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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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하세요. 아주 멋진 걸 찍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건주는 철민의 사촌동생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멋진 거라니 도대체 뭘까? 힌트라도 달라고 했지만 그는 흐흐흐 하고 음산하게 웃기만 했다. 힌트를 주면 나중에 재미가 반감된다나 뭐라나. 재효가 폭력배들과도 연관이 되어 있어서 걱정이 컸는데, 그는 걱정하는 말 같은 건 흘려들으며 혼자 아주 신나했다. 결국 건주는 건성으로 자신의 걱정을 들어 넘기는 철민의 사촌동생을 향해 몸조심 하라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제발 결정적인 걸 찍어오면 좋겠는데. 재효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아주 확실하고 결정적인 어떤 거. 그러면서도 걱정이 된다. 주의 깊은 성격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사천만원을 더 해줬으니 재효가 약이 바짝 올랐을 텐데……. 처음 삼천에 사천을 더하면 칠천. 그 정도면 정말 큰돈이다. 물론 그래도 재효가 가져간 돈에는 못 미치지만.

지금 재효는 정난희에게 올인하고 있으니 설마 다른 사람에게 뜯어낸 돈은 아니겠지? 제발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이어야 할 텐데……. 그래야 재효를 더 옭아맬 수 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파트 문을 열었다.

“왔어?”

“네. 다녀왔…… 어?”

다녀왔다고 익숙하게 인사를 하던 건주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태 실장의 오른팔에 붕대가 사라지고 대신 얇은 반창고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놀라는 건주를 보며 태 실장이 웃었다.

“오늘 실밥 풀었어.”

“그래요? 흉터 같은 건 안 남는데요?”

“관리 잘하면 흉터는 남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 아직은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대. 그래서 말인데…….”

“네?”

“며칠 더 네가 내 샤워를 도와주어야 할 것 같은데?”

태 실장이 건주의 눈동자를 살피며 살짝 망설이는 듯 말했다. 미안해서 그러는가 보았다. 당연하죠. 건주는 일부러 더 크게, 당연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 실장의 샤워를 도와줄 때마다 난감한 상황이 오긴 하지만, 그렇다고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태 실장이 귀가 길에 사온 도시락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잠시 소화를 시킨 뒤, 두 사람은 욕실로 들어갔다. 어제 반바지가 젖어서 빨래통에 넣어둔 상태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트렁크 팬티를 입었다.

환부에 물이 닿지 않도록 비닐로 꼭꼭 싸맨 후 언제나처럼 비누칠을 시작했다. 점차 발기하는 태 실장의 중심을 애써 외면하며 후다닥 비누칠을 하고 샤워기로 씻어냈다.

“다 됐어요. 닦아드릴게요.”

수건을 집기 위해 몸을 뒤로 트는 순간이었다. 발바닥이 미끌하더니 건주의 몸이 뒤로 휘청 넘어갔다. 아무래도 바닥에 남아있는 비누거품을 밟은 모양이었다.

“조심…… 해야지.”

바닥으로 넘어가는 건주의 몸을 재빨리 받아낸 태 실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네. 죄송…… 그보다 팔! 팔 괜찮아요?”

건주의 몸을 받아낸 팔은 오른쪽이었다. 괜찮나? 재빨리 몸을 바로 세우고 허둥지둥 그의 오른팔을 살펴보았다. 상처가 벌어지진 않았겠지? 꽁꽁 싸맸는데 물기가 들어간 건 아니겠지? 걱정하며 세심하게 팔을 살피는 건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태 실장이 “괜찮아.”하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쉰 것처럼 거칠었다. 응? 하며 고개를 들었던 건주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바라보는 눈길이…… 뭐라고 할까.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소독 안 했지?”

여전히 태 실장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까끌거렸다. 건주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애매하게 웃었다.

‘아침에 했는데요.’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입안의 상처도 다 나아서 더 이상은 소독도, 연고도 필요 없었지만 건주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왜일까.

부드럽게 웃은 태 실장이 건주에게 입맞춤을 해왔다. 건주의 허리를 잡아 몸을 딱 붙이고 입안을 꼼꼼하게 훑었다. 입속 깊이 들어온 혀가 목젖을 건드린 순간 으음, 하는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민망해서 엉덩이를 뒤로 빼자 태 실장은 더더욱 단단하게 몸을 맞붙여왔다. 배에…… 두툼하게 발기한 그의 것이 느껴진다. 태 실장의 중심은 뱃가죽을 뚫고 안으로 들어올 듯 뜨겁고 단단했다.

태 실장은 건주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거의 옭아맨 채 키스를 하고 있었다. 아마 그도 느꼈…… 을 거다. 건주의 것이 발기해 허벅지를 찌르고 있음을. 미치겠다. 건주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게 바로 샤워할 때마다 일어나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비누칠을 하느라 태 실장의 몸을 문지르고 있다 보면 저도 모르게 중심이 섰다. 처음에는 헐렁한 반바지로 충분히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발기했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크게 발기하는 거다. 그래서 함께 욕실에 들어와 씻겨주다 보면 둘 다 커다랗게 발기한 채 흠흠 헛기침만 해대는 난처한 상황이 발생했다.

건드리면 서는 것이 남자의 생리라곤 하지만, 자신의 것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왜 서는지! 거기다 오늘은 키스 때문에 더 곤란했다.

태 실장의 혀가 입천장을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간질간질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더욱더 크게 발기한 태 실장의 중심이 건주에 배에 문질러졌다. 건주 역시 자신도 모르게 살짝 허리를 흔들었다.

호흡이 벅차다. 뇌리를 문지르는 달큰한 쾌감에 뼈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슬금슬금 차오르는 쾌감에 눈자위가 붉게 달아오르고 있을 때였다. 항문 입구에 서늘한 것이 닿았다. 순간 건주는 맨발로 얼음을 밟은 사람처럼 동공을 키웠다.

‘서, 설마……?’

키스야 그렇다 쳐도 태 실장은 확실한 노멀이니 키스 이상의 것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비웃듯 그는 건주의 항문 안으로 조금씩 손가락을 밀어 넣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는 살덩이 사이를 헤치며 안으로 조금씩. 조금씩.

“요즘 내가 미친 것 같아.”

태 실장이 잔뜩 쉬어터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건주는 밭은 숨을 몰아쉬며 의아한 눈빛을 했다.

“……?”

“자꾸만 키스하고 싶고, 밤낮으로 널 안고 싶다는 생각을 해. 내가 미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널 안고 싶어. 왜일까?”

그건 건주에게 묻는다기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

건주는 숨을 꿀꺽 삼켰다. 여전히 그의 손가락은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정말 내가 미친 걸까?”

“………….”

건주는 대답 대신 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건주 자신도 미친 것이 분명했다. 태 실장과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끝까지 파고든 손가락이 내벽을 슥 문지르는가 싶더니 뒤로 스륵 빠져나갔다. 건주의 몸이 움찔 떨렸다. 건주는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태 실장을 올려다보며 살짝 입술을 떨었다.

언제 욕실을 나왔는지 모르겠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침대 위에서 태 실장과 엉켜있는 상태였다. 혀뿌리가 뽑혀 나갈 정도로 거친 키스를 하며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성기를 움켜쥔 채 거세게 문질렀다.

“하, 하앗!”

핏줄이 돋아오를 정도로 발기한 태 실장의 페니스가 너무 뜨거워서 손바닥을 델 것만 같았다. 입술을 뗀 태 실장이 건주의 턱을 깨물었다. 건주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미약한 신음성을 냈다.

“하, 아앗…….”

귀두를 문지르던 태 실장의 손이 갈라진 틈을 찔러대자 고통과 쾌감이 뒤섞이며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야릇한 느낌이 몸을 관통했다. 입술을 벌려 연신 가쁜 숨을 내쉬며 몸을 비트는 건주를 알 수 없는 눈길로 응시하던 태 실장이 돌연 몸을 뒤집었다. 출렁. 그런 소리가 난 것 같다. 건주는 입술을 깨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엉덩이를 벌려 입구가 드러나게 한 태 실장이 작게 벌어져 움찔거리고 있는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어떤 움직임도 없이 한참동안 물끄러미.

긴장으로 목이 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노멀이니 막상 항문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든 건지도 모른다. 배설을 목적으로 한 기관에 중요한 부위를 집어넣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건주는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시, 실장님? 거북하…….”

거북하면 안 해도 된다.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였다.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태 실장이 페니스 끝을 항문 입구에 가져다댔다. 둥글고 축축한 액체가 묻은 귀두가 주름을 꾹 눌렀다. 그리곤 안으로 조금씩 파고들어왔다. 건주는 시트를 움켜쥐며 눈을 부릅떴다. 뜨겁게 달아오른 살덩이가 조금씩 몸속으로 파고들어올 때마다 척추를 타고 오싹한 통증이 내달렸다.

아, 아프다. 몸이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건주는 다급하게 심호흡을 하며 몸에서 힘을 빼려고 애썼다. 뒤로 성기를 받아들이는 건 오랜만이었다. 사실 뒤쪽 경험은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효와 사귈 때는 주로 구음을 했고, 삽입 섹스는 별로 안 했다. 간혹 삽입섹스를 했을 때에도 대체로 건주가 재효에게 넣는 쪽이었다. 그걸 재효가 더 원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라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로 재효가 원하는 쪽으로 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경험이 전무 한 것은 아니어서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몸에서 힘을 빼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아, 아윽!”

반 정도 집어넣고 잠시 멈칫하던 태 실장이 건주의 허리를 잡고 단번에 끝까지 밀어 넣었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통증에 건주는 저도 모르게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미안. 아파?”

“괘, 괜찮…… 아요.”

건주는 숨을 내뱉으며 애써 웃었다. 태 실장이 위로하듯 건주의 배를 문지르며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쪽쪽. 어깨에 부리로 쪼는 것처럼 가벼운 입맞춤을 하며 엄청난 통증에 약간 줄어든 건주의 성기를 만져주었다. 한 손으로 꼭 잡고 문지르자 기가 죽었던 페니스가 다시 커졌다. 성기를 자극하는 쾌감에 신경이 앞쪽으로 쏠린 순간 태 실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의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느릿하게 움직이며 내벽을 문질렀다. 그러다 점차 속도를 빨리 하며 항문 안을 들락거린다. 밑으로 떨어지는 엉덩이를 추슬러 올리며 철벅철벅 살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건주는 가쁜 숨만 내쉬며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고통을 견뎌냈다. 그때였다. 뒤로 깊이 빠졌던 페니스가 단번에 쿡 찔러 들어오며 몸 속 깊은 곳, 어느 지점을 건드린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며 아찔한 쾌감이 밀려왔다. 건주는 입을 벌리며 덜덜 떨었다. 누군가 머릿속으로 지릿지릿한 전류를 흘려 넣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걸 몸이 연결된 채인 태 실장이 모를 리 없었다.

“전립선을 건드린 건가?”

그는 어딘지 모르게 몹시 기쁜 기색으로 허리를 추어올렸다. 건주가 명백히 반응하며 몸을 떨었던 지점을 집요하게 찔러댔다.

“으, 하, 하아앗. 하앗!”

회음에 태 실장의 고환이 철썩철썩 부딪쳤다.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에 까슬까슬한 음모가 닿았다. 전립선을 찔러대던 페니스가 뒤로 슬쩍 빠지더니 다시 안으로 치고 들어와 둥근 끝으로 뭉근하게 문댔다. 건주는 이마를 시트에 대고 고개를 흔들며 항문을 조였다.

뒤로 완전히 빠졌던 페니스가 퍽 하는 소리가 함께 안으로 푹 파묻힌 순간 내장 안으로 뜨끈한 것이 퍼졌다. 동시에 건주도 하체로 피가 온통 모이는 감각을 느끼며 정액을 방출했다.

민환은 정신을 잃은 건주의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건주와의 섹스는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분명 풍성한 젖가슴이 없는 밋밋한 가슴임을 느끼면서도, 부드러운 질이 아닌 좁고 뻑뻑한 항문 안에 삽입을 했으면서도 지금껏 해왔던 섹스 중에 단연 최고였다. 머리끝까지 흥분해서 마치 몸이 제 몸이 아닌 것처럼 제어를 할 수 없었다.

미친 것처럼 허리를 흔들었고, 건주의 몸을 자신의 정액으로 가득 채우고 말겠다는 소유욕에 가득 차 몇 번이고 몸 안에 방출했다. 안고 싶다, 라고 머리가 저릿해질 정도로 생각하긴 했어도 막상 닥치면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바보 같은 기우에 불과했다. 자신은 처음 섹스를 하는 풋내기처럼 건주의 몸에 덤벼들었다. 건주가 정신을 잃은 것도 몰랐을 정도로…….

‘놓치고 싶지 않다. 이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지금까지 사귀었던 여자들과는 다르다. 그녀들은 처음부터 즐기기 위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건주는 달랐다. 진심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너와 진심으로 연인이 되고 싶다.”

민환은 건주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입김이 닿은 탓인지 건주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하체가 지저분해서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왔다. 더러워진 허벅지와 사타구니 안쪽을 닦은 후 몸을 살짝 뒤집었다. 꼭 다물린 것처럼 보이는 입구 틈새로 자신이 싸놓은 정액이 아주 약간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틈을 벌리자 이젠 주룩 흐른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뿌연 정액이 선뜩할 정도로 선정적이어서 새삼 아랫도리가 꿈틀거렸다. 순간 색만 밝히는 짐승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민환은 멋쩍게 웃은 후 손가락을 더 깊이 넣어 정액을 긁어냈다. 스스럼없이 남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더럽다거나 역겹다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의아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내벽이 움찔거리며 손가락을 조일 때마다 반응하는 아랫도리 때문에 곤란할 지경이었다.

‘너 정말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건주의 몸을 말끔히 닦아준 후 민환은 곤란한 낯빛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친 얼굴로 잠이 든 건주가 너무 사랑스럽다. 난생 처음 가져보는 감정이 당황스럽고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가슴 속에 심은 느낌이었다.

꼭 된통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다. 입술도 타는 것 같았다.

‘목말라.’

심한 갈증에 목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건주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하아. 눈을 뜨자마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엄청난 사고를 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후회…… 하는 건가? 잠시 생각해 보던 건주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멀인 태 실장과 몸을 섞은 것이 결코 잘한 짓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후회는 안 한다. 그 순간에는 분명 태 실장을 너무나 원했으니까. 한순간 타오른 단순한 욕정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에는 태 실장과 한 몸이 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어쩌면 태 실장과 함께 살면서 차곡차곡 쌓였던 욕망이 일시에 폭발한 걸지도……. 키스나 함께 목욕 같은 걸 하면서 자잘하게 욕구가 일었으니까. 어쩌면 얼마 전 태 실장이 한 말처럼 그와의 애인 놀이에 지나치게 심취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

열을 품은 것처럼 뜨거운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곁이 허전했다. 그러고 보니 태 실장이 없다. 넓은 침대에는 건주 혼자였다. 어딜 간 거지? 설마 순간적으로 불타올라 남자인 자신과 몸을 섞어놓고 자책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남자와의 섹스라니, 보통 사람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들 테지. 남자의 항문에 페니스를 집어넣고 사정까지 했다는 사실이 구역질나고 혐오스러울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런 일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술에 취해 몸을 섞어놓고 다음 날 자신이 남자와 섹스 한 것을 알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했다는 얘기를……….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들려고 한다. 괜히 가슴 한 구석이 따끔거리기도 했다.

손바닥으로 심장 부근을 꾹꾹 누르며 알 수 없는 우울함에 물먹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을 때였다. 달칵 문이 열렸다. 눈동자를 굴려보니 태 실장이 생수통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눈을 반질반질 뜨고 있는 건주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깼어?”

“…… 네.”

“목마르지. 이거 마셔.”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는데, 그 정도의 작은 움직임에도 허리가 찌르르 아팠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허리 아래쪽, 엉덩이 안쪽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움찔해서 미간을 찌푸리는 건주를 본 태 실장이 부드럽게 등을 문질러주며 편안히 앉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곤 생수통 입구를 건주의 입에 대주었다. 태 실장이 생수통을 기울이자 물이 조금씩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건주는 꿀꺽꿀꺽 아이처럼 물을 받아마셨다.

“하아. 살겠다.”

물을 듬뿍 마시고 나자 좀 살 것 같다. 건주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미안해. 힘들지?”

태 실장이 건주의 이마로 내래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

“너무 흥분해서 조절을 못했어.”

“괜찮으셨어요?”

건주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눈치를 보듯 물었다.

“…… 뭐가?”

건주의 질문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태 실장이 되물었다.

“저랑 섹스…… 한 거요. 저도 남자, 실장님도 남자이지 않습니까?”

태 실장이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복잡한 눈길로 괜히 귓불을 잡아당기고 있는 건주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상하지. 네 말대로 너도 남자, 나도 남자인데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흥분했거든. 거기다 섹스 자체도 너무 좋아서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어. 내 몸인데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어서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아마 수백 번은 한 것 같아.”

“………….”

“네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아직도 흥분을 자제하지 못하고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 거든.”

태 실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턱을 살짝 들었다. 건주의 몸이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곧 몸 전체가 새빨갛게 변한 건주가 우물우물 입술을 움직이다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민망하다. 왠진 잘 모르겠지만 민망해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 다행이네요.”

다소 엉뚱한 대답에 태 실장이 픽 웃었다.

“너는 어땠나? 처음이었을 텐데,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아팠나?”

“아프긴 했지만…….”

“불쾌하거나 역겹진 않았지?”

내가 태 실장님께 던져야 하는 질문인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건주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멍한 대답에 왠지 초조해 보이던 태 실장이 기쁘게 웃었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들뜬 아이처럼 웃는 태 실장의 모습이 이상하고, 이해가 안 갔다. 태 실장은 건주의 옆으로 앉더니 조심스럽게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다음부터는 좀 더 살살 할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긴 했지만, 네가 기절한 후 인터넷을 찾아보니 남자들끼리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더군.”

“……?”

점점 더 영문 모를 소리만 한다.

“그러니까…….”

“……?”

“나와 계약 애인 말고 진짜 애인이 되어보는 게 어때?”

태 실장은 건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망설이더니 힘겹게 말을 했다.

“……? ……!!!!”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되어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다 태 실장이 한 말이 머릿속에 완전히 접수된 순간 경악으로 입을 벌렸다. 진짜…… 애인? 지금 태 실장이 진짜 애인이 되자고 한 거 맞지? 건주는 입술을 잘근 씹고 있는 태 실장을 보며 멍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멍해 있는 건주를 보며 태 실장이 입술을 살짝 떨었다. 믿기진 않지만 태 실장은 지금 긴장……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너에 대해서만은 분명해지지가 않아.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이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

“………….”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물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니까 쉽게 말한다고 생각하진 말았으면 좋겠군. 그러니까 내 말은!!!”

“…….”

“너와 진심으로 연인이 되고 싶다.”

온종일 정신이 멍했다. 안개를 머릿속에 두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밀가루를 뒤집어 쓴 것처럼 눈과 마음이 텁텁하기도 했다. 온통 태 실장이 했던 말에만 신경이 가 있어서 일손도 손에 안 잡히고 자꾸 한숨만 나왔다.

‘아마 대답하기 쉽지 않을 거야. 나도 쉽게 결론 내린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도 깊이, 오래 생각한 후에 대답해주기 바라.’

말을 하는 동안 태 실장은 몇 번이나 숨을 삼켰고, 가끔 혀를 차며 난감하게 턱을 문지르기도 했다. 그리곤 모든 말을 다 끝낸 후엔 여전히 영혼이 없는 인형처럼 멍해 있는 건주를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군. 아, 물론 너와 가볍게 놀고 싶다는 의미로 한 말은 절대 아니야. 진지하게, 난생 처음으로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바쁘게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 있다며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한 말이었다. 건주는 입술을 꼭 다물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아까부터 아니 어젯밤부터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리고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하도 요란하게 뛰어서 혹시 옆 사람이 듣진 않을까 염려가 되어 슬쩍 옆을 돌아봤을 정도였다.

이상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이 안 된다. 건주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을 빼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도 마치 불길을 직접 대고 있는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가슴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미치겠다. 미치겠어. 미치겠다는 생각만 든다. 건주는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정수기와 책상 사이를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오늘은 과장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근무 태도 불량으로 또 시말서를 써야 했을 지도 모른다.

입안이 까끌거려 입맛이 없어서 점심도 뜨는 둥 마는 둥 한 후 휴게실로 가 담배를 뻑뻑 피웠다. 요즘 하루에 피우는 담배 양이 부쩍 늘었다. 전엔 한 갑 사면 최소 일주일은 갔는데, 요샌 이삼일이면 없어진다.

“왜 그래? 고민 생겼어?”

“…… 네?”

선배가 줄담배를 피고 있는 건주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잖아.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줄담배만 연신 피고 있고. 그리고 이마에 주름살 좀 봐라. 세상 시름 너 혼자 다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아.”

건주는 멋쩍게 웃으며 손으로 이마를 박박 문질렀다. “별 일 아니에요. 사적인 고민이 좀 있어서요.”하고 말하며 애써 웃었는데, 곧 한숨이 나와서 푹 내쉬었다. 선배가 그런 건주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것처럼 머리와 심장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미치…… 겠네.’

태 실장 말대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는데,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혼란스럽고 당혹스럽기만 하다. 싫다, 좋다. 어느 쪽으로도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먹먹하고 자갈을 삼킨 것처럼 버석버석한 가슴을 꾹꾹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부르르 떨려서 건주는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마냥 화들짝 놀라며 몸을 흠칫 굳혔다. 아. 놀랐다. 심하게 놀란 것이 머쓱해서 혼자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던 눈빛이 어눌하게 내려앉았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재효였던 것이다. 건주는 잠시 핸드폰이 재효라도 되는 것 마냥 노려보다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었지?”

건주를 보자마자 재효가 한 말이었다. 건주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리에 앉았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오늘따라 재효의 태도가 당당하다. 뭔가 커다란 한수를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자신만만하고, 눈동자에는 여유마저 감돌고 있었다. 뭐…… 지? 재효의 입가에 걸린 비릿한 미소를 본 순간 웬일인지 등줄기로 싸늘한 한기가 스쳤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심장박동이 빨라졌지만 건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의연하게 재효를 바라보았다.

“사진으로 날 협박했었지? 나도 똑같이 해주려고.”

무슨…… 의미지? 팔짱을 낀 채 느긋한 자세로 건주를 쳐다보고 있던 재효가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손끝으로 휙 던졌다. 팔랑팔랑 날아간 사진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재효는 건주를 향해 주워서 확인해 보라는 듯 거만하게 턱짓을 했다. 쯧 혀를 차며 사진을 집어든 건주의 낯빛이 창백하게 얼었다.

“……!”

굳어가는 건주를 보며 재효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기억나겠지? 네가 끝까지 넘어오지 않으면 써먹으려고 찍어두라고 했던 건데, 이런 식으로 쓰게 됐네. 자, 이제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건가? 민환 형님이 아무리 마음이 넓어도 그런 사진을 보고 나면 화가 나겠지? 거기에 내가 약간의 각색만 더해줘도 넌 끝장이야. 애인의 난잡한 과거를 용서할 수 있는 남자는 별로 없으니까.”

“…….”

“특히 민환 형님 같은 사람은. 겉은 무척 다정해 보이지? 그러나 속은 누구보다 냉혹한 사내야, 형님은. 형님이 이 사진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말 궁금하지 않아?”

“…….”

“어떻게 할까? 나도 너처럼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할까? 아니면 형님과 헤어지라고 말해볼까? 이 사진을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어. 그건 너 가져. 선물이야. 사진은 얼마든지 더 뽑을 수 있으니까. 그럼 또 연락하지.”

재효는 이를 드러내며 한껏 웃은 후 일어나 카페를 나가버렸다. 건주는 피가 날 정도로 혀를 씹었다. 비릿한 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참을 수 없이 구역질이 올라왔다. 사진을 움켜쥔 채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얼굴을 박고 구역질을 해댔다. 뱃속이 뒤틀려서 아플 정도로 구토를 한 후 더러운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여전히 손에 꼭 쥐고 있던 사진을 들어보았다.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언제 찍힌 것인지를……. 술에 탄 약을 먹고 정신을 잃었을 때 찍힌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자신은 난잡하게 다리를 벌린 채였다. 입술이 한껏 벌어져 있는데다 중심까지 발기해 있어서 누가 보아도 섹스하기 직전의…….

“우욱!!”

다시금 구역질이 올라왔다. 건주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어나 토악질을 해보았지만 더 이상 나오는 것은 없었다. 속에 가득 차 있는 듯한 뭔가를 다 토해내고 싶은데 더 이상 아무 것도 안 나온다. 그래서일까. 배가 아프고, 가슴도 아팠다. 건주는 옷자락을 있는 힘껏 구기며 변기 안을 향해 몇 번이나 반복해서 헛구역질을 해댔다.

가슴이…… 아프다. 쇠구슬로 내장을 쿵쿵 찍어대는 것처럼 견딜 수 없이 아팠다.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만 같았다. 건주는 심장을 부여잡고 다시금 힘없이 바닥에 털썩 앉았다. 아래로 고개를 툭 꺾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장맛비처럼 후둑후둑 떨어져 바지를 흥건하게 적셨다.

만약 태 실장이 이 사진을 보게 된다면? 별로 춥지도 않은데 오싹한 소름이 돋으며 몸이 마구 떨렸다. 두려움이 목구멍을 틀어막아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두렵…… 다? 왜? 태 실장이 실망할까봐? 어차피 계약으로 얽힌 관계이고, 최후의 순간에는 다 알게 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나?

복수를 위해 태 실장을 이용하겠다고 직접 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이렇게 두렵…… 지? 왜 이렇게 무서운 거지? 마치 칼로 피부를 죽죽 그어 내리는 것처럼……. 섬뜩한 총구가 관자놀이를 겨누고 있는 것처럼…….

- 너와 진심으로 연인이 되고 싶다.

다음 순간 건주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창백한 비명이 목구멍을 긁어대는 것만 같아서 목도 꽉 부여잡은 채 숨을 헐떡거렸다.

“……!!!”

맙소…… 사. 맙…… 소사. 대, 대체 언제……부터? 건주는 새하얗게 얼어붙은 채 입술을 덜덜 떨었다. 대체 언제부터 태 실장을, 태민환이라는 사내를 마음속에 담았던 거지?! 도대체 언제부터 태민환이라는 사내가 내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던…… 거지?

도대체 언제부터!!!

세상 모든 근심걱정을 다 짊어진 사람처럼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집안으로 들어섰던 건주는 소파 위로 비죽 올라온 뒤통수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러나 곧 뒤통수의 주인이 태 실장이 아님을 깨닫고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왔어?”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는 경환의 입에는 길쭉한 오징어다리가 물려 있었다. 경환은 오징어다리를 한쪽 이로 질겅질겅 씹었다.

“웬 오징어야?”

“동기 중에 고향이 울릉도인 녀석이 있거든. 집에서 어머니가 오징어를 보내 주셨다고 좀 나눠주길래 형 맛보라고 냉큼 가져왔지. 맛있네. 쫄깃쫄깃한 게. 먹다 보니 술 생각나서 맥주 한 잔 하고 있던 참인데, 너도 마실래?”

건주는 말없이 경환의 맞은편으로 앉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맥주 한 캔을 집었다. 답답한 속을 털어내듯 한 캔을 쉬지도 않고 쭉 마신 후 빈 캔을 내려놓는데 소파 등받이에 걸린 양복 상의가 보였다. 태 실장의 것이었다.

“실장님…… 오셨어?”

“어. 오늘 저녁 맛있는 거 해준다고 장보러 갔어. 흐흐.”

형님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대감으로 마음이 잔뜩 부푼 경환이 히죽 웃었다.

“그…… 래?”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다. 건주는 맥주 캔을 하나 더 집었다.

“참, 네 꽃뱀 애인이 만났다는 남자가 도대체 누구야? 내가 생각할수록 분해서 참을 수가 없어. 내가 대신 복수…… 는 못해주겠지만 누군지 말하면 결혼 파토나게 해줄게. 아니면 형한테 말하던지. 솔직히 나야 별 볼일 없지만 우리 형은 능력이 좀 있거든. 너도 잘 알겠지만.”

빼놓지 않고 형 자랑을 하는 경환을 향해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의 옛 애인이 누구인지 알면 경환이도 경악하겠지? 그리고 태 실장님도. 이들 형제가 경악과 분노, 혹은 경멸에 차 자신을 볼 거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쓰라렸다.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랄 정도로 이들 형제가 좋아져버렸다. 특히 태 실장이…….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을 정도로 재효에게 상처를 받아서 손쉽게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주 조금씩.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떨어진 태 실장에 대한 마음이 어느새 심장 전체를 적셨던 것이다. 그걸 지금껏…… 몰랐다.

“말만으로도 고마워.”

흐릿하게 웃은 건주가 경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무슨 짓이야!”

팩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은 경환이 건주를 향해 고개를 갸우뚱 했다. 표정이 이상한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두 번째 캔을 말끔하게 비우고 일어나는 건주를 향해 경환이 “싸웠어?”하고 물어왔다.

“응?”

“아까 보니 형 표정도 심상치 않던데. 둘이 싸운 거야?”

“…… 아니.”

건주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을 때였다.

“우리가 애들이냐? 싸우게.”

등 뒤에서 태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아서 심장 부근을 문지른 건주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양 손 가득 장을 봐온 태 실장이 보였다. 그는 건주와 시선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웃었다.

“왔어?”

“…… 네.”

어색한 눈길이 오갔다. 진짜 연애를 해보자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태 실장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어색하긴 했지만, 지금은 특히 더 했다. 아니 어색하다기 보단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자꾸만 콩당콩당 뛰었고, 목덜미는 화끈거렸다. 건주는 달아오른 목덜미를 들키고 싶지 않아 자라처럼 움츠렸다.

마음이 얼굴에 드러날 것 같아 무섭…… 다.

“씻고 나와. 근사한 해물탕을 해줄 테니.”

건주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도망치듯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탁 닫자마자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저 사람이…… 좋다. 사실 태 실장이 연인이 되자고 했을 때 기뻤다. 그러나 기쁘다고 자각하지 못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태 실장과 자신의 사이에는 강재효와 정난희가 있었다.

재효와의 관계를 알게 되면 분명 경멸할 거다. 속였다고 분노할 거다. 어떤 식으로든 정난희에겐 상처를 줄 테니 그 점에 대해서도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그녀는 태 실장의 핏줄이고 자신은……. 그래, 지금은 좋아해준다고 해도 언젠가는 질려버릴지도 모를 그런 일회성 상대…….

건주는 손목으로 심장을 꾹꾹 살이 아플 정도로 눌렀다. 그래도 아릿아릿한 가슴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태 실장이 자신을 경멸할까 봐 무섭고, 지금의 다정함이 냉혹함으로 변할까 봐 두렵다.

잃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태 실장이 내민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을 수도 없었다.

생각보다 오래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나 보다. 어느새 문틈을 비집고 얼큰한 냄새가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 바깥에서 경환이 “우아! 맛있겠다!”하며 호들갑을 떠는 소리도 들렸다. 건주는 입술을 씹으며 걸음을 뗐다.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나오니 식탁 위에는 근사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서 먹어봐.”

한 그릇 푸짐하게 떠서 내려놓으며 태 실장이 어서 맛보라며 건주를 재촉했다. 건주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든 후 먹어보았다. 역시 맛있다.

“맛있…… 어요.”

“그래? 다행이군. 오늘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공을 들였거든. 잘 봐달라는 의미야.”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건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며칠 굶은 사람마냥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머리꼭지로 태 실장의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져서 더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역시 싸웠구나?!”

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 실장과 건주를 번갈아 보던 경환이 와락 소리를 내질렀다.

“안 싸웠다니까.”

“근데 뭘 잘 봐달라는 건데?! 역시 싸운 거 맞지? 형이 잘못한 거구나!”

“아니라고 했지!”

아웅다웅하는 두 형제를 쓴 눈으로 보며 건주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이상하게 콧속이 시큰거리고 있었다.

급하게 먹은 탓인지 체했나 보다. 속이 답답해서 억지로 들었던 선잠에서 깬 건주는 소화제를 한 알 찾아먹고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모로 누워 잠든 태 실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실 따로 자고 싶었지만 오늘 경환이 자고 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함께 있기 부담스러운데.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진실을 숨긴 채 태 실장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싫다며 거절할 수도 없었다.

태 실장이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분명 관계도 끝이 나겠지만 아직은 함께 있고 싶었다.

“잠이 안 와?”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말을 걸어오는 태 실장의 눈동자에는 졸음의 기운이 조금도 없었다. 그 역시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나 보았다.

“네.”

“내 말이 그렇게 부담스러웠나?”

“그게 무슨……?”

“어제부터 나와 눈도 잘 안 마주치고, 잠도 잘 못 자잖아. 불편하고 어색해 하는 것이 눈에 보여.”

“…….”

“정 내가 싫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그런 게 아니에요.”

건주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버럭 외쳤다.

“……?”

“실장님이 싫은 게 아니라…… 나한테 문제가 좀 있어서…… 그래서……. 지금 당장은 답 못하겠지만 열심히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로 열심히.”

필사적으로 말하는 건주를 보며 태 실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곤 제 옆을 툭툭 쳤다. 누우라는 의미였다. 망설이던 건주가 머뭇대며 그의 옆에 누웠다. 곧 자연스럽게 허리로 팔이 둘러졌다. 태 실장이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등을 토닥토닥했다. 건주는 그의 가슴으로 얼굴을 묻으며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시큰거리는 눈을 꾹 감았다.

태 실장이 좋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태 실장이 자신을 경멸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또 다시 상처받긴 정말 싫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얼마나 있었을까. 아주 조심스럽게 태 실장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참 건주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하아, 하고 커다란 숨을 내뱉었다.

“미치겠군.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이렇게 초조할 줄이야.”

곤란한 듯 중얼거리는 말은 분명 혼잣말이었다. 건주는 깨진 유리알을 밟고 있는 기분을 느끼며 목구멍 안으로 한숨을 삼켰다. 유리 조각이 핏줄 안으로 파고든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하루 종일 머리가 묵직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입맛이 없어서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대신한 후 두통약을 두 알 삼켰다. 그럼에도 지끈거리는 미열이 가라앉지 않아 손톱으로 관자놀이를 꼭꼭 누르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왔다. 액정을 보니 재효라 건주는 짜증이 가득한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 회사 앞이야. 나와.

우위에 섰다고 생각한 탓일까. 재효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명령조로 돌아가 있었다. 건주는 쯧 혀를 차며 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지금 나갈 테니 기다려.”

왼손에 쥐고 있던 빈 종이컵을 구겨 휴지통에 내버린 후 밖으로 나가니 재효가 차 보닛에 엉덩이를 걸친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1억이면 될 것 같아.”

재효가 건주를 보자마자 난데없이 말했다. 건주는 기가 찬 눈빛으로 재효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

“나와 난희 결혼 날짜가 잡혔거든. 내 처지를 뻔히 아니까 아무 것도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남자가 쪽팔리게 빈손으로 결혼할 순 없잖아? 적어도 근사한 다이아반지 하나 정도는 해줘야지. 그러니까 딱 1억만 내놔.”

유난히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했더니만 드디어 결혼 날짜가 잡힌 모양이었다. 건주는 버석 마른 들판처럼 메마른 눈빛으로 재효를 바라보았다.

“…….”

“그리고 형님이랑 헤어져. 아무래 결혼날짜가 잡혔다곤 해도 너란 존재가 영 거슬리거든.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널 볼 때마다 진흙탕에 발을 담구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울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너랑 얽히는 거 영 별로야. 형님한테 난잡한 놈으로 찍혀서 강제로 이별을 당하는 것보단 네 쪽에서 정리하는 게 더 낫지 않아?”

“…….”

“생각해 보니 이 사진이 참 쓸모가 많을 것 같아. 형님 부모님 손에 들어가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들의 애인이 사내놈인 것도 기가 막힐 텐데, 이런 사진이나 찍히는 놈이라면 더더욱 기함을 하시겠지?”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지 재효가 어깨를 떨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는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는 모양이었다. 건주는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딱 한 개비가 남아있다. 돛대를 입에 물고 불을 당긴 후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마음대로 해.”

“…… 뭐?”

“네가 내키는 대로 하라고. 나도 나 내키는 대로 할 테니. 한 번 부딪쳐보자고. 어느 쪽이 더 많이 깨지는지 나도 몹시 궁금해졌어.”

“너…… 미쳤어?”

빙글거리던 그대로 재효의 얼굴이 굳었다. 음산해진 눈빛을 마주하며 건주는 피식 웃었다.

“지극히 제정신이야.”

“그런데도 끝까지 가보자고?”

“네가 내 약점을 쥐고 있다면, 나도 네 약점을 쥐고 있어. 난 아직 돈을 덜 받았고, 더 이상 네게 휘둘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 마음대로 해봐.”

“형님이 이 사진을 보는 것에 대해 조금도 두렵지 않다 이건가? 허세야? 뭐야?”

물론…… 두렵다. 그렇다고 겁을 먹고 재효에게 휘둘리고 싶진 않았다. 그건 수철이에게 미안한 짓이었고, 진실이란 애써 숨기고 은폐하려 해봤자 결국은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지금 다 말하자. 다 말해버리자. 자신이 게이란 것도, 태 실장이 꽃뱀이라 부르는 옛 애인이 재효란 것도……. 태 실장은 기함하겠지. 분노하겠지. 경멸하겠지. 차디찬 눈빛으로 노려볼 테지.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두렵다. 더불어 태 실장과는 영원히 끝이…… 나겠지.

덜덜 떨리는 손끝을 숨기려고 건주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곤 싸늘하게 재효를 노려보았다.

“이제 오천 남았어. 네가 내게서 가져간 돈. 그걸 갚을 생각이나 해.”

건주의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재효는 한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표정을 서늘하게 굳힌 후 알 수 없는 눈길로 건주를 살펴보았다. 방금 한 말이 진심인지, 혹은 단순한 허세인지 알아보려는 듯.

건주는 재효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되받아쳤다. 재효가 입매를 비틀었다.

“단순한 허풍 같지는 않군. 정말 갈 때까지 가보자 이거지?”

“물론이야.”

“그렇다면 끝까지 가보자고. 나도 이젠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있으니까.”

건주는 재효를 뒤로 한 채 사무실 안으로 돌아왔다. 두통이 더 심해져서 약 두 알을 더 삼킨 후 책상에 엎드리는데 눈가가 시큰해졌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단순한 계약관계, 재효를 압박할 수 있는 존재로만 생각했던 태 실장의 존재감이, 문득 자각하고 보니 너무나 크고 깊게 마음속에 있었다. 그게 견딜 수 없이 슬프고, 그의 앞에 당당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아팠다. 연인이 되자고 말해주었는데, 대답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뼈가 시릴 만큼 고통스럽다.

이제야…… 알겠다. 왜 재효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지. 그게 더 간단하다는 걸 알면서 어째서 끝끝내 숨기고 싶었는지 이 순간 깨달았다. 태 실장이 재효에 대해 아는 걸 두려워했던 까닭도 뼈저리게 알겠다. 이런 날이 올까봐 무서웠던 거다. 일로 얽혔을 때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건 핑계였고, 진짜 이유는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거다. 태 실장이 실망하고 분노하며 자신을 밀어낼까봐 그게 무서워서…….

처음부터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마음이 이렇게 깊어지기 전에 말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쿵쿵. 주먹으로 가볍게 바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민환은 굳이 시선을 들지 않았다. 누군지 보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웬일이야? 네가 술을 다 마시자고 하고?”

친구인 장현이 놈이었다. 오랜만에 술이나 마시자고 전화를 걸었는데 저런다. 그러는 제 놈도 신혼재미에 푹 빠져서 그간 연락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앉기나 해.”

시큰둥하게 말하며 바텐더에게 눈짓을 하자 곧 장현의 앞에 빈 잔이 놓였다. 민환은 장현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니 좋긴 한데…… 정말 웬일이야? 이상한 소문이 솔솔 돌던데 혹시 그거 때문이야?”

“이상한 소문?”

민환이 잔을 비우며 물었다.

“어. 태민환이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고 하던데?”

민환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일부러 숨기려고 애쓴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부러 소문을 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장현의 귀에까지 건주에 대한 말이 들어갔다니 놀랍다. 어머니가 철저히 입단속을 시켰을 텐데. 하긴 소문이란 숨기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빨리 퍼지긴 했다.

“사실이야.”

담담한 말투에 장현이 깜짝 놀랐다. 마시려고 들었던 술잔을 그대로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녀석은 휘둥그레 변한 눈으로 민환을 보았다.

“정말이야? 농담이지? 천하의 플레이보이 태민환이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고?”

“내가 그런 농담이나 지껄일 놈이야? 사람 일이란 한치 앞을 모르는 거더군.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허 이거 참.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야?”

난감하다는 듯 목을 긁적긁적 긁은 장현이 술을 쭉 마셨다. 단번에 잔을 비운 후 자작으로 채우며 ‘나 원 참’을 세 번쯤 중얼거렸다. 민환은 피식 웃었다.

놀랍겠지. 나도 내 자신이 놀라우니까. 혹시 건주의 입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는 말이 나올까봐 덜덜 떨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나 낯설고 이상한데, 남들이야 오죽할까. 민환은 장현처럼 ‘나 원 참.’을 중얼거리며 술을 마셨다.

자신이 영 싫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건주는 망설이고 있었다. 본인 말로는 제 문제라고 하는데, 그게 뭔지 몹시 궁금했다. 알면 나서서 뚝딱 해결해준 후 ‘내가 해결해줬으니 이제 마음껏 내게로 와라.’라고 말이라도 해볼 텐데.

“정말이야? 정말로 남자랑 살림 차렸어?”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지 장현이 재차 물었다.

“정말이다. 거기다 무려 짝사랑 중이지.”

“…… 뭐어?!”

장현은 기어이 술을 뿜었다. 민환에게도 몇 방울 튀었다. 민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꺼낸 후 턱과 옷깃을 닦았다.

“미, 미안. 그보다 짝사랑? 천하의 태민환이? 이거야 말로 놀랄 노자로군.”

“…….”

“쌤통이다. 이놈아.”

허, 허, 하는 소리를 내던 장현이 불현듯 표정을 바꾸더니 히죽 웃었다.

“…….”

고소해하는 장현을 싸늘하게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아랑곳 않고 히죽히죽 웃기에 바빴다.

“학교 다닐 때부터 여자들의 시선을 독점해서 우릴 기죽인 벌을 이제야 받는 거야. 짝사랑이라니 흐흐……. 어쩌다 무려 짝사랑을 하게 된 거야? 그것도 남자를? 첫눈에 확 반했어? 보자마자 영혼이 찌르르 했어?”

“그건 아니야. 그냥…… 조금씩 좋아졌다고 할까?”

차츰차츰 정이 들었고, 익숙해졌고, 좋아졌다. 처음에는 몸이 닿고 싶었고, 그 다음에는 키스하고 싶었고, 그런 후에는 안고 싶었다. 안고나니 흩어져 있던 마음의 형태가 확실하게 모양을 잡았다. 혹시 정신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이상했던 자신의 행동은 사랑…… 이었다.

미치겠군. 내가 사랑을 다 할 줄이야. 머쓱하게 웃는 민환을 보며 장현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리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태민환이 저런 표정을 하는 걸 다 보고.”

“뭐?”

“아무 것도 아니야.”

장현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은 후 어느새 비어버린 민환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어떤 사람이야? 안 보여줄 거야?”

“좀 기다려. 확실한 답변을 듣고 나면 소개해 줄 테니까.”

건주와 진짜 연인이 된다면 당연히 친구들에게도 소개할 생각이었다. 녀석들은 놀라 뒤집어지겠지만 상관없었다.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 부끄럽다거나 수치스럽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서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장현의 잔도 비어서 채워주려고 술병을 집는데 전화가 울렸다. 먼저 술부터 채워준 후 핸드폰을 꺼내 보니 강재효였다. 이제 출장에서 돌아온 건가? 민환은 장현에게 양해를 구한 후 전화를 받았다.

“나야.”

- 형님. 지금 시간 되십니까?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급한 일인가? 난 지금 친구와 술을 마시는 중인데…….”

- 급한 일이긴 한데……. 으음, 그럼 내일 점심때 뵐까요?

민환은 장현을 힐끗 보았다. 물끄러미 이쪽을 보고 있던 장현이 급한 일이면 가보라는 듯 눈짓을 해왔다.

“아니. 지금 보지.”

어차피 할 얘기도 있으니까. 약속장소를 정한 후 일어섰다.

“먼저 가. 난 혼자 술 한 잔 더 하고 갈 테니까. 너하고 술 마신 다니까 마누라가 겨우 허락한 거거든. 이런 날 마음껏 마셔야지.”

“많이 마시진 마라. 제수씨한테 원망 듣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제수씨라니! 형수님이지! 참, 계산 꼭 하고 가라.”

녀석. 결혼하더니 아저씨가 다 됐다. 민환은 고개를 흔들며 계산을 끝냈다. 차를 가져온 탓에 대리를 부를까 하다 그냥 택시를 탔다. 차는 나중에 본가의 어머니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가져오라고 하면 된다.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재효는 벌써 와있었다.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기색으로 자꾸만 혀로 입술을 적시던 그는 실내로 들어서는 민환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일찍 왔군.”

“네. 가까운데 있었거든요.”

“할 말이 뭐야?”

민환은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그 말에 재효가 가슴을 들썩였다. 크게 심호흡을 한 것이다. 숨을 골라야 할 정도로 중대한 말인가?

“몇 번이나 망설였습니다만 아무래도 형님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형님이 모르고 계신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을 하려고 서두를 저렇게 길게 꺼내는 거지? 민환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재효를 보았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내였는데, 과거를 알고 나니 더더욱 싫다.

“본론만 말하지.”

“박건주씨에 대한 얘깁니다.”

“……?”

건주에 대한? 냉정한 눈빛으로 뒷말을 재촉하는 민환을 보며 재효가 침을 삼켰다.

“참 꺼내기 힘든 얘기인데…… 그 사람, 별로 소문이 좋지 않네요. 사생활도 난잡한 것 같고……. 아무래도 무슨 속셈이 있어서 형님께 접근한 것은 아닐까 해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네요.”

민환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건방진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민환의 표정이 언짢게 변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더구나 내 애인에 대해서?”

너 같은 놈이 감히……. 그 말은 삼켰다. 건주는 강재효 같은 놈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릴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강재효가 건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 몹시 불쾌하고, 혐오감마저 들었다. 차혜련을 앞세워 건주를 폭행하더니 이젠 모함까지 해? 어디까지 하나 보자. 그런 태도로 턱짓을 했을 때였다.

“이걸 좀 보십시오.”

눈을 빛낸 재효가 내민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던 민환의 눈동자가 차갑게 흔들렸다. 이, 이건!! 민환은 뚤어져라 노려보던 사진을 와삭 구긴 후 어금니를 악물었다. 가슴에 한순간 태풍이 휘몰아친 것 같았다. 순식간에 수많은 감정이 심장 안에서 뒤엉켰다.

그러나 잠시 후 고개를 든 민환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돌덩이처럼 딱딱하기만 한 민환을 보고 강재효는 만족한 듯 슬쩍 웃었다. 언뜻 스치고 사라진 웃음이었지만 민환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이게…… 뭔가?”

“저한테도 그쪽…… 친구가 있어서요. 그 친구한테서 얻은 겁니다. 박건주씨 소문이 상당히 안 좋더군요.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참고…… 하지.”

민환은 냉정하게 재효를 훑어보았다.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부하듯 웃고 있는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비열함뿐이었다. 도대체 내게서 뭘 얻어내려고 이러는 거지? 그의 속셈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주제넘게 나선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참, 저희 날 잡았습니다. 5월 25일로요. 난희가 5월의 신부가 되고 싶다고 하네요. 두 달이 채 안 남았으니 급한 감이 없진 않지만, 이왕 할 거 빨리 하려고요.”

“날을 잡았다고?”

“네.”

민환은 눈썹을 휘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낮에 어머니와 잠시 통화했을 때 언뜻 난희가 생각보다 빨리 결혼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었다. 몰랐는데, 그게 날을 잡았다는 뜻이었나 보았다. 민환은 입매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래? 축하하네.”

그 결혼 절대 못할 테지만.

“감사합니다.”

“얘긴 끝났나?”

매정한 음성에 재효는 한순간 불쾌한 낯빛을 했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었다.

“네? 네.”

“그럼 나 먼저 일어나지.”

민환은 미련 없이 일어선 후 술집을 나왔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자마자 잔뜩 구긴 채 주머니에 넣었던 사진을 꺼냈다. 건주의 알몸 사진이라. 그것도 상당히 난잡한 포즈의……. 하! 사진을 내려다보는 민환의 눈빛이 얼음알갱이처럼 파삭거렸다.

강재효의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남자이고, 거짓말에 능수능란한 사내였다. 그렇지만 모두 거짓말이라고 여기고 여상히 흘려버리기엔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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