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민환은 자꾸만 들끓으려 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주먹을 쥐락펴락 하고, 심호흡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이는 건주가 보였다.
“이제 오세요?”
“…… 그래.”
“술…… 드셨습니까?”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술 냄새가 나나 보았다.
“조금.”
건주는 난감한 눈빛을 만들어 보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하는 표정에 잠겨 있는 건주를 보는데 사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대체 누가 그딴 사진을 찍었을까!! 그런 사진을 찍을 정도면 건주와 분명 매우 가까운 사이였겠지. 아마 연인 사이 같은…….
화가…… 난다. 발끝에서부터 뜨거운 불길이 스멀스멀 피부를 타고 오르는 것 같았다. 그건 분노였다. 분노가 몸을 태울 것만 같았다. 누군가 건주의 벗은 몸을 보았고, 흥분을 시켰고, 또 몸을 합쳤……. 제기랄! 민환은 이를 악물며 주먹도 꽉 쥐었다.
한참 망설이던 건주가 이내 결심이 선 듯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드릴…… 말씀이…….”
“너 처음부터 게이였나?”
강재효 말이 건주가 그쪽에서 유명하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게이였다는 뜻. 사실 그게 가장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이 말이 튀어나왔을까. 스스로도 당황해 혀를 차고 있는데, 건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는 것이 보였다.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건주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어, 어떻게 아, 아셨…….”
건주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저 우연히…….”
왜일까. 강재효의 입에서 들었다는 사실을 말해선 안 될 것만 같다. 근거 없는 직감이었다.
“죄, 죄송…… 합니다. 일부러 속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민환은 손을 들어 건주의 말을 막았다.
“그만. 오늘은 좀 혼란스럽군.”
색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문 건주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비틀거리며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뒷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위로를 해주어야 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민환도 너무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이 마구 엉킨 실타래 같았다.
민환은 물끄러미 닫힌 침실 문을 바라보다 작업실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의자에 털썩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박건주가 게이였다고? 처음부터? 생각해 보면 건주는 한 번도 제 입으로 나는 게이다, 아니다 말한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었을 뿐. 그러나 건주는 자신의 말에 반박한 적 또한 없었다.
속은 것에 화가 나는 건가? 잘 모르겠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강재효가 던진 폭탄에 머릿속과 마음이 다 터져 엉망진창으로 변했…… 잠깐! 강재효는 왜 굳이 만나자고 해서 사진을 건네준 거지? 맹세코 그의 말대로 순수한 걱정 때문일 리는 없었다.
- 저도 실장님의 애인이라는 신분을 좀 이용해도 괜찮을까요?
불현듯 뇌리로 예전 건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용하고 싶으면 마음껏 이용하라고 했지만 이해가 잘 안 갔었다. 자신의 애인이라는 신분이 옛 애인에게서 돈을 받아내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 하지만 만약 강재효가 박건주의 옛 애인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는 가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여러 단서들이 생각났다. 강재효의 과거 피해자들 중에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여럿 있었다는 점. 언젠가 건주가 재효와 난희에 대해 물어본 점. 그리고 오늘 강재효의 태도.
“…….”
다음 순간 민환의 잇새를 비집고 ‘하, 하하하’하고 허탈하고 비틀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거 였군. 이거 였어! 이제야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 왜 강재효가 차혜련을 앞세워 건주에게 린치를 가했는지도 이해가 갔다.
‘둘이 그런 관계였단 말이지?’
민환은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건조하게 웃었다. 입매가 싸늘하게 비틀렸고,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렇지. 강재효를 견제하려면 내 애인이라는 신분이 가장 적절했겠지.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제길!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거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울화가 치밀었다. 민환은 사납게 욕설을 내뱉으며 책상을 쾅 내리쳤다. 손이 우릿하게 아파왔지만 그보다는 심장이 더 아팠다. 마치 강한 전기로 지지는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미친 사람처럼 시뻘건 눈으로 가슴을 퍽퍽 치고 있는데, 술 생각이 난다. 한순간에 정신을 잃어버릴 만큼 독한 술이.
민환은 거실로 나와 장식장에서 집히는 대로 술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곤 뚜껑을 따 벌컥벌컥 마셨다. 독한 술이 한꺼번에 들어가자 뱃속이 화끈거리다 못해 내장이 다 녹아내리는 것처럼 쓰라렸지만 아랑곳 않고 마치 물처럼 벌컥벌컥 마셨다.
언제 잠이 들었지? 민환은 아주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번쩍 눈을 떴다.
“아, 죄송해요. 아침이라……. 일어나셔서 씻으세요. 제가 아침 준비 했어요. 솜씨는 없지만요.”
시선을 들어보니 건주가 소파 옆에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어제 술을 마시다 소파 위에서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는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오랜만에 느끼는 숙취였다. 민환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욕실에 들어가 차가운 물에 몸을 씻고 나니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다. 어젠 얼마나 퍼마신 거지? 한 병을 다 비운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에도 새로 한 병을 더 뜯은 것 같은데, 그건 얼마나 마셨는지 잘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며 부엌으로 가보니 식탁 위에 멀건 콩나물국이 놓여 있었다.
“요리는 영 젬병이라 별로 맛은 없을 거예요. 그래도 아무 것도 안 먹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을 하는 건주의 손가락에는 보이지 않던 밴드가 여러 개 붙어 있었다. 서툰 칼질을 하다 벤 모양이었다. 민환은 저도 모르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쯧, 혀를 찼다. 요리도 못하면서 뭘 하겠다고 나서서 다치는 건지.
국그릇을 들어 후룩 마셔보았는데 맛은 없었다. 싱겁고, 비린 냄새가 났다. 그래도 민환은 국물을 끝까지 마셨다.
“네 옛 애인…….”
그 말에 건주가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 네?”
“많이 사랑했나?”
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 네.”
민환은 이를 꽉 물었다. 눈빛이 섬뜩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랬겠지. 사랑한 만큼 배신감에 치를 떨었겠지. 사랑한 만큼 용서할 수 없었겠지. 그래서 복수한다고 한 거겠…… 지. 다음 순간 민환은 끼긱, 큰 소리로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출근해야겠어.”
그리곤 빠른 걸음으로 걸어 밖으로 나왔다. 등 뒤로 묵직한 현관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히는 순간 민환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 그래. 이건 질투다. 건주가 게이라는 점과 재효와의 관계에 대해 속였다는 점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아니 물론 화가 난다. 하지만 그보다는 확실한 형태를 갖추고 나타난 박건주의 옛 애인에 대한 치졸한 질투심이 더 컸다. 자신은 건주에게 아무 것도 아닌데, 이미 예전에 건주의 몸과 마음을 모두 가져가버린 사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분하고,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화가 났다.
처음 옛 애인에 대해 얘기를 들었을 때는 바보 같다고 생각했었다. 돈을 받아내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뜻밖인데?’라고 여겼고. 그런데 건주에 대한 마음이 변하면서 그의 옛 애인에 대한 감정도 변해버렸다. 일상적인 분노에서 맹렬한 질투심으로.
두 사람은 어떻게 사랑했을까. 건주가 그 새끼를 향해 어떻게 웃었을까. 몇 번이나 잤을까. 이런 생각만 하고 있는 스스로가 정말 미쳐버린 것 같았다.
‘질투라……. 질투란 말이지. 정말 박건주란 남자 때문에 별 걸 다 하게 되는군. 태민환, 별 웃기는 걸 다 하는군.’
하지만 웃음은 나지 않는다.
어쨌든 이로써 강재효를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며 민환은 핸드폰부터 꺼내 들었다. 그리곤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강재효에 대한 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 지금 사람을 풀어 최선을 다해 증거와 증인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서두르세요.”
- 네.
“그리고 강재효의 채무 관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보시고요.”
- 채무관계요? 네. 알겠습니다.
일전에 건주가 돈의 일부를 받아냈다며 삼천 가량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돈은 강재효의 주머니에서 나왔을 터. 민환은 강재효에게 그런 큰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필시 난희나 혹은 다른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왔을 테지. 어디서 돈을 융통했는지 알아둔다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거다.
- 실장님이 싫은 게 아니라…… 나한테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는 분명 강재효겠지. 어쩌면 그 사진도 강재효가 직접 찍었을 지도 모르지. 민환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에 찢긴 손바닥에 따끔거렸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허공만 노려보았다.
설마 그 문제가 강재효에 대한 미련 때문은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민환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술이 터지며 피가 물처럼 주룩 흘러나왔다. 혀로 피를 닦아보니 꼭 지금 자신의 마음처럼 비리고 습한 쇠 냄새가 났다.
“어이, 김수철. 너 언제쯤 눈 뜰래?”
수철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분명히 숨도 쉬고 있고, 심장도 뛰는데 왜 깨어나지 않는 걸까? 답답해서 수철의 몸을 잡고 흔들고 싶은 심정마저 들었다.
건주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창백한 수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어서 일어나”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병원을 나와 터덜터덜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누구지?
“네. 박건주입니다.”
스팸전화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전화를 받았다.
- 저 정난희예요. 좀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전화를 걸어온 이는 정난희였다.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라 놀라서 걸음마저 멈추고 말았다.
“아……. 저 무슨 일로?”
- 건주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지금 시간 되면 좀 만나요.
“네. 그러죠. …… 거기 알아요. 지금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후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건주를 미간을 찌푸렸다. 정난희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냉랭했던 것이다. 단순한 느낌 탓인가? 전화상이라 확신할 수는 없는데 왠지 기분이 싸했다. 뭐, 가보면 알겠지.
버스를 타고 청담동으로 향한 후 약속한 카페로 들어갔다. 정난희는 아직 오직 않아서 먼저 커피를 한 잔 시킨 후 멍하니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제가 늦었네요.”
역시나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며 정난희가 건주의 맞은편으로 앉았다. 역시 아까 착각한 것이 아니었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건주는 어리둥절했다. 늘 화사하게 웃었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봄날처럼 밝은 아가씨였는데, 오늘은 안색이 어두운데다 눈동자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운 것……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별로 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절 보자고 한 용건이 뭡니까?”
그녀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백을 들었다. 그리곤 달칵 열더니 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그걸 본 순간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 언젠가 한 번 당해본 상황.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저건 돈 봉투다. 문제는 왜 정난희가 자신에게 돈 봉투를 내밀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태 실장 어머니에게 부탁이라도 받았나? 그러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그건 아닐 거다. 이 방법으론 안 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럼 뭐지?
건주는 복잡한 눈길을 들어 정난희를 바라보았다.
“오천이예요.”
“……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그쪽이 재효씨한테 요구한 돈이요.”
말을 하는 정난희의 목소리에는 경멸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건주는 흠칫 굳었다.
“…… 그게 무슨…….”
“모른 척 할 셈인가요? 그쪽이 재효씨한테 보낸 문자들을 우연히 봤어요. 어떻게 된 거냐고 캐물었더니 고백을 하더군요. 두 사람 예전에 잠시 사귀었던 사이라면서요?”
“…….”
“한때의 방황으로 잠시 만났는데 얼마 전 우연히 다시 재회한 후 과거 일을 빌미로 재효씨를 협박했다면서요? 처음에는 잠시지만 재효씨가 남자와 사귀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날 너무 사랑하고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어떡하든 건주씨한테 줄 돈을 마련하려 했다는 말에 용서하기로 했어요. 어쨌든 과거는 과거니까요. 하지만 그쪽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어요. 과거의 일을 미끼로 사람을 협박하다니 어쩌면 그렇게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는 거죠? 나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완전히 사람을 잘못 봤네요.”
건주는 차가운 물을 한 모금 삼켰다. 강재효. 방법을 바꿨나? 끝까지 가보자고 하더니 정말 작전을 바꾸었나 보군. 정난희를 회유하는 쪽으로. 물론 사실을 완벽히 각색해서. 처음엔 과거를 숨기기에 급급하더니, 이젠 더러운 방법으로 찍은 사진을 이용해 건주를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울 작전인 모양이었다. 재효로썬 지금 최후의 수단을 쓰고 있는 걸 거다.
이런 식으로 건주를 점점 더 코너로 몰아가고 있는 사람은 재효 자신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조금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걸까. 이젠 실망할 것도 없는데. 이런 걸 두고 점입가경이라고 하나? 정말 궁금해진다. 강재효는 어디까지 할 생각인 걸까? 자신은 도대체 재효의 무엇을 사랑했던 걸까. 일전에도 느꼈지만 건주가 사랑했던 건 허상이었다.
강재효란 사내의 잘 포장한 얼굴과 번지르르한 말발에 속았던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게 여겨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허상에 매달려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해 왔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울 지경이었다.
만약 강재효란 사내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태 실장 앞에 당당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고, 서글펐다. 할 수만 있다면 어리석게 눈이 멀었던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싶을 만큼.
“재효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아니라고 발뺌하고 싶으신가요? 그래봤자 소용없어요. 난 이미 당신의 이중성을 아니까. 이 돈이나 받아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오빠 앞에도요. 마음 같아선 다 말해버리고 싶지만 오빠가 상처받을 것 같아 참는 거예요. 그러니 조용히 정리하고 사라져요.”
독한 말을 듣고 있는데 모멸감이 느껴지긴 보단 눈앞의 아가씨가 불쌍했다. 결국 그녀나 자신이나 강재효란 사내에게 속은 희생양일 뿐이니까.
건주는 돈 봉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집요하게 재효에게 돈을 요구했던 것은, 빈털터리인 재효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무리수를 두길 바랐던 탓이었다. 물론 그가 훔쳐간 돈을 받아내고 말겠다는 독한 마음도 한 몫 단단히 거들었지만.
이 돈은 필시 정난희의 지갑에서 나온 돈 일터. 받지 않아야 마땅하겠지만……. 건주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망설였다. 정난희에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면 더 이상 재효에게서 돈을 받아내긴 힘들다는 뜻이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건주는 봉투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이 돈은 받죠.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는데, 이건 협박해서 받아낸 돈이 아닙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이죠.”
“그게 무슨 궤변이죠?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이라니. 협박해서 뜯어낸 돈이 어떻게 당연한 것이 되는 거죠?”
“내가 재효에게 꽤 많은 돈을…… 좋아요. 빌려주었다고 해두죠.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요.
어쨌든 이 돈은 내게서 재효에게 갔던 돈이니 당연히 다시 돌려받아야 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받은 겁니다.”
“…….”
그녀는 건주의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심쩍은 눈빛을 했다.
“재효가 말했다니 나도 솔직히 말하죠. 한때 우리가 사귀었던 건 맞습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건 강재효란 사내의 잘 포장된 거짓이었죠. 난희씨, 당신이 사랑하는 건 재효의 어떤 점입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난 당연히 재효씨의 모든 면을 사랑해요.”
정난희가 오만하게 턱을 들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완벽한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늘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주어서요? 아니면 위기의 순간에 그가 구해주어서요?”
“…….”
“나도 그랬죠. 나도 그런 점 때문에 재효를 사랑하게 되었죠.
나중에야 그 모든 것들이 잘 만들어진 연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요.”
“아까부터 자꾸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거짓말로 날 농락하려 들지 말고 오빠하고나 헤어져요! 이건 경고예요.”
앙칼지게 외쳤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 사이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겁니다. 난희씨가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요!”
“그럼 저 먼저 일어나죠.”
건주는 눈살을 찌푸리는 정난희를 두고 카페를 나왔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했다. 어쨌든 그녀에게 자그마한 가시 하나는 던져놓았으니까.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며 건주는 왼쪽 가슴을 툭 두들겨보았다. 오천만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있지만,
왼쪽 주머니는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그게 어쩐지 웃겨서 건주는 피식 웃었다. 이제 원금은 다 받았다. 부모님 보험금에 대출금까지. 아직 이자는 받지 못했지만, 이자는 다른 것으로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 태 실장님.’
갑자기 심장 언저리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어서 건주는 손으로 가슴께를 꽉 눌렀다. 갑자기 호흡곤란이라도 온 것처럼 심장이 저릿저릿 아팠다.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대는 것처럼 욱신욱신 아파서 참기가 힘들었다.
- 너 처음부터 게이였나?
그 말을 하던 태 실장의 눈동자는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한 걸음이라도 다가서면 그의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고작 게이였다는 사실을 숨긴 것으로 그렇게 싸늘하게 분노했는데, 재효와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릴 정도로 두렵고, 아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섬뜩하지만 그래도 말…… 해야 한다. 정난희까지 알게 된 이상 태 실장이 알게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듣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해야 한다.
알곤 있는데… 과연 말이 나올까? 분명 어제보다 더 싸늘하고 섬뜩하게 분노할 텐데……. 그래도 해야 한다. 재효가 태 실장님께 그 사, 사진을 보여주기 전에…. 만약 태 실장이 그 사진을 본다면? 건주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저도 모르게 심장 부근을 부여잡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나 보다. 아주머니 한 분이 일어나더니 건주더러 의자에 앉으라고 말했다. 괜찮다고 황급히 거절했지만 소용없었다.
“어서 앉아요. 젊은 양반이 금방이라도 툭 쓰러질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선……. 쯧쯧.”
건주는 머쓱하게 머리를 문질렀다. 그리곤 괜스레 바깥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도 제대로 깜박이지 못하고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툭, 투둑 하는 소리가 났다. 비 온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버스를 두들기는 빗소리에 승객들이 술렁거렸다.
“어머, 비 온다. 너 우산 가져왔어?”
“아니. 오늘 일기예보에서도 비 온다는 소리 없었거든. 아이, 짜증 나. 비 맞고 가게 생겼네.”
“비가 오네. 소낙비 같은데 금방 그치지 않을까?”
걱정스럽게 창밖을 내다보며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건주의 얼굴에선 일말의 걱정기도 없었다. 오히려 창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꽉 막혀 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씻겨 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버스에서 내린 후에도 건주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걸었다. 정류장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었지만 우산은 사지 않았다.
빗줄기가 상당히 굵어서 순식간에 온몸이 젖었다. 구두 안까지 다 젖어서 질척질척 소리를 내며 걷고 있을 때였다. 슥, 머리 위로 우산이 드리워졌다. 움찔하며 시선을 돌려보니 태 실장이었다.
“왜 비를 맞고 돌아다녀?”
똑바로 앞만 바라보며 말하는 태 실장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아직 화가 안 풀렸나 보다. 건주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속였다는 것을 알았는데, 쉽게 마음이 풀리지 않겠지.
“우산이 없어서요.”
“하나 사면 되잖아.”
“그냥 비가 맞고 싶어서……. 실장님은 왜 걸어오세요? 차는?”
“술집 앞에. 가져오라고 시킨다는 것을 깜박했어.”
그 뒤론 침묵이 이어졌다. 건주는 태 실장의 보폭에 맞추어 걸으며 가끔 몰래몰래 얼굴을 훔쳐보았다. 태 실장은 무미건조한 낯빛으로 앞만 보고 있었다. 늘 다정하고 따뜻했는데……. 재효에 대해 알게 되면 더더욱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겠지? 앞으로 두 번 다시 그의 따스함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자위가 시큰해졌다. 눈앞도 흐릿해졌다. 비를 맞아서 다행이었다. 여차하면 눈물이 아니라 빗물이라고 우길 수 있으니까.
우울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먼저 몸부터 씻었다. 건주는 거실 욕실에서, 태 실장은 침실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태 실장은 맥주 한 캔을 들고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브라운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건주도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낸 후 태 실장의 옆으로 앉았다.
이제 말…… 하자.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온몸의 힘을 다 그러모아 막 말문을 열었을 때였다.
“저기 할 말이…….”
“너 말이야.”
하필이면 그 순간 태 실장도 말문을 열었다.
“먼저 말씀하세요.”
“너 먼저 말해.”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는 건주의 시선 끝에 태 실장의 입술이 보였다. 그의 입술은 벌겋게 부어서 희미한 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러다 태 실장이 이로 잘근 씹자 금세 터지며 시뻘건 피가 흘러나왔다.
“입술에서 피가…….”
“됐어. 별 거 아니야.”
“자, 잠깐 기다리세요. 휴지 가져 올게요.”
허둥지둥 휴지를 가져와 닦아주려는데, 태 실장이 건주의 손목을 잡았다. 이젠 만지지도 말라는 뜻인가? 겉으론 다정해도 알고 보면 한없이 냉혹한 사람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한순간에 마음이 돌아서서 손길조차 닿기 싫어진 건가? 심장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히는 것만 같았다. 점점 더 안으로 파고들며 콕콕 쑤시는 통증을 남겼다.
건주는 태 실장의 손에서 손목을 빼낸 후 일그러진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대답을 망설였던 건 옛 애인…… 때문인 거지?”
“…… 네.”
“옛 애인이 가져간 돈을 찾겠다고 했었지. 그 돈을 다 찾으면 되는 건가? 그걸로 끝이 나는 건가?”
“그, 그건…….”
그건 아니다. 건주는 아직 재효에게 받을 것이 있었다. 건주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태 실장이 먼저 말했다.
“정말 그게 다인가? 혹시 미………. 젠장. 아무 것도 아니야. 오늘은 작업실에서 잘 테니, 침대는 너 혼자 쓰도록 해.”
태 실장은 멍해 있는 건주를 내버려둔 채 성큼성큼 걸어 작업실로 들어가 버렸다. 건주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태 실장이 사라진 방문을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분명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다 말았는데.
하아. 한숨이 나온다. 오늘도 결국 말을 못했다. 건주는 반도 마시지 않은 캔을 들고 일어나 싱크대로 향했다. 그리곤 남은 맥주를 주룩 부어 버렸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태 실장에게 다 말할 텐데. 그래서 그가 연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좋습니다, 라고 말할 텐데.
- 너와 진심으로 연인이 되고 싶다.
귓가에서 태 실장의 쑥스러운 목소리가 쟁쟁 울린다.
“네. 저도요.”
건주는 자그만 목소리로 대답한 후 허망하게 웃었다. 아무리 후회하고 자책해도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수구 안으로 흘러가버린 저 맥주처럼.
빈 캔을 재활용 통에 던져 넣고 침실 안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잠이 안 온다. 안 그래도 넓은 침대인데, 어제 오늘은 더 넓게 느껴졌다. 마치 망망대해를 침대로 삼은 것 마냥 그랬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건주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작게 웅크려 보았다. 여전히 춥다. 한겨울 추위를 맨몸으로 대하고 있는 것처럼 추웠다.
‘자야 하는데.’
생각은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잠은 오질 않았다. 곁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태 실장과 함께 하는 생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이젠 그가 없으면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만약 그를 영영 잃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 겠다.
“형. 박건주랑 싸웠지!”
정원의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소리도 없이 나타난 경환이 마치 탐색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민환은 손가락으로 경환의 이마를 딱 튕긴 후 담배를 비벼 껐다.
“왜 자꾸 헛소리야? 안 싸웠어.”
마음껏 싸울 수 있는 관계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말이 좋아 계약 연인이지, 따져보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사이였다. 약속한 계약이 끝나면 예전처럼 존재조차 몰랐던 사이로 되돌아가는……. 그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갑자기 혀끝이 씁쓸해져서 담배나 한 대 더 필까 하다 관두었다.
“그런데 왜 며칠 전부터 청승이야? 형답지 않게 어깨 축 늘어뜨리고, 눈빛도 우울해 보이고, 며칠 못 잔 사람처럼 눈 밑이 시커멓잖아. 거기다 힘도 하나도 없고. 분위기도 심상치 않아. 난 형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다 알거든. 싸웠지? 그치?”
“싸웠길 바라는 거냐?”
“싸웠으면 얼른 화해하라고. 형 청승 떠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
민환은 피식 웃었다.
“언제는 절대 반대라고 외치더니? 이젠 화해하라고?”
경환이 눈동자를 뱅글뱅글 돌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테이블 위로 털썩 엎어졌다. 그러면서 웅얼웅얼 말했다.
“지금도 반대인데……. 아씨. 나도 몰라. 하여간 복잡해. 형이 이쁜 여자 형수랑 결혼해서 귀여운 조카를 낳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 근데 박건주랑 싸웠다고 생각하니 그건 그것대로 마음이 안 좋아. 그 형…… 사실은 좋은 사람이라는 거 알아. 내 병신 같은 모습을 뻔히 봤으면서도 비웃지도 않았고.”
침울하게 말한 경환이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또 다시 스스로를 자책하나 보았다. 폭력 앞에 무방비해지는 자신을 말이다. 민환은 동생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건 경환의 잘못이 아니었다. 경환을 그렇게 만든 그 새끼들의 잘못이지.
지금은 참 활발해 보이지만 어릴 때 경환은 말이 별로 없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자존심만 세서 부모 형제에게도 쉬이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 표적이 되었던 것 같다. 경환을 폭행한 것들을 거의 죽도록 팬 후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한 놈이 더듬더듬 말했는데 그 이유가 “재수 없어서.”였다. 단지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폭행한 녀석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민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녀석들을 소년원에 집어넣었다. 제발 선처해 달라고 부모들이 매달렸지만 봐주지 않았다. 자식을 그렇게 만든 데에는 그 부모들에게도 책임이 있었으니, 함께 고통을 당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너무 했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눈앞에서 누군가 발만 들어 올려도 발작하는 것처럼 벌벌 떠는 동생을 볼 때마다 오히려 더 못 갚아준 것이 후회될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멀쩡한데, 누가 폭력 비슷한 거라도 쓰려고 하면 병신이 되는 경환은 정신적 절름발이였다.
“…….”
형의 손길이 좋은지 헤헤 웃은 경환이 살짝 고개를 들더니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또 되게 불쌍한 사람이야. 전에 술 마시면서 들었는데, 애인이라는 년이 돈을 다 들고 날랐데.
뼈 빠지게 일해서 돈 갖다 바치면 다른 놈이랑 노는데 다 써놓고, 그것도 모자라 형 부모님 생명보험금이랑
집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서 홀라당.”
“…….”
민환은 눈썹을 찌푸렸다. 박건주. 생각보다 더 바보였군.
“그게 다가 아니야. 사람을 시켜 형 친구까지 폭행했다고 하더라.
온 순정을 다 바쳐서 사랑했는데 그런 식으로 사람 뒤통수를 치다니, 참 나쁜 년이지?
누군지 알면 내가 대신 복수해주고 싶은데, 말을 안 하네.”
민환은 결국 담배를 한 대 더 입에 물었다. 단순히 집 대출금만 뜯긴 줄 알았더니…….
하긴 생각해 보면 그렇다. 강재효처럼 질이 나쁜 인간이 겨우 돈 몇 천으로 끝냈을 리가 없었다.
아마 껍질까지 벗겨갔겠지. 그랬나? 그 수철이라는 친구 일도 강재효 짓이었군.
참 미련할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랑을 했군. 그 정도로 강재효 같은 놈이 좋았나?
필터를 힘주어 꾹꾹 씹다가 입안이 텁텁해져서 그냥 담배를 꺼버렸다.
그만큼 당했으면 갚아주는 게 당연하지만…….
혹시 지금 건주가 가진 복수심이 미련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꾸만 초조해졌다. 사랑이 긴 만큼 미련도 길었을 테니까. 그 생각만 하면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화가 나고, 잡히는 대로 다 부수고 싶은 폭력적인 마음도 일었다.
강재효 때문에 바로 대답을 할 수 없다고 했던 말 때문에 더 마음이 썼다. 꼭 쓰디쓴 쓸개를 통째로 삼킨 것처럼.
물어보면 간단할 텐데 그건 두려웠다. 건주의 입에서 ‘미련이 남았습니다. 죄송합니다.’하는 말이 나올까 봐. 민환은 허허롭게 웃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두려운 것이 생겼다. 이런 자신이 낯설고 바보처럼 느껴지지만, 아무리 애써도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누군가 지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꼴불견이라고 비웃을 거다.
“여기서 뭣들 해?”
사박사박.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난희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그냥 얘기하고 있었어. 넌 왜 나왔어?”
“그냥. 안이 답답해서. 경환이 너 이모가 찾더라.”
“그래?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감기 걸리니까 둘 다 적당히 있다 들어와.”
경환은 슬리퍼를 터덜터덜 끌며 실내로 돌아갔다. 경환의 자리는 난희가 차지했다.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하아, 하고 작게 숨을 내뱉는 난희의 얼굴에는 발간 홍조가 피어 있었다. 안에서 술 몇 잔 마신 모양이었다.
“술 마셨어?”
“응. 어른들이 결혼 축하한다고 권하는데 안 마실 수가 없었어. 더 마셨다간 취할 것 같아서 몰래 도망 나온 거야.”
“잘했어.”
“재효씨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은 아버지의 생신날이었다. 매년 이 날은 일가친척들이 다 모이는데, 확실한 가족만 참석할 수 있었다. 강재효는 아직 완벽한 가족이 아니라 잔치에 초대되지 않은 것이다.
정원 한쪽에 마련된 집에서 쉬고 있던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민환에게로 다가오더니 발치에 엎드렸다. 그레이트데인 종인 이 녀석은 아버지의 개로 아버지와 민환만 따랐다. 민환은 손을 내려 데인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하아 하고 바람을 불어 술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고 있는 난희를 보았다.
“그 결혼 꼭 해야겠어?”
난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부모님이랑 친척들 다 반대할 때도 오빠는 중립이었잖아. 그런데 결혼날짜까지 다 잡은 지금에 와서 왜 그런 말을 해? 오빠가 그러니까 괜히 불안하잖아.”
“날짜를 잡았을 뿐이지, 아직 결혼식을 올린 건 아니잖아?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권유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말에 난희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유가 뭔데? 혹시…… 박건주씨 때문에 그래?”
민환의 눈빛이 한순간 섬뜩하게 번쩍였다.
“무슨 의미야?”
난희가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입술을 깨문 난희가 이내 “아무 것도 아니야.”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환은 날카롭게 난희의 얼굴을 훑었다. 난처한 빛이 그녀의 눈동자 안에 빼곡했다. 뭔가를 숨기고 있군.
“춥다. 들어가자.”
“뭔가 들었어? 강재효한테?”
“무, 무슨 소리야?”
“정난희!”
나직하지만 힘 있는 음성에 어깨를 움츠린 난희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도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머뭇거리며 민환을 보았다.
“오빠. 박건주씨가 재효씨를 협박해서 돈 뜯어낸 거 알고 있어?”
“…….”
“오빠 실망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젠 어쩔 수 없네. 안 믿겠지만 정말이야.
사실은…… 두 사람 전에 잠깐 사귀었대. 박건주씨가 재효씨를 하도 쫓아다녀서 어쩔 수 없이 잠깐 만났는데, 나랑 결혼하다고 하니까 예전 일로 협박을 한 모양이야. 박건주씨는 다른 말을 했지만, 난 그 사람 안 믿으니까. 나한테 그럴 게 아니라 오빠야말로 그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해. 아주 나쁜 사람이야.”
지금 뭐라고? 난희의 말이 길어질수록 민환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강재효 그 새끼!
나한테는 사진을 들고 와 건주의 험담을 늘어놓더니, 난희한테까지 거짓말로 건주를 욕보였어?
아마 협박했다는 말은 진짜일 거다. 그러나 그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건주의 몫이었다.
돈을 준 것을 보면 처음에는 돈으로 입막음을 하려 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건주를 고립시키는 쪽으로 작전을 바꾼 모양인데……. 강재효가 자꾸만 민환의 심기를 건드린다. 건주의 사랑을 한때나마 독차지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열통이 터져 죽을 것 같은데, 옷 속에 들어온 개미처럼 자꾸만 깔짝깔짝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
“…….”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처음에 들었을 때는 너무 놀랐는데 재효씨가 무릎 꿇고 막 울더라. 그 사람한텐 나밖에 없다고, 너무 사랑한다고. 너무 절절해서 내 가슴이 막 아팠어. 난 그 사람 사랑해. 그래서 그 사람 말을 믿어.”
민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민환은 쯧 혀를 차며 일어난 후 무섭도록 단호한 눈빛으로 난희를 내려다보았다.
“난 결혼 반대다.”
“오, 오빠!”
“지금 들어가서 이모부께 말씀 드릴 생각이야. 물론 아버지한테도”
민환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다면 결국 난희는 결혼할 수 없게 된다. 민환의 설득에 아버지가 움직일 테고, 그건 즉 이모부를 움직인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난희 역시 모르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채 난희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민환을 보았다.
“이유가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박건주씨에 대해 나쁘게 말해서 그래? 하지만 정말로…….”
“그 새끼는 사기꾼이야.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너에게 접근했을 거다.”
“오빠!”
“유산을 한 푼도 못 받게 되었다고 말해 봐. 그 새끼가 어떻게 나오나.”
“오빤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재효씨가 그럴 리 없잖아.”
“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난 널 그 새끼와 결혼시킬 마음이 없다. 그러니 마음 접어.”
난희를 강재효와 결혼시킬 수 없다는 선언에 친척들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곧 수긍했다.
자신이 하는 일이니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 알아서 짐작한 것이다.
이모부보다 더 강재효를 못마땅해 하는 이모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난희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은 절대 못 헤어진다고, 꼭 결혼하고 말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지만 민환은 그녀를 꺾을 자신이 있었다.
늘 일처리가 확실한 김 비서이니 강재효를 옴짝달싹 못하게 할 여러 증거와 증인들을 모아올 테니, 걱정할 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모든 일에 당당하고 자신만만한데, 왜 건주에 대한 일만은 흐리멍텅하게 처리하게 되는지. 강재효란 놈이 대형폭탄을 투하한 이후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민환의 마음도 복잡하고, 건주와의 관계도 너무나 어색하다.
‘장현이 놈 말대로 벌을 받는 건가?’
난생 처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스럽다고 느껴진 단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마음속엔 다른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니.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들어서는데 이상하게 실내가 썰렁했다.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많이 추워서 보일러를 늘 켜두는데? 건주는 아직 오지 않았나? 민환은 침실 문을 벌컥 열어보았다. 침대 위에 웅크린 채 이불을 꽁꽁 말고 있는 건주가 보였다. 왠지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져서 한달음에 다가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건주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한 가득이고, 입술은 허옇게 일어난 상태였다. 이마에 손을 대보니 몹시 뜨겁다. 꼭 뜨거운 불덩이를 만진 것처럼 손바닥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미련한 녀석! 어제 비를 맞고 다니더니만!”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할 것이지. 안 그래도 아침에 집을 나서던 얼굴이 유난히도 지쳐 보이는 것 같아서 하루 종일 마음이 쓰였는데, 결국 이 사단이 났다.
민환은 땀으로 흠뻑 젖은 건주의 옷을 모조리 벗기고 새 이불을 꺼내와 덮어주었다. 차가운 물수건을 만들어 와야 할 것 같아서 몸을 튼 순간이었다.
“가지… 마요.”
건주가 민환의 손을 잡았다.
“물수건을 만들어 올게. 열이 심해.”
“가지 마요. 내 곁에 있어줘…… 요.”
물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잔뜩 잠긴 목소리로 건주가 애원했다. 민환은 할 수 없이 작게 숨을 내뱉으며 건주의 옆에 누웠다. 따뜻한 온기가 그리웠는지 건주가 곧바로 가슴으로 파고들더니 배실 웃었다. 응? 어디서 본 듯한 웃음인데?
맞다. 일전, 건주가 경환이 놈과 술을 마셨을 때 보여주었던 표정이었다. 그때도 술에 잔뜩 취해 헤롱대며 아이처럼 웃었다. 짐작컨대, 지금 건주는 열에 취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병원에 데리고 갈까? 아니면 의사를 이리로 부르는 편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죄송…… 해요.”
“뭐가?”
“이것저것 다. 실장님한테 속인 게 있어……서 너무 죄송……해요.”
민환은 쌕쌕, 열에 들뜬 숨을 빠르게 내뱉는 건주를 내려다보았다.
“뭘 그렇게 많이 속였는데?”
“내가 본래부터 나, 남자와 자는 사람이라는 것도 마, 말 안 했고…….”
“또?”
“재, 재효가 내 예, 옛 연인이라는 것도 말 안 했, 했어요. 미안…… 해요. 실, 실장님이 아는 게 시, 싫어서…….”
몸이 으슬으슬 추운지 건주는 자꾸만 민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게 어미 품을 찾는 새끼 같아서 애처로웠다. 민환은 건주를 품에 꽉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얼마나 땀을 흘리고 있는지 잠깐 사이에 민환의 손바닥에 건주의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날 지경이었다.
“왜 싫었는데?”
“모, 몰라. 그냥…… 싫었어. 지금도 시, 싫어.”
건주가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그 탓에 머리카락이 턱에 닿아 간질거렸다.
“내 말에 당장 대답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물론 강재효 새끼 때문이겠지? 설마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제기랄! 유치한 건 알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혼자 중얼중얼 하다 픽 실소했다. 열 때문에 정신이 없는 사람을 두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시선을 내려 보니 건주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쯧, 혀를 차며 일어나려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건주가 손으로 민환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무…… 서워.”
한숨을 내쉬는데 건주가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뭐가?”
“날 싫어할…… 까봐. 겨, 경멸할…… 까봐. 무서워서 말, 모, 못했어. 두, 두려워. 또 다시 사, 상처 받는 것이…….”
마지막 말을 입안에서만 웅얼거려서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들어야 할 말은 다 들었다. 민환은 복잡하고 음울한 눈빛으로 건주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끼를 베고 있는 것처럼 습한 기분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그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슬픈 것도 같고, 화가 나는 것도 같고, 몸의 어느 부분이 뚝 떨어져 나간 것처럼 허허로운 기분도 들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엿본 기분이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타인에게는 절대 내보이고 싶지 않은 연약한 부분이 있었다. 그걸 의도치 않게 훔쳐본 듯 마음이 따끔거렸다. 가슴이 쓰라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경환의 말이 생각난다. 모든 걸 다 줬는데 결국 돌아온 건 배신이었다는 말이…….
김 비서가 조사해온 강재효의 지난 행적을 돌아봤을 때, 그자가 건주에게 어떤 식으로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잘 알 것 같았다. 아마 수없이 심장이 난도질당했을 거다. 내색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건주의 속은 다 헤져서 너덜거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켜주고 싶다.’
민환은 건주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지금도 강재효를 생각하면 솜털이 곤두설 만큼 화가 나고, 미칠 듯한 질투심이 올라오지만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받아낼 사람은 건주가 아니라 강재효였다. 자신이 얻고 싶어 하는 박건주의 사랑을 받았으니 대가 역시 강재효가 치러야겠지.
그리고 건주는…………. 그래 상처입고 너덜거리는 건주는 자신이 품어주어야겠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지켜주어야겠다. 사랑하고 사랑하다 상처를 입었으니, 이젠 사랑받고 또 사랑받아서 다 헤진 가슴이 온전해지도록 해주고 싶었다.
‘철들었구나. 태민환.’
민환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퍼뜩 생각난 것이 있었다. 김 비서의 보고에서 강재효의 뒤를 봐주는 폭력배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난 것이다.
- 네. 둘째 도련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강재효에게 뒷배가 있다고 했죠? 그자와 은밀히 접촉할 방법이 없을까요?”
- 알아보겠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제길!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거야!”
잔뜩 짜증을 내며 재효는 곰치의 성기를 항문 안에 집어넣었다. 다마를 잔뜩 박은 곰치의 성기는 항문 안을 가득 채운 후 내벽을 날카롭게 찔러댔다. 그 느낌에 머리가 저릿해질 정도의 쾌감이 몰려왔지만 아무리 거칠게 엉덩이를 흔들어도 피에 달라붙은 것 같은 불쾌함과 일말의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전혀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사정을 한 후 곰치의 몸 위에서 내려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일이 안 풀려?”
재효는 대답 대신 필터를 꽉 씹었다. 곰치에게 건주 새끼의 알몸 사진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제 일이 끝나겠구나, 싶었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예상가는 전혀 달랐다. 박건주는 여전히 태민환의 곁에 달라붙어 있었고, 태민환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밸도 없는 새끼. 그런 사진을 보고도 건주 놈을 품고 싶나. 그깟 놈을 진짜 사랑이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건주 놈도 그렇다. 사진을 보여주면 당장 겁에 질려서 벌벌 떨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할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나왔다. 도대체 그 새끼 어디에 그런 독함이 숨어 있었던 걸까? 예전의 박건주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차라리 사진을 그 새끼 회사 홈페이지에 올려버릴까? 완전히 매장당해 버리게? 혹시 쓸모가 있을까 해서 그냥 지니고 있지만 수틀리면 인터넷에 올려버릴 테다. 그럼 그 새끼는 완전히 매장 당하는 거지. 낄낄 웃던 재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진짜 되는 일 없네.”
난희 년 쪽도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난희를 설득해서 겨우 결혼날짜를 잡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자니? 난희 년이 울고불고 하는 통에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는데, 아마 태민환 쪽에서 태클을 걸어온 것 같았다. 설마 건주 새끼가 뒤에서 태민환을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건주 새끼가 다시 나타난 이후로는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차혜련 일도 그렇고, 태민환 일도 그렇고, 난희 년까지. 제기랄. 재효는 담배를 거칠게 비벼 껐다. 태민환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난희 년에게 살점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건주 놈과 잠시 사귀었다는 말을 했을 때만해도 이제 속 시원히 박건주를 떼어낼 수 있겠다고 여겼다. 사진을 보던 태민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고, 난희 년은…… 물론 처음에는 ‘정난희에게 다 말하기 전에 나머지 돈을 해와.’라는 문자를 들켰을 땐 이제 끝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재효는 곧 머리를 굴려 방법을 생각해냈다. 건주와 잠시 사귀었음을 고백하고, 그것 때문에 협박당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각색한 내용을 들은 정난희는 처음에는 펑펑 울었지만, 재효의 사랑한다는 말에 곧 마음을 풀고 절대 박건주를 태민환의 곁에 둘 수 없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요즘 좀 난희 년의 태도가 예전과는 달리 조금 시큰둥한 기색이 있긴 하지만 결혼에는 큰 무리가 없겠구나, 하고 안심했는데 설마 태민환이 뒤통수를 칠 줄이야.
“골치 아픈 생각은 그만 하고 한 번 더 어때?”
곰치는 성기는 어느새 다시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시큰둥하게 검붉은 성기를 내려다보다 혀를 차며 일어나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을 때였다. 삽입의 고통에 턱을 든 재효의 시야로 천장 한구석에 교묘하게 숨겨진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가끔 곰치가 몰카를 찍어 VIP들의 약점을 잡는 일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누구 약점 잡을 일 있었어?”
“무슨 소리야?”
“저기 카메라가 있는데?”
곰치가 고개를 뒤로 꺾어 보는데 “씨팔!”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재효의 가슴을 세게 밀어냈다.
“어떤 새끼가 이딴 데 카메라를 달아놨어?!”
반응을 보아하니 곰치는 아닌 모양이다. 그는 카메라를 뜯어내더니 사납게 벽에 집어던졌다. 파삭, 소리를 내며 카메라가 깨졌다. 동시에 재효의 흥도 완전히 깨졌다. 난희 년이나 만나러 가야겠다. 그 년이 좋아하는 백장미를 한 아름 사들고서. 주변에서 반대를 하건 말건 정난희의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그년의 마음이 변치 않게 잘 붙잡아 둬야했다. 그년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길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사랑고백을 하는 쪽팔린 짓도 했지 않은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데 불현듯 건주 새끼가 떠올랐다. 자신의 뒤를 밟아 곰치와 그 부하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찍어 협박했던…… 제길! 박건주 짓이었어!! 다음 순간 재효는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곰치의 술집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