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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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를 백 번쯤, 아니 천 번쯤은 한 것 같다. 하도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를 반복해서 뒷목도 뻐근했다. 건주를 세워놓고 무려 세 시간이나 야단을 쳤던 과장은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시말서를 쓰게 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래놓곤 돌아서니 마음이 안 좋은지 일하고 있는 건주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용한 무당 소개시켜줄까?”하고 물어왔다. 자기가 보기에 아무래도 건주에게 악재가 낀 것 같으니 굿이라도 하란다. 건주는 인형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정중하게 과장의 제안을 거절했다.

“너 요즘 정말 무슨 일이야? 툭 하고 다치고 오고, 툭 하면 넋 놓고 있고. 내 동생한테 이상한 일도 시키고.”

점심시간, 부리나케 달려온 철민이 건주를 보곤 기막힌 얼굴로 혀를 차댔다.

“그냥 사적인 일이야. 이제 곧 끝나는 일이고.”

“말을 안 하니 답답해서 살 수가 있나? 우리 채경이랑은 연락이 됐어? 어제 아침에 너랑 연락 안 된다고 전화 왔던데.”

“어. 아침에 통화했고, 오늘 밤에 만나기로 했다.”

아침에 휴대폰을 켜보니 부재중 통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대부분이 철민의 사촌동생에게서 온 것이었다. 출근하며 전화를 걸었고, 오늘 퇴근 후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 시켰으니 돈 두둑이 챙겨줘야 해? 녀석 그걸로 다음 학기 등록금이랑 생활비 한다고 했으니까.”

“알았어.”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응.”

손목을 빨리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천천히 식사를 하고 있는데, 선배가 뒤늦게 구내식당으로 들어왔다. 식판을 들고 철민과 건주의 앞으로 앉은 그는 숟가락을 뜨다말고 건주를 빤히 보았다.

“왜 그러세요?”

“너 혹시 빚졌냐?”

“네? 무슨 소리에요?”

“나 나오기 직전에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 와서 받았더니, 웬 남자가 굉장히 험악한 목소리로 너를 찾던데? 당장 바꾸라면서 난리도 아니었어. 지금 자리에 없다고 대충 끊었는데 혹시 사채 끌어다 쓴 거 아니지?”

절대 아니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이었다.

“너 사채 썼어?”

철민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건주는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 후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야. 절대 아니에요.”

“그럼 아까 그 남자는 뭐야?”

“좀 아는 사이인데, 저한테 화가 나서 그래요.”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화가 나도 보통 난 게 아닌 것 같던데? 자칫하면 전화기를 뚫고 나올 기세더라.”

시간을 달라고 해놓고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화가 날 만도 할 테지. 거기다 휴대폰도 안 받았으니까. 건주는 두 사람을 향해 빙그레 웃어준 후 시작을 마저 했다. 정말 오랜만에 식판을 싹싹 긁어서.

선배의 말로 봐서 또 다시 재효에게서 전화가 걸려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 뒤로는 단 한 통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핸드폰으로도, 회사로도. 이상하긴 했지만 이쪽에서 먼저 걸어볼 마음은 없었다.

퇴근 후 건주가 향한 곳은 홍대였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홍대 거리는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한 가득이었다. 이제 스물아홉. 아직 20대라고 우길 수 있는 나이인데도 웬일인지 자신만이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주눅이 들어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 약속장소로 향한 건주는 입구에 서서 전화를 걸어보았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던 남자가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더니 받으려다 말고 건주를 보았다.

“건주 형님?”

“네. 방채경씨.”

건주는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간지럽게 방채경씨가 뭡니까? 제가 한참 아래니까 그냥 채경이라고 편히 부르세요. 말도 놓으시고요.”

채경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철민의 사촌동생은 우락부락한 체구를 가진 운동선수 타입의 남자였다. 도저히 이름에서 연상할 수 없는 건장한 외모에 자꾸만 웃음이 나려 한다. 외모와 이름을 가지고 웃는 것은 실례라 건주는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체격은 건장하다 못해 우람하지만, 눈동자는 빛나고 있어서 매우 영민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성격도 좋아 보이고.

“고생했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솔직히 안 들키려고 용을 빼긴 했는데 재밌었습니다. 전 은근히 이쪽 계통이 적성에 맞나 봐요. 굉장히 신나더라고요.”

“그랬다면 다행이고. 그리고 무사해서 역시 다행이야.”

“형님이 따라다니라고 한 남자요. 정말 지저분하게 놀던데요? 어제는 남자랑 자고, 오늘은 여자랑 자고. 거기다 약도 하고. 도대체 누굽니까?”

채경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주섬주섬 가방에서 두툼한 사진 뭉치와 테이프를 꺼내 건주를 향해 슥 밀었다.

“내 돈 훔쳐 간 사기꾼.”

“네에? 정말이요? 그래서 직접 잡으려고 저보고 뒤따라 다니라고 한 겁니까? 우아. 대박이다. 완전 흥분되는데요? 그런데 잡아먹을 증거나 될지 모르겠네요. 가능한 한 많이 찍기도 했고, 또 몰카도 설치하긴 했는데…….”

“충분히 도움이 됐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건주는 사진과 테이프를 가방 안에 챙겨 넣은 후 미리 준비해두었던 봉투를 꺼내 채경을 향해 밀었다.

“이거 받아. 수고비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형님의 인격을 믿고 여기서 세어보진 않을게요. 인격만큼 넣어주셨죠?”

넉살도 좋다. 건주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고 가볍게 술도 한 잔 했다. 채경의 성격이 워낙 좋고 유쾌해서 공통되는 주제가 없어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대화를 하는 동안 얼마나 웃었는지 나중엔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10시 무렵 채경과 헤어진 후 집으로 향했다. 버스에 올라타며 건주는 머쓱하게 웃었다. 이젠 자연스럽게 집이라는 말이 나온다. 처음에는 집, 이라고 하면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주택이 떠올랐는데 이젠 태 실장의 아파트가 먼저 생각난다.

생각해 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 태 실장과 그의 주변에 대해 너무 많이 익숙해져버렸다.

따뜻한 버스 안에 있으니 잠이 와서 꼬박꼬박 졸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이 드드드 울려서 건주는 화들짝 놀라며 늘어져 있던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은 후 핸드폰을 꺼내 보니 정난희였다. 건주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네. 박건줍니다.”

- 나 정난희에요. 이제 속이 시원해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다짜고짜 소리만 지르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건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창문을 약간 열었다. 기분이 좋아서 술 한 잔 했더니 열이 올라 낯이 화끈거렸던 것이다. 술 마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 자칫하면 상처 덧난다고.

- 우리 결혼…… 깨지게 생겼어요!

“그게 제 탓입니까?”

- 그럼 누구 탓이겠어요?! 박건주씨 때문에 오빠가 결혼을 반대하고 나선 거라고요! 왜 오빠는 헤어지지 않으면서 우리를 깨어놓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이것도 그쪽이 시킨 건가요? 그렇게 그쪽과 헤어진 재효씨가 미워요?

실장님이 결혼 반대를……? 아무 것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정난희의 결혼 문제는 태 실장이 얼마든지 간섭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그의 여동생이고, 이건 그 여동생의 인생이 걸린 일이니까.

“잠깐 시간 되십니까?”

- …….

“늦은 시간이라는 건 알지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정난희는 한참 침묵했다. 그러다 전화로 이러는 것보단 만나서 얘기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알았어요.”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건주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 후 택시를 타고 정난희를 만나러 갔다.

그녀가 약속장소로 정한 카페는 꽤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가장 한적해 보이는 장소를 골라 앉은 후 주스를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니 퉁퉁 부은 얼굴의 정난희가 들어왔다. 눈이 새빨갛고 눈두덩이 부은 것을 보니 많이 운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쁘긴 했지만.

“전 먼저 시켰어요. 주문하시죠.”

“녹차 주세요. 하실 말이 뭐죠?”

“실장님이 난희씨 결혼을 반대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래요. 처음에는 결혼날짜까지 잡았으니 신중해야 한다던 아버지도 오빠가 어떻게 설득했는지 무효로 하자고 나오셨어요. 지금 재효씨는 점심 무렵부터 계속 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고요. 영문도 모른 채 파혼당한 재효씨는 얼마나 기가 막힌 심정이겠어요? 내가 어떻게 얻어낸 결혼허락인데. 이젠 오빠까지 나섰으니 꼼짝없이 헤어질 판이에요.”

얼굴이 발갛게 될 정도로 급하게 말을 내뱉었던 그녀가 숨을 골랐다. 건주가 냉수를 슥 밀어주자 힐끔 보더니 마지못해 마셨다.

“실장님이 이유도 없이 반대했을 리는 없습니다. 단순히 저와 재효의 관계 때문에 반대했을 리는 더더욱 없고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실장님이 움직였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얘기를 드리고 싶은 겁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박건주씨 말고는 다른 이유를 생각해낼 수 없어요.”

건주는 주스로 목을 축였다. 그리곤 가방에서 테이프를 꺼냈는데, 건네주기가 망설여진다. 테이프 안에 담긴 내용이 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보진 않았지만, 아마 재효와 섹스 장면이 들어있을 거다. 그것도 남자들끼리의 정사가.

이걸…… 정난희에게 전해줘도 될까?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비열하지 않나. 이러면 재효와 내가 다를 것이 뭔가.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복잡하게 들어찼다.

“재효에게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 하! 이젠 모함까지 하는 건가요?”

“재효와는 이대로 헤어지는 편이 난희씨를 위해서도 좋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날 설득하려는 거예요? 그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가진 건 없지만 날 사랑해준다고요. 내게는 최고인 남자인데, 뭐가 날 위해서 좋다는 거죠?”

답답하다. 건주는 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테이프의 존재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당장 이것을 정난희에게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울어서 부은 얼굴로 나타난 그녀를 보니 선뜻 건네지지가 않는다. 이걸 보면 굉장한 충격을 받을 테니까.

“내가 말했죠? 내가 받아온 돈은 당연히 돌려받아야 하는 돈이었다고. 

그건 내 부모님의 생명보험금이었습니다. 그걸 재효가 말도 없이 가지고 사라졌고요.”

냅킨으로 코밑을 닦던 정난희의 손길이 일순 멈추었다. 그녀는 커진 동공으로 건주를 보았다.

“믿을 수…… 없어요.”

“그럴 겁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나도 처음에는 재효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지금 내 친구는 병원에 누워있어요.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서요.”

“그것도 재효씨가 그랬다고 말하고 싶은가요?”

정난희가 앙칼지게 외쳤다.

“직접적으로 그런 건 아니지만 재효가 원인인 건 분명합니다. 

사람을 시켜 그 녀석을 린치 하도록 시켰으니까요. 내가 하고 있는 행동도 분명 정당하진 않습니다. 

저도 그걸 모르진 않아요. 하지만 재효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어요. 

만약 난희씨에 대한 재효의 사랑이 진심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지도 모르죠.”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정난희는 혼란에 휩싸여 건주를 보았다.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자잘하게 잡혀 있었다. 건주의 중얼거림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도 하고, 전혀 이해 못 한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네요. 어쨌든 박건주씨 말에 따르면 재효씨는 나쁜 사람이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내가 그걸 어떻게 믿죠?”

“…….”

“설사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내가 직접 재효씨한테 물어보겠어요.”

정난희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다물렸다. 건주는 테이프를 꽉 움켜쥐며 한숨을 내뱉었다. 말로는 도저히 설득이 안 되겠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도 예전에 눈과 귀를 모두 닫은 채 친구들의 충고를 무시해버렸으니까.

“잠시…… 만요.”

“할 말이 남았어요?”

“이거…….”

건주가 테이프를 테이블 위에 올리자 정난희가 의아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죠?”

“드려야 할지 말지 지금도 고민이 되네요. 이걸 보면 난희씨가 무척 충격을 받을 것 같거든요.”

“이게…… 뭐죠?”

건주는 대답을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테이프를 내놓은 지금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과연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건지. 그녀를 설득할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오아시스로 가서 재효에게 당한 다른 피해자를 데려온다든지 하는 또 다른 어떤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그녀가 믿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약을 먹여 몸을 빼앗을 거라고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험한 일을 당하기 전에 강한 충격 요법을 써서라도 재효에게서 벗어나게 해주는 편이 그녀에게 좋지 않을까?

생각의 끝은 단정이 아니라 의문형이었다. 마음은 여전히 어느 쪽이 옳은지 갈팡질팡이었지만, 건주는 눈을 질끈 감고 테이프를 정난희를 향해 밀었다.

남자인 자신도 강간을 당할 뻔한 일을 겪은 후 한참 힘들었다. 여자인데다 곱게 자란 정난희는 아마 그런 일을 당한다면 견뎌내기 어려울 거다.

“집에 가서 보세요.”

“…….”

“그리고 가능하면 재효와 단둘이 있지 마시고요.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먼저 일어나 카페를 나오며 건주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정난희는 마치 인형이 되어버린 것처럼 굳은 채 하염없이 테이블 위, 테이프만 응시하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막차에 올라탔는데 명치가 따끔거리며 아파왔다. 이로써 강재효와 정난희의 결혼은 확실히 깨질 거다. 그런 장면을 보고도 결혼 마음을 먹을 여자는 없을 테니까. 이제 남은 건 재효와 재효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을 고소하는 것뿐인가?

재효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 내 약점을 쥐고 있으니. 사진이 인터넷에 퍼져서 정말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바깥을 나오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그땐 재효에게서 돌려받은 돈으로 성형수술이라도 할까? 건주는 창문에 이마를 기대며 픽 허탈하게 웃었다.

달칵,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선 후 신발을 벗으려다 깜짝 놀랐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태 실장이 무서운 낯빛으로 건주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 다녀왔어요.”

“좋아. 우선 들어와. 얘기는 그 뒤에 하자고.”

무슨 얘기를? 건주는 성큼성큼 앞서가는 태 실장의 뒤를 조심조심 따라가 소파에 앉았다. 머리꼭지까지 화가 난 사람처럼 엄한 눈빛으로 건주의 손목을 들어 올린 태 실장이 주의 깊게 붕대를 살폈다.

“약은?”

“꼬박꼬박 먹었어요.”

“좋아. 왜 이렇게 늦었어?”

“누구를 좀 만나느라고……. 난희씨를 만났어요. 두 사람 결혼 반대하셨다면서요?”

“오늘 이모부가 정식으로 파혼 선언을 했다고 들었는데, 난희가 너를 찾아간 모양이군. 원망 들었지?”

미안하다는 투였다. 건주는 작게 웃었다.

“그렇긴 한데, 전 괜찮았어요. 그보다 난희씨가 걱정이네요. 제가 뭘 좀 줬는데, 그걸 보면 심한 충격을 받을 게 분명하거든요.”

“뭘 줬는데?”

건주는 대답 대신 애매하게 웃었다. 태 실장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 안에 있는 나쁜 면은 꽁꽁 숨기고, 오로지 좋은 면만.

“실장님. 안경도 쓰시네요.”

테이블 위에 새까만 뿔테 안경이 놓여 있었다. 한 번도 태 실장이 안경 쓰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좀 놀랐다.

“보호 안경이야. 눈이 피로한 날에만 가끔 끼는 거지. 그보다 그만 씻고 자도록 하지. 늦었어.”

힐끗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이 지났다. 옷을 벗고 씻고 나오니 새벽 1시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새로 붕대를 갈아주던 태 실장이 후우, 하고 억눌린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참기 힘든 것을 참고 있는 듯 괴로운 숨결이라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러세요?”

“키스 정도는…… 해도 되겠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입술에 태 실장의 입술이 닿았다. 깃털처럼 가볍게 닿았던 입술은 진한 입맞춤으로 변했다. 건주의 허리를 꽉 안고 하체를 비비며 키스를 해오던 태 실장이 갑작스레 혀를 뺐다. 실처럼 길게 연결된 타액이 형광등 불빛 아래서 반짝거렸다.

“더 했다간 사고를 치겠어.”

태 실장의 목소리가 사포처럼 거칠었다. 그는 미련을 떨쳐내듯 건주의 허리를 놓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

더 해도 되는데. 그 말이 목구멍을 간질인다.

“처음에는 충동적으로 했지만 두 번째는 연인의 사랑을 나누고 싶거든. 섹스를 하나의 유희거리로만 생각하던 내가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난 샤워를 한 번 더 해야겠으니 너 먼저 자도록 해.”

건주는 쿵 소리를 내며 닫히는 욕실 문을 습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은 왜 대답을 미루고 있는 걸까? 따지고 보면 고민하던 문제도 해결된 셈인데. 이젠 굳이 재효 문제를 마무리 지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는데 왜?

태 실장은 재효의 일을 알아도 화내지 않았고, 기다려준다고 했다. 그런데 왜? 전부를 내던질 용기가 이젠 없는 걸까? 답답한 가슴을 꾹 누르며 건주는 침대에 누웠다.

“다녀올게요.”

인사를 한 후 조수석의 문을 쾅 닫았다. 버스나 지하철, 혹은 택시를 이용해도 되는데 태 실장은 굳이 건주를 회사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멀어지는 태 실장의 차 꽁무니를 오래도록 바라보다 멋쩍게 웃으며 돌아섰을 때였다.

“나는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아주 좋아 죽네?”

초췌한 몰골의 재효가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지?

“무슨 일이야?”

“무슨 일? 너지?! 네가 난희 년한테 수작을 부린 거지?! 

그렇지 않다면 난희 년이 갑자기 마음을 바꿀 리가 없어! 새벽에 그년이 갑자기 그러더라.

 나 같은 놈이랑은 결혼 못한다고. 몇 시간 사이에 마음 바뀔 일이 뭐가 있겠어? 네놈의 수작뿐이지!”

“난 너의 실체에 대해 알려줬을 뿐이야.”

“내 실체? 내 실체가 뭔데?! 머저리 같은 놈들 이용 좀 한 게 대수야? 난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야.”

한숨밖에 안 나온다. 하나 둘씩 출근하던 사람들이 건주와 재효를 보고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던져왔다.

“물론 그랬겠지. 회사 앞에서 난동부리지 말고 꺼져. 경찰 부르기 전에.”

“이 새끼, 네가 감히 나한테?! 네가 이딴 식으로 내 뒤통수를 쳐!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너지? 그거 가져간 새끼도 너지?!”

“그거?”

건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뭔데, 나더러 가져갔다는 거지? 불에 덴 멧돼지처럼 날뛰던 재효가 우뚝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곤 서늘한 눈빛으로 건주를 노려보더니 “두고 봐.”하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가버렸다.

아침부터 몹시 피곤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오늘이 토요일이라 다행이다. 오전 근무만 할 테니까.

“일찍 왔네.”

누가 말을 걸어서 돌아보니 얼굴이 거칠한 선배였다.

“어제 술 마셨어요?”

“어. 금요일 밤이라고 마음껏 마셨는데, 생각해 보니 오늘은 놀토가 아니더라고. 아우, 우리는 언제 격주가 아니라 토요일마다 쉬어보나.”

선배가 투덜거렸다. 배를 잡고 죽겠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선배를 향해 웃어주며 건주는 사무실 의자에 앉았다.

정난희에게서 전화가 온 건 막 퇴근 준비를 하던 때였다. 그녀는 건주의 목소리를 듣고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침통한 그녀의 심정이 손에 잡힐 듯 보여서 건주 역시 아무 말 없이 휴대폰만 귀에 대고 있었다.

선배가 먼저 퇴근한다며 건주의 어깨를 툭 치고 갔다. 그 순간 정난희가 꺼질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 박건주씨가…… 원망스러워요.

그리곤 이내 전화를 툭 끊었다. 건주는 뚜뚜 차가운 기계음이 나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 한참 동안 굳어 있었다.

“다음 달이면 집 비워줄 수 있을 것 같아.”

건주는 물끄러미 수철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사과를 깎고 있는 경태를 바라보았다. 병원에서 경태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늘 길이 엇갈렸는데 오늘은 수철의 어머니가 잠시 집에 다녀와야겠다며 건주와 경태에게 병실을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몇 달 더 있어야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좀 복잡한 일이 있어서 계약이고 뭐고 다 파기하고 전세금이랑 대출 좀 받고, 집에서 원조 좀 받아서 조그마한 아파트 한 채 샀다. 이번 일로 집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겪었거든. 대출금 갚을 길이 아득하긴 하지만 집주인이란 것들한테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 다행이 운 좋게 싸게 나온 아파트를 건졌어. 이달 말에 이사 나간다고 하니까 도배만 새로 해서 이사 들어가려고.”

“그래. 잘 됐네. 축하한다. 너도 드디어 집주인이 되었구나.”

“흐흐. 그러게. 대출금 끼고 산 집이긴 해도 내 집이 생겼다니까 좋긴 하다. 이거 먹어.”

경태가 힘들게 깎은 사과를 내밀었다. 제 딴에는 팔까지 부들부들 떨어가며 열심히 깎는 것 같았는데, 솔직히 딱 보는 순간 허탈한 웃음이 먼저 나왔다. 살이 반 이상 베어 나간 것이다. 칼질 참 못한다. 그 생각이 들었지만, 건주는 아무 말 없이 사과를 입에 넣었다. 맛은 괜찮았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새콤한 것이.

“맛있네.”

“어. 길거리에서 샀는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더라고. 그건 그렇고, 너 손목은 괜찮은 거지?”

“응. 덧나지 않게 조심만 하면 된대. 한동안 불편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경태가 혀를 끌끌끌 찼다. 건주를 보자마자 기겁해서 자리에 앉히더니 그간의 자초지종을 모두 캐물은 경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 나가서 재효놈 아작을 내고 싶지만, 그 녀석도 이제 신세가 처량해졌다니까 참는다. 근데 또 너한테 해코지 하는 거 아냐? 오늘 아침에도 회사 앞까지 찾아왔었다면서?”

“이젠 어떤 것도 안 무서워. 참 전에 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

“어, 맞다. 사진에 있던 그 남자는 곰치라는 놈이래. 한때 알아주던 주먹이었다던데? 지금은 겉으로는 조용히 사는 척 하지만, 뒤로는 여전히 나쁜 짓을 일삼아서 경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다더라. 근데 그럼 뭐해. 증거가 없는데. 아주 용의주도한 놈인가 봐. 조그만 단서라도 잡혔으면 좋겠다고 하던걸?”

“그럼 폭행으로 고소하면?”

“얼씨구나 하겠지. 고소하려고?”

“몰랐으면 모를까, 누가 수철일 이렇게 만들었는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내가 사람을 시켜 재효 뒤를 밟았는데, 쓸 만한 걸 두어 개 건졌어.”

채경이 찍어온 사진 안에 곰치와 재효가 약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 정도 가지곤 큰 처벌은 못 받겠지만.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건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경태가 불쑥 말했다.

“너 미안해서 그러지.”

“…… 뜬금없이 뭐가 미안해?”

“악착같이 재효에게 처벌을 내리려고 하는 거 말이야. 수철이 놈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잖아. 그리고 태 실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연애하자고 한 거 거절한 것도 죄책감 때문이고.”

“거절은 아직 안했어.”

“어쨌든!”

단호하게 말하며 경태는 과도로 사과를 쿡 찍었다. 죄책감…… 때문이라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창백하게 누워있는 수철을 돌아본 건주가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 드륵 문이 열렸다. 옆 침대 손님인가, 하고 돌아보니 인아씨였다. 건주와 경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어섰다.

“오랜만입니다. 인아씨.”

“네. 그러네요.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건주씨 손목이…….”

건주는 걷어 올렸던 와이셔츠 소매를 끌어내렸다.

“좀 다쳤습니다.”

“조심하시지 그러셨어요.”

걱정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무척 수척했다. 전에 왔을 때 어머니께 들었는데, 인아씨 부모님이 더 이상 수철의 병실에 가지 말라고 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수철이 때문에 힘들 텐데, 부모님의 압박까지 인아씨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이 갔다. 청바지와 티셔츠의 수수한 차림을 한 인아씨는 침대 옆에 서서 한없이 수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흐윽 소리를 내더니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병실을 나가버렸다.

건주와 경태는 마주보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아씨 살이 많이 빠졌네. 조만간 따로 시간 내서 몸보신이라도 시켜줘야겠다. 수철이놈 눈 떴다가 지 애인 저 꼴이 된 걸 보면 우리한테 뭐라 그럴 거 아냐. 형수씨 안 챙기고 뭐했냐고.”

“그래. 나중에 수철이한테 원망 안 들으려면 인아씨 잘 걷어먹여야겠다.”

건주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울면서 뛰어나간 인아씨는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난희야! 제발 얘기 좀 해. 응? 제발.”

재효는 정난희의 방문 앞에 꿇어앉아서 벌써 세 시간째 애원하는 중이었다. 이젠 다리에 감각조차 없었고, 목도 쉬어터진 것처럼 걸걸한 목소리만 나왔지만 정난희를 설득하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그나마 바깥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택배를 받기 위해 문을 연 틈을 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면 차와 사람, 개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에 꿇어앉아 비참하게 애원을 했을 거다.

“난희야! 제발! 너마저 나한테 왜 이러니? 네가 이러지 않아도 우리 힘들잖아? 제발 너까지 이러지 마라. 응?”

속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혼 날짜를 잡고 화려하게 상류층에 입성할 꿈을 꾸고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변하더니 이젠 정난희마저 자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역시 박건주 그 새끼인가? 맞다. 전부 그 새끼 때문이다. 그놈이 나타난 이후부터 제대로 풀린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난희야…….”

재효는 애절하게 정난희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손등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꿇어앉아 계집애 이름이나 부르고 있는 지금 모습이 비참하고 화나지만 절대 정난희를 놓칠 순 없었다. 정난희 약혼자라는 이름으로 빌린 돈이 얼마인데! 담보물이 없어지면 당장 돈부터 갚아야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손끝에 닿았던 화려한 꿈이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꼴을 볼 순 없었다.

이 손에 움켜쥐기 직전이었던 화려한 꿈이었는데! 그걸 놓쳐? 말도 안 되지!

“이러시면 안 돼요. 절대 들이면 안 된다고 했는데. 어서 나가세요. 제발요.”

가정부가 자꾸만 곁을 맴돌며 안절부절 못했다. 꼭 웽웽거리는 파리처럼 귀찮게 구는군. 재효가 입매를 실룩이며 사납게 노려보자 늙수그레한 여자가 움찔 놀라더니 후다닥 부엌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완전히 포기하진 못하고 부엌 입구에 선 채 “어떡해.”만 연발한다. 달칵.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린 건 그 순간이었다.

“난희야!”

재효는 벌떡 일어나려다 한순간 휘청거렸다. 일부러 깎지 않은 수염은 몹시 초췌해 보였고, 안색 또한 창백할 것이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다리를 두들기며 하아 한숨까지 한 번 내쉬었다.

“…….”

그런데도 난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달음에 달려와 부축하며 괜찮냐고 물었을 텐데. 그는 쯧, 속으로 혀를 찼다.

“난희야. 나와 줬구나. 우리 제발 얘기 좀…….”

비틀거리며 한 발 내딛었을 때, 뒤로 한 발 물러선 정난희가 손에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을 휙 내던졌다. 팔랑팔랑 춤을 추듯 내려온 것은 A4 용지였다. 종이 위에 뭔가 프린트 된 것이 보였다.

“…….”

“이게…… 뭐야?”

불안하다. 불길하다. 축축하고 미끌거리는 것이 등줄기를 타고 주룩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재효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숨기며 허리를 숙여 종이를 집어보았다. 그리곤 경악했다. 자신이 곰치의 성기를 항문 안에 집어넣은 채 환희에 떨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건주 새끼.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 새끼였군. 기어이 이걸 난희 년에게 보냈어! 제발 이것만은 아니길 그렇게 바랐는데, 최악이었다. 이 정도면 도저히 변명의 여지도 없다. 생각해 보겠다던 놈이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부터 예감이 이상하긴 했었다.

“더럽고 불결해. 꺼져.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마.”

요조숙녀 정난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지 않는 험악한 말이 재효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쾅! 또 다시 방문이 닫힌 순간 재효는 종이를 사납게 구겼다.

“누가 저놈을 들였어?! 당장 끌어내! 그리고 넌 오늘부로 해고됐으니 회사에 나올 필요 없어!”

실내로 들어서던 난희의 아버지가 재효를 보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짐을 들고 그의 뒤를 따라왔던 기사와 비서가 허둥지둥 다가오는 것을 보며 재효는 이를 악물었다. 두 사람이 양쪽 팔을 잡으려 할 때 거칠게 내치며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지른 후 정난희의 집을 나왔다. 끝났다. 이제 다 끝나버렸다. 분함과 원통함, 선뜩한 분노와 싸늘한 절망감이 찾아왔다.

밖으로 나온 재효는 사납게 벽을 퍽퍽 걷어찼다. 제기랄! 제기랄! 씨팔! 이제 어떡하면 좋지? 진작 난희 년의 몸뚱이에 도장을 찍어두는 건데! 지금이라도? 젠장, 보아하니 눈도 안 마주칠 기세던데 어떻게?! 곰치 형에게 부탁해서 납치라도 하라고 할까. 그러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곰치가 재효의 부탁을 들어줄 때는 건드려도 뒤탈이 없을 것 같은 사람에 한해서였다. 쟁쟁한 집안의 딸인 난희를 납치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리 없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초조하게 골목을 따라 내려가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 요즘 수상한 소문이 돌고 있던데, 설마 사실은 아니겠지?

사채업자였다. 벌써 자신의 약혼이 깨진 것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나 보았다. 아니라고 변명한 후 전화를 끊긴 했는데 아마 오래가진 않을 거다.

이제 어쩐다? 곰치가 소개해준 그들은 진짜로 조직이었다. 조직에서 운영하는 사채라 튈 수도 없었다. 산채로 배를 갈라 내장이라도 떼어갈 것들이었다. 그들은.

어떡하지? 젠장! 하루아침에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된 거야?! 정난희는 물 건너갔고,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돈이다. 파혼 당한 걸 알면 당장 돈 갚으라고 위협을 해 댈 테니까. 돈, 돈을 어디서 구하지? 곰치 형이 빌려줄 리는 만무하다. 그 못생긴 새끼랑은 몸 거래만 해왔으니까.

‘이게 다 박건주 새끼 때문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그 새끼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매장을 시켜버리는 건데! 지금이라도 같은 방법으로 복수하고 싶지만 사진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필름 원본과 인화한 것이 같이. 아침의 반응으로 보아 건주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가져간 거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돈, 돈이 필요해. 돈! 그래, 건주 새끼한테서 받아내자. 이렇게 집요하게 나를 망치려고 하는 걸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건 미련이 남아서일지도 모른다. 원래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홱 돌아버려서 복수하겠다고 설치고 있지만, 무릎 꿇고 애원하면 마음이 풀릴 지도 모르지. 그 새끼가 가져간 돈이면 사채 빚은 갚고도 남았다. 정난희가 준 오천이면 이자로 충분하니까. 더구나 박건주의 옆에는 태민환이 있었다. 잘 구슬려서 태민환의 돈까지 긁어낸다면?

이거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저도 죽고, 나도 죽는 수밖에. 재효는 독기를 품은 눈으로 휴대폰을 꺼내 박건주의 번호를 불러냈다.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봄비인데, 봄비라고 하기엔 어쩐지 처량 맞은 비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사람이 가득한 것을 보고 택시를 탔던 건주는 단지 앞에서 내린 후 양복 상의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달렸다. 빨리 들어가야겠다. 상처가 물 들어가면 안 되니까.

“…….”

“이제…… 오냐?”

추위에 파랗게 얼어붙은 입술을 달달달 떨면서 말을 건네는 사람은 재효였다.

“만나기 싫다고 했을 텐데?”

병원에 있을 때 잠시 만나자는 전화가 와서 단칼에 거절했는데, 설마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건주는 흠뻑 젖어서 떨고 있는 재효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 있다고 했잖아.”

“나는 없어.”

“건주야, 제발!”

빗물인지, 눈물인지 재효의 눈에 물기가 흥건했다. 한없이 애처로운 모습으로 건주를 바라보던 재효가 돌연 무릎을 꿇었다.

“…….”

“너한테 해준 돈 때문에…… 내가 좀 곤란하게 됐어. 그러니 제발 그 돈 돌려줘. 그리고 우리 다시 시작하자.”

“…….”

“생각해 보니 너만큼 나한테 진심이었던 사람은 없었어. 내가 출세에 눈이 멀어 정작 중요한 것이 뭔지 모르고 있었나 봐. 모든 걸 다 잃고 다니까 이제야 눈이 뜨인 것 같아. 많이 늦었겠지만, 제발 다시 받아줘.”

“…….”

“물론 내가 많이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한땐 너무 좋았잖아. 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럼 후회할 짓 하지 않고 너한테 정말 잘할 텐데……. 왜 인간은 다 잃고 난 후에야 후회하는 걸까. 어리석게.”

“…….”

“건주야. 넌 늘 날 봐줬잖아.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잖아. 그러니까 제발 다 잊고 나한테 돌아와라. 다시 시작하자. 응?”

쏟아지는 빗줄기의 양이 점점 굵어졌다. 이젠 봄비가 아니라 장맛비 같았다. 건주는 우두커니 서서 바닥에 꿇어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재효를 바라보았다. 재효는 온통 비에 젖어 보기만 해도 애잔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옷자락도 옷에 달라붙어있고, 입술은 파랗게 얼어있는데다 볼까지 하얗게 변해갔다.

“다시 시작…… 하자고?”

조용한 음성이었다. 빗소리에 잠길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는데, 그걸 들은 재효가 번쩍 턱을 들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자.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잖아? 안 그래?”

재효는 무릎걸음으로 건주를 향해 다가온 후 잠깐 사이 축축하게 젖어 다리에 휘감긴 옷자락을 장난스럽게 툭툭 건드렸다. 건주는 무심한 눈길로 재효를 내려다보았다.

“내게 준 돈 사채업자들한테 빌린 돈이야?”

“응. 좀 위험한 자들이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너한테도 있잖아. 위험한 친구.”

억지로 웃는 재효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곰치 형도 이번 일에는 별로 도움이 안 돼. 곰치 형 식구들보다 그쪽 식구들이 훨씬 더 많고, 훨씬 윗조직이거든. 일단 원금이라도 갚아야 살 것 같은데. 너마저 날 외면하면 나 죽을지도 몰라. 응? 건주야?”

사채업자들한테서 돈을 끌어다 썼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게 맞았다. 든든한 담보였던 정난희와의 약혼이 깨졌으니 이제 그들에게 쫓길 일만 남았겠군. 돈이 나올 구멍이 전혀 없으니 한동안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며 고생을 할 거다.

“일어나.”

“응?”

“일어나라고 했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일까. 슬그머니 건주의 눈치를 살핀 재효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어깨를 축 내리고 작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쌍해 보인다. 건주는 조용한 눈길로 재효를 바라보았다.

“수철이는…… 아직 못 깨어났지?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한 번 찾아가보지도 못하고 정말 미안하다. 조만간 같이 한 번 가보자. 면목 없지만 가서 사과해야지.”

“그딴 사과 필요 없어.”

“…… 뭐?”

재효가 웃는 듯 마는 듯 건주를 보았다. 건주는 다 젖은 양복 상의를 팔에 걸친 후 계단을 올랐다. 큰일 났다. 비 맞고 왔다고 태 실장님한테 또 혼나게 생겼다.

“네 사과 필요 없다고. 어차피 진심도 아니잖아? 수철이도 네 사과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을 거다.”

“박…… 건주…….”

“다시 시작하자고? 그럼 내가 좋다고 할 줄 알았어?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놈으로 보여? 다시 시작하자고? 하!”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도 가당치 않을 판에 거짓말로 농락하려 하다니, 코웃음만 나왔다.

“…….”

선뜩할 정도로 차가운 반응에 재효가 파랗게 얼어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안하지만 난 너한테 조금의 미련도 없어. 그리고 전에 말했을 텐데. 더 이상은 너에게 아무 것도 주고 싶지 않다고. 이미 예전에 충분히 줬어. 오히려 너무 많이 줘서 탈이었지. 병신 같이……. 네가 사채업자한테 시달리든 말든 상관 안 해. 그자들한테 죽기 싫으면 스스로 경찰서에 가서 자수라도 하든지.”

“왜, 왜 그래? 건주야. 나 정말 반성했어. 진심으로 반성하고, 진심으로 너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

“어쩌지? 설사 그게 진심이라고 해도 난 조금도 너와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다시 시작하기는커녕 너를 사랑했던 시절마저 빡빡 지우고 싶은 심정이야.”.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멍하니 건주를 바라보던 재효가 씨발,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곤 눈동자에 새까만 독기를 담은 채 목을 꺾으며 성큼성큼 건주를 향해 다가와 상처 입은 손목을 움켜잡았다. 손톱이 붕대 안으로 파고들며 환부가 욱신욱신 아파왔다. 이를 악물며 손을 힘껏 뿌리쳐봤지만, 생각보다 재효의 악력이 셌다.

“자수? 내가 약이라도 처먹었냐? 죄도 없는데 무슨 자수를 해? 씨발 새끼. 안 속는다 이거지? 병신 같던 게! 내가 나만 망한 채 가만히 있을 줄 알아?”

“…….”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말에서는 쾌쾌한 걸레 냄새가 났다. 건주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협박하고 있는 재효를 노려보았다. 이게 재효의 본모습이다. 한결 같이 변하지 않는.

“웃어? 네가 언제까지 여유를 부리…….”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그 손 놔.”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낮지만 거절할 수 없는 위엄도 있는 음성이었다. 재효는 흠칫거리며 건주의 손목을 놓더니 건주의 어깨 너머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낮게 뭐라고 욕설을 중얼거리더니 허둥지둥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태 실장은 도망가는 재효를 굳이 쫓지 않았다. 대신 단걸음에 건주를 향해 다가와 손목을 살폈다.

“괜찮아요.”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괜찮다고 대답했다.

“어서 들어가서 소독하고 붕대 갈아야겠어. 그건 그렇고 저 자식은 왜 온 거야?”

“난희씨마저 돌아섰나 봐요. 그래서 곤란해지니까 찾아온 겁니다. 다시 시작하자나요?”

층수를 누른 태 실장이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곤 팔짱을 끼곤 전광판을 올려다본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아까 재효 행동 보셨잖아요. 당연히 싫다고 했죠.”

태 실장이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래? 그럼 이제 거의 끝이 보이는 건가? 조심해. 아까 보니 눈빛이 흉흉한 것이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으니까.”

“네.”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우선 몸부터 씻고 소파에 앉아 붕대를 갈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태 실장의 정수리가 잘 보인다. 가마가 두 개구나. 그 생각을 하던 건주가 저도 모르게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

태 실장도 놀라고 건주도 놀랐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고, 고맙습니다. 저 먼저 들어가 잘게요.”

건주는 허둥지둥 일어난 후 침실로 도망쳐 왔다. 심장이 콩당콩당 뛰고 있었다. 그러나 침대로 털썩 몸을 던지는 얼굴에는 우울함이 서려 있었다. 요즘은 자주 이렇다. 괜히 웃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 많았다.

‘끝이라…….’

재효의 끝이 오고 있다는 건 태 실장에게 대답을 해주어야 하는 순간이 오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가슴이 이유도 없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태 실장이 침실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더니 슬쩍 건주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건주는 잠결인 척 그의 가슴에 안기며 숨을 삼켰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겠다.

- 태민환에겐 말하지 말고 너 혼자 조용히 나와. 

안 그러면 내가 갖고 있는 사진 네 회사, 태민환 회사, 그리고 태 회장에게도 보내버릴 테니까.

딱 일주일 만에 재효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실 그건 좀 의외였다.

 지난 토요일 이후로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 협박이나 회유 같은 걸 시도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그간 잠잠했던 거지? 어쨌든 나오라니 나갈밖에. 협박이 무섭다기보다 건주 역시 재효에게 마지막으로 줄 것이 있었다.

건주는 전화를 끊은 후 호흡을 골랐다. 그리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태 실장이 궁금한 눈으로 물어왔다.

“외출?”

“네. 볼일도 있고, 만날 사람도 있어서요.”

“그래. 상처 덧나지 않게 조심하고, 늦지 않게 들어와.”

태 실장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럼 다녀올게요.”

웃으며 아파트를 나온 건주가 곧장 향한 곳은 경찰서였다. 폭행, 협박, 납치, 약물복용 혐의로 재효를 고소하고 증거로 채경이 찍어온 사진을 제출했다. 그리고 사기 혐의도……. 사기, 협박에 대해선 피해자가 많을 테니 자세히 조사하라는 부탁도 덧붙였다. 전과가 없어서 확신하진 못하겠는데, 죄목이 많아서 아마 잡히면 쉽게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거기다 오아시스에 들러 바텐더에게 얘기를 했더니, 바텐더는 재효에게 당한 피해자들을 수소문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아마 죄가 더 무거워질 거다. 더불어 곰치와 그 부하라는 자들도 함께 폭행으로 고소한 후 경찰서를 나왔다.

재효가 약속 장소로 정한 곳은 건주의 본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공터였다. 근사한 주택을 지으려고 부지를 매입했는데, 갑작스런 사고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후 공터로 남아있다는 얘기를 어머니 생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 바닥이 보이지 않는 그곳은 훤한 대낮에도 사람들이 잘 왕래하지 않아서 몸을 숨기고 있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걸 생각하고 그쪽으로 불러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간에 맞춰 공터에 도착한 후 주변을 둘러보는데 풀이 바삭바삭 흔들리더니 그 안에서 재효가 쓱 모습을 드러냈다. 재효는 불안함에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훑어보더니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재빨리 건주를 향해 다가왔다.

“젠장! 새끼들, 어디서 정보를 그렇게 빨리 주워듣는 거야! 하아, 박건주. 마지막 경고야. 1억 만들어와! 내일 밤까지 당장! 아니면 너 죽이고 나도 죽을 거다.”

“…….”

“난 이렇게 쫓기곤 못 살아! 씹새끼들, 그깟 돈 좀 썼다고! 시간만 주면 얼마든지 다른 미끼 물어서 갚을 수 있는데, 그걸 못 참고 날 협박해대? 개새끼들! 내가 남창인 줄 아나. 아무 놈에게나 내 구멍을 돌려대게. 씨팔 놈들! 딱 반년만 시간을 달라니까 그걸 못 참고!”

일주일 사이 재효는 꽤나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린 모양이었다. 최소 몇 년은 도망자 생활을 해왔던 사람처럼 초췌하고 핼쑥한 얼굴을 한 채 연신 불안하게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있었다. 거기다 뺨이 부어있고 입술까지 살짝 터진 것으로 보아 몇 대 맞기도 한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럽다. 아마 옷으로 가려진 부분에도 폭행의 흔적이 있나 보았다. 그걸 보니 일주일 동안 잠잠했던 이유가 짐작되었다. 연락을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거다. 사채업자 놈들에게 잡혀있느라.

건주는 물끄러미 재효를 바라보았다. 이제…… 재효는 알았을까? 폭력이 사람의 몸과 정신을 얼마만큼 파괴하는지? 타인에게 짓밟히는 기분이 어떤 건지? 건주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했던 모습인데, 막상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속이 시원하진 않았다.

“…….”

“내 말 알아들었지? 1억만 내놔. 그 돈을 가지고 외국으로 튀어야겠어. 더러운 새끼들, 내가 돈을 갚을 줄 알고?”

재효가 바닥에 퉤 침을 뱉었다. 그걸 무심히 보고 있던 건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1억 대신 다른 걸 줄게.”

당연히 받아야 하는 죄의 대가를.

“………… 뭐?”

건주의 말을 이해 못한 재효가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멀찍이 숨어있던 형사 두 명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헐렁한 면바지에 누런 점퍼, 때 낀 운동화인 평범한 차림새를 하고 있어도 형사는 티가 나는지 재효의 얼굴이 금세 경악으로 새하얗게 질렸다.

“짭새잖아!”

“…… 맞아. 형사들이야.”

“바, 박건주 너!!”

재효는 건주가 경찰까지 불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흔들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손을 떨었다. 돈도 뜯어내고, 나름 협박도 했는데 경찰까지 부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거대한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눈빛으로 건주를 노려보았다.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너, 네가 어떻게 나한테!!”

경찰들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재효가 건주를 확 밀치더니 앞으로 튕기듯 나갔다. 형사들이 도망가는 재효의 뒤를 쫓았다. 건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쫓고 쫓기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도로 반대편에 서 있던 새까만 차의 문이 열린 건 그 순간이었다.

“어서 타!!”

안에서 누군가 재효를 향해 외쳤다. 재효는 한순간 당황한 듯 멈칫거렸지만 이내 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재효가 차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문이 쿵 닫히더니, 차가 출발했다.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향해 형사들이 주먹을 흔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건주 역시 입술을 세게 깨물며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차를 노려보았다. 누구…… 지? 곰치라고 했던 그 폭력배인가?

“미안합니다. 하지만 곧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숨을 헐떡이며 다가온 형사들이 사과를 했다.

“…… 그럴까요? 조력자가 있는 것 같은데……. 곰치일까요?”

이대로 영영 재효를 놓치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재효는 반드시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곰치는 아닙니다. 그놈은 지금 경찰서에 있거든요. 아무튼 너무 큰 걱정하지 마십시오. 잡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놈에게서 또 연락이 오면 절대 혼자 나가지 마시고 오늘처럼 꼭 저희한테 전화 주십시오.”

“네. 당연히 그럴 겁니다.” 건주는 형사들과 악수를 나눈 후 터덜터덜 걸었다. 생각했던 복수는 거의 다 끝냈다. 돈도 돌려받았고, 재효의 최종목표인 정난희와의 결혼도 깼다.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며 고통이 어떤 건지 알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실현되었다. 남은 건 체포뿐인데, 형사들이 그렇게 자신하니 아마 곧 잡힐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헛헛한 거지?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걷다 보니 집 앞이었다. 담과 대문을 가만가만 살펴보는데 웬일인지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집인데도 말이다.

‘안도 그럴까? 낯설까?’

온 김에 들어가 볼까 하다 관두었다. 괜히 신혼부부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경태는 다음 주말에 이사를 한단다. 녀석, 제 집이 생기니 몹시 좋은가 보았다. 이사 날짜를 잡았다는 말을 하며 연신 싱글빙글 웃음을 흘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난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만나자는 말에 알았다고 말한 후 약속장소로 가보니 정난희가 먼저 와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편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가 테이블로 다가서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

건주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동일인물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앙상하게 말라있었다. 화장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은 푸석푸석했고, 입술에는 거친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 그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지 눈 밑도 검었다. 마음고생이 몹시 심했나 보았다. 보고 있기가 안쓰러웠다.

“앉으세요.”

“얼굴이…….”

건주의 말에 그녀는 쑥스럽게 웃으며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좀 그렇죠? 화장할 기력도 없어서 그냥 나왔어요. 좀 흉하더라도 잠시만 참아주세요.”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정난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며칠 전에 재효씨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사채업자들한테 쫓기고 있다고 돈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몇 천 정도는 내가 임의로 만들어줄 수도 있었지만 거절했어요. 지금도 마음이 몹시 아프고 재효씨가 너무 보고 싶고, 안타깝게 변한 그 사람 상황이 불쌍하지만 한 번 끌려가기 시작하면 영영 끌려갈 것 같아서요. 아무리 사랑했어도 용서 못하겠는 건 있더라고요.”

말갛게 웃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아낸 정난희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보기완 달리 꽤나 당찬 구석도 있는 아가씨였다.

“…….”

“그리고 박건주씨 말이 맞았어요. 그 사람…… 전적이 화려하더군요. 심한 말해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다 이해합니다.”

건주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럼 한 가지만 더 이해해주세요.”

“무슨……?”

뭘 이해해 달라는 거지? 왠지 가슴이 불길하게 둥둥 꼭 북소리처럼 뛰었다. 갑자기 목이 말라서 건주는 다소 성급한 동작으로 컵을 집어 물을 마셨다.

“헤어져주세요.”

“…….”

건주는 컵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나무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정난희를 바라보았다. 지금 헤어져달라고…… 했나? 냉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단호한 정난희의 표정을 보아 하니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보았다. 그녀는 굳어있는 건주를 향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한테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박건주씨를 볼 때마다 재효씨 생각이 나서 괴로울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 건 이제 알지만, 그래도 건주씨가 아니었다면 아무 것도 모른 채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원망할 것 같아요. 그럼 건주씨를 피하기 위해 오빠도 피하게 되겠죠. 난 연인을 잃었어요. 오빠마저 잃고 싶진 않네요.”

“…….”

“그러니 제발 오빠와 헤어져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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