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3)

***

“좀 더 드세요.”

“별로 생각이 없구나. 둬라. 이따 배고프면 먹을 테니까.”

일부러 멀리까지 사온 죽인데, 수철의 어머니는 몇 숟갈 뜨다 말았다.

“어머니 단팥죽 좋아하시잖아요.”

“자식이 저러고 누워있는데 좋아하는 단팥죽이 무슨 소용이겠니. 입맛도 없다. 네 성의는 고맙다. 바쁠 텐데 꼬박꼬박 찾아와주고. 어제 경태도 왔다갔다.”

“네. 얘기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셋이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친구가 좋긴 하구나. 물 좀 떠오마.”

눈시울을 적신 수철의 어머니가 비지도 않은 물병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 건주는 침대로 다가가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수철을 내려다보았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는데, 왜 깨어나지 않는 걸까. 머리는 참 예민하고 복잡한 부위라 간혹 이런 일이 있다곤 하지만 그게 왜 하필 수철이어야 하는 걸까.

눈을 감고 있는 친구의 안색이 너무 창백해서 더럭 겁이 난다. 건주는 입술을 꼭 깨물며 수철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따뜻하다. 아직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수철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효한테 돈 받아내라고 했지? 그래. 네가 시키는 대로 돈 받아낼 거다. 널 이렇게 만든 대가도 다 받을 거야. 그러니까 어서 눈 떠라. 눈 떠서 통쾌하다며 웃어줘.’

건주는 수철의 손을 꼭 잡았다 놓은 후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철의 상태가 너무 안타깝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자신으로 인해 이렇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커다란 돌덩이에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 분명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녀석이…….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허망하게 져버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적응이 안 된다. 오히려 알고 있는 만큼 더 허탈하고 마음이 아팠다.

혀를 깨물며 돌아서는데 문이 드륵 열리더니 아까 나갔던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그만 가봐라. 너도 가서 쉬어야 내일 또 일하지.”

“네. 또 올게요. 어머니.”

꾸벅 인사를 한 후 터덜터덜 병실을 나왔다. 어깨를 축 내리고 힘없이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으. 젠장. 엄청 아프군.”

“스무 바늘이나 꿰맸으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응? 실장님 목소리 같은데? 뒤를 돌아본 건주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태 실장이 손에 붕대를 감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병원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오후에 통화할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멍하니 서있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가는 감각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곤 서둘러 태 실장의 곁으로 다가갔다.

“실장님. 그 팔 어떻게 된 겁니까?”

건주가 마치 따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네가 여긴 웬일…… 아아. 친구 면회를 다녀가는 모양이군. 별 거 아니야. 현장에 나갔다가 좀 다쳤어.”

갑자기 나타난 건주를 보고 놀랐던 태 실장이 이내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병원에 수철이 입원해 있음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좀이 스무 바늘이에요? 그나저나 누굽니까?”

“내 남자.”

웃음기를 머금은 태 실장의 말에 그를 부축하고 있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농담이 나오세요?”

“전 실장님 댁에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박건주라고 합니다.”

건주와 태 실장의 연인 놀이는 가족 한정이기 때문에 대충 그렇게 말했다.

“아, 반갑습니다. 나경수입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다니 잘 되었네요. 전 사무실 다시 들어가 봐야 하니 실장님 좀 부탁드립니다.”

“아, 예. 걱정 마세요.”

“괜찮으세요?”

스무 바늘이면 보통 큰 상처가 아닐 텐데? 건주는 걱정스럽게 태 실장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거기다 왜 하필이면 오른팔인지. 생활하기 많이 불편할 텐데. 마치 제가 다치기라도 한 듯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건주를 향해 태 실장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 당분간 좀 불편하고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을 테지만 할 수 없지. 차는? 안 가져왔나?”

털털거리던 고물차는 지난주 결국 퍼져버렸다. 정비소에 가져갔더니 속이 엉망이라 버리는 게 낫다는 충고를 듣고 폐차를 부탁하고 왔다. 겉도 그리 멀쩡하진 않았는데, 속은 더 엉망이었나 보았다. ‘겉은 이래도 속은 아주 멀쩡합니다. 정비도 다 했고요.’중고차를 팔았던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건주는 쓰게 웃었다. 그래도 워낙 싸게 사서 그만하면 본전은 뽑았다.

“폐차했어요. 실장님 차는요?”

“사무실 앞에. 나경수 차로 이동했거든.”

“그럼 택시 잡아올게요.”

택시는 바로 잡혔다. 갈증이 났는지 태 실장은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에서 물부터 꺼냈다. 한손으로 뚜껑을 열기 힘든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는 그를 소파에 앉혀두고 대신 컵에 물을 가득 따라 가져다주었다. 그리곤 붕대가 감긴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쩌다 다친 겁니까?”

“아까 말했잖나. 부주의한 사고야.”

“조심…… 하셨어야죠! 현장은 곳곳에 위험 요소가 있어서 몇 배나 더 주의해야한다는 것도 모르셨어요?!”

이유도 없이 목이 메더니 갑자기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 그래도 오늘도 깨어나지 않은 수철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마음이 울적했는데, 태 실장이 부주의한 사고로 다쳤다고 하니 울컥 화가 났나 보았다. 입술을 깨물곤 시선을 슬쩍 들어보니 태 실장이 미간에 주름을 몇 개 잡고 묘한 눈길로 건주를 보고 있었다.

“…….”

“죄송…… 합니다. 작은 사고로도 큰일이 날 수 있다는 거 실장님도 아시잖아요. 수철…… 이만 해도 그렇고. 저희 부모님과 여동생도 그렇고요.”

“그래. 다음부터는 조심하지.”

태 실장은 건주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어깨를 두들기며 부드럽게 웃었다. 갑자기 울컥했던 것처럼 갑자기 힘이 쭉 빠져서 건주는 전쟁에 패한 졸병처럼 어깨를 축 내렸다. 등을 거북이처럼 구부리고 한숨을 내뱉는데 어깨로 팔이 올라왔다. 또 습관적으로 팔을 올렸나 보다, 한 순간이었다. 태 실장의 왼팔에 힘이 실리며 건주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당황해서 어어 하는 사이 건주는 태 실장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상태가 되어 있었다. 건주는 고장 난 인형처럼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친구 상태가 많이 안 좋아?”

“계속…… 의식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또 어떻게 보면 안색이 너무 창백해서 혹시 이대로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말을 채 마무리 짓지도 못하고 건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왠지 눈자위가 까끌거리는 것 같아서 눈을 감았는데, 이마 위로 따뜻한 것이 슥 문질러졌다. 움찔하며 눈을 떠보니 태 실장의 왼손이었다. 그는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건주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턱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참 이상도 하지.”

“…… 뭐가…… 요?”

“보통은 사내놈들끼리 이러고 있으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불편하고 싫은 느낌이 들었을 텐데 넌 괜찮거든. 이제야 하는 말인데, 전에 너와 같이 바에 갔을 때 내게 작업을 걸어왔던 남자가 몸에 손을 대려는데 좀 불쾌하더라고. 게이인 척 하겠다니 나도 참 엉뚱한 계획을 생각해냈다 싶었지만, 상대가 너라서 정말 다행이야. 다른 사내였다면 이미 예전에 계약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다른 수를 강구했을 것 같거든.”

불쾌하게 안 여겨줘서 고맙다며 웃어야 하나. 어째야 하나. 건주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태 실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탓일까. 오늘따라 태 실장의 턱 선이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다.

비가…… 오나? 내가 지금 비 맞고 있나? 몸이 축축한 느낌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뒤척거리던 건주가 결국 눈을 떴다. 이마를 슥 문질러보았는데 손등에 닦여 나오는 것이 없었다. 이상하네? 분명 축축…… 태 실장님! 허둥지둥 태 실장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고, 가끔 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져서 열이 나는데다 자면서도 고통스럽게 미간을 구길 정도로 통증이 심한가 보았다. 하긴. 스무 바늘이나 꿰맸다고 했으니까, 아프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차가운 물수건을 만들어와 태 실장의 몸에 가득한 식은땀을 닦아주는데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뭐라 표현할 순 없지만…… 그냥 이상했다. 태민환이라는 사내도 강철 인간은 아니구나, 하는 느낌 때문에 그런가.

심한 열과 땀 때문에 차가운 물수건은 금세 뜨끈해지고 축축해졌다. 건주는 보일러 온도를 더 높이고, 연신 들락거리며 새로 물수건을 해와 태 실장의 몸을 닦아주었다. 바깥이 서서히 밝아올 무렵 다행스럽게도 열이 내렸다. 그제야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린 건주가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지만 괜찮았다. 뭐라고 할까. 기분이 뿌듯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거, 그게 마음을 한없이 뿌듯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침 대용으로 마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식탁에 앉아 있다가 저도 모르게 졸았나 보다. 꾸벅.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떠보니 맞은편에 태 실장이 앉아 웃고 있었다.

“침 흘렸어.”

건주는 민망함에 볼을 붉히며 손등으로 입가를 슥슥 문질러 닦았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한참 전에.”

한참? 후다닥 커피를 보니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다 식은 커피지만…… 드실래요?”

태 실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건주는 컵에 식은 커피를 따라 물처럼 마셨다. 컵을 내려놓은 건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태 실장이 손을 뻗더니 턱을 슥 문질렀다.

“침 자국, 남아 있었어. 그리고 고마워.”

“뭐, 뭐가요?”

건주는 당황해서 턱을 다시금 박박 문지르며 반문했다. 뭐가 고맙다는 거지?

“밤새 간호해 줬잖아.”

알고 있었나. 깊은 잠에 들어서 모를 줄 알았더니. 건주는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이다 남은 커피를 싹 비운 후 일어섰다.

“별 거 아니에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 먼저 나갈게요. 다녀오겠습니다.”

부드럽게 웃는 태 실장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후 복도로 나왔는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거의 못 잤지만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상쾌한 아침이었다.

***

“으으, 젠장!”

욕실에서 들리는 소리에 슬쩍 문을 열어 본 건주가 허어, 하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하세요?”

“왔어? 보시다시피 머리 감고 있어.”

“제가 보기엔 머리를 감는 것이 아니라 눈을 학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샴푸 거품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태 실장이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한 손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 안 되는군.”

“제가 도와드릴게요.”

건주는 양복 상의를 벗어 침대 위에 던져둔 후 바지와 셔츠를 둥둥 걷었다. 욕실 안으로 들어가 가장 먼저 샤워기로 태 실장 머리의 거품부터 씻어냈다. 왼손으로 샤워기를 들고, 오른손으로 두피를 부드럽게 문지르자 태 실장이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몰랐는데, 태 실장 머리카락이 꽤나 부드럽다. 미역처럼 매끄럽게 손에 휘감겼다. 미역이라는 표현은 좀 웃긴가? 스스로 생각해놓고 웃긴 표현이라며 몰래 키득 웃고 있을 때였다.

“이제야 좀 살겠군. 기왕 도와준 김에 목욕도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태 실장이 불편한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부탁을 해왔다. 건주는 별 부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새벽에 땀을 뻘뻘 흘리는 그의 몸을 닦아주었는데,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찜찜했던 모양이었다.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잠시 계세요.”

드레스 룸으로 가서 반바지로 갈아입은 후 다시 욕실에 돌아오니 태 실장은 욕조 안에 들어가 느긋하게 기대고 있었다. 그러다 돌아온 건주를 보고 욕조 밖으로 나와 똑바로 섰다. 몸에 물기가 흥건해서 비누칠하고, 거품을 씻어내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건주는 우선 샤워 타월에 비누칠을 듬뿍 한 후 자신만만하게 돌아섰다.

‘…….’

잠 잘 때는 늘 보는 몸이고, 자다 보면 엉키기도 하는 몸이지만 이렇게 보니 또 새삼스럽다. 건주는 괜히 머리를 긁적거린 후 숨을 삼키며 태 실장의 몸에 비누칠을 시작했다. 우선 등부터 다리까지 꼼꼼하게 비누칠을 한 후, 앞으로 돌아와 어깨부터 비누칠을 시작했다. 가슴을 지나 복부까지 비누칠을 한 후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가던 건주의 손길이 멈칫했다.

아무리 어떤 사심도 없이 씻겨주는 것이라 해도 거긴 건드리기가 좀 그렇다. 움찔 손을 멈춘 건주가 어딜 보고 있는 건지 깨달은 태 실장도 흠흠, 하고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더운 김이 가득한 욕실 안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괜히 입안에 침이 고였는데 삼키면 커다란 소리가 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다리 좀…… 벌려 보세요.”

태 실장이 다리를 넓게 벌리자 사타구니 안쪽부터 다시 비누칠을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슥슥 닦으면 될 텐데, 자꾸만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움찔움찔 닦다가 손등으로 태 실장의 중심을 툭 건드리고 말았다. 그저 슬쩍 스쳤을 뿐인데도 남자의 몸 중 가장 예민한 부위는 커졌다.

“원래 거기는 건드리면 커지는 부분이야.”

태 실장이 멋쩍은 말투로 말했다.

“네. 저도 잘 알아요.”

재빨리 태 실장의 하반신에 비누칠을 한 후 샤워기를 틀었다. 물소리에 맞춰 침을 꿀꺽 삼킨 후 거품기를 말끔히 씻어냈다. 바싹하게 잘 마른 타월로 몸까지 닦아준 후 건주는 태 실장 모르게 숨을 삼켰다. 드디어 끝났다. 그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정말 별 거 아닌데요. 매번 고맙다고 하시면 쑥스럽습니다. 먼저 나가 계세요. 저도 좀 씻을게요.”

태 실장이 나가고 욕실 문이 닫히는 순간 건주는 곧게 세우고 있던 등에서 힘을 풀었다. 홀로 생각해 보니 웃긴다. 태 실장은 별 생각이 없었을 텐데 혼자만 어색해하고 긴장했던 것 같다. 목욕탕에 가면 벌거벗고 남의 손에 몸을 내맡기기도 하는데 말이다.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으며 바지를 벗던 건주의 이마에 내천이 생겼다. 아랫도리가 살짝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건주는 난감한 낯빛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그 날인가? 완전히 발기한 것이 아니라 굳이 손으로 풀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냥 내버려둔 채 샤워노즐을 힘껏 틀었다. 그리곤 몸을 씻고 나와 함께 저녁을 먹고 뉴스를 보며 자잘한 담소를 나눈 뒤 잠자리에 들었다.

어제 거의 날밤을 샌 터라 침대에 누우면 곧바로 시체처럼 잘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자고 싶은 마음은 태산처럼 쌓여있는데, 눈은 마음과 달리 말똥거렸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고 있는데 침대가 살짝 일렁거리는 것 같더니 등에 뜨끈한 것이 닿았다. 바로 태 실장의 맨살이었다. 똑바로 누워 자고 있던 그가 옆으로 돌아누운 탓에 몸이 닿은 것이다. 건주 역시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자세라 엉덩이 부근에 태 실장 성기가 닿아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잘만 잤는데 오늘따라 묘하게 의식된다.

아마 피곤한데 잘 수 없어서 신경이 곤두서있는데다 아까 욕실에서 그런 일도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냥 죽이지 말고 손으로 풀어주는 건데…….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지만.

‘내일부터는 속옷이라도 걸치고 자라고 할까?’

내내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미치겠다. 오늘따라 갑자기 왜 태 실장의 성기가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건주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태 실장과 살짝 거리를 둔 후 눈을 질끈 감았다.

양을 오백 마리 가량 셌을 때야 겨우 잠이 왔다.

“나경수.”

“네.”

“목욕탕에 가면 가끔 때밀이에게 몸을 맡기기도 하나?”

민환의 물음에 나경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창 업무에 대한 지시를 내리던 중에 뜬금없이 던진 질문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대답해 봐.”

민환의 재촉에 나경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가끔 때 밀기 귀찮은 날에요. 돈은 들지만 제가 미는 것보다 말끔하게 밀리거든요.”

“혹시 그럴 때 말이야, 이상한 기분…… 같은 것도 느끼기도 해?”

“이상한 기분이라니…… 실장님! 저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배 나온 중년 아저씨가 때 밀어준다고 느낄 사람으로 보이세요?! 저 변태 아닙니다. 요즘 정말 왜 그러세요? 전에는 제 소중한 물건을 보고 흉측하다는 소리를 하시더니!”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은 나경수는 “담배 좀 피고 오겠습니다.”하곤 회의실을 휙 나가버렸다. 민환은 머리를 뒤로 꺾으며 허, 하고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목욕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는 목욕탕의 때밀이를 부르는 것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건주의 손길이 중심을 스치는 순간 그만 느껴버리고 말았다. 찰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의 스침이었는데 말이다.

‘욕구불만인가?’

그러고 보니 첫 경험이후 여자 없이 이렇게 오래 지내본 적은 처음이다.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여전히 여자를 만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제 나도 늙은 건가. 욕구가 별로 안 드는 것을 보면, 하고 생각했었는데 어제의 일을 돌이켜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나저나 참 곤란하게 되었다. 오른팔을 멀쩡하게 쓸 수 있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 동안 샤워를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건주에게 몸을 내맡겼다가 매번 느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난감하다. 건드리면 느끼는 것이 남자의 본능이라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무에게나 느껴버리면 단순히 변태밖에 안 된다. 이 경우에는 아무나가 아니긴 하지만. 골치 아픈 상황에 한숨을 푹 내쉬고 있는데 핸드폰이 떨렸다. 꺼내 보니 차혜련이다. 민환의 이마에 대번에 주름살이 패였다.

“왜?”

- 좀 만나요.

“우리 사이에 더 볼 일이 남아 있나?”

- 당신!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거예요?

“너야말로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처음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 우린 단순히 즐기는 사이일 뿐이라고 말이야. 너도 동의했고.”

- 그, 그건…….

“그건 내가 오성의 둘째 아들임을 알기 전이란 소릴 하고 싶은 건가?

- …….

저쪽에서 숨을 짧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민환은 혀를 쯧 찼다.

“끊어. 그리고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내 핏줄도 아닌 아이를 가지고 나와 결혼할 생각은 이제 그만 접는 것이 좋아.”

- 끝내 그런 식으로 나오는군요. 후회하게 될 거예요.

민환은 핸드폰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설마 언론에 흘리기라도 할 건가? 젠장! 정말 골치 아픈 여자다. 찌푸린 눈매로 톡톡 테이블을 두들기던 민환이 핸드폰을 들었다.

“접니다. 김 비서님. 전에 말씀드린 것 있지 않습니까? 네, 차혜련이 만나던 남자 신변확보 해주십시오.”

어쨌든 한때 몸을 섞었던 여자이니 되도록 좋게 끝내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이렇게 나온다면 할 수 없었다. 민환은 서늘한 눈빛으로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

토요일 오전. 세탁소에서 온 사람에게 일주일치의 세탁물을 모조리 보낸 후 건주는 청소기로 집안 구석구석을 밀기 시작했다. 태 실장은 살림 도우미를 쓰지 않는다. 세탁물은 일주일치 모아서 토요일에 세탁소로 보냈고, 청소는 직접 했다. 처음에는 양말은 물론 속옷까지 보내는 것을 보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그런 것까지 세탁해주나?’하고 놀라기도 했지만 이젠 익숙해지기도 했고, 사실 편했다. 세탁물을 모아서 보내면 다림질까지 다 되어서 돌아오니까.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고, 스팀 청소기로 구석구석 닦는 동안 태 실장은 소파에 앉아 건주를 뚫어져라 보았다. 이쪽으로 가면 시선이 이쪽으로 따라오고, 저쪽으로 가면 저쪽으로 따라온다. 하도 쳐다봐서 뒷꼭지가 근질근질할 지경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내가 염치없는 놈이 된 것 같아서. 청소기 정도는 밀 수 있다니까.”

“괜찮아요. 괜히 무리하다 덧나면 곤란하잖아요.”

“청소기 좀 민다고 덧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아픈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보다는 스스로 하는 것이 나았다. 요리는 젬병이라도 청소는 썩 잘 하는 편이라 그다지 힘들 것도 없었다.

“그래도요. 가능하면 무리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내 팔이 다 나을 때까지만 사람을 쓰도록 할까?”

느릿하게 중얼거린 말에 건주가 바닥을 밀던 손길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집에 낯선 사람이 들락거리는 것이 싫다면서요?”

내가 없는 사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들락거리는 것이 싫다. 그런 이유로 되도록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하고 있다, 라고 말했었다.

“그렇긴 한데…….”

“저 때문이라면 그러지 마세요. 청소는 꽤 하거든요.”

건주는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청소기 두 개를 다용도실에 넣어두고 돌아서는데 문자음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보니 재효였다.

「이따 좀 만나.」

건주는 슬쩍 태 실장의 눈치를 살핀 후 답장을 보냈다.

「어디서?」

「8시. 종로.」

알았다고 답변을 보낸 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이 딱 일주일째였다. 일주일 내내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신경이 쓰였는데, 마지막 날 만나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돈을 준비했는지, 아니면 다른 걸 준비했는지 나가보면 알 것이다.

‘태 실장님 혼자 두고 나가기가 좀 그런데…….’

문제는 태 실장이었다. 사지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다친 것도 아닌데, 일단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혼자 두는 것에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이런! 제길. 본가에 잠시 다녀와야겠어.”

건주가 괜히 집안 이곳저곳을 서성이는 동안 작업실에 들어가 있던 태 실장이 혀를 차며 나왔다.

“무슨 일 생겼어요?”

“내가 다친 걸 부모님이 아신 모양이야. 당장 오라는군.”

“모셔다 드릴까요?”

그 손으론 운전도 못할 테니까.

“집에서 차를 보낸다고 했으니 그거 타고 다녀오면 돼. 아무래도 저녁까지 먹고 올 것 같은데.”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저녁 때 약속이 생겨서 이따 나갈 겁니다.”

“그래? 그럼 저녁 맛있게 먹고 와.”

고개를 끄덕인 후 태 실장이 옷을 갈아입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나가자 넓은 집안이 더 넓게 느껴진다. 왠지 썰렁한 마음이 들어서 괜스레 어깨를 한껏 움츠리며 텔레비전의 볼륨을 한껏 높였다. 그리곤 멍하니 브라운관을 쳐다보며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7시가 되자 옷을 갈아입었다. 아파트를 나서며 경태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더니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재효를 만나기 위해 종로로 가는데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재효가 어떤 식으로 나올까. 반응이 예상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아무 것도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목이 타서 편의점에서 생수를 한 병 사마신 후 만나기로 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각에 도착했는데, 재효는 이미 와 있었다. 건주는 어깨가 뻣뻣할 정도로 온몸에 힘을 준 후 재효를 향해 다가갔다.

“받아.”

앉기가 무섭게 재효가 흰 봉투를 테이블 위로 휙 내던졌다. 아무 말 없이 봉투를 집어 안을 살펴보니 천만 원 권 수표 세 장이 들어있었다. 우선 봉투를 챙겨 주머니 안에 넣어둔 후 서늘하게 재효를 보았다.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은 아니겠지? 난 분명 다 돌려달라고 했을 텐데. 거기에 수철이의 병원비까지 더해서.”

삼천은 큰돈이지만, 재효가 훔쳐간 액수에는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삼천으로 모자라단 뜻이지?”

“…….”

라이터를 탁 켠 재효가 신경질적으로 입매를 비틀었다.

“좋아. 우선 그것만 받아둬. 우선 당장 마련할 수 있었던 목돈은 그게 다니까.”

“그런 식으로 시간 끌어봤자 소용없어. 잡음 없이 정난희와 결혼하고 싶다면 빠른 시일 내에 돈 내놔. 그간의 정이 있으니 지금부터 딱 일주일 더 줄게. 그 안에 돈 다 내놓지 않으면 네 과거에 대해 한 건씩 터뜨려 줄 테니 알아서 해.”

건주의 협박에 재효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눈꺼풀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겠지만, 그러기엔 재효에겐 켕기는 과거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정난희는 재효에게 너무나 매력적이면서 절대 놓칠 수 없는 커다란 먹잇감이고.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 알고 있어?”

은근한 협박이었다. 건주는 재효를 향해 조소했다.

“물론 알고 있지. 바로 내가 그런 경우거든. 궁지에 몰리다 못해 너를 물려고 이렇게 나서고 있잖아. 적당히 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내가 너를 물어버리려는 마음을 먹지도 않았을 거 아냐.”

토요일 밤이라 그런지 술집 안은 사람들로 와글와글했다. 건주는 들뜬 소란 가운데에 재효를 내버려두고 술집을 나왔다. 그리곤 경태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다. 멀지 않은 곳으로 약속장소를 잡았기 때문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요새 일이 바쁜지 경태는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연신 하품을 해댔다. 건주는 피식 웃으며 다가가 맞은편으로 앉았다.

“오랜만이다.”

“어.”

경태도 건주도 수철의 병원에는 자주 가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엇갈렸다. 둘 다 서로의 일로 바빠 따로 약속을 잡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병원에는 자주 들른다면서? 어떻게 한 번도 안 마주치냐.”

“그러게. …… 이거 받아라.”

건주는 아까 재효에게 받았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돈.”

“도온?”

“어. 이 돈으로 수철이 병원비 계산해.”

봉투를 열어 금액을 확인한 경태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그러나 경태는 곧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미심쩍게 건주를 쳐다보았다. 건주에게 이렇게 큰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어디서 난 돈이야?”

“그건 나중에 얘기해줄게.”

“…….”

“훔친 돈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네가 뭘 훔칠 주제나 되냐? 흐음…… 좀 수상하긴 하지만 나중에 얘기해준다니 그냥 넘어갈게. 그것보다 왜 나보고 계산하래? 네가 직접 하면 돼지.”

건주는 짧게 웃었다.

“아들 친구 돈이라 안 받으려고 하실 거 아냐. 특히 몹시 불쌍한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내 돈은. 그러니까 나중을 대비해서라도 네가 계산한 걸로 해.”

수철의 어머니에게 건주는 여전히 부모도 없는 불쌍한 녀석이었다. 그리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은 것도 아닌데, 어머니 눈에는 무척 안 돼 보였던 모양이다. 만날 때마다 경태보다는 건주를 더 애틋해하고,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애를 쓰시곤 했다. 명절 때나 기념일 같은 때 경태가 주는 선물은 기분 좋게 받으시면서 건주의 것은 마지못해 받으셨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거 사오지 말라는 말씀을 꼭 덧붙이면서. 그걸 잘 알고 있는 경태가 피식 웃더니 봉투를 챙겨 넣었다.

“알았어. 저녁은 먹었어? 안 먹었지? 나도 안 먹었으니 밥 먹으러 가자. 근처에 닭갈비 잘하는 집 있어.”

하루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Copyright 1999-2010 Zeroboard / skin by JY달콤한 계약 1110.04.23 20:3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