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3)

***

크게 한 일도 없이 피곤하네요. 이래서 나이는 못 속인.....쿨럭...^^;

건주는 약국에서 급히 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재효의 회사로 향했다. 회사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경악하는 것까진 참았는데, 낯모르는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는 것까진 못 참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던 데도 상처를 다 가릴 순 없었는지, 힐끔대며 건주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래도 퉁퉁 부은 얼굴 덕에 이득을 본 것도 있었다. 요즘 근무 태도가 불량하다고 과장님께 단단히 깨질 것을 각오하고 출근했는데, 과장님은 건주의 얼굴을 보더니 기가 질린 눈빛으로 자리로 가라며 손짓을 했다.

‘자네 올해 삼재가 든 거 아닌가? 운세가 너무 사나운 것 같어.’하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삼재라…… 정말 그런가?

외근을 나왔다가 바로 퇴근해 재효의 회사로 향한 터라 도착하니 딱 퇴근시간이었다. 시계를 보며 바쁘게 걷던 건주가 회사 앞에 서 있는 정난희를 보고 멈칫 섰다. 한껏 멋을 낸 차림을 보니 오늘 재효와 데이트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어떡하지? 잠시 망설였던 건주는 이내 결심을 굳히고 그녀를 향해 다가가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를 보고 피하는 것도 어쩐지 좀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 했던 정난희가 마스크를 벗는 건주를 보고 어머, 하고 외치더니 곧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근데 얼굴이…….”

“사고가 좀……. 그래서 얼굴이 엉망입니다. 데이트…… 있으신가 봐요.”

“네. 재효씨랑 같이 저녁 먹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어요.”

“들어가지 않고 왜 밖에서 기다리십니까?”

“아빠가 저 회사에 들락거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거든요. 맞다. 별일 없으시면 우리랑 같이 저녁 먹어요.”

건주는 곤란한 눈빛으로 정난희를 보았다.

“데이트에 끼긴 좀. 눈치가 영 없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오빠도 부르면 되죠. 건주씨가 부르면 바로 달려오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면서 괜히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태 실장과의 입맞춤이 처음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그럼 차라도 같이 한 잔 해요. 이모가 들으면 절 가만두지 않겠지만, 사실 전 건주씨가 마음에 들거든요. 물론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저도 좋아요.”

정난희는 말갛게 웃었다. 보면 볼수록 바르게 잘 자란 아가씨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만큼 자신처럼 재효에게 속고 있는 것이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나중에 재효와 자신에 관한 일을 알게 되면 정난희는 어떻게 나올까. 화를 낼까? 가능하면 그녀에게는 상처주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상처 받을 거다. 그게 참 마음 아팠다.

“재효씨! 여기야.”

건주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제나 저제나 입구를 바라보고 있던 정난희가 번쩍 손을 들었다. 웃으며 마주 손을 들었던 재효가 시선을 드는 건주를 보고 흠칫 굳었다. 재효의 눈동자에 냉기가 언뜻 스쳤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온 눈빛에선 정난희를 향한 온화함만이 흐르고 있었다.

“또…… 뵙네요. 여긴 웬일이시죠?”

건주의 몸을 빠르게 훑은 재효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지나던 길입니다.”

“우연히 만났어. 차 한 잔 같이 하자고 했는데, 괜찮죠?”

“…… 그… 래. 괜찮아. 난희 네가 원하고 있는데 내가 싫을 이유가 어디 있어.”

재효는 건주에게 애정을 과시라도 하듯, 정난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파스타가 먹고 싶다는 정난희의 주장에 따라 세 사람은 파스타 전문점으로 향했다. 굉장히 어색하고 무거운 식사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건주의 착각이었다. 재효는 무서우리만치 침착한 얼굴로 건주를 대했다. 식사를 끝낸 정난희가 “잠시 만요.”하며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는.

화장품 가방을 든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재효가 서늘하게 눈매를 굳히며 건주를 노려보았다.

“무슨 속셈이야?! 이젠 난희까지 이용해 날 압박할 셈이야?!”

“속셈은 내가 아니라 너한테 있겠지.”

“무슨 의미야?”

“차혜련을 앞세우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잇새로 내뱉은 말에 재효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차혜련이라면 형님이 예전에 만나던 여자가 아닌가?”

“돈을 찾아가야해.”

“…….”

“날 린치했던 사내들이 했던 말이야.”

의식을 잃기 직전 사내들이 중얼거린 말을 들었다. 돈을 찾아가야 한다. 

정신이 든 후 그 말을 떠올린 순간 깨달았다. 재효는 앞에서는 건주에게 돈의 일부를 주고,

 뒤에서는 도로 돈을 빼앗아갈 계획을 세운 것이다. 전부는 아니라 해도 순순히 돈을 주었던 숨은 의도가 바로 그거였다.

“……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군.”

“그렇게 발뺌해봤자 소용없어. 그 자들, 네가 보냈다는 증거도 가지고 있으니까.”

건주는 보여주려고 가져왔던 사진을 꺼내 슥 밀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던 재효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너…… 내 뒤를 밟았어?!!”

“수철이가 찾아가서 돈 내놓으라고 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시켜 폭행을 가했던 너였어. 

나한테도 안 그럴 거란 법은 없잖아? 말했지. 내가 말한 기한 내에 돈 갚지 않으면 네 과거를 하나씩 터뜨려 주겠다고.

 이 사진은 좀 더 가지고 있겠지만, 돈 내놓지 않으면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가 고소할 거다. 

밤이었지만 난 날 때린 자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깟 사진이 무슨 증거가 되는데? 웃기지 마. 네가 폭행당한 시간에 그들은 다른 곳에 있었을 거다.”

알리바이 조작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건주는 픽 웃었다.

“하나 더 가르쳐줄까?”

“……?”

“그 날 나와 같이 있었던 남자…… 태경환이었어. 

경환이도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봤을 거야. 이 사진을 경환이에게 전해주면 일이 참 재미있게 돌아가겠지?”

애써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던 재효가 경환의 이름을 듣고 움찔 놀라며 볼을 실룩거렸다. 

그리곤 사진을 손안에서 와삭 구기며 섬뜩하게 건주를 노려보았다.

“모레…… 만나. 돈 더 해줄 테니.”

“둘이서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그때 정난희가 돌아왔다. 그녀는 식사 하느라 지워진 화장을 완벽하게 고친 후였다. 건주는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태 실장은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건주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침의 일을 생각하면 괜히 어색하고 낯이 화끈거리지만, 대놓고 티를 내자니 그것도 좀 이상할 것 같았다. 키스가 처음도 아니었고, 실장님은 별 의미 없이 한 행동일지도 모르는데 혼자만 의식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솔직히 섹스만 안 했다 뿐인지, 이런 거 저런 거 다 한 셈이나 마찬가지인데 고작 키스 갖고 사춘기 소년처럼 굴지 말자. 하아. 근데 왜 자꾸 아침의 키스가 마음에 걸리는 거지. 왜 이렇게 자꾸만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거야?

“뒤통수에 구멍 나겠어.”

탁, 책을 덮은 태 실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건주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저녁은요?”

“밖에서 먹었어. 너는?”

“저도요. 우연히…… 난희씨를 만나서 같이 먹었어요.”

“난희를?”

의외라는 듯 태 실장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네.”

“강재효도 함께?”

태 실장의 눈빛에 언뜻 냉기가 스쳤다. 그 때문일까. 대답하기가 망설여져서 잠시 머뭇대다 고개만 살짝 끄덕여보였다. 

그가 “그렇군.”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빤히 보는 건주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코가 시퍼래.”

안 그래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전체적으로 퉁퉁 부어있지만 특히 콧마루와 뺨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어서 기도 안 찼던 것이다. 

건주는 손으로 얼굴을 슬며시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입 좀 벌려 봐. 입안은 어떤가 보게.”

순간적으로 아침의 일이 생각나서 귓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왜 자꾸 그 일이 의식되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닐 거야. 아무 의미도 없었어. 처음도 아니잖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태연한 척 입을 아 벌렸다. 턱을 위로 들고, 눈동자는 허공만 바라본 채 바보처럼 입을 쩍. 낮게 억눌린 웃음소리가 들린다싶더니 또 다시 입안으로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눈을 끔벅끔벅하는 건주의 목에 팔을 감고 완전히 몸을 밀착시킨 태 실장이 본격적으로 혀를 움직였다. 아침에는 머뭇대는 기운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어떤 망설임도 없이 입안을 훑었다. 입천장을 건드리고, 치아를 문질렀다. 어떻게 반응해야하는지를 몰라 움찔거리는 혀를 힘차게 빨아들이는 순간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맞닿은 심장에서 박동 소리가 느껴졌다. 쿵쾅쿵쾅. 이러다 튀어나오겠다. 왜 이렇게 뛰는 거지? 머리는 멀쩡한데 심장만 미쳐버린 것처럼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한참 만에 입술이 떨어져나가자 건주는 붉어진 눈동자로 태 실장을 응시하며 숨을 헐떡거렸다.

“소독한 거야.”

“아…… 예.”

그렇죠. 침이 상처 소독에 효과가 있으니까요. 빙그레 웃은 태 실장이 멍하니 호흡만 하고 있는 건주의 턱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아무렇지도 않게 닦았다.

“어땠어?”

“뭐가…… 요?”

“키스 말이야. 처음에 했을 때는 최악은 아니라고 했지? 지금은 어때? 괜찮았나?”

“아, 네. 뭐……. 근데 제 반응이 어떤지 궁금해서 키스…… 한 겁니까?”

“소독이라고 했잖나.”

“…….”

예. 그렇군요. 소독. 갑자기 진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어서 어깨를 축 내렸다. 샤워나 해야겠다. 주섬주섬 일어났을 때였다. 태 실장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너와의 애인 놀이에 지나치게 심취해있는 모양이야.”

“…… 네?”

건주는 당혹스러움에 눈을 깜박이며 태 실장을 돌아보았다. 애인 놀이에 심취했다고?

“자꾸만…… 키스하고 싶은 것을 보면 말이야.”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쓱하게 웃는 태 실장을 보는데 심장이 아득한 아래로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이상한 느낌. 건주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태 실장을 잠시 보다 허둥지둥 돌아섰다.

“빌어먹을!”

재효는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박건주 새끼한테 들어간 돈이 오늘 추가로 준 것까지 합하면 벌써 칠천이다. 그 생각만 하면 속에서 천불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돈도 아깝지만 무엇보다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 하던 새끼에게 협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  없고 미칠 것처럼 화가 났다.

박건주 새끼. 감히 나를 협박해? 두고 보자. 내가 이대로 당할 줄 알고?!

멍청한 곰치 형의 부하들이 일만 제대로 처리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돈을 꼭 찾아오라고 했더니 찾아오기는커녕 태경환까지 건드렸어?! 기가 찬다.

사실 돈은 얼마든지 융통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정난희라는 아주 훌륭한 담보가 있으니까. S물산 사장의 사위라는 직함만 있어도 사채업자들은 얼마든지 돈을 꿔주었다. 다만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게 뒤꿈치를 물린 것이 너무나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아주 제대로 돌아버렸어. 박건주. 하지만 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야. 기다려. 곧 받은 것의 몇 배로 갚아줄 테니까. 재효는 이를 으득 씹었다.

‘멍청한 새끼들. 얼굴을 보이지 말라니까 버젓이 보인데다 건드려선 안 될 사람까지 건드리고, 돈도 못 찾아와?

 이래서 머리가 없는 것들은 곤란하다니까.’

재효는 입매를 비틀며 술을 마셨다. 요즘은 이래저래 되는 일이 없어서 짜증으로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설마 이번 일로 태민환이 직접 나서진 않겠지? 일단 돈으로 박건주 새끼의 입막음은 해뒀는데…….

 거기다 차혜련 그년은 왜 또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요샌 제대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지 자꾸만 초조해졌다. 쫓기는 것 같고, 답답하고, 자꾸만 조급증이 들기도 하고.

“오늘도 기분이 엉망이네.”

곰치가 룸으로 들어왔다. 제 부하들이 돈을 되찾아오지 못한 일로 그는 요즘 재효에게 한껏 미안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재효는 차가운 눈빛으로 곰치를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형 부하들이 실수하는 바람에 오늘 그 새끼한테 추가로 돈이 더 들어갔어. 자그만치 칠천이야. 칠천!”

신경질을 내는 재효를 보며 잠시 윗입술을 부르르 떨었던 곰치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었다.

“그래. 미안하다. 그 새끼들이 멍청해서. 너도 알다시피 주먹밖에 못 쓰는 놈들이잖냐. 대신 사과하는 의미로…… 선물을 하나 주지.”

“선물?”

재효는 곰치가 내미는 것을 시큰둥하게 보았다가 다음 순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곰치가 내민 것은 정말 멋진 선물이었다.

“형. 이, 이건?”

“서랍 정리를 하다 우연히 발견했지. 쓸모 있는 선물이지?”

“물론!”

쓸모가 있다마다. 해외 출장을 갔다 온 이후 박건주에게 멋진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씩.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웃은 재효가 곰치에게 달려들어 허겁지겁 바지를 벗겼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할 생각이었다.

??        ??

“이봐. 나경수. 자넨 남자한테 키스하고 싶었던 적 있었나?”

민환의 말에 나경수가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제 근무태도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제 설계가 영 별로세요? 제가 마음에 안 들어 죽겠습니까? 그러면 괜한 시비 걸지 말고 그냥 자르세요.”

“대답이나 해.”

“아 진짜! 요즘 왜 그러세요?! 요즘 정말 이상한 거 아십니까?!”

얼굴이 토마토처럼 벌겋게 변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는 부하 직원을 시큰둥하게 보며 민환은 턱을 비스듬하게 들었다.

“대답!”

“저 변태 아닙니다. 그쪽도 아니고요. 전 여자만 좋아합니다. 혹시 제가 여자를 멀리하는 것 같아서 그러세요? 말씀 안 드려서 그렇지, 저 스무 살 때부터 만나온 애인이 있습니다. 후년쯤에는 결혼할 생각이고요. 다음에 꼭! 소개시켜 드릴게요.”

잔뜩 흥분해서 외쳐놓곤 바람을 쐬러 휑 나가버리는 나경수의 등을 보며 민환은 끌끌 혀를 찼다. 그렇지. 저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도 그랬었고.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건주만 보면 키스하고 싶고, 그보다 더 진한 것도 하고 싶고 그렇다. 유혹을 이기지 못해 한 번 키스를 한 이후에는 더 많이 하고 싶어져서 참으로 큰일이었다.

‘연인 놀이에 지나치게 심취한 거야.’

처음부터 건주에게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데다 사소한 스킨십을 나누며 점차 가까워지다 보니 몸이란 놈이 박건주란 사내를 진짜 애인처럼 인식해버린 모양이었다. 오늘 새벽에는 아랫도리가 팽창하는 느낌에 번쩍 눈을 떴다가 완전히 발기해 있는 중심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여자로 착각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 나이에 누가 알까 너무나 쪽팔리지만 꿈에서 건주를 안았다. 알몸의 건주가 자신의 아래에서 흐트러지는 꿈을 꾸고 발기를 한 것이었다. 스스로도 정말 이해할 수 없지만 꿈속에서 자신이 안으려고 했던 사람은 분명 박건주라는 사내였다.

‘안고 싶다.’

다음 순간 민환은 벌떡 일어나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을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잘 익은 과일처럼 붉은 혀를 보고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인데, 이젠 안고 싶다. 그의 몸을 열고 깊은 곳까지 제 중심을 찔러 넣고 싶었다. 박건주란 사내를 마구 휘젓고 싶고, 자신의 몸 아래에서 몸부림치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을 상상만 해도 혀가 바짝바짝 탔다.

미쳤구나. 태민환. 완전히 미쳤어. 어떻게 남자인 건주를 상대로…….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진해지는 욕구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미치겠군. 언제부터 건주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입을 벌리고 있는 건주의 혀를 보고 일순 미친 듯이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 날부터인가? 아니면 손을 다치고 건주의 도움으로 샤워를 시작했을 때부터인가? 함께 샤워를 할 때, 건주의 손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지조 없는 중심이 발기했었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였는지. 다만 확실한 건 자꾸만 키스하고 싶고, 안고 싶고, 한 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키스는 소독이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포장하고 있지만, 만약 그 이상을 하게 되면 건주가 어떻게 나올까? 키스 정도는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진도를 더 나가면 화를 내겠지? 어쩌면 더 이상 계약을 이어갈 수 없다고 나설 지도 모르겠다. 잠깐, 건주와 키스 이상의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지금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거지? 미치겠군. 내가 요즘 왜 이러지.

다른 사내놈들을 보면 키스는커녕 여전히 손가락 하나 대고 싶지 않는데 건주는 달리 여겨지는 것을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애인인 척하며 몸도 마음도 지나치게 가까워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자인 건주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할 리 없지 않은가.

하아. 민환이 묵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차려. 태민환. 박건주와는 애인 계약을 맺은 사이이지, 진짜 애인이 아니니까. 다음 순간 민환은 사납게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애인이 아니다?’

그 말이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나와 박건주는 현재 가짜 애인. 혹은 계약 애인이지? 일순 거친 사포로 피부를 박박 문지르는 것처럼 기분이 나빠진다. 민환은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험악한 얼굴로 사무실 안을 서성였다. 건주와 자신이 가짜 연인이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가짜 애인인 것이 싫다? 그럼 난 건주와 진짜 연인이 되고 싶은 건가? 언뜻 머리를 스친 생각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을 때였다.

“실장님. 전화 오는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책상 위를 쳐다보니 핸드폰이 드드드드드 요란하게도 몸을 떨고 있었다. 성큼 다가가 핸드폰을 들어보니 김 비서였다.

민환은 김 비서가 건네주는 봉투를 열어보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묵묵히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민환의 얼굴에 서서히 냉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까지 빠르게 다 훑은 후 서류를 내려놓으며 그는 허, 하고 탄식했다.

“이게 다 사실입니까?”

“네. 알아보는데 애는 먹었지만 전부 사실입니다.”

단호한 김 비서의 말에 민환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신분상승을 노리는 제비 같은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강재효의 과거는 민환의 예상보다 훨씬 더 지저분했다.

그냥 제비가 아니라 협박에 사기까지. 폭력배와도 연관이 되어 있는데다 약물복용 혐의까지………. 

김 비서가 강재효에게 당한 피해자 몇을 찾아내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데, 그 중에는 남자도 끼여 있었다. 

여자들 중에는 억지로 강간을 당해 그걸 빌미로 협박을 당한 경우도 있었고.

 교도소에 가도 수백 번은 갔을 법한 악질이었다. 그렇게 지저분하게 놀던 자식이 감히 난희를 노렸단 말이지?

 그것도 모자라 감히 건주에게 해도 끼쳤고.

이모부도 분명 뒷조사를 했을 텐데 대충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고 만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난희의 고집에 져서 둘의 결혼을 허락했겠지. 몰랐다면 모를까, 안 이상 녀석을 난희의 곁에 둘 수 없었다. 민환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후 김 비서를 보았다.

“아버지도 아십니까?”

“아직 말씀 안 드렸습니다.”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이모부가 아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그럼 시끄러워지겠죠. 전 가능하면 조용히 해결하고 싶군요.”

그러니 당분간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다. 눈칫밥을 삼십 년 가까이 먹어온 사람답게 김 비서는 민환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염려 마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면 피해자들의 증언을 녹음해 오십시오. 쉽진 않겠지만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지 설득하시고요.”

“고소할 생각이십니까?”

“과거 행적을 보아 하니 쉽게 물러날 놈이 아닌 것 같네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김 비서가 돌아간 뒤에도 민환은 자리를 지키며 담배 두 대를 더 태웠다.

그런데 이 녀석이 왜 차혜련을 앞세워 건주를 린치한 거지?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그 문제는 만나서 물어보면 곧 알게 되겠지. 세 대째의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끈 후 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섣불리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 식사자리를 만들어 슬쩍 떠볼 생각이었는데, 난희 말이 강재효가 이모부를 모시고 해외 출장을 갔단다. 전화를 끊으며 민환은 쯧 혀를 찼다.

“참, 실장님. 오늘 실밥 풀러 가는 날인 거 잊지 않으셨죠?”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나경수가 말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꼭 풀어야 하나.”

“무슨 말씀이세요? 어서 나오세요. 제가 병원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까.”

좀 아니…… 많이 아쉽다. 실밥을 풀고 오른손이 자유로워지면 더 이상 건주의 시중을 못 받을 텐데. 정확하게 말하면 더 이상 그의 손에 몸을 내맡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물론 건주의 손길이 몸을 스칠 때마다 중심이 발기하려고 해서 좀 난감하긴 했지만 말이다.

병원에 가서 실밥을 풀며 물어보니 며칠 정도는 더 환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단다. 민환은 친구의 설명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었다. 난감한 상황이 매번 일어나긴 해도 건주의 손길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민환은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찬 후 묵직한 한숨까지 내쉬었다. 역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상처가 나아가는 것에 아쉬움마저 느끼다니 말이다.

‘박건주. 너 내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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