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6 10. 작은 해전 =========================================================================
“왜적들이 주 무기 외에도 칼을 한두 개씩 차고 다니니까 전리품이 많아서 좋습니다. 그런데 도련님! 노꾼과 사공을 합쳐 저 배에 70명 정도 있습니다. 네 척 합하면 280명이 약간 안 될 겁니다. 다들 튼튼하니 고산국에 끌고 가서 노예로 써먹으면 어떻겠습니까?”
“노예? 그냥 돌려보내 줘야지. 해중국에 끌고 가봐야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거야.”
“예? 도련님은 나가사키에서 노예를 사와서 일을 시키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는데요. 다 젊은 남자들이라 일시키기에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노예시장에 나온 왜인들은 일본에서 생활기반이 완전히 파괴된 사람들이다. 불쌍하다고 그곳에서 사서 기껏 풀어줘 봤자 돌아갈 곳이 없거나 다시 노예로 팔릴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이 있어. 전쟁 중이라면 끝날 때까지 광산 노동이나 시키겠지만 지금은 전쟁 중도 아니잖아.”
계복은 이민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뭔가 분한 듯했다.
“녹도전선이나 가리포전선에서 오도로 끌려간 우리 격군들은 왜인들 밑에서 주린 배를 안고 노예 생활을 했지 않습니까? 우리라고 그런 짓을 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고 싶어? 그들은 해적, 우리는 실제는 사병이라도 형식은 관군이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우리가 왜적을 더 많이 죽이면 될 테니 괜히 힘없는 포로를 괴롭히거나 굶기는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필요가 전혀 없어.”
계복은 쉽게 납득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왜적을 더 많이 죽이면 된다는 이민호의 말에는 심히 공감했다.
방패판이 다 떨어져 나간 왜선 네 척을 외륜선들이 한 척씩 예인해 우치나 섬으로 향했다. 외륜선이 항구에 진입할 때 부두에 사람들이 가득 몰려나와 있었다. 몰랐는데 류큐 왕국 사람들은 물론 국왕까지 나와 해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배에서 내려 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류큐 국왕에게 알현인사로 큰절을 올렸다. 이민호가 앞으로 류큐 왕국 사람들에게 시킬 일이 많으니 국왕에게 항상 공손해야 했다.
그리고 국왕과 대신들에게 잠시 대화를 요청했다. 왜선 네 척과 포로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두에 임시로 대형 천막이 쳐지고, 먼 곳에 있던 대신들까지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그 강력한 일본의 군선 세키부네 네 척을 아주 짧은 시간에 쳐부쉈다고 들었소. 해중국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오.”
“류큐 국왕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해중국은 우방인 류큐 왕국의 안전과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해 협조해드릴 것임을 약조 드립니다.”
이민호가 류큐 국왕에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해줬다. 그러나 마치 구한말에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를 어르고 달래서 이권을 빼먹는 주 조선 외국 공사들 중 하나가 된 기분이 들어 이민호는 속으로 뜨끔했다.
류큐 대신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왜선 네 척에서 내린 왜군들이 지난 이틀 동안 범인을 내놓으라며 나하 시내에서 분탕질 치면서 완전히 뒤집어놓았다고 했다. 사쓰마 무사와 병사들을 죽인 책임이 있기에 이민호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왜군들이 백성들을 혹독하게 다루니 결국 겁에 질린 백성 하나가 해중국 사신에 대한 이야기를 발설했소. 미안하게 됐소. 일본인들은 해중국 사신선에 보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쪽으로 향했던 모양이오. 해중국의 대략적인 위치가 저들에게 알려졌을 것이오. 정말 미안해서 할 말이 없소.”
“조만간 해중국 위치를 알리려고 했으니 괜찮습니다.”
그러나 지금 해중국과 고산국에는 간수군이 달랑 열 명씩 지키고 있었다. 세키부네 네 척이 갑자기 들이닥친다면 못 막을 수도 있었다.
앞으로 해중국 이름으로 일본에서 무역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부터 일본 땅에서 무역할 때는 고산국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원주민 부족 이름을 따서 아타얄국과 케타갈란국도 미리 국가명의 예비 후보로 집어넣었다.
지금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역을 안정화시키고 있는 시기였다. 최근에는 왜구들을 대상으로 한 도해금지령까지 내렸다. 시마즈 가문은 2년 전의 패배 이후 도요토미로부터 심하게 견제를 받고 있었으므로 나가사키에 영향력을 미쳐 이민호의 무역을 방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류큐 왕국에 피해가 적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 왜선들에 실린 물건은 모두 류큐 왕국의 것이겠군요. 다 내려서 피해를 입은 주인들에게 돌려주십시오.”
“해중국 군사들이 싸워서 적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이 됐으니 우리가 되돌려 받을 수는 없소.”
“도둑이 훔친 물건을 주인에게 되찾아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왜선에서 짐을 내려 빼앗긴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그런데 뜻밖에 왜선에는 류큐 왕국이 명나라에 조공하려고 사신선에 쌓아두었던 고가의 물건이 아주 많았다. 옆에서 계복이 아까워서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래도 저희 때문인 것 같아 저희도 조금 배상을 하겠습니다.”
“해중국 사신은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릴 양심도 도덕도 없는 무뢰한으로 몰 셈이요?”
원래 사람들이 좋은 건지, 아니면 국제무역을 하다 보니 예의를 잘 아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류큐 대신들은 법도를 꽤나 따졌다. 이민호는 외륜선에서 땅콩 열 섬을 내리게 했다.
“좋은 작물이 있어서 나누고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건 땅콩이라고 하는데 볶으면 아주 고소하고 맛이 있습니다.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여러 가지 반찬으로 만들어 먹어도 됩니다. 종자와 볶은 것을 각각 다섯 섬씩 드릴 테니 볶은 것은 백성들과 함께 나눠 드시고 종자는 쓸모없는 땅에 심어서 수확하소서.”
“요즘 명나라 농민들이 휴경하는 대신 농지에 심는다는 낙화생이구려.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들었소.”
“맞습니다. 이 땅콩으로 기름을 짜거나 가루를 반죽해서 좋은 식품을 만들어보십시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백성들도 즐겁고, 잘하면 다른 나라에 판매할 수도 있을 겁니다.”
“고소하긴 한데 쉽게 질리지 않겠소?”
이민호가 설탕을 주로 하고 소금을 약간 넣어 간을 한 꿀땅콩을 국왕에게 바쳤다. 맛에 놀란 국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것은 수출상품으로 가능성이 있었고, 사탕수수 재배를 하는 류큐에 딱 맞는 상품이었다.
이민호는 전부터 류큐에 공을 많이 들였다. 류큐의 위치나 특산품은 별 거 없었지만 지난 세기에 무역을 하면서 축적한 항해기술과 지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이들에게 있었다.
“줄기와 잎은 가축 사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류큐에서 땅콩을 재배한다면 제가 매년 땅콩기름 일정량을 구입하겠습니다.”
“해중국에서 사주신다니 연구해 보겠소. 그런데 왜적 포로를 잡았다고 하지 않았소?”
홍삼을 달여 먹고 건강이 많이 회복된 류큐 국왕이 땅콩을 까먹으며 물었다. 국왕은 아직 병후 조리 중이고 너무 말라서 살이 더 찌는 편이 보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이민호가 땅콩으로 기름을 짜라고 권한 것은 식용유로 쓰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다이너마이트를 만들기 위한 니트로글리세린의 원료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땅콩은 훌륭한 식품이며,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작물이었다.
“예. 사무라이나 아시가루들은 대부분 전투 중에 죽었고 조총수 하나만 포로가 됐습니다. 사공과 노꾼들도 300명 가까이 됩니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류큐 왕국의 바다에서 일어난 싸움이고 류큐는 해중국의 동맹국이니, 포로에 대한 처분을 국왕 전하께 맡기겠습니다.”
“포로에 대한 처분은 승리자의 권리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을 해줘서 참으로 고맙소. 생각 같아서는 다 쳐 죽여 버리고 싶지만, 이미 백성들이 다 봤으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소. 배는 불태우고 노꾼들은 사쓰마로 송환하겠소.”
그 동안 병 때문에 염세주의에 빠졌던 류큐 국왕이 힘을 내고 있었다. 잘하면 이민호가 없을 때에 침공한 사쓰마를 상대로 류큐국 혼자서도 싸울 수 있게 될 것 같아 이민호는 기대가 컸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조총수는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우리 백성들을 괴롭힌 놈일 것이오. 멀리 가서 죽여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직 국왕은 사쓰마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이민호는 조금 실망했지만 국왕도 차차 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해중국 사신은 연치가 어떻게 되시오? 키는 큰데 나이를 알아보기 힘들다오.”
“국왕 전하께 숨겨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열두 살입니다.”
“오오! 대단하시오. 티베트의 송첸캄포께서는 열두 살에 즉위하여 티베트를 통일하셨고,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 노중련은 열두 살에 유명한 논객들을 말로써 굴복시켰소. 천조의 만력제께서도 열두 살에 즉위하지 않으셨소?”
나이가 어리다고 기죽지 말라는 국왕의 격려를 받고 이민호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예전 나이를 다 까먹고 열두 살 애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이민호는 수하들과 함께 류큐 국왕의 환대를 받으며 슈리성에서 하루 머물렀다. 류큐 대신들에게 화역과 염초밭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주고 외륜선에 적재한 유황을 꽤 많이 넘겼다.
류큐 왕국이 조총을 100여 정 정도 갖고 있어서 이것을 복제하도록 권했는데 금속 가공 기술이 딸려 어렵다고 했다. 배를 급히 마카오로 보내 포르투갈 상인들에게서 조총을 수입하려 해도 자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민호는 조총보다 구조가 간단한 승자총통과 비슷한 전장식 총 설계도를 넘겨주었다. 방아쇠와 연결된 용두가 화승을 물고 총열 뒤쪽 추진화약에 직접 불을 붙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화약과 총알을 작은 종이봉투에 함께 싸서 휴대하다가 전투할 때 찢어서 총구에 부어 넣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조총보다 정확도가 떨어지겠지만 발사속도는 조금 우월한 총이 만들어졌다.
- 파앙!
“오오오! 관중이오! 대단합니다!”
나하에 사는 모든 대장장이들과 목공들이 밤을 새워 새로운 총을 다섯 정이나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슈리성 뒤쪽 활터에서 시험 사격을 했다.
역시 조총에 비해 명중률은 많이 떨어졌지만 가격에 비해 쓸 만한 총으로 류큐의 대신들에게 인정받았다. 사격 속도는 조총의 두 배 이상이었다.
“새로 만든 총이 아주 좋습니다. 이것을 많이 만들면 사쓰마군에 대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명중률이 너무 낮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단 일제사격을 해야 하겠습니다.”
“몇 줄로 나누어 한꺼번에 쏘고 교대하는 식으로 말이오?”
“예. 적에게 총탄을 퍼부으십시오. 예민하게 다뤄야 하는 조총과 달리 이 총은 구조가 매우 간단합니다. 그러니 급하면 화약은 같은 양을 넣더라도 보통 총알 여러 개, 또는 작은 납탄을 한꺼번에 스무 개씩 넣어서 쏴도 됩니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명중률이 낮으면 산탄 효과라도 거두라는 의미였다. 잠시 후 다섯 명의 총병들이 총구에 작은 납구슬 열 개씩 넣고 동시에 발사했다. 과녁 대신 옆으로 길게 펼쳐진 흰 천에 구멍 수십 개가 한꺼번에 뚫렸다.
“대단하오. 고맙소!”
류큐 국왕이 막내 공주와 결혼하라는 제의도 뿌리치고 이민호는 조선으로 항해를 떠났다. 막내딸이 여덟 살이라 하니 류큐 국왕의 부마가 된다면 소꿉놀이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우치나 섬이 수평선 아래로 내려가자 이민호가 행사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사공들이 외륜선 우현에 기다란 널빤지를 밖으로 빼고 그 위에 포로로 잡힌 왜병 조총수를 세웠다.
사공이 왜병의 손을 뒤로 잡아 묶고 눈 부위를 중심으로 얼굴을 천으로 감았다. 곧 닥칠 운명을 깨달은 왜병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이민호는 가차 없이 지시했다.
“앞으로!”
간수군이 왜병의 등에 사정없이 채찍질을 했다. 왜병이 흐느껴 울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한 걸음씩 앞으로 걸었다. 널빤지가 휘청거리자 왜병이 무릎을 꿇었다가 다시 세웠다. 바로 밑이 바다인 것을 아는 것이다. 이민호 옆에서 계복이 혀를 찼다.
“도련님답지 않게 이런 것도 하시는군요.”
“유구국 국왕과의 약속이니까 어쩔 수 없지.”
“처형을 안 하면 간수군들이 나중에 유구국에서 소문을 낼까봐서요?”
“약속을 어겼다가 나중에 손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 엎어라!”
두 손이 뒤로 묶인 왜병이 널빤지 위에서 균형을 잡고 끝까지 버티자 이민호가 지시를 내렸다. 사공들이 널빤지를 뒤집자 왜병이 머리부터 물에 빠졌다. 왜병은 아주 잠시 얼굴을 수면 위로 내밀었다가 그대로 빠져 들어갔다.
환성을 지르는 간수군들을 뒤로 하고 이민호는 선장실로 향했다.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시간에 사람을 죽이라고 지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