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계약 prol
눈을 뜬 순간 어마어마한 두통이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범종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머릿속이 윙윙 울린다. 미간과 콧등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 끙끙 앓았던 건주는 뒤늦게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낯선 장소란 것을 깨달았다.
‘여기가…… 어디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살펴본 방안은 화려하진 않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병원은 절대 아닌 것 같고…… 호텔도 아닌 것 같은데 어디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서는데 순간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한참 가만히 있다 보니 차차 괜찮아졌다. 그제야 건주는 후우, 하고 긴 숨을 내뱉다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입고 있는 옷 또한 제 옷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하의는 없고 헐렁한 잠옷 상의만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간신히 엉덩이만 가린 채 맨다리를 훤히 내놓은 민망한 차림에 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낯이 달아올랐다.
‘설마 일을 친 건 아니겠지?’
엉덩이를 더듬어 봤는데 아프거나 우린 느낌이 없는 것을 보니 기억에도 없는 섹스를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일단 다행이긴 한데 더 궁금해진다. 여긴 어디고,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서……. 자신이 왜 낯선 곳에 이런 민망한 차림으로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려면 우선 방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막 방문을 주먹 한 개가 들어갈 정도로 살짝 열었을 때였다.
“네가 난잡하게 놀아나건 말건 상관하려 하지 않으려 했다만 이젠 안 되겠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한 거니?! 순진한 아가씨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서 임신까지 시키다니!”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건주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사내를 향해 화가 난 음성으로 쏘아붙이고 있었는데, 사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
“더는 안 되겠다. 결혼을 해라. 네 애를 가졌다던 그 애랑 결혼 해! 집안이야 별 볼일 없더라만 그래도 우리 집안의 핏줄을 가졌다는데 별 수 없지 않겠니? 네 아버지와도 이미 얘기 끝냈다.”
“어머니!”
순간적으로 등골로 오싹한 소름이 돋았을 정도로 지독히 낮은 저음이었다. 직업이 성우인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음성. 저런 보이스를 가진 사내의 얼굴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건주는 저도 모르게 문을 조금 더 열었다.
“부를 것 없다. 이번엔 나도 네 아버지도 너를 무조건 결혼시키기로 단단히 결심을 굳혔으니까. 결혼에 관한 준비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넌 신경 쓸 일이 조금도 없을 거다. 식장에만 나타나면 돼. 만약 이번에도 우리말을 듣지 않는다면 유산은 한 푼도 남겨주지 않을 거야.”
“그런 식으로 협박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전 누구하고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요.”
“태민환!”
저 사내의 이름이 태민환인가 보았다. 태민환? 건주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는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낯선 이름도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얼굴을 보면 확실해질 것 같은데…….
“………….”
귀부인이 분을 못 이겨 왈칵 성질을 냈을 때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중얼거리며 문을 점점 더 활짝 열던 건주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그만 거실로 넘어지고 말았다.
“누구?”
“…….”
뭐라고 얘기해야 하지? 사실 전 두 분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데, 눈을 떠 보니 여기에 이런 차림으로 와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나?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건주가 애써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 순간 귀부인의 고운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녀는 성이 난 눈길로 사내를 사납게 노려보며 외쳤다.
“태민환! 너 이제 하다하다 남자까지 건드린 거니?!”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귀부인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건주가 저 사내의 침실에서, 저 사내의 것으로 짐작되는 잠옷 상의를 입고 나왔으니 말이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태, 태 실장님!”
손까지 마구 내저으며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건주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사내는 태 실장이었다. 건주의 회사와 거래하고 있는 건축사무소의 설계사이자 실질적인 오너지만 태 실장이라고 불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건주는 태 실장과 직접적으로 대면한 적은 없지만 멀리서 서너 번 본 적은 있었다.
“너란 애는 도대체!!”
“이래서 절대 결혼은 안 한다고 했던 겁니다.”
“……… 뭐?”
“전 게이입니다. 제 성향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간 수많은 여성을 만나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본성대로 살 생각이니 앞으로도 제가 결혼할 기대는 접으세요.”
거짓말. 저건 백 퍼센트 거짓말이다. 건주의 눈에는 태 실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보이는데, 귀부인의 귀에는 진실로 들렸나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이내 새하얗게 질렸다.
“너, 너너…….”
“……….”
“그, 그럼 이제 사내놈들을 건드리고 다니겠다는 거니?! 오만 여자들하고 염문을 뿌린 것처럼 이 남자 저 남자? 난 그 꼴까진 못 본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으면 죽었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전 이 남자 하나면 족하니까요. 정식으로 소개하죠. 제 애인입니다. 어머니.”
건주의 곁으로 다가온 태 실장이 다정하게 어깨로 손을 감았다. 순간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말도 안 나오는지, 건주는 붕어처럼 입만 뻐끔뻐끔하며 태 실장과 귀부인을 번갈아 보았다.
“애인…… 이라고?”
“네. 어머니.”
“평생 처음으로 애인을 소개시켜주었는데, 그 애인이 사내라고? 그럼 그 애는 어떻게 된 거니? 네 애를 가졌다고 하던데?”
“거짓말입니다.”
태 실장의 단호한 말에 귀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너무 혼란스럽구나. 다음에, 다음에 얘기하자.”
귀부인은 복잡한 눈길로 건주를 쳐다보더니 휙 몸을 틀어 나가버렸다.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펄쩍 뛰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신 겁니까?! 제가 왜 태 실장님의 애, 애인이……….”
“너 누구야?”
“네?”
“누군데 나를 알고 있냐고?! 설마 일부러 나를 노리고 내 차에 뛰어든 건 아니겠지?”
차에 뛰어들어? 바보처럼 눈만 깜박이고 있던 건주가 그제야 ‘아, 맞다.’하는 소리를 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배가 고파서 먹을 걸 사러 가려고 길을 건너다 사고가 났던 것 같다. 망막으로 똑바로 쏘아져 들어오던 강한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며 ‘이대로 죽는 건가?’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떠올랐다. 그 차가 태 실장의 차였나 보았다.
건주는 자신이 사기꾼이라도 되는 냥 사납게 쏘아보고 있는 태 실장을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대성 타일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 실장님을 알고 있고요. 사고는 제 잘못이 아닌데요. 전 분명 파란불에 건넜거든요.”
태 실장은 아무 말 없이 건주를 쏘아보았다. 어? 아닌가? 내가 착각했나? 빨간불…… 이었나?
당당하게 말했던 거완 달리 속은 불안함으로 콩당콩당 뛰었다.
사실 요즘 통 제정신이 아니라서 정말로 파란불에 건넜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을 때, 태 실장이 고개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노리고 뛰어든 거 아니냐고 했던 것에 대해선 사과하지. 이름이 뭐지?”
“박건주라고 합니다.”
태 실장이 앉으라고 권해서 건주는 조심스레 소파에 앉았다. 태 실장도 건주의 맞은편으로 앉더니 긴 다리를 거만하게 꼬았다. 구김이 거의 없는 검정색 치노 팬츠를 보니 헐벗고 있는 제 다리가 참으로 민망했다.
“저, 제 옷은 어디에? 그리고 병원이 아니고 왜 태 실장님 집에 와 있는 겁니까?”
“바닥을 구르면서 찢어진데다 더러워서 세탁소에 보냈네.
그리고 내가 사고를 냈다는 것이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시끄러워지기 때문에 내 집으로 데려온 거야.
안 그래도 요즘 결혼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프거든.”
건주는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의사를 불러 진찰시켰으니 걱정은 안 해도 돼. 약간의 타박상외에는 괜찮다고 하더군. 과로에 영양실조 증세가 있는 것만 빼면.”
과로야 그렇다 쳐도 다 큰 사내가 영양실조라니. 건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건주는 화끈거리는 귓불을 잡아당기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생각해 보니 요즘 거의 안 먹긴 했다.
경태로부터 A 호텔에서 재효를 봤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퇴근하자마자 호텔로 달려가 새벽까지 기다렸으니 말이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재효를 놓칠 것 같아 소변도 한계까지 참은 후에야 후다닥 다녀오곤 했으니
밥 먹을 시간 같은 건 더더욱 없었다
. 원래 아침은 거르고 점심·저녁만 먹는데 보름 가까이 저녁도 걸렀으니 영양실조가 올만도 했다.
더군다나 요샌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으니까.
더 민망한 꼴을 보이기 전에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이젠 두통도 사라졌으니 집에 가서 밥을 잔뜩 먹고 쉬어야지.
“폐, 폐를 끼쳤네요. 옷을 좀 빌려주시면 다음에 깨끗하게 세탁해서 가져다드릴게요.”
벌떡 일어나며 외친 말에 태 실장이 혀를 차더니 도로 앉으라는 듯 손짓을 해보였다.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는데…….”
“……?”
제안? 건주는 눈을 끔벅거리며 태 실장을 바라보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요즘 결혼 문제가 골치가 좀 아프거든. 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집에서 압박을 해대고 있고, 그 와중에 잠시 데리고 놀던 여자가 내 애까지 가졌다고 나서는 통에 더더욱 곤란해졌어.”
임신을 시켜놓고 책임을 회피하려 하다니 최악이다. 상당한 플레이보이라고 선배에게 듣긴 했지만 책임감마저 결여된 남자인 줄은 몰랐다. 건주는 저도 모르게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 분이랑 결혼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 애가 아니야.”
“네?”
“다른 놈 애를 배놓고 내 애라고 뒤집어씌우고 있는 거라고. 내 애를 가졌다고 하면 내 어머니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여자거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뚱한 물음에 태 실장이 피식 냉소를 흘렸다.
“자넨 내가 그렇게 허술해 보이나?”
하긴. 선배 말로 태 실장은 완벽주의자라고 했다. 납품한 물건에 아주 조그만 흠이 있어도 불벼락이 떨어져서, 태 실장이 짓는 건물에 보낼 물건에는 몇 배나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투덜댔었다.
가만히 다시 생각해 보니 태 실장은 절대 무책임한 남자가 아닐 것 같았다. 저렇게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눈빛을 가진 남자가 겨우 책임지기 싫다는 이유로 ‘내 애가 아니다.’라는 비열한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그럼 아니라고 하시면 되잖아요?”
“믿지 않으니 문제지. 그렇다고 애가 태어나기도 전에 DNA 검사를 할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야. 그 여자 입장에선 일단 결혼만 하고 나면 나중에 내 애가 아니란 것이 밝혀져도 거액의 위자료를 받고 이혼할 수 있을 테니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계산을 하고 있겠지만, 난 거기에 순순히 응해줄 생각이 없거든.”
“………?”
그래서 어쩌자는 걸까? 의아한 건주의 눈빛을 읽기라도 한 듯 태 실장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또한 이번 일을 빌미로 어떡하든 날 결혼 시키려고 들 테니, 두 여자가 내 결혼에 대해 포기할 때까지 자네가 내 애인 역할을 해주면 좋겠네.”
‘기간은 길어봐야 6개월. 물론 자네의 수고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치러주지.’
‘실장님의 애를 가졌다고 거짓말한 여성분과 결혼하기 싫으면 끝까지 아니라고 부정하면 되지 않습니까? 부모라면 결국은 자식의 말을 더 믿을 테니까요.’
‘물론 그렇겠지. 그런데 그녀가 아니더라도 다른 여자들을 끌어다 붙여서라도 꼭 결혼을 시키려고 할 것 같거든. 어머니 최후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유산 문제까지 입에 올리신 것을 보면 말이야. 그렇다 해도 난 절대 결혼할 마음이 없으니 어머니를 포기시키려면 이 방법이 제일 효과적일 것 같아.’
태 실장의 말을 떠올리며 건주는 피식 웃었다. 부자들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결혼을 피하려고 게이인 척 하겠다니 말이다. 그렇게 결혼이 하기 싫은가?
태 실장의 거짓말에 동참해 줄 마음은 조금도 없어서 거절하자 그는 ‘생각이라도 해봐라.’라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남의 명함, 그것도 회사의 큰 고객의 명함을 함부로 버릴 순 없어서 잘 챙겨두긴 했는데, 개인적인 일로 연락할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무엇보다 지금은 태 실장의 장난에 발맞춰줄 상황도 아니었다. 건주는 어제 집으로 날아온 경고장을 떠올리며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달 말까지 대출금을 갚지 않으면 집을 경매에 넘기겠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이라도 집을 팔면 대출금은 갚을 수 있었다. 부동산에 알아보니 요즘 집 알아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골치 썩지 않고 팔 수 있을 거라고 했고. 하지만 그 집은…….
“미안. 내가 좀 늦었다.”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니 경태가 미안한 낯으로 웃고 있었다.
“괜찮아. 뛰어왔어?”
많이 늦지도 않았는데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경태의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혀 있었다. 건주가 물 컵을 밀어주자, 경태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오늘따라 버스도 늦게 오고 길도 어찌나 막히던지. 도중에 내려서 뛰어왔어.”
“천천히 와도 되는데 뭐 하러 그랬어?”
“내 시간이나 남의 시간이나 시간은 금이야. 근데 수철이 이 새끼는 또 안 왔어?”
건주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 수철에게 전화를 건 후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경태를 보며 가만히 웃었다. 건주에게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딱 둘 있는데, 바로 경태와 수철이었다. 재밌는 건 둘의 성격이 정 반대라는 점이었다. 경태는 꼼꼼하고 시간관념이 정확한 반면, 수철이는 약간 느슨한 성격이라 시간관념도 흐릿했다. 그래서 매번 약속이 있을 때마다 수철의 지각 문제로 한차례 실랑이가 오가곤 했다.
“어디래?”
“한 십 분이면 도착한다는데. 근데 이 녀석 뭔 일 있나?”
“왜?”
“목소리가 안 좋던데?”
“그래? 무슨 일이지?”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오자 경태는 보지도 않고 오렌지 주스를 주문한 후 “나중에 오면 물어보지 뭐.”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재효 새끼…… 못 찾았지?”
“응.”
건주는 아이스티를 쪼르륵 소리 나게 마시며 짧게 고개를 끄덕했다.
“아우, 그 새끼! 그 날 잡았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바이어랑 상담하던 중이라. 미안하다.”
“네가 왜 미안해?”
강재효. 일 년 전까지 건주의 애인이었던 남자 이름이다. 스물여섯에 처음 만나 이년간 사귀었고, 나중 일 년은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다. 평생 그렇게 사랑하며 살 거라 믿었는데 딱 일 년 전 이맘때, 재효는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렸다. 부모님이 건주에게 남겨준 재산이 든 통장을 가지고……. 그것만으로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재효가 사라진 후 얼마 뒤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태와 수철이는 재효가 작정하고 건주를 꼬신 후 돈을 챙겨 달아났다고 했지만, 건주는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 일 년 재효를 찾아다녔다.
“여기 냉수 한 컵 주세요! 얼음 팍팍 넣어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은 수철이었다.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는지 수철은 사납게 인상을 쓰고 건주와 경태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오더니 대뜸 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뭐야?”하며 사진을 들어 올렸던 경태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건주도 경태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다시피 하며 보았다.
“…………!!”
다음 순간 건주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진 안에 지난 일 년 동안 그토록 찾아다녔던 재효가 있었다. 턱시도를 말끔하게 차려입고, 공주님처럼 예쁜 아가씨와 팔짱을 낀 채. 건주는 멍한 눈빛을 들어 수철을 바라보았다.
“거기 그 아가씨,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의 외동 따님이시랜다. 한 달 전 약혼했고. 그때 찍은 사진이래. 지금 소문이 아주 자자하댄다. 남자 판 신데렐라라고 말이야. 친구 놈 스튜디오에서 그 사진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하마터면 숨이 막혀서 죽을 뻔 했다니까!”
“………….”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댄다. 쥐뿔도 없는 놈이 갖은 선물 공세에 별별 이벤트를 다 해가며 여자 꼬셔서 고속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고 말이야. 그 돈이 다 어디서 났겠냐? 다 네 돈이지! 그 새끼, 가만 안 둘 거야!”
수철이 거칠게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경태의 얼굴도 험악하게 변했다. 둘의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냉수를 가지고 오던 종업원이 흠칫 놀랐을 정도였다. 건주는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 후 얼음까지 와삭와삭 씹고 있는 수철을 멍하니 보다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정말…… 이야?”
혀끝이 말라붙는 것처럼 아파서 겨우 몇 마디 하는데도 힘이 들었다.
“응. 아가씨가 재효 놈한테 푹 빠졌나봐. 집안에서 반대가 대단했는데 딸이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어쩔 수 없이 약혼 시켰나 봐. 반 백수나 마찬가지인 놈을 아가씨 아버지 회사에 취직까지 시켰다고 하더라.”
“그 회사…… 어딘지 알아?”
***
회사에 월차까지 내고 찾아와놓고 막상 재효가 보이자 숨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숨기고 난 후에야 ‘내가 왜 숨어야 하지?’하고 반문해보았지만, 몸은 여전히 재효 쪽에선 보이지 않게 숨긴 채였다. 일 년 동안 찾아 다녔으면서도 막상 재효를 보면 무슨 말부터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왜 내 돈을 갖고 도망갔냐고 따질까? 아니면 왜 배신했냐고 화를 낼까? 그도 아니면 ‘훔쳐간 돈을 내놓지 않으면 약혼녀에게 나에 대해 몽땅 다 말해버릴 거야.’라고 협박이라도 할까.
사실 돈에 미련이 남는 건 아니었다. 대출금을 생각하면 막막하고,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해선 화가 나지만, 분노만이 건주가 가진 감정의 전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재효가 왜 그래야 했는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어떤 결론도 내고 싶지 않았다.
시계를 본 재효가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재효의 뒤를 따라가며 건주는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고 애써보았다. 스토커처럼 따라다니기만 할 순 없으니 뭐라고 말을 걸긴 걸어야 하는데 시작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생각을 하며 뒤따르다 정신을 차려보니 건주는 술집에 들어와 있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웨이터가 웃는 얼굴로 다가오며 물었다.
“네.”
“그럼 바로 안내해 드릴까요?”
“테이블에 앉아도 됩니까? 저기에 앉고 싶은데…….”
건주가 가리킨 곳은 재효의 뒤쪽 테이블이었다. 웨이터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물론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간단히 맥주 두 병과 마른 안주를 시킨 후 의자에 앉았다. 조용한 분위기 탓에 친구로 보이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재효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맥주 두 병을 해치우는 동안 두 사람은 소소한 일상 얘기를 나누었다. 건주는 김말이 과자를 와삭 씹으며 한숨을 삼켰다. 이게 뭘 하는 짓인지. 스토커처럼 뒤에 숨어서 말이나 엿듣고……. 참 한심하다. 한심해. 마음의 준비를 한 후 다른 날 다시 오자.
계산서를 들고 막 일어나려 할 때였다.
“참 얼마 전에 네 호구 친구 놈을 봤다면서?”
‘호구’란 말이 건주의 발걸음을 잡아당겼다. 건주는 어정쩡하게 들었던 엉덩이를 의자에 도로 붙였다.
“응. 호텔 커피숍에서 나오다 잠깐 시선이 마주쳤었지.”
“그 뒤 별 일 없었어? 네 호구가 안 찾아왔냐?”
친구의 말에 재효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찾아오면 대수냐? 난희는 이미 내 손에 꽉 쥐고 있어.”
“난희씨야 그렇지만, 그 부모님은 아니잖아. 혹시 그 놈이 앙심을 품고 난희씨 부모님한테 다 말해버리겠다고 하면 어떡할래?”
“잘 달래면 돼. 그 새끼는 내 말이라면 다 듣거든.”
“지금도 그렇겠냐? 돈 싹 챙겨서 튀었는데?”
“어머니가 죽을병에 걸려서 그랬다고 하면 돼. 그 새끼 그 말이라면 껌벅 넘어가거든. 데리고 노는 동안에도 어머니 핑계대고 돈 잘 가져다 썼지. 하여간 되게 멍청한 놈이었다니까. 내 말이라면 팥이 콩이라고 해도 믿었으니.”
재효가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 웃었다.
“나쁜 놈. 어쨌든 2년이나 사귄 애인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냐?”
“2년간 얼마나 지긋지긋 했는데. 부모가 죽으면서 남긴 보험금이 제법 된다는 소리 듣고 작정하고 꼬셨을 때는 한 반 년이면 될 줄 알았는데, 통장 비밀번호 알아내는데 이 년이나 걸렸다는 거 아니냐.”
참 진절머리 나는 세월이었다는 듯 몸서리를 치는 재효를 곁눈질로 본 후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소주를 몇 병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독촉장이 보였다. 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 집이…… 어떤 집인데…….’
결혼 이십 오년 만에 겨우 마련한 보물 같은 집이라며, 엄마가 밤낮으로 쓸고 닦았던 집이었다. 먼지 하나 없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걸레질을 하면서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무엇보다 부모님과 여동생의 체취가 남아있는, 소중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집이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이 집만은 지키고 싶었다. 부모님의 생명과 맞바꾼 돈을 도둑맞은 것도 모자라 집까지 남의 손에 넘기게 생겼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경태와 수철이 말이 옳다는 것을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재효에게 피치 못할 사정 같은 건 없었으리란 것쯤은 건주도 알았다. 다만 믿고 싶지 않았다. 외로움에 눈이 멀어 최악의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재효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돈을 가져간 날이면 늘 여자의 향수 냄새를 묻히고 들어왔고,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모른 척 눈을 감았다. 또 다시 혼자 남겨지는 것이 못 견디게 두려웠던 것이다. 둘 사이에 있는 것이 가식과 거짓말뿐이라고 해도 혼자보다는 낫다고 믿었는데 그 결과가 이거다. 재효를 만나기 전보다 더더욱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 완전히 제 발등을 제가 찧은 꼴이었다.
스스로를 향해 피식피식 실소를 흘리고 있을 때였다.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드르르르 진동했다. 건주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핸드폰을 꺼낸 후 누군지 확인도 않고 받았다.
“네.”
- 나 태민환인데, 아직도 생각이 안 끝났나?
태 실장이었다. 건주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행에…… 갚아야 할 빚이 좀 있어요. 그걸 해결해 주시면 실장님이 원하시는 만큼 애인 노릇을 해드릴게요.”
재효를 찾으면 집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이 될 거다. 근거도 없이, 그저 바보 같이 품고 있던 마지막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 남은 거라곤 이 집뿐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집만은 지키고 싶었다.
***
“여기는 태 실장님 침실 아닙니까?”
일주일 전 사고로 잠시지만 머문 적이 있기 때문에 알고 있다. ‘앞으로 제가 쓸 방은 어디입니까?’하는 물음에 태 실장이 안내한 곳은 바로 그때의 그 침실이었다. 건주는 당황했지만 태 실장은 태연했다.
“물론 여기는 내 침실이지.”
“그런데 왜 여기로……? 설마 이 넓은 집에 방이 하나뿐인 건 아니겠지요?”
일일이 수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대충 보아도 문이 5개는 넘었다.
“빈방은 많지만 자네와 나는 같은 방을 써야 해.”
“왜요?”
왜 많다는 빈방을 두고 태 실장과 같은 방을 써야 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멍한 건주의 표정을 보고 태 실장이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제가 게이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애인이랑 같이 살 겁니다. 말 한 마디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내 부모님은 만만한 분들이 아니야. 그간 내가 만난 여자들이 몇 명인데 고작 말 몇 마디로 믿을 것 같나? 이왕 시작했으니 확실히 속아 넘어갈 정도로 그럴 듯 하게 해야 하지 않겠나?”
“…….”
“어머니가 갑자기 들이닥쳤는데 자네와 내가 다른 방을 쓰고 있으면 뭐라고 생각하시겠어? 드레스 룸은 저쪽 문이니 가서 짐 정리부터 하도록 해.”
그런가? 그렇겠다. 건주는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던 박스를 들고 태 실장이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드륵, 미닫이문을 여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옷들이 보였다. 종류별로 착착 정리되어 있는 옷들을 보니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동시에 당분간 태 실장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도 실감났다.
그냥 가끔 만나서 애인인 척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태 실장은 동거를 제안했다. 그래야 더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다면서.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건주는 동거에도 동의했다. 어차피 하기로 결정했으니 동거를 해야 한다고 해도 큰 상관은 없었다.
건주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양복만 행거에 걸어두고 티셔츠와 청바지 같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들은 그냥 박스 안에 두었다. 그러곤 거실로 나가니 소파에 앉아있던 태 실장이 맥주 캔을 내밀었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듯 새하얀 김이 서려 있는 맥주는 보기만 해도 차가웠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차라 급히 풀탑을 딴 후 시원스레 마셨다. 그제야 체한 것처럼 답답하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 일주일,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교통사고도 나봤고, 돈을 갖고 도망쳤던 전 애인도 찾았고, 애써 부인하고자 했던 진실도 확인했고, 태 실장의 가짜 애인도 되어 동거까지 시작했다. 단기간에 감당하기 힘든 많은 일들을 동시에 겪은 탓인지 몹시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건주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태 실장을 바라보았다.
“제가 해드릴 일이 정확히 뭔가요?”
“내 가족들, 특히 내 부모님 앞에서 다정한 연인인 척 연기를 해주면 돼. 때에 따라선…… 그래 스킨십도 필요하겠지.”
“스킨십이라면 어디…… 까지?”
태 실장이 턱을 문질렀다.
“글쎄……. 키스 정도는 해야겠지?”
“할 수 있겠습니까?”
건주의 물음에 태 실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으로 남자와 키스하는 상상이라도 하는지 그의 낯빛이 점차 흙빛으로 변해갔다.
“설마 죽기야 할까. 좀 싫긴 하겠지만 참아봐야지.”
“그렇게 결혼이 하기 싫으세요?”
정말 이해가 안 가서 물어봤다. 만약 자신이 게이가 아니었더라면 분명 예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테니까.
“물론 하기 싫으니까 이런 짓까지 하고 있는 거 아니겠어? 그보다 자넨 어때? 참을 수 있겠나?”
나는 남자와도 잘 수 있는 남자입니다, 라고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태 실장과는 사적인 계약이 끝나도 일적으로 얼마든지 얽힐 수 있는 사이였다. 괜히 ‘사실 나는 그쪽입니다.’라고 말해서 나중에 껄끄러운 관계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돈 받고 하는 거니까 일이라고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지요.”
게이라고 해서 남자라면 다 좋은 것도 아니었고, 태 실장과의 키스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라 불편할 테지만 못 할 건 없었다. 건주의 대답에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태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운동을 갈 생각인데 함께 가겠어? 내가 다니는 클럽에는 내 사촌여동생도 자주 오거든.”
첫 공식 나들이를 하자는 뜻인 것 같은데 곤란하다. 건주는 곤란한 낯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후에는 경태를 잠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오늘은 좀……. 약속이 있거든요.”
“데이트?”
“아니오. 친구를 좀 만나기로 해서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아, 그리고 말하는 것을 깜박했는데 나와의 계약이 끝날 때까지는 애인을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어. 네 애인이 괜히 초라도 치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괜찮겠나? 정말 마음에 드는 이성이 나타났다면 그땐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건주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태 실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당분간은 애인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이제 사랑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여기야.”
경태는 먼저 와 있었다. 만나기로 한 카페 안에 들어서자 이제나저제나 목을 뺀 채 출입구만 빤히 보고 있던 경태가 번쩍 손을 들었다. 건주는 희미하게 웃으며 경태를 향해 다가갔다.
“일찍 왔네.”
“어. 오늘은 차가 씽씽 빠지더라고. 뭐 마셔야지? 나도 아직 안 시켰어.”
“커피.”
“여기 커피 두 잔 주세요.”
경태가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있을 때, 건주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집 열쇠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 생기를 잃는다면 어머니 말씀이 생각 나 그냥 비워두기가 좀 그랬는데, 마침 경태가 전세계약 문제가 잘못 돼서 새 집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몇 달 살 집을 구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잘 되었다 싶어서 경태에게 집을 빌려주기로 했다.
“여기 열쇠. 가구 갚은 큰 짐은 어떡하려고? 우리 집에 창고가 있으면 거기 두면 되는데 없어서 곤란하지?”
“이삿짐센터에 맡기면 돼. 길거리에 나앉나 싶었는데 네 덕에 살았다. 희영이도 몹시 고마워하고 있어.”
희영씨는 경태의 부인이다. 3년 전, 인라인 동호회에서 만난 2살 연상의 희영씨와 불같은 사랑에 빠졌던 경태는 작년에 취직을 하자마자 바로 결혼을 해버렸다. 수철이도 내년에는 결혼을 할 것 같고. 그럼 나 혼자 남는 건가? 잠시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그런 마음을 지워버리고 경태를 향해 애써 웃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술이나 한 잔 제대로 사.”
“그거야 당연하지. 그보다 태 실장이라고 했나? 그 사람은 어때? 잘 지낼 수 있겠어?”
“응.”
건주는 커피를 마시며 짧게 대답했다. 잘못했다. 냉커피를 시킬 걸. 3월이라곤 해도 아직 추워서 난방을 세게 튼 건지 카페 안이 더웠다.
“그 새끼 때문에 별 짓을 다 한다. 애인 계약이라니 나 원 참. 그 새끼, 그냥 두고 볼 거야? 어딨는지 몰랐다면 모를까 알면서도 가만히는 못 있겠다. 속에서 천불이 나서 원!!”
속에서 열불이 나는지 급하게 커피를 마셨던 경태가 컥, 하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썼다. 뜨거운 커피를 시킨 것을 잊어버리고 벌컥 마셨다가 입안을 덴 모양이었다.
“가만히 안 있으면?”
“돈이라도 도로 받아내야지! 아니면 약혼했다던 아가씨한테 녀석의 정체에 대해 폭로라도 하든가! 아니면 아가씨 아버지한테라도! 네가 못하겠으면 우리가 대신 해줄 수도 있어. 수철이 놈도 좋다고 따라나설 거다.”
제 일처럼 흥분하고 있는 경태를 보며 건주는 가만히 웃었다. 생각 안 해본 건 아니다. 며칠 동안 머리 터지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삼류 신파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복수라도 할까. 아니면 제발 돌아오라고 애원이라도 할까. 그도 아니면 재효의 회사 앞에 찾아가 녀석을 실컷 두들겨 패기라도 할까.
그럼 속이 풀릴까?
아직 잘 모르겠다. 이대로 재효에 대해선 싹 잊어버리는 편이 좋을지, 아니면 경태와 수철이 말대로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하는 편이 좋을지…….
원래 건주는 우유부단하다고 해야 할지, 신중하다고 해야 할지, 큰 일을 결정해야 할 때 아주 오래도록 생각하는 편이었다. 옆에서 보면 답답할 정도로 말이다. 반면에 한 번 결정한 일에 있어선 망설임이 없었다. 사랑도 그랬다. 처음에는 재효를 경계했지만 한 번 마음을 주자고 결정한 후에는 다 줬다. 간도 쓸개도 다 빼서. 처음에 경계했던 사탕발림 같은 달콤한 말에 결국 마음을 빼앗겨 바보 멍텅구리가 되고 말았지만.
…… 하지만 외로웠다. 재효를 만날 즈음에 경태와 수철이 모두에게 애인이 생긴데다 뒤늦게 자신의 성향을 깨닫고 홀로 마음앓이를 하느라 무척 외롭고, 괴로웠었다. 말벗이나 찾으려고 가끔 갔던 바bar에서 재효를 만났을 땐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던 때였다. 무척 위로가 필요하던 시기였는데, 재효는 그런 건주의 마음을 잘 달래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말들이 거짓말이었지만. 어쩌면 가장 화가 나는 건 거짓으로 자신을 기만했다는 점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생각해?! 정말 이대로 있을 거야?! 녀석이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상류 계급으로 진출하는 걸 두 눈 뻔히 뜨고 볼래? 고속 엘리베이터 탈 수 있는 자금을 댄 사람이 누군데! 댄 것도 아니지. 그 새끼가 훔쳐간 거지.”
경태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혀끝이 씁쓸해진다. 건주는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말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 재효를 찾기 전에는 찾으면 모든 게 다 시원스레 해결 될 것 같았는데, 막상 찾고 나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나도 갈피를 못 잡겠다. 차라리 다 털어버리고 재효에 대해선 말끔히 잊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절대 안 돼! 네가 그 새끼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넌 우리가 모르고 있는 줄 알겠지만, 네가 죽도록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 그놈한테 다 갖다 바친 거 알고 있었어. 네가 힘들게 번 돈으로 그 새끼가 술 처먹고, 여자 꼬시는데 썼다고 생각하면 확 돌아버릴 것 같거든! 그리고 그 새끼가 가져간 돈이 어떤 돈이냐?! 너네 부모님 목숨 값 아냐! 난 그 돈이라도 무조건 돌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혹시 옆 테이블의 사람들이 들을까 한껏 낮추긴 했지만 경태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 건주는 당황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그것까지 알고 있는 줄은 몰랐다. 재효가 어머니 병원비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어서 죽도록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통장에 돈이 있었지만, 보험금에 손대긴 싫었던 것이다. 술집에서 엿들은 말로 유추해 보자면 어머니 병도 거짓말인 것 같지만.
“아직 결정된 건 없어. 생각 중이야.”
“그놈의 생각. 신중한 건 좋은데 가끔 답답해.”
눈매를 일그러뜨리고 가슴을 퍽퍽 치고 있는 경태에게 전화가 왔다. 표정이 일시에 밝아지는 것을 보니 희영씨인가 보았다.
“지금 오래?”
“어. 가봐야겠다. 열쇠 고맙다. 다음에 희영이랑 같이 술 한 번 거하게 살게.”
급한 일이라도 생겼는지 경태는 허둥지둥 인사를 한 후 바쁘게 나가버렸다. 카페 창밖으로 뛰어가는 경태를 멀거니 보고 있다가 건주도 일어났다.
땀이 날 정도로 더운 곳에 있다 나온 탓인지 바깥 날씨가 더 차게 느껴져서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건주는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희영씨의 전화 때문에 생각보다 약속이 훨씬 빨리 끝나버려서 시간이 많이 남았다.
‘태 실장님한테 전화를 해볼까?’
돈을 받았으니 돈값은 해야 하니까. 잠시 고민했지만 곧 관두기로 마음먹었다. 태 실장이 아직 운동을 하고 있다는 보장도 없고, 오늘 클럽에 사촌여동생이 나왔다는 보장도 없었다. 계약기간은 6개월.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 서둘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추워서 버스정류장까지 갈 마음이 들지 않아 택시를 잡아타고 태 실장의 아파트로 돌아온 건주의 얼굴에 난감함이 서렸다. 열쇠가…… 없다. 건주는 끙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