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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에 들어선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얼굴이 조금 창백하긴 해도 눈에 확 뜨이는 미인이 바로 태 실장과 관련된 여자일 것이다. 건주가 다가가자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여자가 시선을 돌렸다.
“박건주라고 합니다.”
“차혜련이에요.”
이름을 밝힌 여자는 앉은 채 고개만 까닥했다. 습관적으로 내밀었던 손을 머쓱하게 거둬들인 건주가 의자에 앉았다. 차혜련에게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고 듣긴 했지만, 일주일도 더 전의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회사 일과 수철이, 그리고 재효에게 신경을 쓰는 것만도 몹시 피곤해서 그녀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차혜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좀 놀라버렸다.
“커피…… 아니 딸기 주스로 주십시오.”
이제 겨우 5시인데, 오늘 벌써 커피를 네 잔이나 마셔버렸다. 더 마셨다간 속이 울렁거릴 것 같아 서둘러 주문을 바꾼 후 차혜련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니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은 탓에 살짝 부풀어 있는 아랫배가 분명하게 보였다. 건주의 시선이 제 아랫배에 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차혜련은 민망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보란 듯이 배를 더 내밀었다.
“보이죠? 이젠 티도 제법 나요. 난 이 아이를 아빠 없이 키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건주는 물을 조금 마셨다. 허브를 우린 물인지, 물에서 상쾌한 로즈마리 향이 나고 있었다.
“그럼 아이에게 아빠를 만들어주면 되겠네요.”
무슨 뜻으로 한 말인가. 의도를 헤아려보려는 듯 건주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차혜련의 눈빛에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건주의 말을 좋을 대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 말뜻은…… 그쪽이 물러나겠다는 뜻인가요?”
“아이의 친아빠를 찾아주라는 뜻이었습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물 컵을 집기 위해 뻗은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 사람이 그러던가요? 이 아이가 그 사람 핏줄이 아니라고? 발뺌하는 거예요. 이 아이는 누가 뭐래도 태씨 집안 핏줄이에요!”
주먹을 꼭 쥐고 외치는 차혜련의 눈동자는 왠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지? 아아. 그렇구나. 절대 정난희와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하던 재효의 눈빛과 똑같다. 그건 바로 욕망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건주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재효의 본성을 알지 못했더라면 차혜련의 말을 믿었을 지도 모르겠다. 욕망으로 벌겋게 변한 눈을 사랑이라 착각한 채 말이다.
“민환씨가 그러던데요.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다고. 저도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네요. 증거를 가져오세요. 그럼 얼마든지 물러나 드릴게요.”
“이이…… 더러운 호모 새끼!”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차혜련이 건주를 향해 주스를 끼얹었다. 코끝에서 오렌지 향이 확 끼쳤다. 건주는 냅킨으로 차분하게 얼굴을 닦아낸 후 카페를 나와 옆 건물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수로 얼굴은 씻어냈는데 옷이 문제다. 연한 소라 색 재킷에 누런 오렌지 물이 흉하게 얼룩져 있었다. 곤란하게 되었다. 혀를 차며 택시를 타고 태 실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토요일이지만 그는 오늘도 일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선을 들었던 태 실장이 건주의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새로운 패션은 아닐 테고?”
“차혜련씨를 만났어요.”
태 실장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 여자 짓이야?!”
“실장님이 말했던 대로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주스 세례를 하더라고요. 얼굴이랑 몸매만…… 봤던 겁니까?”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사람들 앞에서 주스 세례까지 받았으니 아무리 건주라도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뚱하게 말했다가 가느스름하게 뜨인 태 실장의 눈매를 보고 아차 했다. 심기를 건드린 건가? 아니 그것보다 우선 자신에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그녀보다 더 최악인 남자를 사랑한 주제에. 괜히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건주를 보며 태 실장이 픽 웃었다.
“가볍게 노는데 얼굴이랑 몸매만 보면 되지, 뭘 더 봐야 하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장님은…….”
“사실은 그 두 개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점이 있긴 해.”
“그게 뭔데요?”
“욕심이 적당한 여자. 너무 욕심이 없어도, 너무 욕심이 과해도 가볍게 놀기엔 부적합하거든.”
책상 위를 정리한 태 실장이 옷걸이 걸쳐두었던 재킷을 입었다.
“평소엔 참 다정한 것 같은데, 이럴 때는 실장님이 무척 나쁜 남자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 억울해. 난 적어도 상대의 진심을 유린하진 않거든.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쿨한 관계가 내가 추구하는 이상이지. 시작하기 전에 그 점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동의하는 여자만 만나거든.”
“그런 건 좀 슬프지 않나요? 너무 차갑…… 잖아요.”
차갑다는 표현이 옳은진 모르겠지만 슬프긴 하다. 감정은 분명 물건과 다를 텐데.
“네가 추구하는 이상은 사랑인가? 첫사랑에게 이용당해놓고도?”
“아마 더 신중하게 사랑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거래 같은 관계는 싫어요. 첫사랑도…… 어떤 의미에선 처절하게 끝났지만 후회는 안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고, 줄 수 있는 건 다 줬고, 미련도 가질 만큼 가진 후 끝냈기 때문에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어서 후련하거든요.”
그래서 마지막 미련까지 털어낸 후에 재효를 마음껏 미워할 수 있었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재효에게 대가를 받아내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넨 이상주의자군.”
“그럴지도요.”
바보 같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건주는 다시 사랑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서 행복 하고 싶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일이 처음보다 몇 배는 더 힘들 테지만, 그래도……. 다음 순간 건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누군가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고 하더니만, 언제 또 생각이 이렇게 바뀌었을까. 분명 재효의 일로 사랑 따윈 지겹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사랑 따윈 가치 없다는 투로 말하는 태 실장에게 반발해서 얼결에 한 말이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다시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할 텐데. 난희를 만나기 전에 백화점부터 들를까?”
“먼저 가 계세요. 전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갈게요.”
“그럼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식사도 먼저 하고 계세요.”
그냥 백화점에서 한 벌 사 입자는 태 실장을 설득해 먼저 약속 장소로 보내고 건주는 아파트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데 마음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재효가 자신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분명 많이 놀라겠지? 많이 놀랄수록 좋다. 건주는 무릎 위에 둔 주먹을 꽉 쥐었다.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이 보인다. 건주는 등을 보이고 있는 태 실장과 그의 맞은편에 앉은 재효, 그리고 정난희를 한 사람씩 천천히 바라보았다. 정난희와 재효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재효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정난희는 환하게 웃었고, 재효는 그런 그녀를 아주 세심하게 챙겨주고 있었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주고, 물 컵을 가까이 끌어다주고, 고기를 썰어주고, 빵을 찢어주고……. 예전에 건주에게도 했던 행동들이었다. 사람들이 보는 바깥에서도 흘끔대는 시선을 아랑곳 않고 챙겨주는 행동에 감동한 적이 여러 번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게 재효의 진심인 줄 알았다.
건주는 한계까지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은 후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정난희와의 결혼으로 그렇게도 꿈꾸던 상류 계급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는 재효를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린다. 한껏 들떠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거북이처럼 느리게 걷고 있을 때였다. 정난희에게 자신의 고기 한 점을 덜어주고 시선을 들었던 재효가 건주를 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 순간 재효의 눈빛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볼을 실룩거렸던 재효는 정난희와 태 실장의 눈치를 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풀었다. 그리곤 냅킨으로 입을 닦은 후 ‘잠시 화장실 좀.’하고 일어났다.
“당장 따라 나와. 죽여 버리기 전에!”
재효가 우두커니 서 있는 건주의 어깨를 사납게 치며 잇새로, 건주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머. 언제 오셨어요?”
정난희가 건주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건주는 의자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작게 웃었다.
“또 뵙네요. 지난번에는 죄송했어요.”
일부러 친숙하게 말하자 재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에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는데요. 뭘. 재효씨. 화장실 간다더니 거기서 뭐하고 있어? 참, 인사해. 거기 재효씨 옆에 서 계신 분이 민환 오빠 애인이야. 놀랐지?”
“형님………… 애인?”
지뢰라도 밟은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짓는 재효를 향해 건주는 환하게 웃어주었다.
“박건주라고 합니다.”
“어, 어떻게…….”
왔어, 하고 웃더니 일어나 건주에게 의자를 빼주는 태 실장과 자연스레 앉는 건주를 번갈아보는 재효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입술도 새파랗게 질렸다. 눈동자에는 경악마저 서렸다. 당황하고 놀란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건주는 작게 웃었다.
“놀랐지? 글쎄 잘난 우리 오라버니가 게이가 되어버렸다지 뭐에요.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오빠 새 애인이 남자라고 말 안 했어.”
“어? 어어. 노, 놀랍다. 나 잠깐만.”
건주는 도망치듯 서둘러 화장실로 걸어가는 재효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 시선을 돌린 후 정난희를 향해 웃어주었다. 미리 주문을 해둔 건지, 건주가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나왔다. 재효는 정난희가 ‘아이, 왜 이렇게 안 오지?’하고 걱정을 하고 있을 때에야 간신히 테이블로 돌아왔다. 마음을 웬만큼 가라앉혔는지 처음보다는 나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조금 창백했다.
“내일 클레이 사격하러 가지 않을래?”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를 한 입 먹은 태 실장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정난희가 주문한 디저트는 모두 그녀의 입맛에 맞게 달달했다. 건주도 한 입 먹어보곤 난감한 기색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너무 단 음식은 영 입맛에 안 맞는다.
“좋아요. 내일은 꼭 절반 이상 맞출 겁니다.”
세 발을 맞추고 뿌듯해하는 자신을 보고 웃던 태 실장의 모습을 떠올리곤 그렇게 말하자, 태 실장이 그때처럼 웃었다. 비웃는 것처럼, 혹은 귀엽다는 듯. 그가 자신을 귀엽다고 생각할 리 없으니 비웃는 걸 거다.
“초보가 절반을 맞추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걸?”
“두고 보세요.”
“클레이 사격이 재밌어? 총 쏘아서 날아가는 접시 맞추는 게 뭐가 재밌다고 그러는지 몰라. 재미있었어요? 건주씨?”
정난희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한 번 해봤을 뿐이지만 속이 후련해지더라고요.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요. 전 괜찮았어요.”
“그래요? 흐음. 나도 가볼까? 재효씨, 우리도 따라가 볼래요? 근처에 승마장도 있으니까, 사격하다 지겨워지면 승마해도 되는데.”
“…….”
“재효씨?!”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느라 대답을 않는 재효의 팔꿈치를 정난희가 툭 쳤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재효가 당황스럽게 정난희를 보았다.
“아, 미안. 뭐라고 했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내일 우리도 오빠랑 같이 클레이 사격 하러 갈래요?”
“미안. 내일은 약속이 있어.”
정난희는 아쉽다는 표정을 짓자, 재효가 달래는 듯한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힐끔 건주의 얼굴을 살피며 이를 악무는 재효를 향해 건주는 부러 더 느긋한 웃음을 보냈다.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 재효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라고 하기도 전에 재효는 당장 만나자고 용건부터 대뜸 말했다. 장소는 지난번과 같은 벨라였다. 건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전화야?”
전화를 받은 후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다가 끊는 것이 이상했는지, 태 실장이 의아한 눈으로 물어왔다. 건주는 어떻게 말할까 잠시 망설이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대답했다.
“…… 꽃뱀이요.”
“흐음. 전에 말한 돈 돌려받기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는 건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오늘 만나면 확실해 질 것 같기도 한데, 저기 신호등 앞에 세워주세요.”
차가 건주가 말한 신호등 앞에 섰다. 일단 차를 세운 태 실장이 영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건주를 보았다.
“데려다줄게.”
“혼자 가고 싶어요.”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태 실장을 보낸 후 택시를 잡아타고 벨라로 향했다. 일전처럼 재효는 먼저 와 있었다. 꽤나 속이 타는지 연신 물을 마시면서. 컵이 비어서 물을 더 달라고 하기 위해 손을 들었던 재효가 건주를 발견하고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태민환의 애인이라……. 대단한데? 박건주? 이거였어? 네가 가진 카드가?”
“………….”
“우리 사이가 알려지면 너도 그리 좋지는 않을 텐데, 서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어때?”
몸을 앞으로 내민 재효가 저열하게 웃었다. 건주는 이번에도 자리에 앉아만 있다 그냥 나갈 순 없어서 하우스 와인을 한 잔 주문했다.
“난 알려져도 크게 상관없어. 우리의 일이 알려지면 더 큰 타격을 받는 쪽은 내가 아니라 강재효, 바로 너니까. 그리고 내가 단순히 우리 사이의 일만 가지고 이러는 것 같아? 섹스 하는 사진을 몰래 찍은 후 그것으로 협박한 적도 있다며? 그걸 다 말해볼까? 민환씨가 가만히 있을지. 그리고 너란 남자의 실체를 다 알고 난 후에도 정난희가 너와 결혼할지.”
순식간에 험악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린 재효가 이를 으득 씹었다. 빠드득, 이와 이가 부딪쳐 갈리는 소리가 났다. 사뭇 위협적인 기세였지만 건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느긋한 태도로 와인을 마셨다.
“많이 변했구나. 박건주. 전엔 내 말이라면 꼼짝도 못하더니.”
“그럼 내가 영원히 네 말이라면 충성하던 호구로 살 줄 알았어?”
“………….”
호구란 표현에 재효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건주는 피식 실 같은 웃음을 흘린 후 잔을 다 비웠다. 그리곤 계산서를 재효를 향해 밀어버리고 일어섰다. 재효와 오래 마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등을 곧게 펴 몸을 일자로 만들며 건주는 앉아서 노려보는 재효를 시큰둥하게 내려다보았다.
“네가 계산해. 더 이상은 너를 위해 한 푼도 쓰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일주일 줄게. 전에 말한 돈 만들어와. 안 그러면 민환씨한테 다 말해버릴 테니까. 아니, 다 말할 필요도 없어. 너에 대해 뒷조사를 철저히 해보라는 식으로 슬쩍 흘리기만 해도 네 야망에 충분한 걸림돌이 될 거야.”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재효를 뒤로 하고 건주는 벨라를 나왔다. 돈을…… 만들어올까? 건주가 태 실장을 등에 업었다고 해도 순순히 내놓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고작 이 정도 말에 몸을 낮추고 돈을 내놓는 것은 건주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재효에겐 당장 그만한 돈이 없을 거다. 건주가 보기에 그는 빈털터리가 분명했다. 없는 돈을 마련하려고 무리를 해도 좋고, 돈을 주지 않으려고 무리수를 둬도 좋다.
“으하하하. 그것도 못하냐?…… 요.”
태경환이 건주의 서투른 사격 솜씨를 보고 대놓고 비웃었다.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많이 맞췄는데. 그래봤자 겨우 두 발 차이긴 하지만. 으스대는 태도에 약이 바싹 올랐다. 오기를 부리며 쏜 총알은 하나도 접시를 맞추지 못했다. 태경환은 더욱더 좋아했고, 그럴수록 건주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자세가 잘못 됐어. 지난번에도 가르쳐줬잖아.”
피식 웃으며 다가온 태 실장의 건주의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어깨를 바로하고, 다리의 위치도 고쳐주었다. 그러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건주의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 가져다댔다.
“왜 그러세요?”
냄새 나나? 아침에 샤워했는데?
“향수 뿌렸어?”
“아니오. 아……. 비누를 변기 안에 빠뜨려서 회사에서 여직원이 준 아로마 비누인가 하는 걸 가져다 썼거든요.”
건주는 멋쩍게 웃었다. 멍하게 비누를 집다가 미끄러져서 퐁당 변기 안에 빠뜨리곤 얼마나 황당하던지. 욕실 안에 예비 비누가 없어서 며칠 전, 회사 여직원이 자기가 만들었다며 사무실 직원들에게 나눠준 비누를 가져와서 몸을 씻었다. 비닐 포장을 벗겼을 때부터 향이 좀 진하다 싶었는데, 아직까지도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아. 비누 향이었군.”
“네. 향이 좀 진하더라고요. 전에 쓰던 것 대신 곽에 넣어뒀는데, 향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바꿔 둘게요.”
역시 향이 너무 진해서 별로인가 보다. 사실 건주도 너무 여성스러운 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새 비누부터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태 실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나쁘지 않아.”
그리곤 다시 건주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어쩌면 혀가 살짝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착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촉촉한 것이 목덜미를 스친 순간 태경환이 씩씩 대며 다가왔다.
“밖에 나와서까지 무슨 짓이야!”
태경환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태 실장을 저만치 밀어내더니 자기가 건주 옆에 자리를 잡고 사격을 시작했다. 둘을 갈라놓고 말리라, 명백한 의도가 보이는 행동에 웃음도 나고, 한숨도 났다. 건주는 태경환을 향해 어깨를 으쓱한 후 태 실장이 가르쳐준 대로 자세를 잡았다. 오늘은 성과가 괜찮은 편이었다. 총 50발 중 17발을 맞췄으니까.
뿌듯한 기분으로 잊고 있던 핸드폰을 꺼냈던 건주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부재 중 통화 20통. 전부 한 사람한테 온 거다. 바로 재효였다. 문자도 여러 개 와 있었다. 가장 최근에 받은 문자를 슬쩍 보니 별로 좋은 의미로 보낸 내용은 아닌 것 같아 그냥 일괄 삭제해버렸다.
“차로 1시간 거리에 풍천 장어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서 저녁 어때?”
“좋아. 좋아! 그 전에 승마하고 가자. 승마장 여기서 멀지 않잖아? 오랜만에 나왔더니 말도 타고 싶다.”
묻기는 건주한테 물었는데, 대답은 태경환에게서 나왔다. 승마? 장어? 승마는 해 본 적 없고, 장어는 기름기가 많아 별로지만 차마 대놓고 싫다고 할 수가 없어서 건주는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
“씹! 이 새끼 왜 전화를 안 받아!”
재효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씩씩대며 핸드폰을 내던졌다. 짜증이 나서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박건주, 이 새끼! 감히 내 전화를 씹어? 전에는 내 말 한 마디면 빌빌거리던 새끼가……. 짜증으로 뱃속이 폭발해버릴 것 같아 성급하게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독한 양주가 한꺼번에 들어가자 뱃속이 화끈거렸다.
“오늘은 왜 또 짜증이야?”
대낮부터 들이닥쳐 술을 푸고 있는 재효를 향해 쯧쯧 혀를 차는 사람은 곰치 형이었다. 곰치란 생선처럼 우락부락 못생긴 형은 스스로 ‘곰치’란 별명을 지었으면서도 누가 형을 향해 못생겼다고 하면 발칵 성질을 내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성질이 좀 괴팍한데다 거칠긴 해도 그는 재효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지금은 번듯한 술집 사장님인 척 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양아치라 뼛속까지 믿을 순 없지만, 주고받을 것이 있는 이상 곰치는 재효의 편이었다.
“얘기했지? 예전 내 호구였던 새끼가 갑자기 나타나 돈 갚으라고 협박을 해댄다고.”
“그 새끼가 속을 썩여? 말만 해. 내가 손봐줄 테니까.”
“그게 좀 곤란하게 되었어.”
매엔 장사가 없으니 여차 하면 언제나처럼 곰치 형에게 부탁해 손을 봐줄 생각이었는데, 그게 좀 곤란하게 되어서 더 울화가 치밀었다. 설마 박건주 그 새끼가 태민환의 애인이 되었을 줄이야. 재효가 정난희의 가족 및 친척들 중 가장 껄끄러워하는 상대가 있다면 그건 바로 태민환이었다.
건축 일을 하곤 있지만 사실 누구보다 경영 수업을 철저하게 받은 이가 바로 태 회장의 둘째인 태민환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태민환이 방탕한데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해서 이미 예전에 눈 밖에 났다고 수군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단다. 정난희가‘사실 이모부가 가장 신임하는 아들은 둘째인 민환 오빠야.’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가족들 내에서 가장 파워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태민환이었다.
재효는 태민환이 거북했다. 한 번도 좌절이라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자 특유의 자신만만한 눈빛도 거슬렸고, 깔보는 듯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기분 나빴다. 마주칠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지만 그의 눈 밖에 나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참고 또 참았다. 무엇보다 그는 함부로 건드리는 안 되는 사내였다. 일견 다정해 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 냉혹한 사내, 그게 바로 태민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호구라 부르며 만만히 보았던 박건주가 바로 태민환의 애인이 되어 나타난 것이고.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난희는 지금껏 자신이 이용해 먹은 시시껄렁한 것들과는 달랐다. 그녀와 결혼만 하면 사회의 특권층으로 완벽히 변신할 수 있었다. 난희 아버지 회사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데, 이제 와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뭐가 곤란한데? 말만 해. 내가 해결해줄 테니.”
“그 새끼가 가장 껄끄러운 상대의 애인이 되어버렸거든. 내 과거에 대해 한 마디라도 흘렸다간 난 끝장이야.”
난희의 부모님도 얼씨구나 하고 전보다 더 극렬하게 반대를 할 테고, 혹시 난희의 귀에 과거의 저질렀던 일들이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파혼하자고 들 수도 있었다. 지금이야 자신에게 푹 빠져 있지만 그것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딱 한 발만 더 내딛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하필이면 이 순간 박건주 그놈이, 그것도 하필이면 태민환의 애인으로 나타나다니.
난희 그년에게 도장을 콱 찍어뒀어야 하는 건데! 여러 번 확실하게 도장을 찍어두려고 시도해봤는데 뜻밖에도 난희 년이 성적인 면에서 완고해서 번번이 멋쩍은 얼굴로 그냥 물러나야 했다. 강제로 콱 눌러버릴 수도 있었지만 아직은 그년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약이라도 먹여서 해버릴까?’
그땐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어버렸는데, 제 년이라고 별 수 있겠어?
하지만 그건 최후의 방법이다. 오히려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큰 만큼 최후의 수단으로 써야 한다.
‘우선 결혼을 앞당기자고 해야겠어.’
박건주 같은 미친 새끼가 또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최대한 빨리 결혼부터 해야겠다. 그전에 우선 건주 새끼 일부터 해결하고. 젠장, 수철이란 놈을 건드리는 것이 아닌데. 생각해 보면 건주는 자신의 일이라면 꾹꾹 눌러 참다가도 친구의 일이라면 울컥해서 나서곤 했었다. 이번에도 그 새끼가 크게 다치지만 않았어도 건주 놈이 눈에 독기를 품고 나설 일은 없었을 거다.
새끼가 찾아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통에 화가 나서 그저 위협만 했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그 새끼는 멍청하게 왜 미끄러져서 머리가 박살나고 지랄이야! 지랄이! 재효는 빈 술잔을 쾅 요란하게 내려놓으며 곰치를 바라보았다.
“형. 돈 좀 알아 봐줘.”
“돈?”
“어.”
안 되면 돈이라도 줘서 입막음을 시켜야겠지. 정난희와 결혼만 하면 그깟 푼돈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결혼? 잠깐. 태민환에게 임신한 년이 있다고 했는데. 흐음. 어쩌면 그 년을 이용할 수도 있겠군.
“네가 알아보라면 당연히 알아봐야지. 그 전에…….”
재효의 옆으로 옮겨 앉은 곰치가 은근슬쩍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재효는 픽 입매를 끌어올리며 곰치의 불룩 솟아오른 중심을 내려다보았다. 팽팽하게 부푼 그의 중심은 당장이라도 옷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침을 꿀꺽 삼킨 재효가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리곤 지퍼를 열고 곰치의 성기를 끄집어낸 후 망설임 없이 입에 물었다.
“봄바람이라도 났어? 혼자 뭘 피식피식 웃고 있어?”
“제가 그랬어요?”
“그랬어. 봄바람 난 처녀처럼 혼자서 피식피식. 불 있냐?”
담배를 입에 문 선배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건주는 뒷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선배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그리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혼자 피식대며 웃었다고? 내가? 건주는 필터 끝을 잘근 한 번 씹었다. 그저께 승마장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긴 했는데……. 그 날 일을 떠올리며 건주는 다시금 피식 웃었다.
새까만 흑마에 올라타 허들을 뛰어넘던 태 실장은 정말 멋있었다. 도대체 못하는 것이 뭔가 하는 생각에 질투도 약간 하고, 부러운 마음도 좀 갖고, 많이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 마지막 허들을 뛰어넘던 태 실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예민한 말이 뭔가에 놀라 제대로 허들을 넘지 못하면서 태 실장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친 것이다. 그 순간에는 무척 놀랐는데 어제부터 자꾸만 그 장면을 생각하면 웃음이 났다. 그가 크게 다쳤다면 아마 웃지 못했을 테지만, 천만다행으로 다친 곳은 없었다.
멋쩍게 일어나던 얼굴이 정말 압권이었어.
“이 놈 이거, 정말 봄바람이 났나? 왜 또 혼자 웃어? 너 애인 생겼어?”
건주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도 안 된다는 듯 펄쩍 뛰었다.
“애인은 무슨.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야? 무슨 이유로 혼자 실실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보긴 좋다. 한동안 우거지상을 하고 다녔을 때는 보던 내 기분까지 우중충해지는 것 같았거든.”
재효가 갑자기 사라진 이후부터 별로 웃을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실체를 알게 된 이후에는 더더욱. 거기다 수철의 사고까지 겹쳐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태 실장으로 인해 웃을 일이 종종 생긴다. 태 실장이 왜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재치 있고, 늘 당당하고, 삶에 대한 여유도 넘치고, 기본적으로 다정하다.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남자를 여자들이 그냥 둘 리 없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여자 문제에 관해 너무 가볍다는 점일까? 그것도 굳이 따지자면 그의 말대로 상대를 진심으로 만들어 놓고 가지고 노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겠지.
‘으음?’
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지? 체한 것처럼 명치가 갑갑하고 아려서 건주는 손가락으로 명치를 꾹꾹 눌렀다. 그러자 선배가 “왜 그래?”하고 물어와서 서둘러 손을 내리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웃었다. 좀 전의 통증은 착각이었던 듯 가슴은 어느새 멀쩡해져 있었다.
“그만 들어가자. 담배만 피러 나가면 함흥차사라고 얼마 전에 과장이 잔소리하더라.”
“네. …… 잠시 만요. 선배 먼저 들어가세요.”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져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보였다. “짧게 끝내고 들어와.”하고 말한 선배가 먼저 사무실로 들어갔다. 휴게실 안에 가득한 담배연기가 텁텁해서 복도로 나오며 액정을 봤는데 낯선 번호였다. 또 누구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사람들이 딱딱 정해져 있었는데, 요샌 낯선 전화가 참 많이도 온다. 건주는 습관처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네. 박건주입니다.”
- 나, 민환이 엄마예요.
“아, 안녕하세요.”
- 오늘 시간 어때요? 밖에서 따로 좀 만나고 싶은데…….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였다.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점심시간이다.
“12시부터 점심시간입니다. 멀리는 못 가겠지만 근처라면 뵐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좋아요. 내가 지금 근처로 가죠.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로써 점심은 물 건너갔네. 건주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후 어기적어기적 걸었다. 승마의 후유증이었다. 승마라는 거, 우아하게 말 위에 올라타 있기만 하면 되는 귀족적인 스포츠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만만치 않았다.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프고, 사타구니도 아팠다.
다음에 또 승마하러 가자고 하면 그때는 거절해야지. 관자놀이를 긁적거리며 사무실로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 11시 55분이 되자 선배가 슬금슬금 다가와 점심 먹으러 가자고 옆구리를 찔렀지만, 미안한 얼굴로 거절하고 의자에 걸쳐둔 재킷을 들고 회사를 나왔다. 태 실장 어머니와 만나기로 한 카페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그것도 빨리 걸어서 10분이다. 좀 멀다 싶은 거리지만 고상한 귀부인을 모시고 얘기할 장소는 거기밖에 없었다.
‘아, 실장님한테 어머니 만나러 간다고 얘기해야 할까?’
아무래도 먼저 말을 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는데 핸드폰이 없었다. 건주는 걸어가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까 어머니 전화를 받고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 위에…… 두고 나왔구나. 할 수 없다. 이따 돌아가서 얘기하는 수밖에.
숨이 약간 찰 정도로 빠르게 걸어 카페에 들어가니 태 실장 어머니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건주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흐트러진 숨부터 골랐다.
“이따가요. 손님 오면 주문할게요.”
종업원에게 그렇게 말하고 설렁설렁 메뉴판을 넘기고 있을 때였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건주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그녀는 여전히 ‘귀부인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우아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네. 앉으세요.”
그녀가 앉은 후 건주도 앉았다.
“내가 식사 시간을 뺏었군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시간을 오래 빼앗진 않을 거예요.”
달칵. 핸드백을 연 그녀가 꺼낸 것은 새하얀 봉투였다. 건주는 자신을 향해 쓱 내밀어진 봉투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뭐…… 지?
“이게…… 뭡니까?”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큰 거 세 장 넣었어요. 이 정도면 섭섭지 않을 거예요.”
큰 거 세 장이면 삼천인가? 아니면 삼 억? 아마 삼억이겠지? 자신의 몸값이 삼억이나 된다니 좀 놀랍다.
“………….”
“헤어져줘요. 설마 정말일까, 반신반의했는데 경환이 말이 둘이 정말 사귀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난 우리 집안에 추문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 소문나기 전에 건주군쪽에서 정리해주세요.”
“………….”
만약 자신이 태 실장과 정말 사귀는 사이였다면 꽤 상처가 되었을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왔을 때는 별 생각 없이 보았는데 막상 당하니 자존심도 상하고, 돈이면 단 되는 줄 아나 하는 생각도 들고, 슬프기도 하고, 괜히 가슴이 따끔거리기도 했다. 건주는 새하얀 봉투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뭐라고 해야 할까. 너무 사랑해서 못 헤어진다고 할까?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끝내 고집을 부리면 우리 아이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어요. 우리 애가 유산 한 푼 못 받고 맨손으로 쫓겨나길 원해요? 건주군이 여자이기만 했어도 이런 저속한 짓 안 해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결혼시켰겠죠. 사랑한다면 헤어져줘요. 그게 우리 애를 위한 길이예요.”
조곤조곤한 말투였지만 단호한 힘이 있었다. 어떻게 할까. 한참 망설였던 건주가 봉투를 집었다.
“이 돈은 잘 받을게요. 헤어지는 대가가 아니라 실장님한테 드릴 생각이에요. 저 때문에 유산도 못 받고 쫓겨날 때 이 돈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부탁하신 대로 못 헤어져서 죄송합니다. 전 실장님 없이는 못 살아요. 나중에 실장님이 저한테 싫증이 나서 헤어지자고 한다면, 그땐 헤어질게요.”
최대한 예의바른 말투로 말한 후 카페를 나왔다. 잘한 건지 모르겠다. 건주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회사를 향해 걸었다.
“그러니까 왜 저 몰래 그런 짓을 하셨어요? 그런다고 제가 어머니 뜻대로 할 것 같습니까? 제가 언제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것 보셨어요? 어머니는 아직도 아들을 그렇게 모르십니까? 네. 이만 끊겠습니다.”
발칵 짜증을 내는 어머니와의 통화를 끊은 후 민환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심각한 어투로 통화를 하다 전화를 끊자마자 미친놈처럼 웃는 민환을 직원들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아랑곳 않고 배까지 잡아가며 웃었다.
‘박건주!’
건주가 옆에 있다면 끌어안고 마구 입맞춤이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뭐라고? 돈을 챙겨서 나중에 내가 쫓겨나면 주겠다고?
어쩌면 그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민환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으니 어머니가 기함하는 기분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순둥이처럼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올 줄 알았더니만. 하여간 재밌다. 정말 재밌는 녀석이었다.
처음에는 나무막대기처럼 딱딱하더니 요샌 꽤 경계심이 풀렸는지 제법 말랑해졌고,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좀 더 친해지면 또 얼마나 다양한 표정을 보여줄지 기대가 컸다.
고지식한가 하면 엉뚱한 면도 있고, 딱딱한가 하면 부드러운 면도 있고, 은근히 경쟁심도 있고, 고집도 있다.
스물아홉 살이나 먹은 사내 놈 답지 않게 순진한 면도 있고 말이지. 거기다 끌어안으면 따뜻해서 기분 좋은 몸도 가지고 있고.
민환은 밤사이 저도 모르게 끌어안게 되는 기분의 몸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풍성한 맛도 없고, 보드라운 맛도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기분이 좋았다.
커다란 죽부인을 안고 있는 것처럼 잠이 잘 왔다. 단단해서 꽉 끌어안고 다리도 마음껏 올리기 좋았다.
타고난 피부가 곱고 좋아서인지 가끔 잠결에 여자로 착각해 아랫도리가 반응하려 해서 문제긴 하지만.
엉뚱한 계약의 파트너로 건주를 선택한 것은 정말이지 탁월했다.
“커피 드세요.”
“고마워.”
“근데 이게 무슨 냄새에요? 실장님 향수 뿌려요? 난 향수 뿌리는 남자 바람둥이 같아서 싫어요!”
책상 위에 커피를 내려놓던 여직원이 코를 실룩하더니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민환은 느긋한 태도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향수 아니야.”
“그럼요?”
“내 남자의 향기야.”
“네에? 무슨 소리세요? 내 여자의 향기겠죠. 실장님은 다 좋은데 여자를 너무 밝혀서 흠이에요.
향수가 몸에 배일 정도면 얼마나 오래 끌어안고 있었다는 소리야?”
쿵쿵 걸어가는 직원을 보며 민환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 뵈도 여자 끊은 지 좀 됐다.
그리고 정말 내 남자의 향기이고. 건주의 동료 직원이 직접 만들어서 선물했다는 아로마 비누는 향이 강했다.
가까이 있으면 은은한 향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비누를 같이 쓰는 탓에 지금은 민환의 몸에서도 비누 향기가 나지만,
클레이 사격장에서 처음 비누 향을 맡았을 때는 사실 좀 충격이었다.
남자 몸에서 비누 냄새라니 생각도 못해봤던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사내에게서.
‘이상하지. 똑같은 비누를 쓰는데 건주의 몸에서 나는 향이 더 좋은 것 같으니 말이야.’
민환은 제 손등을 들어 올려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확실히 같은 비누를 쓰는데 풍기는 냄새가 다르다. 건주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좀 더 달큰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코를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을 때마다 건주는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라선 어쩔 줄 몰라 했다. 처음 어머니 앞에서 딥키스를 했을 때는 시큰둥하게 넘어가더니. 지금도 진한 키스를 했을 때 처음처럼 무덤덤한 반응을 보일까?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한 번 해볼까?
아무렇지도 않게, 어떤 거부감도 없이 사내놈에게 키스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깨닫고 민환은 어이가 없어 혼자 잠시 웃었다. 커피를 말끔히 비운 후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 목을 돌리며 뻐근함을 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액정을 보니 건주였다. 어머니와 만났다는 사실을 보고하려고 뒤늦게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민환은 부드럽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나야.”
- 저 건주에요. 오늘 점심때 실장님 어머니를 뵈었거든요.
“흐음. 그래?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이미 다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시침을 떼며 묻자 수화기 너머에서 건주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 민환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 돈을…… 주셔서 일단 받았어요.
“그래? 그래서?”
- 저랑 안 헤어지면 유산 상속자 명단에서 제외한다고 하셨거든요.
주신 돈은 그때 잘 쓰겠다고 했고, 실장님이 헤어지자고 할 때까진 못 헤어진다고 했습니다.
“돈은 받지 말지 그랬나? 그랬으면 더 폼이 났을 텐데.”
일부러 정색하며 말하자 건주가 잠시 침묵했다.
- 만약 실제 상황이었다면 나중에 돈이 꼭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저야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실장님은 아니잖아요. 돈이 없다가 있으면 잘 살지만, 있다가 없으면 불편할 테니까요.
그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숙고 끝에 받은 건데…… 제 생각이 짧았나 봅니다. 죄송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안 받는 편이 더 폼 났을 것 같긴 하네요. 혹시 다음에 또 주시면 그땐 안 받을게요.
…… 과장님이 부르시는 것 같아요. 이따 집에서 봬요.
건주와의 전화를 끊고 유쾌한 기분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경수가 민환을 향해 외쳤다.
“현장 갈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