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8 11. 기축옥사 =========================================================================
이민호는 작은 배를 타고 어부들과 함께 남해안 섬을 돌아다니며 조사했다. 진작 했어야 하는데 바빠서 잊어먹고 있었다.
역시 직접 돌아다녀봐야 좋은 것을 찾을 수 있는 법이었다. 전복 양식 때문에 혹시나 하고 다시마가 자라는 곳을 캐물었는데 뜻밖에 진도와 완도 같은 서해 입구 쪽 섬에서 다시마가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시대는 현대에 비해 추운 편이었고, 서해 쪽으로 한류대가 흐르고 있어서 한대나 아한대 해역에서 번식하는 다시마가 잘 자라고 있었다.
사료를 따로 주지 않아도 되니 해조류를 양식하는 것은 물고기에 비해 쉬운 편이었다. 그러나 다시마만 키워서는 돈이 된다고 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도 연포국 재료로 사용하는 등 다시마를 안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판로는 영 시원치 않았다. 그리고 이민호가 관심을 둔 것은 다시마가 아닌 전복이었다. 전복이 먹어야 의미가 있는 해조가 다시마였다.
진도와 완도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완도에 전복 양식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완도에 사는 어부들 20호를 모아서 종묘장 관리법과 철에 따라 미역과 다시마를 교대로 먹여서 전복을 키우는 방법을 함께 논의했다. 해중국에서 명나라로 양식 전복을 판매할 때 완도산 전복을 원산지 세탁과정을 거쳐 해중국의 특등품 전복으로 판매할 계획이었다.
어민들이 보기에 아직 다시마와 전복의 판로가 확보되지 않았으므로 양식 사업에만 전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이민호가 이들을 모두 고용하는 것으로 했다. 썰물 때 드러나는 개펄 바깥쪽에 대나무로 만든 양식장이 조성됐다.
이민호는 경상도 남해안 일대의 도자기 가마를 돌아보고 동래 왜관에 들렀다. 조선 백자와 옥 도자기 생산이 잘 진행되고 있어서 이민호는 도공들의 생활수준 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도공들에게 기와집과 전답, 노비를 구해주는 등 퍼주었다는 뜻이다.
도공들은 자기들이 왜 이렇게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민호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이민호를 만날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이민호가 남만 상인들에게 파는 가격을 알았다면 이민호의 상투를 쥐어뜯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공들이 생산한 자기는 전라좌수영의 해동상단 창고로 직행했다. 옥 도자기는 남만으로만 판매되기에 조선 안에서는 옥 도자기의 판매가격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도자기에 짐승의 뼈를 섞는다는 말을 듣고 혐오감이 들어 옥 도자기를 사는 사람이 아예 없었고, 그래서 기술 유출을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었다.
그 다음에는 이도다완을 제작하는 다른 가마터들을 찾았다. 도기, 백자, 분청사기 등을 제작하던 민요가 이민호의 상단에 흡수돼 일을 하고 있었다. 일본에 수출할 다완 제작 과정에서 창의성이 가장 중요하기에 도공들에게 자유로운 발상을 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북인 계통 학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노장사상을 잘 이해하는 선비를 초빙해 도공들에게 특별 강습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소박하면서도 자유로운 작품들이 나왔다.
이민호는 도공들이 생산한 다완 중에서 몇 십 개만 골라서 동래 왜관으로 향했다. 거기서 눈에 익은 왜상들과 거래했는데, 세금을 징수하는 조선 하급관리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만 분의 일 가격으로 거래를 마치고 영수증을 써주었다. 잔액은 상인들이 영수증을 들고 나가사키에 가서 겐타로를 만나 정산하기로 했다. 조선 관리의 눈에는 면포 반 필에 팔린 싸구려 막사발에 불과한데 그것을 가슴에 꼭 품고 감동에 젖은 일본 상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동래부에서 경영하는 염전도 살펴봤다. 개펄이 없어 천일염전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꽤 비효율적인 지역이었다. 이민호가 물레방아 등 기술적인 지원을 해줘 간신히 소금 생산에 성공했다. 지금은 땔감이 많이 드는 자염생산을 멈추고 천일염 생산에 주력하고 있었다.
가까운 김해에 있는 가문의 땅도 둘러보았다. 넓은 김해평야 곳곳에 저수지가 들어서 있는 점이 2년 전과 달랐다. 요즘 김해 사람들은 이민호 가문의 소작농들을 따라 다들 이앙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민호는 여기서도 땅콩 종자를 풀어 집집마다 나누어주었다.
김해부에서 운영하는 사창의 회계 점검을 도와주다가 마침 김해부사로 재임 중이던 시전부락의 전우 이경록을 만났다. 함경도가 아닌 엉뚱한 곳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술자리를 갖고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물론 이민호는 이경록을 만날 계획을 갖고 김해부 관아에 왔었다.
이경록은 임진왜란 기간 대부분을 제주목사로 보내게 될 사람이라 이민호와 부친에 의해 일찍부터 특급 관리대상으로 지목된 사람이었다. 시전부락을 토벌하는 동안 이민호가 괜히 이순신을 제쳐두고 이경록과 더 친하게 지낸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민호는 이순신을 아주 어려워했고, 그 때문에 이순신이 섭섭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성웅 앞에서 바짝 위축되게 마련이었다.
나중에 충분히 되돌려 받을 수 있으니 이민호는 이경록에게 호구 짓을 제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경록이나 이순신이나 집에 농지가 많아 기본적으로 잘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 딱히 퍼줄 방법이 없다는 고민이 생겼다.
그래서 아산과 한성부 남쪽을 사업 영역으로 하는 사창을 각각 설치하고 관리권을 넘겨주기로 했다. 물론 이순신과 이경록은 청렴한 사람들이니 받을 리가 없어 부인들을 통해야 했다. 조선 중기 이후 관리들이 봉록을 적게 받았기 때문에 관리들의 부인, 특히 무기와 갑옷, 전마를 사느라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무관의 부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이재에 밝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사람아! 홍삼을 먹는다고 내 엄지손가락이 다시 자랄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런 귀물은 팔아서 다른 좋은 곳에 쓰게.”
“몸에 좋은 것이니 사양하지 마세요, 형님. 양이 많으니 춘부장께도 드리고, 어부인께도 드려요. 자라나는 아이들, 아니 다들 시집장가 잘 갔을 테니 손주들에게도 돌리세요, 형님.”
이민호는 이경록이 부담 느낄 수준으로 팍팍 퍼줬다. 이민호는 김해부사라는 관직을 이유로 이경록에게 뇌물을 줄 이유가 없으니 무관에 대한 지원 차원에서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나중에 제주도에서 천 배, 만 배로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불법을 행하는데 눈감아달라고 할 계획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술김에 얼렁뚱땅 나이 차이가 36살이나 나는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내게 아들 셋, 딸 셋이 있는데 함경도 같은 외지를 전전하는 무관들 자식이 다 그렇듯이 동기간에 나이차가 크다네. 둘째는 안타깝게 요절했지만 어쨌든 내가 밤일을 잘해서 늦둥이들을 많이 봤지. 막내딸이 갓 돌을 지났고 다섯째는 열두 살이야.”
“저하고 동갑이군요.”
“다섯째가 얼마나 예쁜지 몰라. 귀엽기도 하지만 미모가 뛰어나단 말일세. 당장 데리고 와서 자네에게 자랑할 수 없는 게 안타깝군. 몇 년 뒤에 시집보낼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
“헤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하다고 합니다, 형님. 자식 자랑하는 사람을 팔불출이라 하는데 딸 자랑이 지나치면 딸바보라고 합니다.”
술이 약한 이민호가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이경록을 놀렸다. 김해부사는 가족을 데리고 부임할 수 없는 지방관이라 당장 딸의 미모를 보여줄 수 없는 이경록이 혀를 찼다.
“얼레? 직접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 나중에 사위 삼아달라고 나를 쫓아다니면 개자식이라고 불러줄 테다.”
“후후! 자식들과 떨어져 있으면 예쁜 짓만 기억나는 법입니다. 저희 집에는 금송아지가 있습니다.”
“금송아지? 웃기고 있네. 금두꺼비도 없게 생겼으면서.”
나중에 이민호가 한성 이경록의 집에서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 다섯째 딸은 정말 대단한 미인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이경록이 족보가 꼬일까봐 의동생에게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 하여 이민호와 동갑인 한산 이 씨 이의배라는 문신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사실 이민호의 집에는 금송아지가 없었다. 그 대신 순금으로 만든 황소가 있었는데, 조만간 궁궐로 실려 갈 물건이었다. 물론 이민호는 그보다 몇 배나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요즘 조정 분위기가 수상해. 붕당을 이루어 싸우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사림파의 선비들인데 대립이 너무 심각하다네. 머지않아 뭔가 꼬투리만 잡히면 피바람이 불어올 게야.”
“불안하군요. 그런데 중경 형님. 대동계라는 것이 요즘 말이 많던데요. 불측한 무리들 아닙니까? 전 수찬 정여립이라는 사람도 말을 함부로 하는 것 같습니다.”
정여립이 공격받는 여러 가지 중에서 가장 민감한 것이 무력 부분이었다. 대동계를 신분을 떠나 무예수련을 하는 단순한 친목단체로 여길 수도 있지만 정해왜변 때 의병 비슷하게 왜구에 맞서 싸우러 나갔다는 소문이 반대 당파의 주목을 끌었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사병을 모아 봉기한다는 흉측한 소문도 있더군. 전 수찬 정여립은 똑똑한 사람인데 주상전하를 위해 경연에서 율곡 선생을 비판한 이후로 서인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고 있어. 사병을 키운다는 소문이 도는데 정 수찬은 여전히 말을 함부로 하고 여기 저기 편지를 보내 사람들의 의중을 떠보고 있네. 워낙 미운 털이 박힌 데다 허점까지 많으니 상대 당파에서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 사람으로 인해 호남에 거주하는 동인들이 큰 피해를 볼 수 있을 게야.”
“경고를 해줘야겠군요.”
사병을 운용하는 이민호 입장에서 정여립은 매우 골치 아픈 존재였다. 관으로부터 인정받았다지만 대동계라는 사병 조직을 정여립이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여립이 역모죄로 고변을 당한다면, 비록 왕실로부터 하락을 받고 사병을 운용 중인 이민호도 큰 소란에 휘말리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편지를 쓸 때 정여립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꼭 넣었다. 그리고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해 여름 이민호는 외륜선 한 척을 몰고 한성으로 향하는 중간에 완도에 들렀다. 전복 양식장 시설이 얼추 갖춰져 어부들이 바다에서 미역과 다시마를 키우고 있었다. 종묘장에서는 종패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역시 신선한 바닷물을 퍼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다.
이민호는 물레방아 두 개를 반대로 돌리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해수의 농도가 중요한 염전에서는 사용하지 못할 방법이었지만 염도보다는 산소 공급이 중요한 종묘장에서는 상관없었다.
바다로 흐르는 개울의 물을 받아 물레방아를 돌리고 축이 연결된 반대쪽 물레방아가 거꾸로 돌면서 바닷물을 위로 퍼 올렸다. 그 바닷물은 기와로 만든 수로를 따라 종패장으로 흐르게 했다. 물론 염도도 주의해야 하니 개울이 흘러나가는 곳과 바닷물을 푸는 곳 사이에 제방을 쌓아 교류를 차단시켰다.
최소 2년 동안 매달려야 첫 상품이 출하될 것이므로 이민호가 어민들에게 충분한 농지를 사서 나눠주었다. 역시 양식장 사업은 초기 시설투자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가난한 어민들은 양식장 사업을 할 엄두도 못 냈다.
당시 어민에 대한 공납은 전복이 가장 많았다. 정해왜변 때 왜구의 앞잡이를 했던 진도 어민 사화동은 한정 없이 징수하는 전복 공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왜구에게 붙었다고 당시 포로가 됐던 전라좌수영 진무 김개동과 이언세에게 말할 정도였다. 이곳 완도에서도 전복 공납 문제는 심각해서 관아에서는 어민들에게 끝없이 전복을 캐오라고 재촉했다.
이곳 전복 양식장은 어민들에게 혹독했던 전복 공납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양식장도 사업장이므로 당연히 세금을 내야 했고, 이 경우 현물인 전복으로 내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이민호가 생산량을 예상했을 때, 전국에서 어민들이 공납하는 전복의 양을 이곳 완도 양식장 한 곳에서 세금으로 내는 전복만으로 충당이 가능하다고 봤다. 현재 전복은 모든 해역에서 씨가 말라서 큰 것을 구하기 어려웠고, 고밀도로 키우는 양식장의 생산량은 실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산과 양식산은 달랐다. 그러나 다른 어류와 달리 전복은 양식산과 자연산의 맛 차이가 크지 않았다. 광어라면 사람이 배합해서 주는 사료를 먹고 수조에 갇혀 있어 운동이 부족해 살이 탄탄하지 못하겠지만, 전복은 자연산이나 양식산이나 해조류에 붙어서 뜯어먹고 살기 때문이다. 외관상 차이라고는 껍질에 붙은 따개비 정도였다.
앞으로 생산될 전복은 세금과 공납을 제외하고 이민호와 어민들이 6대 4로 나누되 어민들 몫의 전복도 이민호가 모두 구입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완도에서 미역과 다시마를 계절에 따라 교대로 먹고 자란 양식 전복은 세금을 제외하고 전부 이민호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수매 가격은 조선에서 채취되는 자연산 전복의 가격과 무조건 똑같이 쳐주기로 해서 양쪽 모두 매우 만족스런 계약이었다.
이민호는 자연산 전복을 살 계획은 없었다. 상품성을 갖춘 적당한 크기의 전복을 구하기도 어렵고, 다시마를 먹고 자란 양식 전복의 향이 더 나을 거라고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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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중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