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 Extra 2 (15/15)

4. Extra

HIDDEN TRACK 2. 찰스턴의 우울

정보 길드란 대개 어두운 쪽―도둑이라든가, 암살자라든가와 손을 잡아 몸을 숨기기 마련인 업종이었지만, 예외는 있었다. 바로 자유도시에 있는 찰스턴의 정보 길드다.

찰스턴의 정보 길드는 일반적인 인식과 완전히 다른 곳으로, 실체를 감추기는커녕 관광을 온 사람이나 여행자들의 눈에 잘 띌 수 있도록 번듯한 간판까지 세워 두고 있었다. 위치까지 대로 한복판이었다. 자유도시의 관문을 지나 직선으로 쭉 뻗은 메인스트리트를 걷기만 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라 초행인 사람도 모를 수가 없었다.

자유도시가 아니고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자유도시를 방문하는 제국인들은 찰스턴의 정보 길드 간판을 보며 이곳이 이주민들의 도시임을 실감했다. 같은 제국임에도 자유도시의 성벽 안은 전혀 다른 곳인 것이다.

?

제국인들은 번듯한 간판이 달린 정보 길드를 보는 것을 자유도시 입성의 시작으로 여겼다. 돌아가서는 정말로 그러한 정보 길드가 있다며 보고 온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이 근래 수도의 유행이었다. 찰스턴의 정보 길드 앞은 언제나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정보 길드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 여행 안내소와 비슷해지는 게 당연했다. 이미 훌륭한 관광 명소이기도 했다.

자유도시는 바다 건너온 이주민의 도시였다. 아직도 도시 구석구석에서 제국에선 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가 방언처럼 들리는 곳이었다. 허가가 떨어지기 무섭게 관광 명소가 되는 게 당연했다.

제국의 황제는 괴짜이긴 했으나 관대한 통치자였다. 멀리서 온 전쟁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제국어를 의무적으로 배울 것을 정했으나 그들에게 강도 높은 유화정책을 지시하진 않았다.

이민자 1세대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당연히 제국과의 융화는 서서히 이루어 나가야 할 문제였다. 급격한 유화정책을 펴기에는 제국도 이주민들도 준비되지 못했다는 게 황제의 판단이었다.

실제로 자유도시는 문화나 예절, 금기에서 제국과 제법 차이를 보였다.

대표적인 게 ‘왼손잡이’에 관련한 문제인데 제국에서는 왼손잡이를 예의 없는 사람, 불길한 사람, 거짓말쟁이로 취급해 반드시 자랄 때부터 오른손을 강요하는 반면 이주민들은 왼손잡이를 ‘사우스포’라고 부르며 그 희귀성을 높게 쳐줬다. 일부 특정한 분야에서는 왼손잡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대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찰스턴이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저쪽 대륙엔 아주, 대단히 유명한 왼손잡이가 있어서 말이지.”

요사이 매일같이 찰스턴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개새끼―아니, ‘어떤 남자’는 애인의 긴 머리카락을 정성껏 빗질하며 말했다.

“근데 거짓말쟁이라는 건 사실이군. 그건 확실해.”

연애는 다른 데 나가서 해 주었으면. 남의 사무실 말고!

하지만 찰스턴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목숨은 한 개였다. 그 자리에서 찰스턴의 목을 꺾어 버릴 수 있는 남자는 무려 둘이었고.

“네 생각은? 왼손잡이는 거짓말쟁이라는 속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보지그래, 응?”

남자는 ‘애인’의 머리를 빗기다 말고 귓불을 문지르며 본격적으로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입을 꾹 다물고 고집스럽게 대답하지 않는 이가 글을 왼손으로 쓰는 것을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왼손잡이는 거짓말쟁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아주 당당하게 옷 속에 손을 넣어 맨살을 만지작거리는 남자를 버티다 못한 찰스턴은 결국 사무실을 비웠다. 질 나쁜 건달 같은 목소리가 용서해 달라고 애원해 봐,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듣긴 했으나 고개를 젓는 것으로 털어 버렸다. 그 뒤에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앞으로도 영원히.

***

일상은 비슷했다. 이전처럼 평온한가 하면, 그건 좀 애매한 문제였지만.

오늘도 찰스턴의 사무실에 방문한 남자는 당당하게 찰스턴에게 차를 내올 것을 명령했다. 하여간 명령에 아주 익숙한 남자였다.

누가 보면 저쪽 대륙에서 황제라도 해 먹은 줄 알겠네, 씨팔.

표정만큼은 고분고분한 찰스턴은 신중한 태도로 차를 타 내놓으며 눈치를 살폈다.

역시나.

슬쩍 미간을 찌푸린 ‘남자’는 또 한 소리를 했다.

“떫어.”

“죄송합니다요. 아무래도 제가 차 맛을 잘 모르는지라.”

“이해하지.”

개새끼.

혀를 꼭 씹는 것으로 찰스턴은 욕설을 삼켰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효과적이었다.

“아직 상납금을 드릴 날짜 전인데, 오늘은 어쩐 일로…….”

“상납금? 투자와 사업적 아이디어에 따른 배당금이겠지.”

그만큼 뜯어 가면 날강도다, 씹새끼야.

찰스턴은 멍청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어감이 좋지 않군.”

남자가 말하는 배당금은 정보 길드에서 발행하는 관광 안내 책자 사업이었다. 

근래에 들어 자유도시를 방문한 제국인이라면 찰스턴의 정보 길드에 들러 안내 책자 몇 부 정도는 사는 게 당연한 일로 굳어진 상태였는데 그건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아이디어였다. 정보 길드가 하는 일이 뭐 그렇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도시에 대한 안내 역시 엄연한 정보가 아닌가?

돈 냄새 하나는 귀신같이 맡는 찰스턴은 그 안내 책자에 약간의 잔재주까지 부려 넣으며 심혈을 기울였다. 바로 안내 책자의 종류를 다양하게 만든 것인데 하나는 도시의 명소 안내 책자, 또 다른 하나는 이주민들의 문화 차이를 설명한 책자, 마지막으로는 자유도시 내 암묵적 규칙에 대한 책자였다.

거기에 남자는 귀족들의 허영심을 만족시킬 만한 기념품 버전으로도 따로 만들 것을 지시했는데, 질 좋은 종이와 가죽을 사용해 타 대륙의 언어를 사용한 ‘자유도시 안내서’의 발행이었다.

처음엔 이게 뭔 병신 짓인가 했는데, 의외로 귀족들이 앞다투어 사 가는 인기 품목이었다. 대체 읽을 수도 없는 그 책을 왜 사 가는지, 원. 그 부드럽고 유려한 글씨체가 이국적이라나 뭐라나.

찰스턴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귀족적 감각이었다. 어쨌거나 안내 책자는 자유도시가 성장할수록 상당한 수입이 되고 있으니 잘된 일이다.

이렇듯 약삭빠르고 사회생활 능력이 출중한 찰스턴이지만 귀족들의 심금을 울리는 부분에 대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평민이 아니라 귀족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야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그 실행 방법이 까다로웠다. 귀족적인 사고 자체가 되지 않는달까, 귀족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포인트가 잘 와 닿지 않는달까.

찰스턴의 정보 길드가 번성하며 안내 책자 등의 히트 상품을 낸 것은 전적으로 이 남자 덕분이었다.

다만 그는 크게 성공한 투자가로 능력과 별개로 성격이 참…… 그랬다. 이 남자가 조금만 만만하더라도 그 모든 수익금을 혼자 꿀꺽하고 두 배는 행복해졌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반항하지 못하는 것은 남자의 성격 때문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제 사무실인 양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차를 마시는 남자는 보통의 남자가 아니라 완전히 돌은 개새끼였다.

찰스턴은 매월 15일만 되면 속으로 눈물과 욕설을 삼키며 안내 책자 사업의 이익금의 7할을 떼어 나누어야만 했다. 워낙 길드가 번성하고 있는 터라 찰스턴의 몫인 3할도 상당한 금액이었으나 더 큰 남의 케이크 조각을 보는 심정은 참담했다. 수익의 7할을 건넬 때마다 가슴은 만 갈래로 찢어져 죄다 빼앗기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부 조작을 살짝 해 볼까, 라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이내 혹시라도 제 속이라도 읽었을까 봐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의 뺨을 쳤다. 저 새끼는 지독한 새끼였다. ‘애인’한테 하는 짓들만 봐도 정말로 지독한, 어휴…….

심지어 점점 광증이 심해지기도 했다. 찰스턴은 남자를 만날 때마다 손가락을 머리 옆에서 빙빙 돌려서 너는 미친 씨발놈이야,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아 내야만 했다. 용병 시절 듣고 배웠던 모든 욕을 퍼붓는다고 해도 부족한 새끼였다.

카아아악, 퉤엣! 욕도 아까운 새끼! 퉤퉤!

그리고 그가 참아야 할 것은 이 남자 하나만도 아니었다. ‘진짜’는 따로 있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좋을 것 같나, 아니면 긴 채로 유지를 할까?”

“누구 머리카락을…….”

“당연히 루 말이지.”

또 시작이다.

찰스턴이 말하는 ‘진짜’는 바로 이 ‘남자의 애인’이었다. 저들끼리만 루, 루거리고 부르는 게 아주 꼴사나웠지만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다가 인생의 한 페이지를 완전히 구긴, 아니 인생이라는 책을 강제로 덮어 버리고 만 놈들의 이름을 찰스턴은 죄 꿰고 있었다.

“머리카락이라는 같잖은 핑계로 접근하는 년들이 있단 말이지.”

“…….”

“애초에 머리카락을 기른 건 나 때문이라고. 내가 예전에 지나가는 것처럼 흘렸던 말이 있거든. 나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귀엽기도 하지.

흐뭇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찰스턴의 뺨이 경련을 일으켰다.

이런, 미친.

“그냥 자르게 할까 했는데, 침대에서 흐트러져 있으면 참 보기 좋기도 하고 말이야. 주말 아침에 이불을 걷어 내면 알몸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는데 그게 참…….”

입맛을 다시는 남자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사냥감의 목 줄기를 끊어 놓을 듯 사납고 잔인한 표정이었다. 애인을 떠올리며 육식동물 같은 표정을 짓다니. 정말 미친놈이었다.

“특히 여기가 참 예뻐. 아침에 머리를 빗겨서 올려 주다 보면 하얀 목덜미가 눈에 띄는데 꼭 사슴 같아.”

“……사슴이요.”

“역시 네가 봐도 그런 모양이군. 눈동자도 참 싱그러운 녹색이지 않아? 여름의 숲처럼 맑고 짙은 색으로 빛나고 있지.”

찰스턴이 알기로는 전설에 나오는 괴물의 눈도 녹색이었다. 기이한 광채로 번들거리는.

“그래서 목덜미를 드러내자니 참 걸리는 게 많더군.”

하지만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고민하고 있었다.

“악사 일까지 하고 있으니, 영락없이 사슴이잖아.”

대체 악사 일은 사슴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냥 집 안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남자가 부자인 것은 도시 사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영 그만둘 생각을 안 한단 말이지.”

그야 니가 미친놈이라 호시탐탐 집 안에 가둬 둘 궁리만 하는 걸 그 괴물이 본능으로 알아차렸겠지!

찰스턴은 조금 더 혀를 강하게 깨물었다.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뺨이 이제는 얼얼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사슴 같군. 도망도 잘 치게 생긴 것이.”

대답하지 않고 혼자 내버려 둬도 참 잘도 떠드는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산 채로 사슴의 목을 뜯어 버렸다 해도 믿을 만한 흉흉함이었다.

그놈의 사슴!

“부러트리면 도망 못 가겠지?”

?

“부러트리면 도망 못 가겠지?”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찰스턴은 황급히 기억을 뒤졌다. 그러고 보니 곧 웰서트의 배가 온다는 소식이 있다. 웰서트에 대한 소식이 뜰 때마다 남자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이제 비밀도 아니었다.

이런, 씨팔……!

“그러면 사슴다운 매력이 죽지요.”

이제는 ‘괴물’을 떠올리면서도 사슴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게 된 찰스턴은 열심히 입을 놀렸다. 그의 마음속에서 재정의된 사슴은 육식성 맹수로, 산 채로 사람을 찢어 버릴 수도 있는 괴수였다.

“그 다리가 또 매력 아니겠습니까?”

찰스턴은 괴물, 아니 사슴 다리에 걷어차여 봤는데 딱 정말 죽기 직전까지 아팠다.

“……그것도 그렇군.”

남자는 영 탐탁치 않아 하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사냥개 목줄은 어디서 팔지?”

그러더니 뜬금없이 목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닌가.

찰스턴은 갑자기 왜 대화가 그리로 튄 것인지 짐작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어쨌거나 사슴 타령을 계속 듣는 것보다는 나았다.

“대장간에 가면 있습니다.”

“아니. 그런 거친 것 말고. 그럼 목이 상하잖나. 거기가 참 예쁜데. 그건 안 될 말이지.”

찰스턴이 자신이 들은 내용을 의심하는 사이 남자는 태연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단단한 가죽으로 만들었으되, 안에 비단과 솜을 덧대어 피부에 상처가 나지 않는 그런 게 필요하다.”

“……주, 문 제작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요.”

“음. 최대한 빨리 가지고 오도록.”

찰스턴은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네에. 물론입죠…….”

그 목줄이 어디다 사용될 것인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문제의 주문 제작 특수 목줄로 인해 찰스턴은 성적 취향을 의심당해야 했다. 그쪽이 아니냐는 것이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나 내가 아니라 그 미친놈이 괴물, 아니 사슴한테 사용할 것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재차 말하지만 생명은 하나였고, 이 도시에서 연약한 찰스턴의 목을 손쉽게 따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 괴물은 두 명이나 존재했다.

그나마 다행은 그 주문 제작 목줄에 남자가 대단히 흡족한 것이라고나 할까.

찰스턴은 그 불길하고 끔찍한 물건을 남자에게 건넨 직후부터 고객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팔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식당에서 이국의 악사가 노래 부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진짜배기 정보였다. 그럼 언제쯤이면 다시 악사가 나올 것 같냐는 물음에 찰스턴은 최소 3일은 걸릴 것이라 대답했다.

3일이면 다행이지. 에이, 씨발.

찰스턴은 휘적휘적 늦은 출근을 하며 길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어제 연초를 너무 피워서인지, 아침 댓바람부터 남자를 찾아가 만났기 때문인지 목구멍이 아주 깔깔했다.

미신과 감을 믿는 찰스턴은 희미하게 느껴지는 불안에 몇 번이나 침을 모아 뱉는 의식을 치렀다. 일진이 사나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기야. 당연했다.

매일같이 멋대로 문을 들고 오는 것도 모자라 정기적으로 만날 약속까지 정식으로 잡혀 있는 남자는 도시 내에서도 요주의 인물이었다.

어느 정도냐고 하면 규모가 작지 않은 이 자유도시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정도였다. 바로 어젯밤 바다를 건너 떠내려 온 이주민이 아닌 이상 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자유도시 안내서 3권에 주의 사항으로까지 작성해 놨겠는가.

“「기사 이상의 실력자로 평가되지만 기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기사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유도시 초창기에 있던 몇몇 마찰에서 여자를 걷어차거나 주먹질까지 한 인물이다. 그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묻지 마라. 호승심에 결투를 신청했다가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

“…….”

“와우.”

찰스턴이 피눈물을 삼키며 배당금, 사실상 상납금 문제를 잊으려고 하면서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그는 잠시 두 눈을 의심했다.

“화끈하군.”

찰스턴의 집무실 책상에 턱 하니 다리까지 올리고 안내 책자를 소리 내 읽던 남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연히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기사들도 상대가 안 된다는 인물이 여자랑 주먹질을 한 이유가 뭐지?”

“……누구, 십니까?”

“질문은 내가 먼저 했다는 걸 굳이 이 몸께서 지적해야 할까?”

찰스턴은 빠른 속도로 사무실 안의 상황과 의문의 남자의 눈치를 봤다.

호되게 당한 적이 있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아, 망했다. 오늘은 이거구나, 씨팔.

당한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어느새 이러한 상황에 익숙해진 찰스턴은 다 포기한 눈빛으로 고분고분 대답했다. 혹시나 그 미친 새끼가 들을지도 모르니 사무실로 들어와 문을 꼭 닫은 것은 물론이다.

“의처, 아니 의부증, 아니 의처증…… 여튼 애인한테 목을 심하게 매는 남자입니다. 근래에는 여자들이 겁도 없이 그 애인한테 결혼하자고 옷을 벗고 덤벼 든 적이 몇 번 있었습죠. 당연히 난리가 났고 말입니다.”

뒤지고 싶으면 저 바다에 혼자 뛰어들기나 할 것이지, 정신 나간 년들 같으니라고.

찰스턴은 부르르 몸을 떨며 진저리를 쳤다.

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수틀리면 여자를 걷어차고 주먹질을 하는 개새끼보다 더 씹새끼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그 남자’의 잘난 ‘애인’이었다.

문제의 ‘애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남자에 비해 열 배는 더 지독하고 말이 안 통하는 미친놈이었다. 찰스턴은 ‘남자’보다 그 ‘애인’이 수십 배는 더 무서웠다. 더 무서운 것은 남자의 애인이 천하의 둘도 없는 미친 개새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데 있었다!

이런 니미, 씨팔!

영원히 풀릴 수 없는 억울함에 가득 찬 찰스턴은 소소한 복수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남자를 질투의 화신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함이 없다는 건 사실이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님에도 해명할 생각은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이건 찰스턴이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팬 것은, 그것은 정말 구타나 폭행이라고 불러 마땅한 행위였다. 애인 문제도 있었지만 자유도시 초창기에 질 나쁜 꽃뱀과 범죄자를 처리할 때에 주로 있었던 일이었다. 이민자들을 이용할 속셈이었던 연놈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남자가 나섰던 것은 악질 중에 악질인 경우였다고는 하나 어쨌든 상대는 여자였다. 보기 좋은 장면일 리가 없었다.

‘남자’는 적당히 봐줄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양심이라든가, 상식이란 게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었다. 쩔쩔매는 남자들과 기사들을 밀쳐 내고 여자에게 주먹질은 물론이고 발길질도 망설이지 않던 모습은 실로 목줄 풀린 맹수와도 같아,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부정하고 저주하다, 종국에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꿈틀거리는 여자의 양 다리까지 밟아 부러트린 미친놈이 그놈이었다!

목소리를 벌벌 떨며 고지식한 기사가 용기를 내 한마디를 했을 때 반응도 가관이었다. 주먹에 피칠갑을 한 ‘남자’는 고상하게도 품에서 자수가 놓인 고급스런 손수건으로 주먹을 닦고 바닥에 버리며 말했다.

‘사자는 본래 사냥을 할 때 상대가 양이라고 해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지. 내가 좀 겪고 배운 게 있어서 더욱 그래. 바닥 청소비는 따로 지불하지.’

남자는 위험한 짐승 새끼, 아니 사람이었다. 예견된 피해를 막는 것이 제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이라 찰스턴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그 문제의 애인이 여기 6페이지에 있는 「이국의 악사」인가?”

“네.”

“호오…….”

낯선 남자는 당장이라도 구경을 하러 뛰어나갈 듯 몸을 들썩거렸다.

“이 몸이 가서 악사에게 치근덕거린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목숨이 여러 개시면…….”

“내 호위가 아주 대단한 사람이더라도?”

“미친놈은 원래 힘도 장사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기사랍시고 ‘그 남자’한테 껍죽거리다가 줘 터지고 인생 종친 병신들이 한둘이 아닙니다요.”

그리고 ‘그 남자의 애인’은 그런 ‘남자’를 세상에서 제일 여리고 순수한 소년처럼 여길 수 있을 정도의 살인귀였다. 초면에 그것까지 알려 줄 정도로 박애주의자는 아니라 말은 할 수 없지만 <이국의 악사> 쪽이 최소한 수십 배는 위험한데다, 더 미친놈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남자의 애인’은 이미 몇 번이나 찰스턴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남자’에 대한 문제로 협박한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애인’을 무슨 가련하고 청순한 사슴 보는 듯한 눈빛을 했고!

요즘 찰스턴이 가장 자주 듣는 단어는 ‘사슴’이었다, ‘사슴’!

어디 가당키나 한 묘사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역겨운 일이었다. 힘이 없으니 억울하고 더러워도 말할 수가 없었다.

힘없는 평범한 남자인 찰스턴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은 사슴고기를 딱 끊어 버리는 정도였다.

“황제의 호위 기사쯤 돼도 이기기 어렵겠나?”

“와하하하!”

역시 이 새끼도 미친놈이다. 애초에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얌전한 얼굴로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진짜 괴수 말이다.

“무슨 허풍도 참! 그런 도박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견적을 내보자면 반드르르 한 것이 보아하니 수도의 제법 한다 하는 귀족 같은데 적당히 달래서―

“―…….”

찰스턴은 남자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 옆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의 면면도.

“……설마, 크흠, 그…… 주, 주인…….”

“그래.”

미친놈인 줄 알았던 이가 싱그럽게 웃었다.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로구나. 눈치도 썩 쓸 만하고 만족스러워. 그래. 이 몸이 네 주인님이시다. 이쪽은 내 충성스러운 호위, 시오젠. 둘도 인사를 나누도록 해.”

미친놈, 아니 상상 이상으로 돌은 새끼, 아니지, 찰스턴의 주인님은 오른쪽 손을 내밀어 가볍게 흔들며 경애의 키스를 요구했다.

“길드에서 정보를 샀더니, ‘이국의 악사’는 당분간 나오지 않을 거라고? 일정이 짧으니 이 몸이 직접 방문하도록 하지. 안내해라.”

그 순간, 찰스턴은 그 자리에서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족쇄를 넘겨받을 때 짓던 ‘남자’의 표정과 눈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아니, 상상 그 이상의 짓을 저지르고 있으리라.

찰스턴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그다지 추천하고 싶은 일이 아니니 결정을 재고해 달라고 할 셈이었으나……

“……네에. 시기가 조금 좋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만…….”

황제의 호위 기사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황제의 호위 기사가 손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리란 판단에서였다.

최소한 도망갈 시간은 벌어 주겠지.

오판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찰스턴이 ‘그 남자와 사슴’에게 충성을 다짐하기까지 30분 전의 이야기였다.

-The En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