 스스로 구멍을 보이고, 온갖 천박한 말들을 내뱉었다. 그가 시키는 짓이라면 무엇이든지 했다.
내 동생, 내 천사.
어딘가에 억류되어 있을 동생이 걱정스러웠다. 아래가 찢어져 피거품이 나는 것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모를 동생을 생각하는 것이 더 끔찍했다.
제발, 제발 살아만 있어 줘. 제발.
루슬란은 분노하고 있었다.
남쪽 섬에서 자신을 버리고 간 것.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그때의 시간을 이용한 것.
비헤른 성채를 점령하고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북에서 출발한 파발이 도착했는데 거기엔 사건의 전말이 전부 적혀 있었다.
바이호른 대공이 고문을 받은 건 그 파발이 전한 말이 결정적이었다.
잘못을 빌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뭐든지 했다.
루슬란은 자신을 루라고 부를 것을 명령했다. 옷을 입고 있지 않기를 명령했다. 사람들 앞에서 다리를 벌리길 요구했고, 허리를 흔들며 거짓 교성을 내길 바랐다.
네가 누구라고?
저는 루입니다. 악사예요. 루요. 바이호른 대공 같은 게 아니라, 악사예요. 루예요.
말투를 바꾸고, 이름을 바꿨다. 본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 가졌던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동생, 내 동생. 내 천사. 나의 오노레.
그 애 이름보다 중요한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관식의 날이 밝았다.
“오노레…….”
루슬란이 동생을 보여 주기로 한 날이었다. 동생의 무사만 확인한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했다. 이델은 검은 후드를 쓰고 어두운 커튼 뒤에 숨어 동생을 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가 대관식에 본 것은 그의 동생이 아니라 노신관이었다.
“아아아아악!”
루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었다.
내 동생, 오노레! 내 천사!
대관식을 마치고 돌아온 루슬란은 짧게 혀를 차더니 그런 루의 몸을 쉽게 제압했다.
“왜 그러느냐?”
“오노레! 오노레!”
“아, 대신관이 네 동생이 아니었다고?”
“왜 거짓말을 했어, 왜!”
“난 거짓말한 적 없는데.”
대신관을 오노레라고 한 것도 너고, 그 늙은이를 네 동생이라고 말한 것도 너지.
루슬란은 짙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대 대신관의 이름이 그랬던 것도 같군.”
“……어딨어.”
“거래는 끝났을 텐데. 무엇이든지 하면 대신관을 보여 주겠다고 했고, 그래서 봤잖아. 이번에는 무엇을 할 텐가?”
“뭐든지, 요.”
뭐든지 할게요.
루슬란은 갈라지고 터진 입술에 입 맞추며 미소 지었다.
“그래. 약속 꼭 지켜.”
***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벤이 옆을 돌아보았다.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든 이델의 모습이 보였다.
“……루슬란?”
가끔 루슬란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된 이델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 아니다.”
루벤은 일어나려는 이델의 가슴을 가만히 다독여 누르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좋은 꿈을 꿨는데 말이야.”
품에 가득 차는 이를 끌어안으며 긴 검은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자 아쉬움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좋을 때 깨 버려서 그래.”
“여기서는 하면 안 되는 겁니까?”
“음, 아직은 그럴 마음까진 안 들어서. 이 상태도 나쁘지 않고, 참을 만해.”
“좋은 꿈이었다면서요?”
“그런 게 있거든.”
루벤은 씩 웃으며 가물가물 잠기는 이델의 양쪽 눈에 입맞춤을 했다.
뭐, 그 개새끼를 언젠가 반드시 죽이겠다는 계획이야 하고 있지.
네 동생 말이다.
미소로 말을 대신한 루벤의 얼굴을 보고 이델은 안심하며 잠이 들었다.
불안해지면 나를 깨우시면 됩니다.
루벤이 도톰한 귓불을 빨아 당기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럼 또 안아 줘야 해.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