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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면 반박하기 쉬웠을 거다. 하지만 꺼져가는 촛불처럼 연약한 눈빛으로 조곤조곤 말해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는 건주를 두고 정난희가 먼저 일어섰는데, 그녀가 나간 후로도 한참 동안 건주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실 건주는 태 실장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게 지난 일주일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한 결과였다. 결단코 싫어서가 아니다. 그를 사랑…… 한다. 그래,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하게 되었다. 전전긍긍 앓은 것이 무색하리만치 속은 걸 알고도 화내지 않았을 때, 태 실장의 넉넉한 마음을 깨닫고 한층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렇게 다정한데, 진짜 연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지만, 자신은 행복해질 자격이…… 없었다. 자신의 잘못된 첫사랑으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이 몇인데. 수철이, 수철의 부모님, 인아씨, 그리고 정난희도. 그들 모두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채 혼자만 희희낙락 웃으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태 실장을 거절하자고, 자신은 예전처럼 외로운 생활로 돌아가자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오늘 정난희에게서 헤어져달라는 말을 듣는 순간 거대한 도끼가 심장을 찍어대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고통이 왔다. 숨도 잘 쉴 수 없었고, 누군가 칼로 살점을 하나하나 포를 뜨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그렇게 지독한 절망감이 든 적은 처음이었다.
재효의 배신과 실체에 대해 알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벼랑 아래로 한없이 한없이 떨어지고 있는 듯한 이런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좋을까.
헤어져달라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막상 이별을 고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또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과연 뼈가 갈리는 듯한 그 고통을 참아낼 수 있을까? 내가 과연 태 실장님과 헤어질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베란다에 서서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태 실장이 다가오며 물었다.
“별 생각 안 해요. 그냥 이것저것.”
건주는 침통한 표정을 지우고 태 실장을 향해 웃었다.
“…… 이것저것 뭐?”
“오늘, 재효를 고소했어요. 만나자고 연락이 왔었거든요. 그 자리에 형사와 함께 나갔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어요.”
“곧…… 잡히겠지. 재효가 잡히는 날이 네 대답을 들을 수 있는 날인가?”
건주는 인형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이미 대답은 나와 있지만, 대답을 하고 나면 여길 나가야 한다. 태 실장과 헤어져야 한다. 그래서 대답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 아마…… 도요.”
“네가 어떤 대답을 해줄지 몹시 긴장되는데. 잘 봐달라는 의미로 식사를 준비했어.”
태 실장이 건주의 손을 잡고 안내한 곳은 식탁이었다. 식탁 위에는 근사한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스테이크, 샐러드, 빵, 수프, 그리고 와인까지.
“언제 이걸 다…….”
요리를 하는 것도 몰랐는데. 태 실장은 마술사 같다. 뭐든 뚝딱 만들어내는.
“요즘 통 기운이 없는 것 같아서. 스테이크는 내가 너에게 처음 만들어준 요리였던가? 그때는 날 위해 만들었지만, 지금은 널 위해 만들었어. 먹고 잘 좀 봐줘.”
건주는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자른 후 입에 넣어 보았다.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는다. 맛있다. 처음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스테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화도…… 안 나요?”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쳐 올라와서 건주가 마치 따지듯이 물었다.
“뭐가?”
“그렇잖아요. 결과적으로 전 실장님을 속였고, 이용했는데 왜 화를 안 냅니까? 난희씨 파혼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안 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외치는 말에 태 실장이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화를 냈으면 좋겠나?”
“………….”
“처음에는 물론 화가 났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너는 일부러 속인 것이 아니라 단지 말을 안 했을 뿐이야.”
“그게 그거…….”
“내게는 달라. 무엇보다 그런 걸 다 떠나서 내가 널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는 건 기본 아닌가?”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태 실장을 보고 있는데 기어이 눈물이 툭 떨어졌다. 재빨리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눈가를 덮는 건주를 보며 태 실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울어? 스테이크가 맛이 없나?”
“아니오. 너무 맛있네요.”
“그럼 내가 한 스테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우는 건가?”
“네. 너무 맛있어서. 너무 좋아해서…….”
안…… 되겠다. 이 사람이 너무 좋다. 너무 좋아져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은데 어떻게 헤어진단 말인가. 헤어져야 한다고 일주일 내내 다짐해놓고 막상 말을 못 꺼내 미적댔다. 헤어져달라는 정난희의 한 마디에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단지 말과 생각만으로도 이런데, 막상 정말 헤어지려고 든다면 심장이 아예 멎어버릴 지도 모른다.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저 좀 안아줄래요?”
“뭐?”
“좀 안아…… 줘요.”
단순한 포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떨리는 건주의 눈동자를 가만히 보던 태 실장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주 앉은 자세로 항문 안에 손가락이 들어왔다. 두 개째였다. 검지와 함께 중지를 밀어 넣은 태 실장이 건주의 오른쪽 유두를 깨물었다. 건주는 어깨를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아, 아앗, 하앗!”
태 실장은 손가락을 구부려 갈고리처럼 만든 후 내벽을 사정없이 긁어내렸다. 다리를 벌리고 있는 탓에 훤히 보이는 발기한 페니스가 흔들거렸다. 시선을 살짝만 내려도 보이는 음란한 모습에 혀가 바싹 마르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을 깊이 넣은 태 실장이 하체를 더 바짝 붙였다. 허벅지에 단단한 그의 성기가 닿았다. 역시나 완전히 발기한 그의 성기가 건주의 허벅지를 꾹꾹 찔렀다.
유두가 아플 만큼 깨물며 태 실장은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불편한 자세 탓일까. 아니면 뒤를 사용하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세 개가 들어와 뒤를 벌리자 아프다. 건주는 입술을 깨물며 발갛게 변한 눈으로 태 실장을 보았다.
“아, 아파!”
“미안, 내가 또 성급했나?”
손가락을 뒤로 살짝 빼는 태 실장의 눈동자는 시커먼 먹구름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눈자위가 욕정에 음습하게 변한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뒤를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아팠거든요.”
“그래?”
건주의 말에 태 실장이 기쁘게 웃더니 멈추고 있던 손가락을 다시금 움직였다. 세 개의 손가락이 내벽 안에서 비벼졌다. 손톱으로 긁어내고, 문질렀다. 입으로는 어깨와 유두를 빨면서 다른 손으로는 건주의 페니스를 건드렸다. 건주는 태 실장의 어깨에 아직 불편한 양손을 올리고 헐떡거렸다.
안을 거칠게 후비던 손가락이 스륵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입구에 뜨거운 열을 품은 것이 닿았다. 그것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구를 한계까지 벌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 아아앗!!!”
아프다. 뒤가 갈라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눈꼬리가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떨어졌다. 태 실장은 건주의 다리를 들어 제 허리를 감게 한 후, 엉덩이를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귀두만 들어와 있던 것이 건주의 움직임에 따라 완전히 들어와 박혔다. 그러자 배꼽 밑에서 꿈틀거리는 그의 페니스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건주는 발갛게 목덜미를 물들이며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숨을 고른 태 실장이 곧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깊이 들어왔다 나가고, 더 깊이 들어왔다가 나간다. 그는 끊임없이 건주의 몸속을 들락거렸다.
“하, 하앗, 하아앗!”
분명히 앉은 채 마주보는 자세였는데 어느새 건주는 매트리스 위에 누워 허공을 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건주의 다리를 높이 올린 태 실장이 퍽 하고 들어왔다. 침대가 밀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삽입이었다.
“허억!”
뒤로 한껏 빠져나갔던 태 실장이 거칠게 퍽 박으며 낮게 신음했다. 건주는 태 실장의 허리를 힘주어 감았다. 손은 매트리스 위에 무늬처럼 펼쳐두었다. 긴 숨을 내뱉은 태 실장이 건주의 전립선을 집요하게 찔러대기 시작했다. 엄청난 쾌감에 시야가 아찔거렸다. 건주는 허리를 활처럼 구부렸다. 그러자 태 실장의 페니스가 좀 더 깊이 들어왔다. 몸 전체로 그를 받아들이며 건주는 환희에 떨었다. 좀 더 깊이, 좀 더 많이 그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이른 아침의 병원은 너무 고요해서 소름이 끼쳤다. 건주는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를 걸어간 후 수철의 병실 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잠시 볼일을 보러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잘 되었다. 수철이와 둘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미안, 수철아.’
건주는 침대 옆에 서서 침울한 눈빛으로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친구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혼자만 행복해지려 하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그래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아니 태 실장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미안하다. 사실 너를 이렇게 만들고 나 혼자 행복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거절하려고 했다. 그 사람하고 헤어…… 지려고 했어.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 못 하겠어. 나도 모르는 사이 너무 많이 사랑하게 되어버렸어.’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았다. 하지만 안 된다. 못 하겠다. 보잘 것 없고, 바보 같고, 병신 같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태 실장을 위해서라도 못 헤어지겠다. 그냥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 될 테다.
‘대신 강재효는 꼭 잡아넣을게. 형사들이 열심히 뛰고 있어. 잡았다는 연락이 오면 제일 먼저 너한테 알려줄게. 그러니 이제 그만 일어나.’
건주는 수철의 손을 꼭 잡고 미안하다고, 제발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간절하게 속삭인 후 병실을 나왔다. 그리곤 정난희를 만나러 갔다. 오늘도 어제처럼 그녀는 초췌한 몰골로 먼저 와 있었다. 아침부터 만나자고 전화를 걸었으니 실례라는 생각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그녀는 아무런 내색도 않고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일찍부터 만나자고 연락을 드려서.”
“괜찮아요. 저도 어제 잔뜩 실례되는 말을 한 걸요.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나요?”
건주는 우선 숨부터 크게 들이쉰 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난희가 건주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죄송하다는 말은 어제 제가 한 말을 거절한다는 의미인가요?”
“네. 저를 보면 괴롭고 힘들 난희씨 심정은 이해합니다.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요. 하지만 전 실장님과 헤어질 생각이 없습니다.
이별을 생각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도저히 못 하겠더군요.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고, 얼마든지 원망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헤어져달라는 부탁만은 못 들어드리겠네요.”
“…… 정말 안 되나요?”
“네. 그리고 이별을 하고 안 하고는 우리 두 사람이 상의해서 결정할 문제지 다른 사람이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정난희가 건주를 물끄러미 보았다.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어떤 감정도 없는 눈동자였다.
가슴이 고장 난 수레처럼 덜컥거렸지만, 건주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정난희는 한참동안 침묵했다.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건주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다시 한 번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곤 카페를 나와 아파트로 돌아왔다.
어떤 의미에선 그녀가 고맙다. 만약 정난희가 헤어져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자신은 ‘헤어져야 해.’하고 결정만 내려놓고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해 미적미적 시간만 보내고 있었을 거다.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말로 대답을 미루면서.
그녀의 말로 진정한 이별을 실감하게 되었고, 절대 태 실장을 떠날 수 없다는 완전한 결론을 얻었다. 그러니 정난희가 고마울 수밖에.
슬그머니 웃으며 아파트 문을 열자마자 태 실장의 벼락같은 음성이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말도 없이 어딜 다녀오는 거야?!”
태 실장이 샤워하는 사이 몰래 나갔다 왔더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잠깐 병원에 갔다 왔어요.”
“말은 하고 나가야 할 거 아냐?!”
“미안해요. 민환…… 씨.”
“그래. 다음부터는………… 뭐?”
태 실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건주는 얼굴이 화륵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정난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계속 ‘민환씨, 민환씨’하고 연습을 했는데도 아직 그 호칭이 혀에 설고, 또 벌거벗고 있는 것처럼 민망하다.
“미, 민환씨…….”
“…….”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걸까? 민망해죽겠는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쳐다보기만 하니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건주는 귓불을 죽죽 잡아당기며 원망스럽게 태 실장을 노려보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겁니까?!
“미, 민환씨?”
건주는 또 한 번 어색하게 태 실장을 불러보았다.
“무슨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 거지? 나 좋을 대로 해석해도 되는 건가?”
건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못 박힌 것처럼 가만히 서 있던 태 실장이 어느 순간 성큼성큼 두 걸음만으로 다가오더니 건주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을 통해 두 개의 심장이 쿵쿵쿵 뛰는 소리가 어지럽게 귓가에 울렸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웅장하고, 가장 위대한 박동이었다. 건주는 태 실장의 가슴에 얼굴을 댄 채 희미하게 웃었다.
태 실장이 좋다. 너무 좋다.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비난받는다고 해도 이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박건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건주를 꼭 안고 있던 태 실장이 돌연 팔을 풀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왜 그러지?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대뜸 이름을 부른다. 건주는 얼결에 대답했다.
“네?”
“오늘부로 계약 관계 끝내자. 지금부터 내 연인이…… 되어줄래?”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대답하고 싶었던가. 그때 못했던 대답을 이제야 한다. 건주는 천천히 웃었다.
“네. 네. 네에!”
그리곤 아파트가 떠나가라 큰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들으며 태 실장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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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됐습니까?”
- 무사히 빼돌린 후 사채업자들 쪽으로 넘겼습니다.
처음에는 도와주는 줄 알았다가 사채업자들 사무실로 향하자 몹시 반항하더군요.
형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재효를 도운 건 민환이 보낸 사람이었다.
물론 재효를 돕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쉽게 경찰에 잡히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상태는 어떻습니까?”
- 도망쳤다는 이유로 많이 맞은 탓에 기절한 상태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민환은 힐끗 문을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서 더 괴롭히고 싶지만 그럼 건주가 내내 신경 쓰겠지?
아마 강재효가 경찰에 잡힐 때까지 노심초사할 거다. 그건 싫다.
건주의 신경이 자신 말고 다른 데로 쏠리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기다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며칠 더 두고 보다 경찰에 제보하세요. 단 쉽게 넘겨서는 안 됩니다. 가능한 한 많은 고생을 시키고 넘기세요.”
- 네. 알겠습니다.
“그간 모아온 강재효의 범죄 증거물들도 함께 넘기시고요. 증인도 확보하셨죠?
- 네. 어렵게 설득해 뒀습니다.
“그리고 곰치 놈에게도 슬쩍 흘리세요. 이번에 잡힌 건 강재효 때문이라는 식으로요.”
- 네. 지시한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아마 강재효는 감옥 안에서도 괴로울 거다. 곰치로부터 꽤나 괴롭힘을 당할 테니 말이다.
특별히 두 사람은 같은 교도소에 갈 수 있도록 힘을 좀 써봐야겠다.
사채업자들에게 당한 정도로는 분이 안 풀린다.
물론 기절할 정도로 맞고, 빌려준 돈을 뽑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자들이 강재효의 구멍도 이 사내 저 사내에게 돌린 모양이지만 그걸 로는 부족했다. 건주는 받은 만큼만 주면 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민환은 받은 것의 열 배로 갚는 것이 철칙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김 비서와의 통화를 끝내고 서랍을 연 민환이 꺼낸 것은 곰치를 통해 훔쳐온 강재효의 필름과 사진이었다.
꽤나 가까운 사이인 척, 깊은 의리로 뭉친 척 허세를 부렸던 곰치는 돈 1억에 안면을 싹 바꾸곤 기꺼이 이것들을 훔쳐다 주었다.
강재효, 아마 사진이 없어진 것을 알고 기함을 했을 테지.
픽 비웃음을 흘린 후 라이터를 찰칵 켠 후 사진과 필름을 차례차례 태웠다. 거액으로 주고 사진을 찾아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건주의 알몸 사진이 다른 사내의 손에 있는 것이 싫어서였다. 그냥 사내도 싫은데 한때 건주가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라니, 더더욱 싫다. 그리고 둘째는 왠지 건주가 이 사진의 존재를 몹시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긴 이런 사진을 세상에 존재한다면 누구라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테지.
이 사진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해 어쩌면 건주는 한참 동안 노심초사하겠지만 태웠다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사진의 존재에 대해 알고, 봤다는 것 또한 알게 되면 몹시 충격을 받을 테니 말이다.
재까지 말끔하게 태워 없앤 후 민환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건주가 깊이 잠든 틈을 타 몰래 나온 거라 깨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조심스럽게 침실로 돌아가 보니 건주는 아주 오랜 만에 깊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요샌 고민에 빠져 자주 뒤척이며 잠을 잘 이루지 못하더니만. 건주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했기 때문에 대답을 조르지 않고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이 굉장히 초조하고 긴장되고, 또 한편으로는 몹시 두려웠지만 이렇게 건주를 손에 넣었으니 괜찮다.
사실 민환은 건주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 모질고 독한 성격이 못되는 데다 제 사람은
끔찍이 챙기는 기질이 있어서 병원에 친구를 두고 혼자만 잘 살 수는 없다며 거절할 거라고 여겼는데,
이번에도 건주는 민환의 예상을 제대로 깨주었다. 이래서 좋은 거다. 이래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거다.
‘계약서는 찢어야겠군.’
거절에 대비해 ‘가짜 연애 계약서’를 여러 장 써두었다.
지금 같은 계약 연애를 6개월 단위로 갱신해야 하는 줄 알았더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빙긋 웃은 민환이 침대에 눕자 기다렸다는 듯 건주가 안겨왔다. 그를 안으며 민환도 눈을 감았다.
품에 꽉 찬 것은 사랑이고,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