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3)

***

귀마개를 했는데도 아직도 귀가 멍멍하다. 건주는 손으로 양쪽 귀를 문질렀다. 클레이 사격이라는 거 생각보다 재미있다. 30발 중에 맞춘 건 고작 3발밖에 되지 않았지만, 탄약이 접시에 명중해서 깨질 때마다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동생 놈이 온다는군.”

전화를 받느라 뒤늦게 레스토랑에 들어온 태 실장이 건주의 맞은편으로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동생이요?”

“그래. 바로 밑의 동생. 어디냐고 물어서 말해주었더니 근처라고 바로 온다는군.”

“전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 동생이죠? 몇 살입니까?”

태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물다섯. 나와는 나이 차이가 좀 나는 편이야. 유난히 나를 따르는 놈이라 좀 심하게 대할지도 몰라.”

“네. 각오하고 있을게요.”

“흥! 무슨 각오!”

근처라고 했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태 실장의 동생은 정말 금방 왔다. 뒤를 돌아보니 태 실장과 많이 닮은 남자가 삐딱하게 서 있었다. 그는 건주를 험악하게 노려보더니 거칠게 의자를 빼 털썩 앉았다.

“어디에 있었던 거야?”

“바로 근처라고 했잖아. 그것보다 이 새끼야? 형 애인이라는 놈이!”

“태경환! 말조심해! 새끼가 뭐야?! 나와 만나고 있는 사람이고, 일단 너보다 윗사람이야.”

태 실장이 건주를 노려보고 있는 동생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맞은 부위를 감싼 태경환이 원망스럽게 건주를 쏘아보았다. 피부를 헤집는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에 건주는 그저 웃기만 했다.

“반갑…… 습니다. 저는 박건주라고…….”

“누가 너 같은 새끼 인사 받고 싶대…… 요.”

건주가 내민 손을 사납게 쳐내며 앙칼지게 외치던 태경환이 슬쩍 형의 눈치를 살피더니 어색하게 ‘요’를 붙였다. 그러면서 입매를 실룩거렸다. 형인 태 실장을 몹시 좋아하면서도 무서워하나 보았다.

“인사 받을 것도 아니면서 뭐 하러 왔어?”

“생일선물주려고 왔다! 저녁때 집으로 오라고 했는데 형이 싫다고 했다면서?”

생일? 건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늘이 생일이었어요?”

분명히 태 실장이 적어준 종이에 있던 생일은 오늘이 아니었다. 의아한 건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경환이 건주를 홱 쳐다보았다.

“뭐야?! 애인이라면서 생일도 몰랐어! …… 요.”

“넌 요만 붙이면 다 존대냐? 건주에게 뭐라고 할 것 없어. 그에게 알려준 건 양력 생일이니까.”

“그게 무슨?”

“집에선 보통 음력으로 생일을 따지거든. 양력으로 따지면 좀 더 있어야 하지만, 음력으로 따지면 오늘이 내 생일이지.”

그렇게 하는 집도 있다곤 들었지만. 건주는 아랫입술을 살며시 물었다 놓았다.

“말씀을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당연히 종이에 적어준 생일만 보고 그 날 애인으로써 뭘 해주면 좋을까. 어떤 걸 해주어야 가족들이 믿을까, 하는 생각만 했었다.

“이 나이에 생일이라고 유난 떨 것도 못 되고. 어쨌든 지금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나.”

“그래도…….”

“생일에 함께 있는 게 뭐가 중요해? 뭐니 뭐니 해도 생일에는 선물을 받아야 제 맛이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태경환이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선물을 턱 내려놓았다. 그리곤 어서 풀어보라는 듯 눈으로 재촉을 해댔다. 어린 동생의 재촉에 피식 웃음을 흘린 태 실장이 선물 포장을 풀었다. 슬쩍 보니 시계다. 건주가 알고 있는 고급 시계 브랜드라고 해봤자 롤렉스뿐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얼핏 보아도 값이 꽤 나가 보이는 시계였다.

“블랑팡이군. 분명히 아버지한테 네 카드 정지 시키라고 말씀드렸는데 무슨 돈으로 샀어?”

“다시는 사고 안친다고 싹싹 빌고, 다음 학기에는 절대 낙제 당하는 과목 없게 하겠다고 애원해서 정지 풀었지. 고맙지? 존경하는 형님의 선물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야. 애인이라면서 형님의 생일도 제대로 모르는 누구랑은 다르거든.”

당당하게 가슴을 쑥 내민 태경환이 건주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시계가 든 선물 케이스를 테이블 한쪽으로 치우며 태 실장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면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지금 자신은 태 실장과 열렬히 사랑하는 애인 역을 하고 있으니까.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는데 막 피아노 연주를 마친 남자가 연인으로 보이는 여자에게로 다가가며 웃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연인의 연주에 무척 감동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피아노라……. 어머니 생전에 생신 선물겸으로 자주 쳐드렸었지. 피아노라도 칠까? 쏘아보는 시선이 하도 따끔거려서 이대로는 못 있겠다.

“선물은 양력 생일에 사드릴게요.”

저런 고급 시계는 못 사겠지만. 의자에서 일어나는 건주를 향해 태 실장이 궁금한 시선을 건네 왔다. 건주는 쑥스럽게 목덜미를 긁으며 피아노로 향했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손을 푸는데 참 낯선 기분이 든다. 대학 입학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일하던 피아노 학원에 가서 참 자주 쳤었는데. 거의 십 년만인가? 손이 굳어서 제대로 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건주는 딱딱하게 굳은 손을 주물주물한 후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예전에 어머니가 아주 좋아하셨던 팝송을 치기 시작했다. 레이 찰스의 ‘Georgia oh my mind’였다.

“The whole day through Just an old sweet song keeps Georgia on my mind I said Georgia-Georgia A song love you comes as sweet and clear as moon light through the pines.”

어머니가 건주가 치는 ‘Georgia oh my mind’를 유난히도 좋아해서 신물이 나도록 쳤던 보람이 있는지, 거의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추억에 젖어 노래까지 부른 건주는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 허둥지둥 테이블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결단코 체질이 아니었다.

“연주 실력이 좋은데?”

태 실장이 감탄하며 말했다.

“흥! 좋기는. 그 정도는 나도 칠 수 있어. …… 아, 전화 왔다. 나 전화 좀.”

태경환이 밖으로 나가자 건주는 멋쩍게 웃었다.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 강사를 하셨거든요. 어릴 때부터 드나들며 배우다 보니 그저 조금 칠 수 있는 수준이 된 거죠.”

“그저 조금은 아니던데. 그리고 노래도 아주 수준급이었어.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주 감미…… 롭더군. 그런 목소리를 감미롭다고 하는 것이 맞나?”

감미……. 그 정도는 아닌데 민망하다. 건주가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괜스레 눈동자만 굴렸다. 칭찬받는 거 정말 어색하다. 더구나 자신보다 몇 배는 더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줄 것 같은 태 실장이 하는 칭찬이라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때 때맞춰 음식이 나왔다.

“뭐야? 왜 2인분이야?”

통화를 끝내고 들어온 태경환이 툴툴거렸다.

“2인분만 주문했으니까. 줄 거 줬으면 이제 그만 가라. 괜히 형님 데이트 방해 할 생각하지 말고.”

섭섭한 표정으로 태 실장을 쳐다보던 태경환이 삐친 아이처럼 불퉁 돌아섰다. 쿵쿵. 일부러 요란하게 발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태경환을 보다 태 실장에게 넌지시 말해보았다.

“화 난 것 같은데요. 괜찮을까요?”

“괜찮아. 어서 식사 하지.”

그러나 괜찮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아파트로 돌아와 보니 태경환이 문 앞에 보란 듯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태경환 너!”

“나 당분간 여기서 살 거야. 어머니 허락도 받았어.”

태경환이 당황한 채 서 있는 건주를 보며 한 쪽 입 꼬리만 틀어 올려 씩 웃었다.

“아. 미안. 바깥 욕실은 경환이 놈이 쓰고 있어서.”

욕실 문을 잠그지 않는 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혼자 살다 보니 굳이 욕실 문을 잠글 필요가 없었고, 재효가 함께 살 때도 굳이 문을 꼭꼭 걸어 잠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태 실장의 아파트에 들어온 이후로도 매번 생각만 ‘욕실 문 잠그고 씻어야지.’해놓고 막상 욕실에 들어가면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는 거다.

‘문…… 잠갔어야 했는데…….’

비누가 바닥에 떨어져서 주우려고 허리를 숙인 순간, 하필이면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엉덩이와 고환, 페니스까지 완전히 태 실장의 눈앞에 훤히 노출되는 사고가 발생해 건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신체 중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다 드러내놓고 있는 상황이니 좀 많이 민망했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일을 한 번 겪었지만, 경험이 있다고 해서 나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훨씬 많이 민망하다.

“괘, 괜찮습니다.”

3초가량 얼어있던 건주가 애써 태연하게 허리를 펴며 태 실장이 세면대를 쓸 수 있도록 옆으로 몇 걸음 비켜주었다. 그리곤 서둘러 머리를 감고 몸을 대충 닦은 후 욕실을 나왔다. 등 뒤로 문이 탁 닫히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이! 아침 처먹어…… 요.”

드레스 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태경환이 침실 문을 벌컥 열더니 사납게 외쳤다. 그러다 끝에 ‘요’를 붙이는 것이 이상해 돌아보니 태 실장이 욕실 문설주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태경환이 인상을 쓰고 있는 제 형을 향해 헤헤 웃었다.

“형도 식사해.”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요’붙였잖아. 빨리 나와서 아침이나 먹어.”

무조건 여기서 살 거다, 하고 고집을 부리는 동생을 향해 태 실장은 ‘함께 살 거면 집세를 내라. 돈으론 안 받는다. 네가 집안일을 해라.’라고 말했다. 분명 제 손으로 물 한 컵 안 떠다먹었을 귀한 도련님으로 자랐을 테니 절대 못한다고 드러누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태경환은 오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알았어! 그깟 집안일쯤!’하고 소리쳤다. 본인은 자신만만해 하지만 건주는 사실 걱정이 컸다. 그리고 그 걱정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조금 탔어. 그냥 먹어. 이 몸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요리니까!”

건주는 ‘조금’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 새까만 식빵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냥 토스트기를 누르기만 하면 되는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태울 수 있을까. 신기할 지경이었다. 건주 자신도 요리는 별로지만 태경환은 정말 구제불능에 가까웠다.

“잘 먹을게요.”

그래도 본인은 나름 고군분투한 흔적이 보여서 그나마 나은 계란 후라이를 입안에 꾸역꾸역 넣었다. 그러다 하마터면 도로 뱉어낼 뻔 했다. 소금밭이다. 소금밭. 건주와 마찬가지로 식빵은 도저히 먹을 엄두가 안 나는지 계란 후라이를 포크로 잘라 입안에 넣은 태 실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소금 소태군.”

“짜? 으엑! 이상하네. 아줌마가 전화 걸어서 시키는 대로 한 건데…….”

동생의 말에 한숨을 지으면서도 태 실장은 계란 후라이를 들어 입안에 넣고 몇 번 씹은 후 삼켰다. 그 후에 물 두 컵을 마시긴 했지만. 건주는 그래도 입안이 짠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태 실장을 물끄러미 보았다. 소태라고 구박을 하면서도 끝까지 먹는 그의 태도가 신기했던 것이다.

“다 안 먹어도 되는데.”

“영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고, 토스트는 빵점이야. 저건 도저히 먹어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버려. 그리고 내일부터는 굽지 말고 그냥 그대로 내놔. 아까운 음식 버리는 것도 죄받을 짓이니까.”

“응.”

태경환이 약간 시무룩한 표정으로 새까맣게 탄 식빵들을 챙긴 후 휴지통에 가져다 버렸다. ‘이상하네. 설명서에 나온 대로 했는데.’하고 중얼거리면서.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는 태경환을 보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자신만 보면 못마땅해서 도끼눈을 뜨긴 하지만 건주는 태경환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꼭 심술보가 가득한 막내 동생을 보는 것 같았던 것이다.

“무척 짜던데 계란후라이는 왜 그냥 드신 겁니까?”

“노력이 가상해서. 토스트도 어지간하면 그냥 먹어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군. 그러는 자네는 왜 그냥 먹었나?”

“저도 노력이 가상해서요.”

무슨 일이든 노력하는 사람은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건주의 생각이었고,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왔다. 건주의 어머니는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노력해서 얻은 일에는 무한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분이셨다. 어머니 생각을 하며 희미하게 웃고 있는 건주를 멀거니 보던 태 실장이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일어섰다.

“그만 일어나자.”

출근할 시간이었다. 계란후라이 하나와 우유 한 잔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끝낸 후 건주는 식탁에서 일어섰다.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었던 양복 상의를 입고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으며 간지럽지도 않은 이마를 슬슬 문질렀다.

“안 나가세요?”

대체로 건주보다 일찍 출근했던 오늘 태 실장은 아직 소파에 느긋하게 앉은 채였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오늘은 사무실이 아니라 현장에 먼저 들렀다 갈 거라 조금 여유가 있어.”

“그럼 저 먼저…… 나갈게요.”

건주는 여전히 이마를 문지르며 ‘덤빌 테면 덤벼!’란 포즈로 이쪽을 보고 있는 태경환을 힐끔 본 후 이번에는 태 실장도 보았다. 그냥 나가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뭐 트집 잡을 거 없나, 저렇게 매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다, 다녀올게요.”

태경환이 눈을 벌겋게 뜬 채 지켜보고 있어서 그냥 휑 나가버릴 수 없어 인사를 하긴 했는데, 너무 어색하다. 거의 십 년 만에 해보는 아침인사였다. 어색하다. 어색해. 차마 두 사람의 표정을 살필 용기가 없어서 후다닥 나온 후 엘리베이터에 재빨리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거울을 보니 귓불까지 벌겋게 변해 있었다.

‘태 실장님 동생은 언제까지 있을 거지.’

난감하다. 난감해. 애인인 척 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게 느껴졌다. 사람들을 속인다는 것이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 실장님! 뭘 그렇게 보세요!”

그깟 물건 좀 봤다고 부하 직원인 나경수가 지퍼를 급하게 올리며 수선을 피웠다. 누가 제 물건을 똑 떼서 먹기라도 한다 그랬나. 민환은 혀를 차며 지퍼를 올렸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 거 좀 봤다고 너무 수선피우는 거 아닌가? 징그럽게 생겼던데.”

“사내놈 물건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 예쁠 건 또 뭐고 징그러울 건 또 뭡니까? 하여간 기분 이상하니까 그런 눈으로 제 국보 좀 보지 마세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예쁜 놈이 있더란 말이지. 민환은 혼잣말을 하며 손을 씻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우연히 두어 번 보게 된 박건주의 중심은 나름 예뻤다. 죽는 날까지 사내놈 물건을 보고 ‘예쁘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색깔이 검붉지 않고 연한 살색을 띠고 있어서 그런가. 거기다 엉덩이도 제법 토실토실했었지. 노즐을 잠그며 민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를 안 만나서 그런가. 참 별 생각을 다 한다. 사내놈 물건이 예쁘고, 엉덩이가 통통하다는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고. 그렇다고 여자를 만날 기분은 아니었다.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지만, 차혜련의 일로 여자란 존재에게 질렸다고 할까, 싫증이 났다고 할까, 그런 비슷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박건주와 보내는 시간들이 재미있었다. 가식적이지 않고, 내숭 떨 술 모르고. 어떤 때는 가시를 잔뜩 세워 주변을 경계하는 고슴도치 같고, 또 어떨 때는 배를 발라당 드러낸 강아지 같았다. 대체로 무뚝뚝하고 나무 인형처럼 딱딱한데 한 번씩 보여주는 표정이 정말 놀랍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볼 수 없었던 타입이라 신기한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박건주라는 존재가 그 누구보다 흥미로웠다.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하여간 정말 의외의 구석이 많은 남자야.’

그런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줄이야. 정말 반할 만큼 멋진 목소리였다. 노래를 부를 때의 얼굴은 또 어땠는지. 너무 부드럽고 달콤해 보여서 오싹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번 일에 다른 사내를 선택했다면 징그러워서 민환쪽에서 먼저 포기를 했을 테지만, 박건주라 다행이었다. 며칠 전 그와 함께 게이 바에 갔다 온 이후에 절실히 느꼈다. 화장실에 갔을 때 노골적으로 유혹해오는 남자를 본 순간 제일 먼저 든 감정이 거부감이었던 것이다. 쳐다보는 것만도 거북한데, 스킨십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박건주에게 가짜 연애 계약을 제의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무슨 일이야?”

“저기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의자에서 일어나는 여자는 차혜련이었다. 이제야 납시셨군. 분명 어머니로부터 얘기를 들었을 텐데 왜 안 오나 의아해 하던 참이었다. 민환은 그녀를 향해 따라오라고 한 후 근처 찻집에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로부터 얘기 들었어요. 당신이 게이라니…….”

“들었다면 알 것 아닌가? 새 애인이 생겼고, 그 애인은 성별이 남자이고, 이미 같이 살고 있어.”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요? 불과 얼마 전까지 나와 섹스를 했던 당신이 게이라고? 말도 안 돼요!”

민환이 싸늘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다른 놈 애를 배놓고 내 애라고 사기를 치는 여자도 있는데 내가 게이가 되었다고 해서 말이 안 될 게 뭐야?”

“당신 아이예요!”

우기면 다 되는 줄 아나. 아니면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내가 멍청이로 보였나? 어차피 즐기기 위해 만나는 거라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 어지간하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민환이 어수룩한 남자는 아니었다. 뒤탈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를 해왔고, 한 번도 여성들에게 희망 같은 걸 품게 한 적이 없었다. 즐기기 위한 상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확실히 인식시킨 후 동의하는 여자들만 만나왔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아이라는 증거를 가져와.”

“어, 어떻게 그런 말을………….”

“누가 봐도 내 아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면 결혼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해주지.”

증거 같은 건 절대로 못 가져올 테지만. 차혜련은 증거라는 말에 하얗게 질려서 새빨갛게 립스틱을 칠한 입술만 까득 깨물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여자가 아니니 자신 다음에는 박건주를 찾아갈 것이 분명했다. 먼저 주의를 주어야겠다.

민환은 찻집 밖으로 나오며 건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 가는데도 안 받는다. 일이 바쁜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 번 더 걸어보았다. 이번에도 안 받는다. 아무래도 일이 바쁜가 보다.

- 네. 박건주씨 핸드폰입니다.

전화를 막 끊기 직전, 수화기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태민환이라고 합니다만, 박건주씨 자리에 안 계신가요?”

- 아………. 전 이경태라고 건주 친구인데…… 저번에 병원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기억이 난다.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던 남자였다. 그런데 그 친구와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나?

“건주는 외근 나갔습니까?”

- 지금 여기 병원입니다. 지금 건주가 전화 받을 상황이 아니라서요.

병원?

병원에 가보기로 한 건 순간의 충동에 가까웠다. 병원에 있다는 말에 전화를 끊는데, 얼마 전 난희를 만나려고 했던 날 하얗게 질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모습이 생각난 것이다. 이번에도 그렇겠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나며 발걸음이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병원 앞에 도착해서야 굳이 올 것 까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왕 왔으니 한 번 들러나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박건주와 그의 친구,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는 수술실 앞에 있었다. 괜찮다고 하더니 전의 그 친구에게 문제라도 생긴 건가?

민환이 다가가자 의자에 앉아 힘없이 고개를 축 늘이고 있던 건주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 순간 민환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한손으로 가슴께를 눌렀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절망으로 새까맣게 변한 눈동자를 보는데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이 느낌은?

“………….”

민환은 조심스럽게 한 걸음 더 내딛으며 밤하늘처럼 어둑하게 내려앉은 박건주의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쑥스러움에 붉게 달아올라 있던 얼굴에 가득 찬 것은 오로지 절망뿐이었다. 꼭 세상 전부를 다 잃은 듯한 얼굴. 심장이라도 잃은 듯한 처연한 눈빛에 괜히 가슴이 쓰라렸다. 사내놈이 저렇게 처연한 눈빛이라니……. 민환은 한숨을 내쉬며 건주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건주가 민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수철이가…… 계단에서 굴렀대요. 그냥 뒤에서 말을 건 것뿐인데 놀라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바닥에 머리를 세게 찧어서 지금 수술을…….”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던 여자가 흑, 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경태라고 했던 남자가 다가가 괜찮을 거라며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건주 역시 우는 여자를 흐릿한 눈으로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는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인데 건주는 울지 않았다.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주먹을 꾹 쥐고 복도 바닥을 하염없이 노려보았다. 그건 참는 것에 익숙한 사람의 행동이었다. 참고 또 참고, 한계까지 참아내는……. 그렇다면 더 이상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민환은 흠, 하고 신음을 삼켰다.

수술실 램프가 꺼진 건 그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고 피곤한 얼굴의 의사가 나오자 민환을 제외한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의사에게로 다가갔다.

“어, 어떻습니까?”

“최선은 다했습니다만…… 경과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자가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를 우울하게 쳐다보던 건주도 비틀거려서 민환이 황급히 잡아주었다.

“괜찮나?”

“네. 괜찮…… 다녀올 곳이…… 다녀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선 어딜 가겠다는 건지. 민환이 혀를 쯧 찼다.

“그 얼굴로 어딜 간다는 거야?”

“꼭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잡고 있는 민환의 팔을 확 밀쳐낸 후 건주는 뭔가가 떠미는 것처럼 달려 나갔다.

“건주야?! 어디가? 야! 박건주!”

친구가 부르는데도 건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네. 강재효입니다.

전에 재효가 얘기를 하자며 데려온 카페에서 회사로 전화를 걸어 무조건 강재효를 찾았다. 부서를 몰라서 걱정이었는데, 다음 대 사장이 될 지도 모르는 인물이라 그런지 곧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재효의 회사로 달려올 때까지만 해도 가슴이 쿵쾅쿵쾅 제멋대로 날뛰었는데,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히려 차분해졌다. 건주는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야. 저번의 그 카페에 있으니까 좀 만나.”

건주의 목소리를 들은 재효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 왜 이래? 지난번에 얘기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연락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라고 했잖아! 지금 못 나가. 다음에 연락할 테니까 돌아가서 기다려.

“안 나오면 내가 회사로 직접 갈 거야. 나와.”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은 후 전의 그 자리에 앉아 냉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는 곧 나왔지만 도저히 목구멍 안으로 뭔가를 넘길 기분이 아니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점심을 먹으려고 사무실을 나설 무렵 인아씨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청천벽력이었다. 그저 뒤에서 말을 걸었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서 허둥거리다 발을 헛디뎌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니. 머리를 심하게 부딪쳐 수술실로 들어갔다는 말에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병원까지 갔는지도 모르겠다. 선배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던 것 같기도 하고, 깐깐한 과장이 네가 먼저 쓰러지겠다고 한 것 같기도 한데 실제인지 착각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꿈결 같이 멍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수철이 수술을 했고,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우려했던 최악의 결과가 현실로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에 손끝이 얼어붙을 만큼 두려웠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억지로 호흡을 하고 있을 때였다. 딸랑, 문소리가 난다 싶더니 곧 성가셔 죽겠다는 표정으로 재효가 털썩 건주의 앞에 앉았다.

“뭐야? 뭐 때문에 오라가라야?”

“수철이가…… 방금 수술을 했어.”

담배를 꺼내던 재효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러나 재효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담배를 입에 물곤 불을 붙였다.

“그래서 뭐? 죽고 못 살던 친구가 수술을 했으니 위로라도 해달라고?”

“계단에서 헛디뎌서 굴러 떨어지며 머리를 부딪쳤어.”

“그러니까 안 나오면 사무실로 찾아오겠다는 협박까지 해대서 나왔더니 왜 수철인지 뭔지 하는 네 친구 얘기를 하고 있는 거냐고!”

건주는 짜증을 부리고 있는 재효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리 뜯어보고 또 뜯어보아도 그 얼굴에선 한 톨의 죄책감도 찾을 수 없었다.

“폭행을 당한 후유증 때문이야. 누구라도 갑자기 그런 일을 당하면 두려움 때문에 후유증이 생겨. 전에 내가 그랬듯이.”

연기를 후우 내뿜었던 재효가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꾹꾹 꽁초를 눌러 끄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뭐? 도대체 그 얘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뭔데? 전처럼 다정하게 위로라도 해줘?”

“…….”

“후유증 좋아하네. 그 새끼가 멍청하게 미끄러져서 다친 걸 나보고 어쩌라고. 낄 데 안 낄 데 분간도 못하고 겁 없이 설쳐대더니 병신 같이 혼자 미끄러지기는.”

재효의 태도는 어이가 없을 만큼 당당했다. 조금도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적어도…… 적어도…… 조금이라도 미안한 기색은 보일 줄 알았다.”

사람이라면, 인간이라면 아주 조금이라도 미안해해야 한다. 그러나 재효는 여지없이 그 기대를 짓밟았다.

“내가 왜?”

다음 순간 건주는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왜라고.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전 재산을 가로챈 것도 모조라, 수철일 죽음 직전까지 내몰고서도 왜 미안해야 하냐고. 자신이 겪었던 일은 저런 남자를 사랑했던 대가라고 치더라도 수철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수철이 그렇게 된 건 전부 강재효 때문이었다. 억지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의 일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사람을 시켜 폭행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수철이 계단에서 떨어질 일도 없었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단순히 뒤에서 말을 건 것만으로 놀라 균형을 못 잡을 정도로 허둥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단순한 추락 사고였다면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거다. 수철의 사고는 재효가 직접 계단 끝에서 등을 떠다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폭행은 다른 자들이 했다 하더라도 사주는 재효가 했으니까.

“맞아. 네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건주의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재효가 턱을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럼 그렇지, 하는 그런 태도였다. 눈동자에는 건주를 깔보는 빛이 가득했다.

재효에게 주었던 것들을 다 받아내겠다고 했지만 막상 방법은 몰랐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어디까지 하면 좋을지 몰랐는데 이제는 아니다. 방법을 정했다. 일부러 의도한 것도 아닌데 태 실장과 인연이 닿은 것은 지금 생각하면 천운이었다.

그래. 맞다. 재효가 미안해 할 일은 조금도 없다. 그는 그의 욕망을 위해,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해왔을 뿐이니까.

“이제 두 번 다시 찾아와서 귀찮게 하지 마. 이제 나는 너 같은 거와는 신분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거니까. 귀찮게 굴거나 내 일을 방해하려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그 결혼 못 할 거다.”

“뭐? 아아. 내 약혼녀를 찾아가서 네가 내 애인이었다고 고자질이라도 하려고? 과연 네 말을 믿을까?”

물론 믿지 않을 거다. 과거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정난희도 강재효라는 사내에게 푹 빠져 있으니까. 건주는 담담한 눈으로 비틀리게 웃는 재효를 응시했다.

“믿게 될 거야. 나는 안 믿어도 그녀가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내가 알고 있으니까.”

“무슨 의미야?! 네가 누구를 알고 있다는 건데?! 너 내가 누구랑 약혼했는지 알고나 있어?!”

정말인가? 아니면 단순한 위협인가? 반신반의하면서 재효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건주는 얼음이 다 녹아 거의 맹물처럼 된 커피를 조금 마셨다.

“네 눈에는 내가 내키는 대로 이용하고, 내키는 대로 짓밟아도 되는 하찮은 지렁이 같은 존재로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내게도 건드려선 안 되는 소중한 존재는 있어.”

“무슨 헛소리야! 누굴 알고 있냐니까?!”

“내게도 자존심은 있고, 분노할 줄도 알아. 내가 널 잘못 본 것처럼 나도 날 잘못 봤다.”

“헛소리하지 말고 알고 있는 거나 말해? 단순한 허풍이야? 아니면 정말이야?”

건주는 계산서를 들고 조용히 일어섰다.

“고맙다. 강재효.”

“뭐?”

너라는 존재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지게 해줘서. 네가 지금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알게 해줘서 고맙다. 건주의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재효를 뒤로 한 채 건주는 카페를 나왔다. 막 택시를 잡은 순간 카페 안에서 재효가 뛰쳐나왔다.

“박건주! 너 거기 안서?!”

힐끔. 뒤를 돌아보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재효가 당장 멈춰서라고 악을 써대고 있었다. 건주는 그런 재효를 향해 옅게 웃은 후 택시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태 실장 아파트의 호수가 보이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건주는 현관 앞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일어나서 열쇠로 문을 따기만 하면 되는데 더 이상은 조금도 움직일 기력이 남아있지 않다. 조금만, 이렇게 앉아 아주 조금만 쉬었다가 들어가자. 완전히 지쳐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태 실장 형제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으니까.

복도의 창문을 꼭꼭 닫아두었는데도 어디선가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봄바람이라고 하기엔 차갑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뉴스에서 눈이 온다고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춥다.’

거의 입을 일도 없으니 짐만 될 것 같아 겨울 코트를 두고 온 탓에 양복 재킷만 입은 차림이라 그런가 몹시 추웠다. 건주는 저도 모르게 몸을 약간 웅크렸다. 아니다. 추운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마음이 한겨울 빙판을 끌어안은 것처럼 싸늘했고, 추웠다.

‘수철아…….’

별 거 아니란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 언제나처럼 씩 웃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수철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눈이 짓무를 정도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인아씨를 차마 볼 면목이 없어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오면서 건주는 차마 울 수도 없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너무 미안해서…….

건주가 이를 악물었다. 그만 들어…… 가자.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어이, 거기서 뭐해?”

언제 온 걸까? 고개를 들어보니 태경환이 옆구리에 상자를 낀 채 삐딱한 시선으로 건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오세요?”

“학교 갔다가 마트에서 장보고 오는 길이야. 빨리 문이나 열어.”

다른 쪽 옆구리에는 헬맷을 낀 태경환이 현관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건주는 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실내가 어두컴컴한 것을 보니 태 실장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보았다. 사람이 없어서일까. 보일러를 틀어두었는데도 싸늘한 실내에 웬일인지 한숨이 난다. 건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침실로 들어가 옷만 갈아입고 나왔다.

태경환은 식탁에 장을 봐 온 물건을 하나씩 꺼내두고 있었다. 한우. 파. 무. 버섯. 고사리 등등. 그리고 맥주 열 캔.

“내일 아침은 육개장이야.”

“끊일 줄은 아세요?”

토스트로 제대로 못하면서 육개장이라니, 벌써부터 걱정이 든다.

“아줌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면 돼.”

스테이크용이라고 적힌 한우 포장지를 보며 건주는 한숨을 삼켰다. 스테이크라……. 태 실장이 스테이크를 했던 날도 오늘처럼 피곤하고 몹시 지친 날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요리가 지친 몸에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태 실장님이 해준 스테이크 참 맛있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태경환이 들었나 보다. 냉장고에 사온 식품들을 대충 집어넣고 있던 태경환이 도끼눈을 뜨고 건주를 휙 쳐다보았다.

“형이 해준 스테이크? 먹어봤어?!”

거의 싸움을 거는 듯 사나운 말투였다.

“…… 네.”

한 대 칠 듯한 기세에 순간 움찔하며 대답하자 태경환의 눈매가 아예 세모꼴로 변했다.

“나도 아직 한 번도 못 먹어봤는데! 난희한테는 파스타 해줬다고 하더니! 맛있었어? 당연히 맛있었겠지? 둘째 형이 한 건데 당연히 환상적인 맛이었을 거야. 그치?!”

“…… 네.”

아주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듯 주먹으로 식탁을 쿵쿵 내리치던 태경환이 얼떨떨하게 서 있는 건주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난 너 절대 인정 못해! 완벽한 민환 형한테는 형처럼 완벽한 여자가 어울린다고! 지금까지 형이 만났던 여자들도 다 별로였지만 넌 더더욱 별로야. 두고 봐. 내가 둘 사이 반드시 갈라놓을 테니까. 아니, 아니지. 완벽한 형님이 게이일 리가 없으니 두 사람이 사귀는 것도 분명 거짓말일 거야. 증거를 잡아야 해. 증거를!”

살짝 맛이 간 사람처럼 중얼중얼. 그러다 목이 타는지 맥주를 따 벌컥벌컥 마신다.

“……….”

“나하고 술 한 잔 해!”

들어가 자려고 몸을 트는 건주를 향해 태경환이 외쳤다. 느닷없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이유가 뻔히 보인다. 술을 잔뜩 먹여서 진실이라도 캐낼 작정인가? 의도가 훤히 보이는 제안이었지만 건주는 두 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술이라도 진탕 먹고 정신없이 뻗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식장에서 양주 두 병을 꺼내 온 태경환이 전투적으로 뚜껑을 땄다. 그리곤 두 개의 잔에 술을 똑같이 따랐다. “마셔!”하는 소리에 건주도 잔을 들고 술을 꿀꺽꿀꺽 마셨다. 독한 양주가 넘어가자 속이 대번에 뜨거워졌다.

술을 한 잔씩 마실 때마다 머릿속이 흐릿해졌다. 취기가 괴로운 마음까지 다 씻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건주는 태경환이 주는 대로 술을 받아마셨다.

어쩌다 재효의 얘기가 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얘기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났다. 양주를 반 병 정도 비웠을 때는 이미 취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상태라 말을 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으니, 기억을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튼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말을 하다 보니 재효에 대한 얘기까지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남의 비극적인 사랑 얘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한 법이라 태경환은 터진 계란노른자처럼 풀린 눈동자를 한 채 열심히 건주의 얘기를 들었다.

“나 같으면 우선 그 년한테 뜯긴 돈 다 받아내고, 결혼 못하게 깽판 놓고, 증거 잡아서 경찰에 확 신고해서 콩밥 먹게 만들 거야! 그 년이 결혼한다는 상류층 아들이 누구야? 내가 웬만한 집은 다 알거든? 말만 해! 내가 가서 ‘네가 결혼하려는 여자는 꽃뱀이다!’하고 말해줄 테니까!”

양주 한 병을 마신 태경환의 발음은 거의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꼬인 상태였다. 얼굴도 딸기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데다 중심을 잘 잡지 못해 몸을 양옆으로 흔들흔들. 영락없이 주정뱅이의 모습이었다. 그건 건주도 마찬가지였다. 너 한 잔, 나 한 잔. 너 두 잔이면 나도 두 잔. 그렇게 공평하게 마셨으니 건주도 양주 한 병을 마셨던 것이다. 건주에겐 치사량에 가까운 양이라 사실 지금 건주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바로 말해 버리면 너무 쉽잖아요. 내가요. 반성하는 모습을 요만큼이라도 보였으면 이런 마음을 먹지도 않았다니까요.”

“맞아! 맞아! 그런 년들은 껍질을 다 벗겨서 소금 통에 확 던져버려야 해. 나아아쁜 녀언!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거거던! 자, 마셔. 마셔.”

태경환이 술병을 들더니 건주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몸이 흔들흔들하니 팔도 따라서 흔들흔들이라 술은 잔 안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부분 바닥으로 흘러버렸다. 그걸 보고 건주는 개그라도 본 것처럼 키득대며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색을 하며 태경환을 불렀다.

“그런데요. 태경환씨.”

“응?”

“너는 왜 나한테 자꾸 반말하세요?”

내가 너보다 네 살이나 많은데.

“반말 듣기 싫냐? 그럼 너도 반말해라. 공평하지?”

공평한가? 공평한 것 같다. 건주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태경환아. 공평한 것 같다.”

바보 형제들처럼 둘이 마주보며 낄낄 웃고 있을 때였다. 덜커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저벅저벅 슬리퍼를 신고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도 났다. 취기로 흐릿한 눈을 들어 보니 태 실장이었다. 그는 거실의 풍경을 보더니 기가 막힌 듯 허, 하는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뭐야? 이 주정뱅이들은?”

“어. 형님이다.”

“어. 실장님이다.”

발딱 일어난 태경환이 쪼르르 달려가 태 실장의 허리에 매달렸다. “형님아.”하고 부르면서 어깨에 머리를 문질문질. 스물다섯 살이나 먹었다면서 하는 짓은 완전 애였다.

“이 새끼. 다신 술 먹지 말라니까! 어서 들어가서 자!”

“안 졸려. 안 졸려. …… 근데 왜 둘이 키스 안 해? 내 친구 중에도 호모 놈들이 있는데, 그놈들은 눈만 마주치면 쪽쪽쪽 하느라 입술이 맨날 부르터있더만! 사실 둘이 안 사귀지? 그치?! 그래서 안 하는 거지? 그 놈들 때문에 나도 알만큼은 알아. 증거 잡아서 엄마한테 말할 거야. 내가 이래 뵈도 특명을 받고 온 놈이라고!”

키스? 건주는 멍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이놈이 어디서 주정이야? 너 내일 일어나면 보…….”

비틀비틀 일어난 건주가 태 실장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태경환을 툭 밀쳐냈다. 그리곤 태 실장의 어깨에 팔을 감고 입술을 갖다 댔다. 키스 하라면 못할 줄 알고?! 술 때문에 이성이 마비되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지도 모른 채, 건주는 목구멍으로 웃으며 태 실장의 입술을 마구 빨았다.

“나도 키스할 줄 알아?! 누가 나보고 키스 못한대!”

당당하게 외친 건주의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정신을 잃기 직전 태경환이 바닥을 구르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키스했다. 키스. 너 보는 눈이 영 젬병인 건 아니야. 우리 형 같이 완벽한 남자를 잡았으니까. 아픈 첫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 형을……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안 돼. 절대 안 돼.”

태경환은 울다가 웃고, 웃다가 화를 냈다. 그런 동생을 향해 한숨을 푹 내쉬는 태 실장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건주의 의식도 완전히 끊겼다.

머리가 아프다. 속도 뒤틀렸다. 건주는 번쩍 눈을 뜨자마자 구르듯이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붙잡고 속을 게워낸 후 기다시피 나오는데 달칵 침실 문이 열렸다.

“이제 깼나?”

“아…… 네. 태 실장님. 으으…….”

다시금 속이 울렁거린다. 꼭 롤러코스트라도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배를 움켜잡고 인상을 찌푸리는 건주를 보며 태 실장이 쯧 혀를 찼다.

“그렇게 퍼마셨으니 속이 안 좋을 만도 하지.”

“죄, 죄송합니다. 그, 그것보다 지금 몇 시……. 추, 출근해야 하는데…….”

“7시야. 아직 여유 있으니 씻고 나와.”

아. 다행이다. 건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도로 욕실로 들어가 몸에 가득한 술 냄새를 씻어냈다. 거실로 나왔는데 얼큰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실장님?”

“살다 보니 남의 술국 끓여주는 날이 다 오는군.”

태 실장은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식탁 위에 콩나물국을 탁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뜨거운 국물이 생각나던 차라 면목 없어 하면서도 슬금슬금 그릇을 들고 국을 마셨다. 시원하고 맛있다. 전에 회사 사람들하고 유명한 콩나물국밥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먹었던 것보다 더 시원한 맛이 났다. 태 실장 손은 마법의 손인가? 건주는 감탄하며 길쭉길쭉 사내답게 잘 생긴 그의 손가락을 힐끔 보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하고요.”

“보나마나 경환이 놈이 먼저 마시자고 했겠지.”

태 실장이 동생이 자고 있을 방문을 노려보았다.

“그렇긴 하지만 저도 어제는 술이 마시고 싶었던 날이었거든요. 그래서 과음을…….”

말을 이어가던 건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붉어졌다. 과음, 이라고 말한 순간 어제의 추태가 생각난 것이다. 군데군데 필름이 끊어져 기억이 안 나는 것도 많았지만, 태 실장이 귀가했던 순간만큼은 또렷하게 떠올랐다. 태경환의 키스 어쩌고 하는 말에 괜히 약이 올라 태 실장에게 다짜고짜 키스를……. 으아. 무슨 짓을 한 거야?! 원래 꼭지가 돌 정도로 술을 마시고 나면 엉뚱한 짓을 하곤 하지만, 키스라니……. 어제는 불가피하게 스킨십을 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태 실장이 많이 불쾌했을 거다. 건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동자만 살그머니 굴려 태 실장의 눈치를 살폈다.

“죄송…… 합니다. 어제 불쾌…… 하셨죠? 술에 취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많이 불쾌하더군.”

아, 역시. 건주는 발개진 귓불을 잡아당겼다.

“죄송………….”

“술 냄새만 가득한 키스는 정말 별로였어. 오늘부터는 술 마신 날은 키스 금지야.”

고개를 들어보니 태 실장은 웃고 있었다. 그래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잘 구분이 안 갔다. 술 마신 날은 키스 금지? 그럼 안 마신 날은?

“……?”

“어제 자네가 쓰러지고 나서 경환이 놈이 나를 붙잡고 주정을 하더군.

 친구 커플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말이야. 말을 들어보니 게이 커플은 시도 때도 없이 스킨십을 하는 모양이야. 

그러고 보니 며칠 전 게이 바bar에 갔을 때, 화장실에서 내가 보는 데도 아랑곳 않고 딥키스를 하는 커플을 보긴 했어.

 그게 게이 커플의 일반적이 모습인가 봐.”

“…… 그게 아니…….”

국물을 마시다 사레가 걸렸다. 그래서 기침을 하느라 태 실장의 엄청난 착각에 반박을 못했다.

“전에 어머니 앞에서 일부러 키스를 해놓고 좀 후회했거든. 작위적인 냄새가 날 정도로 너무 보란 듯이 한 거라 나중에 아차 싶더군. 그래서 경환이 놈 앞에서는 안 그러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내 생각이 틀렸나 봐. 어제 말을 들어보니 우리도 좀 더 적극적으로 애정표현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더군.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작위적으로 말고 자연스럽게."

“………….”

“지금쯤 우리 가족은 반신반의하고 있을 거야. 안 믿을 수도 없고, 믿자니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 구석이 있고.”

“…….”

“경환이 놈만 잘 속여 넘기면 다른 식구들은 그냥 믿게 될 거야. 내가 정말 게이가 되었다고 믿게 되면 이번에는 갈라놓으려고 갖은 애들을 쓰시겠지만. 부디 그때도 잘 견뎌주길 바라네.”

“예. 걱정 마세요.”

“그리고 경환이 놈이 버릇없게 굴더라도 이해하고. 유난히 나를 따르는 놈이라 나에 관한 일에만 유별나게 굴거든. 곱게만 자란 것 같지만 녀석 나름대로는 상처도 있고.”

건주는 건더기만 남은 국그릇을 내려놓고 태 실장을 향해 가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전 태경환씨 귀여운 막내 동생 같아서 싫지 않아요.”

“혀엉. 나 속 아파.”

양반은 못 되겠다. 제 얘길 하는지 어떻게 알고 태경환이 부스스하게 뜬 얼굴로 배를 문지르며 나왔다.

“술국 끓였으니까 와서 좀 마셔.”

“형이 끓였어? 그럼 당장 먹어…… 으으으. 우, 우선 화장실 좀…….”

어제 저만 태 실장이 한 요리를 못 먹었다고 도끼눈을 뜨더니, 술국을 끓였다는 말에 좋아죽는다. 당장 환하게 웃으며 성큼 식탁으로 다가오던 태경환이 돌연 하얗게 질리더니 화장실로 달려갔다. 속에서 광란이라도 일어났나 보았다. “야! 내 것까지 다 먹지 마!…… 요.”하고 말하곤 문을 쾅 닫는 태경환을 향해 웃던 건주가 이내 표정을 바꾸고 다시 긴장된 낯빛으로 태 실장을 보았다.

어제 그의 아파트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던 말이 있는데, 말이 쉽사리 안 나온다. 태 실장 얼굴 한 번 보고 한숨 한 번 쉬고, 또 보고 또 쉬고. 그걸 세 번쯤 반복했을 때 태 실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건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태 실장이 할 말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해보라는 태도로 턱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건주는 우선 숨부터 삼켰다.

“돈은 곧 갚을게요.”

“무슨 돈? 아아…… 내가 해결해준 네 빚 말인가?”

“네.”

“그 말의 의미는 뭐지? 계약을 파기하고 싶다는 뜻?”

태 실장의 인상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건주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니오. 그게 아니라……. 옛 애인에게 돈을 받아내려고 하거든요.”

“자네가?”

정말 뜻밖이라는 듯 태 실장이 눈썹을 휘어 올렸다. 마냥 순둥이처럼 봤는데 돈을 받아내겠다고 하니 놀라운 모양이었다. 건주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네. 꼭 돈을 받아내야 할 상황이 생겼거든요. 돈 받으면 갚아드릴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뭔데?”

“저도 실장님의 애인이라는 신분을 좀 이용해도 괜찮을까요?”

“잘 이해가 안 가는 말인데? 내 애인이라는 걸 이용해서 옛 애인에게 돈을 받아내겠다고?”

“………… 네.”

태 실장의 애인이라는 신분은 재효에게 압박을 줄 것이 분명했다. 태 실장은 정난희의 사촌 오빠이고, 재효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무방하겠지만, 그러자니 마음이 안 좋았다. 어찌 보면 태 실장을 이용하는 건데, 거기에 돈까지 받을 수는 없었다. 가짜 애인 관계를 맺어서 서로 이득을 얻는 것이 있으니 태 실장에 받은 돈을 돌려주어야 옳다. 어차피 그 돈은 재효에게서 도로 다 받아낼 테니까.

“여전히 잘 이해가 안 되는군. 그렇게 복잡하게 할 것 없이 차라리 내게 말하는 게 어때? 그 여자의 소재지를 알고 있다면 내가 힘이 되어줄 수 있는데.”

태 실장에게 말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다. 재효와 자신의 관계를 얘기하면 태 실장은 분명 정난희와 재효를 갈라놓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싫다. 너무 쉽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도 싫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 얘기하면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밝히게 되어서 싫은 건가. 나중에 일로 얽혔을 때 불편할까 봐? 건주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너무 쉬워서 싫어요. 좀 더 괴롭게 만들고 싶거든요. 나중에, 저 혼자 감당 안 하면 그때 도움을 청할게요.”

“아무튼 돈을 받아내기로 했다니 다행이군. 무척 뜻밖이긴 하지만. 돈은 안 갚아도 돼. 그리고 내 애인이라는 걸 이용해서 뭘 할 순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것도 마음껏 이용해.”

“정말 그래도 됩니까? 나중에 실장님이 실망하실 일이 있을 지도 모르고, 방금 한 말에 대해 후회할 지도 모르는데요?”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군.”

두 사람의 대화는 태경환의 등장으로 잠시 끊겼다. 아까의 건주처럼 욕실에서 기어 나온 태경환의 낯빛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눈자위까지 벌겋게 변한 채 태경환은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형. 동생 죽겠다아…….”

“자업자득이야. 숙취 핑계로 학교 빠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전에 한 말 기억하고 있지? 한번만 더 학교 빠지면 오토바이 키 뺏는다.”

단호한 말에 태경환이 뺨을 불퉁 부풀렸다. 드레스 룸에서 양복 상의를 갖고 나온 건주가 현관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벌써 출근해? 아직 좀 이른데?”

“병원에 잠깐 들렀다 가려고요.”

“친구는 곧 깨어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 네.”

신발을 신는데 태 실장이 다가왔다. 그리곤 건주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잘 다녀와. 저녁때 보자고.”

“네? 네. 그, 그럼 다, 다녀올게요.”

다정한 애인 연기 돌입인가? 하긴 다짜고짜 딥키스보다 이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또 다정해 보일 것 같긴 하다. 그걸 다 알면서도 참 쑥스럽다. 건주는 노려보는 태경환의 얼굴을 향해 쑥스럽게 웃어준 후 아파트를 나왔다. 뺨에 하는 키스라……. 유치원을 졸업한 이후로 처음이다. 그래서 그런가. 무척 낯설고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건주는 픽 웃으며 태 실장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긁었다.

드르르. 진동음에 액정을 들여다보니 재효의 번호였다. 건주는 손안에서 드르르 드르르 떨리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재효를 만나고 왔던 날 이후로 일주일째. 재효는 매일 전화를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낯선 번호라 재효인 줄 모르고 받았는데, 재효는 건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대뜸 “나와!”하고 명령하듯 말했다. 장소와 시간을 일방적으로 통보했지만 안 나갔다. 그 뒤로는 전화도 안 받았다. 악담이 가득한 문자를 보내는 것도 모자라 매일 지치지도 않고 전화를 걸어오는 것을 보니 건주가 알고 있다던 정난희와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꽤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건 즉 재효가 정난희와의 결혼에 얼마나 목을 매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이기도 했다.

“안 받으세요?”

진동 소리가 거슬렸는지 옆 자리의 직원이 건주의 핸드폰을 가리키며 물어왔다.

“받아야지.”

건주는 웃으며 일어난 후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 끝으로 가 핸드폰을 열자마자 엄청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박건주. 이 새끼! 너 왜 전화 안 받아!!!

“무슨 일이야? 나 일하던 중이야.”

- 네가 날 바람맞혀?! 당장 나와. 새끼야!

담배 생각이 난다. 건주는 담배를 입에 물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한참 여기저기 뒤적여도 안 나오는 것을 보니 라이터를 사무실 안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하긴. 라이터가 있었어도 담배는 못 피웠겠다. 담배 피우는 장소는 휴게실 한정이니까.

“바빠.”

- 너…… 나와. 좀 만나.

“만날 이유 없어.”

- 넌 없어도 난 있으니까 시간 내! 저녁 8시. 벨라로 나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전화는 일방적으로 뚝 끊겼다. 생각해 보면 재효와의 통화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조금씩 일방적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아마…… 건주가 재효를 확실하게 마음에 담았던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건주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후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에게 보는 눈이 없기도 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재효가 무척 무서운 남자라는 의미도 된다. 완전히 마음을 얻기 전까지 어쩌면 그렇게도 철저히 자신을 감출 수 있었을까.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사무실로 돌아가는데 누군가 등을 툭 쳤다. 돌아보니 철민이었다.

“너도 담배 피러 나왔냐?”

철민의 손에는 담뱃갑과 라이터가 들려있었다.

“응.”

잘 되었다는 듯 철민이 씩 웃었다. 함께 휴게실로 들어간 후 철민의 라이터를 빌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무하지 않냐? 담배를 꼭 휴게실에서만 피워야 한다니! 우리가 죄인도 아닌데!”

건주는 말없이 웃었다. 담배는 백해무익하고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는 물건이 맞았다. 가능하면 건주도 끊고 싶지만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았다. 중독은 참 쉽게도 되더니만.

건주가 담배를 피기 시작한 것은 채 2년이 되지 않는다. 군대에 가서도 안 배웠던 담배를 태우기 시작한 것은 재효 때문이었다. 처음 재효가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별 생각없이 누구냐고 물었던 날, 여자 앞에서 뺨을 맞았다. 그때 재효가 했던 말이 뭐더라? 맞다.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다. 성가시게 굴면 헤어질 거라고. 그 날 이후로 재효에게 다른 사람이 있음을 의심하게 되었고, 혹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아도 모른 척 했다.

건주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철민아.”

“어? 왜?”

“부탁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부탁이란 걸 별로 해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고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 필터를 잘근잘근 씹는 건주를 향해 철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부탁? 지금 박건주가 나한테 부탁이란 단어를 쓴 거 맞아?”

“싫으면…….”

“싫기는! 무조건 들어준다. 돈 빌려달라는 말만 빼면! 흐흐. 요새 나 개털이거든. 그래도 꼭 돈이 필요하다면 사채라도 끌어다 빌려줄게. 부탁이 뭔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철민을 보며 건주는 난처하게 웃었다.

벨라는 재효와 두 번 정도 와 본 적이 있는 와인 바bar 였다. 처음 왔을 때는 재효에게 목돈이 필요했을 때. 이유는 어머니의 수술비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 돈을 마련하느라 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뼈가 부서져라 일해야 했다. 마침 방학 기간이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왔을 때는…… 두 번째 왔을 때도 돈 때문이었구나.

고개를 흔들며 안으로 들어가니 재효가 먼저 와 있었다. 건주는 재효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누구야?”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재효가 물어왔다.

“곧 알게 돼.”

“너…… 허풍떠는 거지? 도대체 누굴 안다고…….”

“정난희씨. 무척 예쁘던데.”

약혼녀 이름을 정확하게 대자 재효의 얼굴에서 핏기가 살짝 가셨다. 다급하게 물을 마신 재효가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건주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혹시 내가 허풍을 떠는 게 아닌지 의심하는 모양인데, 거짓말 아니야. 분명 정난희씨에게 무척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어. 그것도 잘.”

“그게 누구냐니까!”

“그렇게 초조해? 내가 난희씨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난희씨는 지금까지 네가 만나왔던 그 누구보다 큰 물고기니까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을 테지.”

정난희와 결혼함으로서 얻는 이득은 많을 거다. 사회적 지위, 명예, 그리고 엄청난 돈. 말하자면 신분이 바뀌는 셈이다. 입매까지 비틀어가며 애써 싸늘하게 말하는 건주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재효가 불현듯 피식 웃었다.

“뭐하는 게 뭐야? 돈? 아니면 내가 너한테 돌아가길 원해? 그도 아니면 한 번 자줘?”

“셋 중 하나만 고르라면 돈이야. 내게서 가져간 돈, 부모님 보험금, 대출금, 그리고 수철이의 입원비까지 다 내놔.”

“미친 새끼. 마음대로 해봐. 네가 누구를 알고 있건, 난희는 나한테 푹 빠져있으니까. 절대 우리를 갈라놓지는 못할 거다.”

“곧 나한테 돈을 주고 입막음을 시키고 싶어질 거야.”

메뉴판을 들고 다가오는 웨이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후 건주는 일어섰다.

알고보면 일등 조력자 태경환?

돈을 뜯어내는 비열건주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지글지글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어? 또 실장님이 요리를 하시나? 기대감을 안고 부엌을 들여다보았는데 없다. 고기 익는 냄새는 나는데 조리기구도, 사람도 없었다. 옆집…… 인가? 그 순간이었다.

“어이, 물 좀 가져와!”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며 태경환이 소리쳤다. 왜 베란다에 있는 거지? 건주는 의아해 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물을 가져갔다.

“지금 여기서…… 뭣들 하세요?”

베란다의 풍경을 본 건주의 입이 딱 벌어졌다. 거기선 삼겹살 파티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휴대용 버너 위에 올려둔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자글자글 익어가고 있었다.

“보면 몰라?…… 요. 눈 뒀다 뭐 하냐?…… 요. 고기 구워먹고 있잖아.…… 요.”

태경환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었을까. 왜 베란다에서 이러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러지.

“왜 베란다에서? 그리고 뜬금없이 웬 삼겹살을…….”

“우선 앉아.”

태 실장의 말에 건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으로 자연스럽게 앉았다. 양복 상의를 벗어 등 뒤에 둔 후 고개를 돌리는데 태 실장이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들어 건주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잠시 움찔하긴 했지만 곧 순순히 입을 벌려 고기를 받아먹었다. 바삭바삭. 고소고소. 맛있긴 하다. 그걸 보고 태경환이 울컥했지만 형의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곤 고개를 우걱우걱 씹었다.

“여기서 이렇게 먹으니까 나름 운치가 있지 않아?”

건주는 피식 웃었다. 베란다는 꽤 넓어서 장정 셋이 둘러앉았는데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쓸데없이 넓기만 한 베란다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나름대로 활용도가 있다. “네. 그러네요.”하고 대답한 순간 베란다 창으로 빗줄기가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후부터 하늘이 꾸물꾸물하더니 이제야 비가 오는 것이다.

“그것보다 웬 고기에요? 더구나 삼겹살을…….”

“삼겹살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야. 불만 있어? …… 요.”

볼이 터져라 고기를 꾸역꾸역 넣으며 태경환이 뚱하게 중얼거렸다.

“불만 없어요. 좀 의외긴 하네요.”

부자들은 최고급 한우만 먹는 줄 알았는데……. 하긴 태 실장도 그렇고, 태경환도 그렇고 두 사람 모두 소탈한 면이 있었다. 함께 지내다 보면 저 두 사람이 알아주는 기업가의 자제들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뭐라고 할까, 저들에게는 특권 의식이라고 할까, 가진 자 특유의 거만함이라고 할까, 그런 게 별로 없었다. 태 실장이야 의외의 면이 많아서 별로 놀랍지 않았지만, 태경환은 정말 의외였다. 영락없이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뭐가 의외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건주는 희미하게 웃은 후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와 토독토독 창을 두들기는 빗줄기 소리가 제법 잘 어울렸다.

배부른 식사를 끝내고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 태경환의 핸드폰이 요란스레 울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은 태경환이 미안한 얼굴로 태 실장을 돌아보며 웃었다.

“형. 친구들이 지금 나오라는데?”

“술에 취해서 바이크 타면 내 손에 먼저 죽는다.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쓸데없이 계산한다고 나서지 말고, 술 취해서 주정부리지 말고.”

“알았어. 그럼 다녀올게요.”

형을 향해 환하게 웃은 태경환이 쪼르르 나가버렸다. 친구들과 놀 생각을 하니 좋은가 보았다. 좋을 때다.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며 건주는 뒷정리를 끝냈다. 설거지를 끝내놓고 무심코 욕실 문을 열었다가 샤워하는 태 실장의 뒷모습을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안으로 들어섰다. 태경환 때문에 욕실을 함께 쓰는 날이 많다 보니 이젠 벌거벗은 채 서 있는 것도 꽤 익숙해졌다. 오히려 화들짝 놀라서 문을 쾅 닫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거다.

태경환 덕분에 익숙해진 건 함께 욕실에서 샤워하는 것만이 아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온 건주는 거실 소파에 앉아 케이블 뉴스를 보고 있는 태 실장의 바로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가 다음 순간 멋쩍게 웃었다. 출퇴근때마다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집에 함께 있을 때면 일부러 곁에 꼭 붙어 있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일주일 만에 습관이 든 모양이었다. 태경환이 없는데도 정말 다정한 연인처럼 엉덩이를 꼭 붙이고 앉은 것을 보면. 태경환에게 보이려고 과한 스킨십을 하려 애썼다면 불편한 마음에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을 텐데, 작고 소소란 것들이라 쉽게 습관이 들고 말았다.

‘지금은 태경환도 없으니까.’

작게 한숨을 내쉬고 슬쩍 엉덩이를 떼려고 하는데 태 실장이 건주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 역시 무의식중에 한 행동인 것 같았다.

“경환이 놈은 내일 돌아갈 거야. 내일 저녁에 어머니께서 돌아오시거든. 어머니는 삼겹살이라면 기겁을 하시는 분이라 가기 전에 고기 먹는다고 오늘 휴대용 버너랑 함께 삼겹살을 잔뜩 사왔더라고.”

“왜요?”

삼겹살이 얼마나 맛있는 음식인데.

“기름기가 많잖아. 그 연세에도 몸매 관리를 철저히 하는 분이거든. 경환이는 어릴 때 외가에서 커서 그런지, 외삼촌과 입맛이 똑같아. 삼겹살, 곱창 같은 기름기가 많은 음식에는 사족을 못 쓰거든.”

왜 외가에서 컸지? 아니 그것보다 어머니가 돌아오신다고 했었지?

“어머니가 어딜 가셨어요?”

“내가 얘기 안 했던가? 이모와 함께 일본으로 쉬러 가셨어. 가끔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 일본에 가셨다가 한 일주일씩 쉬고 오시거든. 이번에 내 문제로 꽤 골치가 아프셨나 봐. 훌쩍 떠나기엔 마음이 안 놓이셨는지 한국에 안 계신 동안 경환이한테 감시를 맡기신 거고. 난희도 함께 갔다가 내일 오니까 이번 주말에 같이 저녁 어때?”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건주는 주말에 정난희를 만나자는 말에 저도 모르게 입안에 고여 있던 침을 꿀꺽 삼켰다.

“난희씨 약혼자…… 도 함께요?”

가슴이 쿵쿵 뛰었다. 태 실장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기대 반, 두려운 마음이 반이다.

“아마도. 내키지 않으면 혼자 나오라고 할게.”

“아, 아니에요.”

조금 떨리긴 하지만 피할 이유는 없었다.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야 재효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할 수 있으니까. 재빨리 고개를 가로젓는 건주를 향해 피식 웃던 태 실장이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와인이 생각나는군. 건주야. 너도 한 잔 할래?”

태경환을 의식해서 집에선 건주, 라고 이름을 부르려고 애쓰더니 이젠 아주 자연스럽게, 당연한 듯이 부른다.

“네. 좋습니다.”

건주도 이젠 건주야, 하고 부르는 호칭에 많이 익숙해졌다. 오히려 가끔 나오는 ‘자네’라는 호칭이 더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래서 참 습관이 무섭다는 걸 거다. 고개를 흔들며 채널을 돌리고 있을 때 태 실장이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코르크 마개를 열자 은은한 향이 잔잔하게 퍼져 나왔다.

건주는 태 실장이 따라준 와인을 조금 마셔보았다. 혀에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전에 가족들 중에 부모님과 경환씨를 주의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왜 그런 거예요?”

사실 태경환과도 함께 살면서 여러 번 궁금했었다. 가끔 못되게 굴긴 해도 그리 경계해야 할 사람 같진 않았던 것이다. 함께 술을 마셨던 일도 재밌었고. 취해서 실수를 좀 하긴 했지만, 술이 깬 후에는 언제 함께 술 마신 적이 있느냐는 듯 태경환이 쌩하긴 했지만 썩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가족들 중에 내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부모님과 경환이 뿐이거든.”

“……?”

“형님은 사람 좋은 호인인데다 약간 소심한 면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잘 못해. 막내 동생은 지독한 개인주의자라 자기 말고는 관심이 없고. 반면에 부모님과 경환이는 내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아.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좀 덜한데, 경환이 녀석 전에는 내가 만나는 여자들한테 많이 못되게 굴었어.”

소심한 첫째와 둘째에게 집착하는 셋째, 그리고 지독한 개인주의인 막내. 성격이 완전히 다른 형제들이다. 건주는 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태 실장을 보았다.

“혹시 전부 어머니가 다른 형제…… 는 아니겠죠?”

재벌들이 첩에게서 자식을 보는 건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던데. 아까 태경환이 어릴 때 외가에서 컸다는 말도 했고. 실례되는 질문을 던져놓고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태 실장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이는데 그런 거 아니야. 우리 형제는 확실히 한 배에서 태어났거든. 아버지에게 꽁꽁 숨겨둔 형제가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없어.”

“그런데 왜 그렇게 결혼을 싫어하세요? 보통 남자들이라면 자신과 똑닮은 분신을 보고 싶어 하던데.”

“너도 그래?”

태 실장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건주는 그의 시선을 피해 발끝을 내려다보며 자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 네.”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 이미 예전에 포기했지만, 분신이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사실 건주가 원하는 것은 자식보다도 피로 이어진 누군가였다. 핏줄이라는 거, 혈연이라는 거, 그거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자기편이라는 증거가 되니까 말이다. 태 실장이 쓴 웃음을 짓는 건주를 알 수 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고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어느새 비어버린 건주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내 자식이 태어나면 어떤 느낌일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꼭 자식을 낳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 자식을 보기 위한 결혼은 말도 안 되고. 아마 결혼 때문에 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더 싫어진 걸지도 모르지.”

“만약 집에서 실장님이 게이임을 인정하고 결혼을 포기하면 어떡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아직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지금 마음 같아선 여자도 질려서 열심히 일만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보다 안 잘 건가?”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이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되었지? 자야죠, 하며 건주가 일어섰다. 잔을 개수대 안에 넣어둔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욕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했다. 그리곤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태 실장은 금방 잠이 들었는지 곧 옆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몸에 닿는 맨살의 느낌도 이젠 익숙하다. 전라로 자는 태 실장의 잠자리 습관에 대해 처음에 질겁했었던 것을 떠올리고 건주는 피식 웃었다. 역시 습관이 무섭다. 무서워.

그러면서 건주도 스륵 잠이 들었다. 바깥에 비가 와서인지 자면서 좀 추웠다. 잔뜩 몸을 웅크렸던 건주는 등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자 잠결에 몸을 틀어 꾸물럭꾸물럭 온기를 찾아갔다. 따뜻하지만 묵직한 것이 몸을 감싸자 그제야 아주 편안하게 씩 웃으며 완전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