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T 18
닭갈비에 밥을 볶아 배부르게 먹고, 거기에 반주로 소주까지 한 병 곁들였더니 딱 좋았다. 조만간 또 보자고 말하는 경태를 보내고 건주는 버스를 타고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 들어선 후 텅 빈 놀이터를 지나가는데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대낮에는 아이들로 들끓었던 놀이터는 밤이 되면 인적이 딱 끊겨서 어쩐지 스산한 느낌마저 준다. 건주는 흐음, 하고 숨을 들이켠 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어느새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술은 반주로 한 병밖에 안 먹었지만, 경태와의 얘기가 좀 길었다. 그렇다고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다. 회사 얘기, 희영씨 얘기, 그리고 수철이 얘기.
바삭바삭.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린 건 놀이터를 거의 지났을 때였다. 건주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
“뭐야? 왜 그렇게 놀라?”
태경환이었다.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바짝 긴장했던 건주는 커다랗게 한숨부터 내쉰 후 뚱한 표정의 태경환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서 뭐해요?”
“내가 여기서 뭐하겠어? 형 집에 가던 중이지.”
“실장님 아까 본가에 가셨는데…….”
“알아. 아까 저녁 먹고 갔대. 난 오늘 하필 약속이 있어서 형이랑 저녁 못 먹었거든. 그래서 얼굴이라도 보려고 온 거야.”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태경환이 설렁설렁 걸어 건주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아는 사이라고 무시하고 홀로 가버리려는 건 아닌가 보다, 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을 때였다. “왜 웃어?”하며 불퉁하게 말하던 태경환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굳었다. 왜냐고 묻기도 전이었다. 등 뒤에서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건주는 컥,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숨을 삼키며 시선을 들어보니 사나운 인상의 사내 셋이 건주를 향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혼자가 아니잖아.”
“무슨 상관이야? 둘 다 손보면 되지.”
“그렇지만…….”
“함께 있는 새끼 좀 봐. 부들부들 떠는 폼이 오줌이라도 지릴 기센데?”
“저게 사내새끼냐? 떨긴 왜 떨어. 병신 같이.”
사내들이 킬킬 웃었다. 태경환을 바라본 건주가 눈을 부릅떴다. 사내들의 말대로 태경환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폭력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의 본능일 수 있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좀 지나친 반응이었다. 눈동자가 풀린 것을 보니 이성마저 마비된 것 같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휘잉! 바람을 가르며 사내의 주먹이 날아왔다. 사내 중 한 명이 완전히 얼어붙어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있는 태경환을 향해 다리를 들어올렸다. 건주는 반사적으로 태경환을 끌어안았다. 퍽!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옆구리가 저릿했다. 뒤이어 허리와 다리, 그리고 머리에도 충격이 왔다.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몸 전체가 저릿저릿했다. 우릿하게 퍼지는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내들은 즐거운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실실 웃으며 태경환을 꽉 끌어안고 있는 건주를 향해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해댔다. 건주는 이를 악물었다. 강재효! 돈의 일부를 줘서 방심하게 해놓고 뒤에서 이런 수작을 부렸단 말이지? 혀를 깨물었는지 혓바닥이 갈라지는 것처럼 아프더니 이내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결국엔 폭력까지 동원할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지만, 시기가 예상보다 빨랐고, 설마 태 실장의 아파트 앞에서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옆엔 태경환도 있는데 말이다. 야망에 눈이 멀어 태 실장도 안중에 두지 않게 된 건가? 재효의 입장에서 태 실장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닌데?
생각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폭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퍽! 사내의 발길이 등줄기를 치는 순간 건주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가로 피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선뜩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찰나인 것도 같고, 영원인 것도 같았다. 잘못 맞았는지 어깨에서 우득 하는 소리가 났을 때였다. 멀리서 삐, 삐삑, 하는 순찰 돌던 경비원 아저씨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웬 영감탱이야?!”
“크게 소란 피워서 좋을 것 없어. 이만 가자.”
“잠깐, 돈은……. 그리고 아직…….”
거기까지가 건주의 한계였다. 경비원 아저씨가 온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건주는 사내들의 말을 다 듣지도 못하고 잠깐 의식을 놓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자꾸만 몸을 흔들고 뺨을 가볍게 톡톡 치는 느낌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태 실장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마치 심장이라도 잃어버린 것처럼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 장님.”
“괜찮나? 정신이 좀 들어?”
건주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 실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왠지 든든한 울타리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 같은 진한 안도감을 느끼며 건주는 또 다시 의식을 놓았다.
똑. 똑. 어딘가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수돗물을…… 덜 잠갔나? 꽉 잠가야 하는데. 이상하다. 몸이 안 움직인다. 돌로 만든 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묵직했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몸이 무겁지?
입안이 아프다. 허리도 아프고, 가슴도 아팠다. 아프지 않은 부위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온몸이 욱신욱신했다.
“으으…….”
건주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새하얀 천장이 보인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에 약 냄새가 섞여 있는 것을 보니 병원인 것 같았다.
“깼어?”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시선을 돌려보니 침대 옆에 태 실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입술이 거칠거칠하고 피부가 푸석푸석한 것을 보니 건주의 곁을 지키느라 밤이라도 샌 모양이었다. 건주는 태 실장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경환씨는요?”
“그 녀석은 괜찮아.”
“그래요? 다행이다. 이런 말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좀 정상이…… 아닌 것 같아 보였거든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폭력을 보고도 태경환은 파랗게 질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를 감싸 안았던 것 같다. 물론 자신으로 인해 또 다른 누군가가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작용한 행동이었다.
“트라우마 때문에 그래.”
“트라…… 우마요?”
“중학교 때 학교에서 심하게 따돌림을 당했거든. 당시 학교 일진인지 뭔지 하는 놈한테 찍혀서. 그 놈들이 영악하게 얼굴은 안 건드려서 감쪽같이 몰랐는데, 어느 날 경환이 놈에게 화가 나 순간적으로 손을 드는 순간 녀석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더라고. 그래서 캐물었더니 학교에서 심한 따돌림을 당했던 데다 매일 놈들에게 맞았더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태 실장의 목소리에선 은은한 분노가 느껴졌다.
“…… 아.”
전혀 짐작도…… 못했다. 형에게 좀 집착하고, 버릇은 없지만 그래도 귀여운 구석이 있는, 구김살 없이 자란 도련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충격이었다.
-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거거던.
함께 술을 마셨을 때 태경환이 했던 주정이 얼핏 떠올랐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구나.
“어릴 때 저만 외가에 맡겼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녀석이 뚱해 있는 상태여서 모난 자존심에 말을 안 했나 봐. 옷을 벗겨봤더니 멍이 안 든 곳이 없더군. 그걸 보는데 어찌나 화가 나던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학교에 찾아가서 그 새끼들 찾아내 반죽도록 팼어.”
“…… 설마요.”
태경환이 중학생 때면 태 실장은 이미 성인이었을 텐데, 아무리 화가 났다고 찾아가서 어린 학생들을 팼을까. 아마 다른 식으로 징계를 했겠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건주를 향해 태 실장이 픽 웃었다.
“정말이야. 진짜로 내게는 콩만 한 녀석들을 거의 반죽음이 되도록 팼어. 그래 봬도 경환이 놈, 내게는 소중한 동생이었거든. 그 일로 꽁한 마음이 풀렸는지, 그 뒤로는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게 되었지만.”
농담이…… 아니었구나. 건주는 복잡한 심정으로 입을 벌렸다. 만약 미주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매일 맞았다면 자신도 화가 나 동생을 괴롭힌 애들을 마구 패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겠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을 것 같다. 다른 방법으로 처벌을 가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태 실장의 행동이 후련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니기도 한 복잡한 마음이었다.
“왠지 좀 복잡한 마음…… 으읏.”
몸을 움직였더니 사방팔방 다 아팠다. 인상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내는 건주를 보며 태 실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 뭐가…… 요?”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못난이 인형처럼 당혹스럽게 입을 벌리는 건주의 이마를 태 실장이 검지로 툭 쳤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내 탓인 것 같아.”
“네에? 그게 무슨…….”
“진작 확실하게 정리했어야 하는 건데. 설마 이런 짓까지 벌일 줄은 몰랐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이번 일은 재효의 짓이었다. 설마? 순간 당황했지만 만약 재효와 자신의 관계를 알았다면 ‘내 탓이다.’라고 말하진 않았을 거다. 그럼 무슨 의미지? 확실한 정리는 또 뭐고? 머리 전체에 둔한 통증이 있어서 깊은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어 통증을 몰아내려 애쓰며 다시 한 번 태 실장을 향해 질문을 던지려던 순간이었다. 병실 문이 열리더니 음울한 표정의 태경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눈을 뜬 건주를 연신 힐끗힐끗 보더니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가왔다.
“의사 말이 죽지는 않을 거래. 2-3일 쉬었다가 퇴원해도 좋다니까 괜히 아픈 척 생색내며 병원에 드러누워 있지 말고 사흘 후에 퇴원해.”
건주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태경환은 창문을 힐끔대며 말을 이어나갔다.
“똑바로 인사 안 해?!”
“이, 인사는 무슨 인사!”
뒤통수를 후려치는 태 실장을 향해 태경환이 발끈해서 외쳤다. 입매를 실룩거리는 태경환은 심사가 몹시 복잡해 보였다. 자신의 치부를 건주에게 보인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 순간 아무 것도 못하고 얼어있었던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하고 그럴 테지. 순순히 고맙다고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테고.
“전화 받고 올 테니 확실히 인사 해.”
태 실장이 드르르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인사는 무슨 인사.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태경환이 입을 불퉁 내밀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건주는 작게 미소 지었다.
“경환씨가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제 몸이 이만한 것도 다행이었다. 그때 경비원 아저씨가 순찰을 돌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거다.
“그냥 경환이라고 불러!”
태경환이 불퉁하게 외쳤다.
“…… 네?”
“존댓말도 하지 말고. 전에 술 마실 때 그랬잖아. 왜 나보고 반말하냐고. 그래서 내가 꼬우면 너도 반말하라 그랬고. 그러니까 너도 그냥 바, 반말 해!”
“…….”
“차, 착각하면 곤란해. 우리 형과의 사이 인정한 거 아니니까. 끝까지 반대하고, 갈라놓을 거야!”
잘 익은 홍옥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 태경환이 아씨, 하고 욕설을 내뱉더니 병실을 휙 나가버렸다.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한동안 눈만 깜박깜박하던 건주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니까 이건 태경환씩 감사 인사인가?
통화가 길어지는지 태 실장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똑똑.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는 링거액을 보고 있자니 살금살금 잠이 온다. 건주는 가물가물 내려앉는 눈꺼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스륵 잠이 들었다.
‘철민이한테…… 연락해봐야 하는데…….’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의식의 절반 이상이 날아간 이후였다.
김 비서와의 통화를 끝내고 병실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건주는 다시 잠이 들어있었다. 민환은 물끄러미 건주의 얼굴을 내려다 보다 터져서 부은 입술을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았다. 열이 나는지 닿은 부위가 뜨끈했다.
화가…… 난다. 어젯밤, 경환의 등에 업혀 온 건주를 봤을 때도 손끝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났었다. 얼굴에 온통 흙칠을 하곤 시커먼 눈물을 질질 흘리는 동생의 얼굴보다 맞아서 피를 흘리며 기절해 있는 건주의 모습에 더 분노가 치밀었다. 이토록 화가 나는 이유는…… 글쎄다.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간 같이 살면서 박건주라는 사내를 꽤 가까운 사이로 인식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친한 친구나 혹은 동생처럼 말이다.
어떤 이유로든 자신이 아끼는 누군가를 다른 사람이 건드렸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기분이 못 되었다. 불쾌하고, 아니다. 불쾌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섬뜩한 분노가 가슴을 치며 지나갔다. 마치 품안에 소중히 품고 있던 꽃 한 송이를 누군가 가로채 짓밟은 듯한 기분이라고 할까.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듯 화가 나 본적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경환이 놈이 학교에서 구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분노가 치밀었다.
민환은 다시 한 번 건주의 부르튼 입술을 살짝 만져보았다. 통증이 느껴지는지 건주가 자면서도 움찔 몸을 떨었다. 으음.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신음성에도 고통스러운 흔적이 깃들어 있었다. 새삼 피부를 타고 싸늘한 분노가 올라온다. 민환은 선뜩하게 입매를 비틀며 병실을 나왔다. 다시 잠들었으니 건주는 아마 한참 깨지 않을 거다. 건주가 잠들어 있는 동안 잠시 다녀올 데가 있었다.
“형?”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오던 경환이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민환을 보고 움찔했다.
“다녀올 데가 있다. 네가 건주 옆에 좀 있어. 깨기 전에 돌아올 테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 여자…… 한테 가는 거야?”
경환이 민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민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 누군지 몰라. 갑자기 덤벼들었어. 난 무, 무서워서 꼼짝도 할 수 없었어. 씨, 쪽팔리게. 내 나이가 몇 갠데,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아직도 이래. 하아. 미치겠다. 내 자신한테 너무너무 화가 나. 형, 나 내가 싫어서 미치겠어.’
어젯밤 처연하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경환이 한 말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떠는 동생의 등을 다독이고 있을 때 번뜩 시선을 든 경환이 뭔가 생각난 것이 있는 듯 말했다.
‘그런데 그자들이…… 이상한 소리를 했어. 남의 남자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돈 얘기도 했는데 그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남의 남자……. 그 말을 들은 순간 차혜련이 떠올랐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했던 말도. 이거였어? 차혜련? 이런 짓까지 했단 말이지.
“형. 때리지는 마. 여자고, 임신도 했잖아.”
혹시 임신한 여자를 때리는 파렴치범이 될까봐 걱정이 되는지 경환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웅얼대듯 말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짓은 안 해. 더구나 이 팔로는 때릴 수도 없고.”
민환은 붕대를 감은 오른팔을 들어보였다. 사내놈이었다면 팔이 이 모양이어도 아랑곳 않고 박살을 내버렸을 테지만.
“지금 형 표정이 얼마나 섬뜩한지 알아? 아무리 분노가 치밀어도 절대, 절대 임신한 여자에게 손대는 짓은 하면 안 된다?”
섬뜩하다고? 경환이 놈이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나? 내가? 표정을 풀려고 애써 보았지만 일그러진 근육은 도통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제길! 이렇게 화가 나는데 표정이 풀어질 리 없지.
“걱정하지 말고 건주 옆에 있어.”
“응.”
힘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가는 경환을 확인한 후 성큼성큼 걸어 병원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조수석에 올라탄 후 뒤를 돌아보니 계집처럼 말끔하게 생긴 사내가 겁에 잔뜩 질린 채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혜련의 남자였다. 직업은 호스트. 나이는 고작 스물둘. 새파란 애송이였다.
“어디서 찾았습니까?”
민환이 김 비서를 향해 물었다.
“부산에 있었습니다.”
차혜련의 임신 사실을 알고 곧바로 부산으로 잠적한 모양이었다. 민환은 사내를 향해 냉소한 후 앞을 보고 앉았다. 고개를 끄덕인 순간 차가 출발했다. 민환이 향한 곳은 차혜련이 살고 있는 빌라였다. 사내를 끌고 내린 후 빌라 문을 쾅쾅쾅 두들기자 “누구세요?”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문 열어.”
“민환씨?”
민환의 목소리를 들은 차혜련이 즉시 문을 열었다. 민환은 사내를 끌고 안으로 성큼 들어가 귀찮은 짐을 내던지듯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사내를 본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노는 동안 할 만큼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준 것들이 부족했나? 저 사내의 새끼를 배놓고 내 아이라 거짓말로 날 농락하더니, 이젠 건주에게 손까지 대?!”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한때나마 나와 살을 섞은 여자라 봐주려고 했는데 끝까지 나를 농락해?! 넌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른다는 것도 몰라?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니까요!”
비릿한 미소를 지은 민환이 사내를 복부를 퍽 걷어찼다. 배를 움켜쥔 사내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네가 말해.”
“혜, 혜련이 뱃속에 든 아, 아이는 제, 제 아이입니다. 이, 일부러 임신을 했고 일이 다 해, 해결될 때까지 저는 잠적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미쳤어?!”
사내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차혜련이 비명을 질렀다.
“이래도 내 아이라고 우길 텐가?”
“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언론사에 제보하겠어요! 인터뷰하겠다고 달려들 잡지가 수십 개는 될 걸요?”
민환은 그녀를 향해 냉소했다.
“그래? 지금 당장 불러. 단, 여기가 아니라 병원으로. 기자들 앞에서 유전자 검사를 해보자고. 뭐합니까? 김 비서님! 저 새끼와 여자를 끌고 병원으로 가지 않고요! 산부인과 수배해뒀겠죠? 그리고 잡지사 기자들 다 불러 모으세요! 이만한 소스라면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올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병원도 이미 검사 준비가 다 되어 있을 겁니다. 태아에는 전혀 지장이 가지 않게 검사를 끝낼 수 있답니다.”
“그리고 경찰에도 연락하세요. 이것도 일종의 사기니까 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안 되면 없는 죄라도 만들어내서 쳐 넣으라고 하세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리고 저 여자 부모에 대해서도 낱낱이 조사해 보고하세요.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매장을 시켜버릴 테니까.”
살기마저 감도는 눈빛을 본 차혜련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김 비서가 다가가자 파랗게 질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차혜련이 소파에 털썩 무너지듯 앉았다.
“내가 적당히 끝내려고 할 때 알아서 물러났어야지. 감히 내 사람에게 손을 대? 끝까지 한 번 가보자고. 나야 추문 때문에 두어 달 귀찮고 말 테지만, 너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거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주지.”
한 톨의 농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자신을 농락하고 건주를 상처 입힌 것에 대해 처절하게 갚아줄 생각이었다. 차혜련은 싸늘하고 섬뜩한 말에 잔뜩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게 참아줄 때 적당히 했어야지. 왜 건주를 건드려서 나를 이렇게 화나게 만들어?!
“내, 내가 한 짓이 아니에요!”
다음 순간 차혜련이 절박하게 외쳤다.
“뭐?”
“당신 아이라고 우기면 결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당신의 추잡한 사내 애인을 건드린 건 내가 아니란 말이에요!”
“무슨 소리야?! 끝까지 발뺌할 셈이야?!”
“정말이에요. 당신 사촌동생 약혼자인가 하는 남자가…… 포, 폭력이라도 써서 당신 애인을 쫓아내면 결국엔 집안의 뜻에 따라 겨, 결혼할 거라고…….”
“뭐?”
민환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차혜련이 지금 뭐라고 했지? 난희의 약혼자라고? 강재효가 왜?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운 표정으로 차혜련에게 다가가 냉소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난생 처음 보는 민환의 냉혹한 모습에 벌벌 떨고 있는 차혜련의 눈동자에 거짓은 없었다.
“정말이겠지?”
“저, 정말이에요.”
그녀는 절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을 떠나.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또 한 번 내 눈에 뜨였다간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차혜련의 빌라를 나와 차에 올라탄 후 민환은 눈을 감았다. 강재효가 부추겼다고? 왜? 난희의 약혼자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긴 했지만, 민환은 그녀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강재효에 관한 문제라면 이모 부부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 비서님.”
“네.”
“강재효에 대해 알아보세요. 그의 과거에 대해 세세히 캐오세요. 되도록 빨리.”
강재효가 느닷없이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 이유를 알아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민환은 눈을 감으며 싸늘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이유가 무엇이건 건주에게 상처를 입힌 대가는 받아낼 생각이었다. 누구라도 건주를 건드리면 용서 못한다. 절대로!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민환은 차갑게 분노했다.
병원으로 돌아오니 건주와 경환 둘 다 자고 있었다. 민환은 소파에 웅크리고 잠든 동생의 몸에 담요를 덮어준 후 침대로 다가갔다. 입술을 약간 벌리고 열에 들뜬 숨을 내쉬고 있는 건주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이상하다. 안타깝고 쓰렸다. 심장이 조여들고, 심한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욱신욱신했다. 내 마음이 왜 이렇지? 나로 인해 이렇게 되었다는 죄책감 때문인가?
‘제 놈이 무슨 흑기사라도 되는 줄 알았나? 그 와중에 경환이는 왜 감싸선…….’
구석구석 맞지 않은 곳이 없는 건주에 반해 경환은 따로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거의 멀쩡했다. 긁힌 자국과 멍이 몇 군데 있는 것을 빼면 말이다. 그것만 봐도 건주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경환을 감쌌는지 알 수 있었다.
하여간 알다가도 모를 사내였다. 박건주란 사내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빴을 판에 경환이까지. 민환은 묵직한 한숨을 내쉰 후 건주의 환자복을 살짝 들춰보았다. 어깨에 퍼렇게 피멍이 들어있다. 마음이 정말 안 좋다. 그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피멍이 든 부분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리고 맞아서 부은 얼굴도, 시퍼렇게 멍이 든 다리와 팔도, 온몸 구석구석 조심스러운 손길로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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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 18
몸에 박혀있던 뭔가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건주는 흠칫거리며 눈을 떴다.
“나 때문에 깬 건가?”
태 실장이 건주의 팔에서 빼낸 링거 줄을 들고 멋쩍게 서 있었다. 병이 비어서 줄을 뺀 건가 보았다. 아까 눈을 떴을 땐 환했는데, 다시 눈을 뜨니 밤이었다.
“왜 아직 계셨어요?”
“환자를 두고 어떻게 가? 나 그렇게 매정한 놈이 아니야.”
환자라고 하니 민망하다. 건주는 이제 자유로워진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잠은 편히 주무셔야…… 흠. 흠흠.”
말을 하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갈라졌다. 피식 웃은 태 실장이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다 주었다. 건주는 상체를 일으킨 후 물을 받아 정신없이 마셨다. 몰랐는데 꽤나 목이 탔던 모양이었다. 500ml 짜리 생수 한통을 순식간에 다 비웠다. 태 실장이 더 줄까, 하고 물어 와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양제를 계속 맞았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지만, 배는 안 고파?”
“안 고파요. 고프다고 해도 이 시간에 먹을 수도 없잖아요.”
힐끔 벽시계를 보니 밤 11시였다. 병원 매점도 이미 예전에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다.
“바깥에 나가서 사오면 돼. 사올까?”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라 건주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안 고파요. 그보다 피곤해 보이는데 집에 들어가서 주무세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 제 핸드폰은?”
그러고 보니 내일은 월요일. 이 몸으로 회사에 출근은 못 할 테니 전화로라도 사정 설명을 해야겠다. 이러다 잘리겠어. 건주는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철민에게도 연락을 취해야 하고.
태 실장이 서랍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주의 손에 쥐어주었다. 건주는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배터리가 아직 남아있었다.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부스럭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지? 시선을 들어보니 태 실장이 침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건주는 황당해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 하세요?”
“자려고.”
“네에?”
편안한 집에 가서 자라니까 왜 침대 위로 올라오는 겁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건주를 향해 태 실장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소파는 불편해서 못 자. 좀 좁긴 하지만 같이 못 누울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옆으로 좀 비켜나 봐.”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여 침대에 태 실장이 누울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굳이 병원에서 자겠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 침대를 쓰는 것이 처음도 아니니 꺼릴 까닭이 없었다. 침대가 좁아 몸을 꼭 붙여야 했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하루 종일 잔 터라 또 잠이 올 것 같진 않았지만, 밤이라 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까 한 말이 무슨 뜻입니까? 실장님 때문이라고 했던 말이요.”
“차혜련이 시킨 짓이었거든.”
……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재효의 짓인데?
“그, 그럴……….”
“처음에는 그렇게 확신했지.”
그건 즉, 지금은 아니라는 뜻. 건주는 몸을 옆으로 틀며 입술을 깨물었다. 약하게 내려앉은 딱지가 벌어지며 핏방울이 솟아나왔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다. 왜 그자들이 태 실장 아파트 앞에서 당당하게 린치를 했는지 말이다. 뒤에서 차혜련을 조종해, 모두 그녀가 꾸민 짓인 것처럼 보이려고 했던 거다. 이젠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어서 재효가 차혜련을 이용했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건주는 혀로 비릿한 피를 닦아내며 눈을 감았다. 태 실장님. 누가 차혜련을 조종했는지 알아냈을까? 재효 짓이라는 걸 알까? 말이 없는 것을 보니 거기까진 모르는 것 같기도 한데……. 물어볼까? 건주는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강재효가 시킨 짓인 걸 알아내셨습니까?’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웬일인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물을 수 없었다. 몇 번을 입술만 달싹였던 건주는 마침내 물어보는 것을 포기하고 아주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면 태 실장님 재효에 대해 몰랐으면 좋겠는데. 알게 되더라도 나중에, 아주 나중에 알았으면 좋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태 실장이 재효에 대해 알게 되는 건 싫다. 그럼 자신와 재효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게 될 테니까. 건주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 ??
배가 빵빵하다. 어지간한 동산만큼 부풀어있어서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만삭의 임산부처럼 배를 불룩 내밀고 뒤뚱뒤뚱 걸으며 건주는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가는 태 실장의 등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몸이 상했을 때에는 무조건 잘 먹어야 한다며 꾸역꾸역 먹이더니, 막상 그는 딱 정량만 먹고 말았던 것이다. 몸이 상한 것은 태 실장이나 자신이나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호텔 로비를 걸어 나오며 건주는 피식 웃었다. 태 실장과 자신은 남들이 보면 꽤나 웃기는 일행일 것이다. 한 명은 팔에 붕대를 감고 있고, 한 명은 얼룩 바둑이처럼 얼굴이 얼룩덜룩인데다 퉁퉁 부어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호텔 이용객들이 지나가며 한 번씩 두 사람을 흘끔거렸다.
호텔을 나오자 은회색 차가 두 사람 앞에 섰다. 도어맨이 문을 열어주어서 건주는 태 실장과 함께 그 차에 올라탔다. 웬 차인가 했더니 팔을 다친 태 실장을 위해 본가에서 보내준 차란다. 유산상속에서 제외하느니 어쩌느니 하면서도 막상 아들이 다쳤다니 걱정이 되는가 보았다.
“집으로 바로 갈 거지?”
“아, 아니오. 전 가까운 지하철역에 세워주세요.”
“꽃뱀을 만나러 갈 생각이라면 다음으로 미뤄.”
태 실장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퉁명스러웠다. 건주는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화가 나셨나? 갑자기 왜? 좀 전 식사를 하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흡족해하던 태 실장이었다.
“아니오. 회사 동료를 좀 만나려고요.”
“그럼 회사 근처까지 데려다주지.”
“지하철 타고…… 네. 그럼 근처까지 부탁드려요.”
태 실장의 차도 아니고, 본가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가자니 마음이 불편해서 지하철을 타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단호해 보이는 눈매를 보고 있자니 끝끝내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대낮이라 그런지 도로가 뻥뻥 뚫려 있어서 막힘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늦어?”
차에서 내리는 건주를 향해 태 실장이 물었다.
“경태도 잠깐 만날 예정이긴 한데, 그리 늦진 않을 거예요.”
“그래. 나도 그리 늦진 않을 거야. 그럼 이따 집에서 보지.”
“네.”
건주는 태 실장을 실은 차가 완전히 떠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전에 태 실장 어머니를 만났던 카페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 한 잔을 주문한 후 철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철민은 20분 정도 후에 도착했다.
“얼굴이……….”
얼굴을 보고 경악하는 철민을 향해 건주는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됐다. 가벼운 사고가 좀 있었어.”
“사흘 병가 냈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보다 내가 부탁한 건?”
“어? 어어. 여기 있어. 녀석 완전히 신나서 따라다녔다고 하던데? 근데 누구야?”
철민이 내민 것은 두툼한 봉투였다.
“다음에 신세는 꼭 갚을게.”
말을 돌리는 건주를 향해 철민이 입매를 실룩거렸다.
“말하기 싫다 이거지. 알았다. 알았어. 계속 뒤는 밟는다고 했으니까 다음에 연락 오면 또 전해줄게.”
철민이 회사로 돌아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랑, 그가 바깥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건주는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두께가 족히 5센티미터는 되어 보일 정도로 두툼하게 쌓인 것은 전부 사진이었다. 바로 재효의 사진.
건주가 철민에게 부탁한 것은 재효의 뒤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철민이 아니라 그의 사촌동생에게지만. 전에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철민의 사촌동생이 대학생이고 사진을 좋아해서 거의 전문가 수준인데, 파파라치 짓으로 용돈을 꽤 쏠쏠하게 번다고 말이다. 제 힘으로 등록금과 용돈을 해결하는 건 좋지만 그러다 원한 살까 두렵다며 혀를 찼었다.
솜씨가 전문가 수준이라고 하더니 과연 철민의 사촌동생이 찍은 사진들은 꽤 훌륭했다. 멀리서 몰래 찍었을 텐데 흔들림 하나 없이 선명하게 잘 찍혀 있었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건주가 일순 멈칫했다.
‘이 사내들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사진에 찍힌 다섯 사내들이 모두 낯이 익었다. 한 명은 재효이고, 다른 한 명은 예전에 잠시 본 적이 있는 재효의 친구…… 였다. 정말 잠깐 본 거지만 외모가 특별했던 데다 풍기는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셋은 며칠 전에 본 자들이었다. 바로 아파트 단지 내에서 린치를 가했던 자들 말이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역시 그들은 재효가 보낸 자들이었군. 건주는 사진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깜박 잊고 안 전해준 말이 있어!”
갑자기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랐다. 철민이었다. 회사에 가던 도중 뛰어서 돌아왔는지, 철민은 상기된 표정으로 숨을 헐떡거렸다.
“전화로 하지.”
“네 핸드폰 꺼져 있던데?”
그 말에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철민의 말대로 꺼져있다. 며칠 충전을 못 시켰더니 아까 철민에게 한 전화를 마지막으로 꺼진 모양이었다. 건주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들을 주섬주섬 모았다.
“무슨 얘긴데?”
“자금을 좀 더 지원해 주면 재미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던데?”
재미있는 사진?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흥미가 생겼다.
“응. 알았다고 전해줘.”
“그럴 것 없이 그냥 내가 연락처를 알려줄게. 내 회사 동료라고 하면 알아들을 거야.”
철민은 카페 주인에게 펜을 빌려오더니 냅킨에 핸드폰 번호를 하나 적어주었다. 그리곤 “진짜 간다!”하고 외치더니 서둘러 카페를 나갔다. 건주는 전화번호가 적힌 냅킨을 잘 챙긴 후 밖으로 나왔다. 쓰레기통이 보여서 사진 두 장만 제외하고 모조리 버린 후 정류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편의점이 보여서 잠시 들러 핸드폰 충전도 했다. 경태의 회사 근처에 도착하니 3시 30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패스트푸드점이 보여서 들어가 앉은 후 경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나다.
“나 너희 회사 근처인데, 잠시 나올 수 있어?
- 어딘데?
“패스트푸드점.”
- 오케. 금방 나갈게.
패스트푸드점의 좋은 점은 주문을 하지 않고 앉아 있어도 눈치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이미 배가 포화 상태라 더 이상은 아무 것도 뱃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은 건주는 경태가 오길 기다리며 창밖만 내다보았다. 잠시 후 저쪽에서 경태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아는 사람을 만났는지 녀석은 길에서 악수를 하고 짧은 대화도 나눴다.
창 쪽에 있는 건주를 보지 못하고 곧장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경태가 실내를 휙휙 둘러보았다. 건주는 미소를 지으며 경태를 향해 손을 들었다.
“여기야.”
“어, 얼굴이…… 얼굴이…….”
경태는 차마 말도 잇지 못했다. 건주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뺨을 문질렀다.
“보기엔 이래도 속은 멀쩡해. 부러진 데도 없고, 내장도 멀쩡하대.”
“어떻게 된 거야? 너희 둘이 돌아가면서 내 간을 들었다 놨다 하기로 약속이라도 했냐?”
수철의 일을 생각했는지 경태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건주도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깨문 경태가 분위기 전환 겸 벌떡 일어나 “뭐 먹을래?”하고 외쳤다. 아무 것도 생각이 없다고 하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경태가 사온 것은 햄버거 세트 하나였다. 점심을 거른 사람처럼 우걱우걱 햄버거를 먹는 경태를 향해 건주는 머뭇대며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웬 사진이야? …… 이거 강재효 그 새끼잖아?”
건주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 새끼 사진은 왜 보여주는 건데? 입맛 확 떨어지게.”
경태는 반쯤 먹은 햄버거를 내려놓고 트레이를 저만치 밀었다. 건주는 말을 하기 전에 우선 심호흡부터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데도 말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이거…… 여기 이 남자가 누구인지 좀 알아봐줘. 경찰에 아는 사람 있다고 했지?”
“어. 건너건너건너 아는 사람이긴 하지만. 근데 이놈이 누군데?”
건주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놓았다. 왠지 심상치 않은 건주의 안색을 보고 경태도 덩달아 긴장한 듯 허리를 뻣뻣하게 세웠다.
“전에…… 재효와 함께 있는 걸 언뜻 봤어. 잠깐 본 거지만 느낌이 별로인 남자라 기억하고 있었거든. 아마…… 여기 있는 이자들 같아.”
“뭐가?”
“수철이 폭행…….”
사진과 건주의 얼굴을 연신 번갈아보던 경태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그, 그럼 수철이 저렇게 된 게…….”
사진을 집어 드는 경태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건주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재효를 찾아갔대. 내 돈 내놓으라고. 그리고 폭행당했어.”
바늘이 돋아난 것처럼 혀끝이 까슬거렸다. 수철이는 나 때문에 저렇게 되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하늘처럼 흐린 눈을 하고 있는 건주를 보며 경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나쁜 새끼. 뭐 그런 새끼가 다 있냐! 네 얼굴도 그 새끼 짓이지?”
“…….”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경태의 얼굴이 울분으로 확 달아올랐다.
“내가 그 새끼를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마.”
건주는 경태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 뭐?”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어. 너마저 나 때문에 다치면 나 못 산다.”
진심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또 다시 누군가가 조금이라면 다친다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았다.
“가만히 당하고 있으려니 속이 터지려고 한다.”
“가만히 안 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경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전에 수철이 병원비 하라고 줬던 돈, 재효한테서 받아낸 거야.”
경태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은 듯 멍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이용하면 이용하는 대로 병신처럼 휘둘렸던 자신이 재효에게서 돈을 받아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말이야, 하고 눈으로 물어 와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 어떻게? 그 새끼가 순순히 주진 않았을 텐데?”
“재효와 약혼한 여자가 태 실장님 사촌여동생이었어.”
그 한 마디로 경태는 일의 전후를 대부분 파악하고 크게 입을 벌리며 웃었다.
“이래서 죄짓고는 못 산다고 하고, 세상이 좁다는 거야. 그 새끼가 잡은 여자가 태 실장 사촌여동생일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냐? 그냥 태 실장한테 다 말해버려. 그럼 약혼 깨지고, 그 새끼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거 아냐?”
“그건 싫어.”
“…… 왜?”
“재효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어.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어. 그걸 용서 못하겠어.”
조금이라도 미안해했다면 이렇게까지 독한 마음은 먹지 않았을 거다. 정난희와의 결혼을 막고 돈을 받아내는 것으로 그쳤을 텐데. 재효는 점점 더 건주를 궁지로 몰아넣어 기어코 고양이의 목덜미를 사납게 물어뜯게 만들고 있었다.
“옛날부터 나는 만약 너와 수철이 둘 중 한 명하고 척을 져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너 말고 수철이와 척을 지겠다고 마음먹었어.”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넌 답답할 정도로 순하고 가끔 보면 미련곰탱이 같지만 한 번 화나면 정말 무섭거든.”
“…….”
아무리 들어도 칭찬 같지 않아서 건주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경태가 배실 웃었다.
“다 좋은데 네가 다치지 않는 수준에서 해라. 난 너만 다치지 않으면 돼. 혹시 또 모르겠다. 네가 재효 놈 완전히 물 먹이고 나면 수철이가 기적적으로 눈을 뜰지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건주는 창밖을 내다보며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딩동. 딩동. 딩동. 아예 초인종을 부술 듯한 기세였다. 건주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아침부터 누구지?’
멍하게 생각하며 일어나려다 도로 풀썩 눕고 말았다. 허리에 태 실장의 팔이 감겨 있었던 것이다. 건주는 난처하게 허리에 감긴 팔뚝을 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의 상처 부위가 욱신거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실밥 풀려면 아직 더 있어야한다고 했지?’
그래도 순조롭게 아물고 있는 중이라니 마음이 놓였다.
“젠장. 아침부터 누구야?”
태 실장도 잠에서 깼나 보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더니 막 침대에서 내려선 건주를 보고 웃었다.
“잘 잤나?”
“네. 실장님은요?”
“나도. 오랜만에 내 집, 내 침대에서 자니 좋았어.”
“그러니까 제가 집으로 돌아가서 주무시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기어이 고집을 부리며 건주의 침대 반쪽을 차지한 건 태 실장 본인이었다.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 네가 없으면 허전해서 잠이 안 오거든.”
“이상한 말씀 마세요.”
불퉁거리긴 했지만 사실 건주도 태 실장이 함께 있어주어 안심이 되었다. 낮에 혼자 병원 침대에 누워있으면 괜스레 허전한 느낌도 들었고. 건주는 정말이라는 듯 억울한 눈빛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있는 태 실장을 뒤로 하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태경환이 안으로 확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게 열어?”
그의 손에는 커다란 박스가 들려있었다. 투명이라 안이 보였는데 허연 고체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뭐야?”
“곰국 굳힌 거. 형님 먹으라고 내가 아줌마 졸라서 만들라고 했어.”
자랑스럽게 헤죽 웃은 태경환이 곰국이 든 플라스틱 박스를 식탁 위에 텅 내려놓았다. 바깥의 소란에 태 실장이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새벽부터 웬일이야?”
“형 먹으라고 곰국 해왔어.”
태 실장이 힐끗 식탁 위를 쳐다보았다.
“난 곰국 안 좋아해.”
“그, 그래도 먹어! 몸에 좋은 거야! 사골도 제일 좋은 걸로 구해서 끓이라고 했단 말이야. 버리지 말고 꼭 먹어!”
두 주먹을 꾹 쥐고 우다다 외친 태경환이 도망치는 것처럼 “학교 간다! 도서관 자리 맡아야 해서 일찍 가야 하거든!”하며 나가버렸다. 건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여전히 형 생각은 끔찍하게도 하는 동생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밝은데 그런 아픈 과거를 안고 사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폭력이란 사람의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파괴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맞은 부위가 욱신거리고, 수철이 생각도 나며 마음이 우울해지려고 한다. 건주는 애써 밝은 표정으로 태 실장을 향해 말했다.
“경환이는 정말 실장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내가 아냐.”
“네?”
“나 먹으라고 해온 것이 아니라 너 먹으라고 해온 거야.”
에이, 설마 그럴 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주를 향해 태 실장이 혀를 차며 덧붙였다.
“난 곰국이 별로라서 먹지 않는다는 것을 녀석도 잘 알아. 그런데도 굳이 해 온 이유가 뭐겠어? 녀석 나름대로는 고맙다는 표현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거야.”
정말…… 인가? 건주는 진하게 우러난 곰국 덩어리를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나 먹으라고? 굳어있던 건주의 입가가 천천히 풀렸다.
“그것보다 경환이는 그렇게 쉽게 이름을 불러주면서 왜 난 아직도 실장님이야?”
“…… 네?”
“애인인 나는 실장님이고, 왜 내 동생은 친근하게 경환이냐고. 몇 번이나 호칭 수정하라고 말했을 텐데?”
“그, 그건……….”
물론 여러 번 들었고, 고치려고 노력도 해봤는데 잘 안 된다. 실장님이라는 호칭이 완전히 입에 붙어버렸나 보았다. 쏘아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건주는 괜스레 허공만 두리번두리번 보았다.
“민환씨하고 백 번만 불러봐. 그럼 실장님보다는 민환씨란 소리가 먼저 나올 테니까.”
열 번도 아니고 백 번? 팔짱을 낀 태 실장이 건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자 빨리 내 이름을 불러봐!’위협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주춤주춤 물러나는 건주의 눈에 현관에 떨어져 있는 조간신문이 보였다.
“신문이 와있었네요! 가져올게요.”
건주는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가 신문을 주웠다. 그리고 막 허리를 펴려 했을 때였다. 쾅!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문의 걸쇠 부분과 정통으로 부딪친 건주가 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손으로 코를 부여잡은 채.
“부딪쳤어? 다쳤어?”
문을 열었던 태경환이 건주를 보고 다급하게 물어왔다. 태 실장도 달려왔다.
“괘, 괜찮……….”
말을 끝내기도 전에 코피가 주룩 쏟아졌다. 부딪치며 순간적으로 혀를 씹었는지 입안에서도 비릿한 피 냄새가 한가득 나고 있었다.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자 경환은 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 어떡하지? 피 나는데!”
“호들갑 떨지 말고 넌 학교나 가. 도서관에 자리 맡아야 한다며?”
“그, 그래도?”
경환은 피를 흘리는 건주를 보며 차마 발길을 못 떼고 있었다. 건주는 여전히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경환을 향해 눈을 크게 휘어주었다.
“괘아…… 나. 어른…… 가.”
발음이 불명확하게 나와서 손짓으로 어서 가라고 재촉을 했다. 건주와 태 실장이 자꾸만 가라고 하니 경환은 울상을 지으며 마지못해 나갔다. 다시 돌아와야 했던 이유인 오토바이 키를 힘없이 쥔 채.
“손 좀 떼 봐.”
건주를 소파에 앉힌 태 실장이 말했다. 건주는 슬그머니 손을 뗐다.
“어때요?”
태 실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멀쩡해져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상처를 더 늘렸군.”
끌끌 혀를 찬 태 실장이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코피는 금방 그쳤지만 코는 욱신욱신 아팠다. 탈지면으로 코피를 닦아낸 태 실장이 손끝으로 콧잔등을 툭 건드리자 건주는 차마 비명도 못 지르고 눈만 부릅떴다.
아, 아프다!
“……!”
“부을 것 같아.”
우울한 말이다. 안 그래도 얼굴이 엉망인데 코까지 붓게 생겼으니. 이런 몰골로 출근을 어떻게 하지?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던 건주가 갑자기 악, 소리를 내며 볼을 감쌌다. 혀와 입 안쪽이 몹시 따끔거렸다. 양 볼을 감싸고 끙끙 앓는 건주를 보며 태 실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입 벌려봐, 하고 말했다.
입을 벌리자 태 실장 이마에 잡힌 주름이 더 굵어졌다. 또 다시 탈지면으로 입안을 슥슥 닦아낸 후 꺼냈는데, 벌겋게 변한 탈지면을 보고 건주도 좀 놀랐다. 피 맛이 느껴져서 입안이 찢어졌구나, 라고 생각은 했는데 예상보다 더 심한 상처였나 보았다.
태 실장이 입을 더 크게 벌리라고 말해서 시키는 대로 턱이 아플 만큼 벌렸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 태 실장이 건주의 입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혀뿐만 아니라 입 안쪽도 찢겼어.”
얼굴이 워낙 가까이 닿아있어서 말을 하자 입김이 간질간질 닿았다. 건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움찔 떨었다.
“…….”
“연고 발라줄 테니까 그대로 입 벌리고 있어.”
태 실장이 구급상자에서 연고를 꺼내는 동안 건주는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한참 벌리고 있었던 탓에 혀가 꿈틀꿈틀 움직였다. 탈지면으로 닦아내 말라버렸던 입안에도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입을 계속 벌리고 있자니 좀 힘들다. 아직 멀었나? 연고 못 찾았나? 드디어 찾은 연고를 들고 다시금 건주의 입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주륵, 입안에 흥건하게 고인 침이 턱으로 흘러내린 순간 태 실장이 “제길!”하고 거칠게 중얼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입을 오래 벌리고 있었더니 그만…….”
상처에 연고 발라주려는데 침을 흘려서 기분이 상했나 보다. 허둥지둥 사과를 하던 건주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입술에 태 실장의 입술이 닿았던 것이다. 어, 하고 생각한 순간 발라주겠다고 한 연고 대신 태 실장의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입맞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깜짝 놀랐다.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빼는 건주의 허리를 왼손으로 단단히 부여잡은 태 실장이 더 깊이 키스를 해왔다.
입안 깊이 들어온 혀가 상처 부위를 건드렸다. 맞붙은 입술 사이로 으으, 하고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태 실장은 혀로 상처 부위를 꼼꼼하게 핥았다. 매끈하고 뜨거운 살덩어리가 찢긴 부위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통증에 허리가 비틀렸다.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로 아팠지만 등줄기가 간질거리는 쾌감도 느껴졌다. 마치 사춘기 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
‘뭐야? 이건?’
숨이 답답하다고 느낄 때쯤 태 실장이 입술을 뗐다. 건주는 입술을 약간 벌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멍하니 태 실장을 보았다. 느닷없는 키스의 의미가 궁금했던 것이다. 이것도 애인 연습의 일종인가?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좀…….
태 실장과 두 번 딥키스를 했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뭐라고 할까. 좀 더 간질거리고 좀 더 심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키스였다고 할……까. 아아. 잘 모르겠다. 정확하게 표현은 못 하겠지만 확실히 전과는 다른 키스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
“침이…… 상처 소독에 효과가 있다고 하더군. 난 이만 출근준비를 해야겠어.”
건주도 놀랐지만 태 실장은 더 놀란 얼굴이었다. 느닷없이 키스를 해놓고 스스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건주를 보더니 출근 핑계를 대며 일어섰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태 실장의 등을 멀거니 바라보며 건주는 심장께를 꽉 눌렀다. 꼭 남의 심장을 뚝 떼어다 억지로 자신의 몸 안에 끌어다 붙인 기분이었다. 그만큼 심장의 박동이 낯설었다.
건주는 멀쩡히 길 가다 갑자기 뒤통수를 후려 맞은 사람처럼 멍청한 얼굴로 태 실장이 들어간 침실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