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2 11. 기축옥사 =========================================================================
“하얗고 우윳빛 광택이 나는 건 인정하겠지만 색깔이 너무 적나라합니다. 명나라에서는 절대 이런 것을 고급으로 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황상께서 마음에 들어 하신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맞아요. 사람마다, 나라마다 취향이 다르지요. 상인이라면 모름지기 그런 취향 차이를 파악해야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저번에 옥 도자기를 남만 상인들과 거래했는데 경덕진에서 만든 도자기보다 최소 두 배는 더 받았습니다. 다른 상인들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맙소사! 예. 비밀을 엄수하겠습니다.”
신라방 상인은 차와 함께 나온 감자 크로켓을 꽤 좋아했다. 고산국에서도 감자 농사가 풍년이라 식량 사정이 확 풀렸다. 그래서 원주민들이 쌀을 화폐 대용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요즘 대만 남부에 사는 여러 원주민들이 고산국 궁성을 방문해 씨감자를 얻어갔다. 이민호는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허용하며 재배법과 요리법도 가르쳐주도록 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부족으로 돌아갈 때 쓸 식량까지 제공했다. 아주 싸게 백성을 늘리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니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미적 감각은 다릅니다. 천조의 남성들이 싫어한다 해도 혹시나 여성들이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옥 도자기를 약간 드릴 테니 황궁의 신분 높은 여성분들에게 장 점주의 상단 이름으로 진상해보세요.”
“예. 황후전에는 어렵더라도 후궁들과는 끈이 있으니 진상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동해의 봉래 해삼 견본을 신라방 상인에게 보여줬다. 물에 불려서 잠시 지켜보던 상인이 연신 한숨을 내쉬더니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후우~ 실로 탄복했습니다. 대인께서 보여주시는 상품은 어느 하나 귀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상인이 땀을 비 오듯 흘렸다. 흑해삼 말고는 조선의 해삼이 명나라에 수출된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땀을 흘리는 것은 이민호도 마찬가지였다. 해관 주위에 큰 나무를 옮겨 심어 그늘을 드리웠는데도 너무 더웠다. 이곳은 땅 자체가 덥고 습기도 높았다.
“봉래산 근처 바다에서 잡혀 봉래 해삼이라 하는데, 이것도 흑해삼과 같은 양인 이천 근을 가져왔소. 일단 단가를 제시해보시오.”
“휴우~ 솔직히 계산이 안 됩니다. 이런 귀물은 가격이 정해지기 어렵고 주인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해삼 유통업계에 큰 충격을 줄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괜찮소. 장 점주에게 자금 면에서 여유를 주겠소.”
“감사합니다. 그러시다면 근 당 천은 20냥을 드리고 위탁판매를 요청합니다. 저는 중간상인에게 넘길 판매액의 2할만 취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흑해삼은 지난번에 평균 판매가가 근 당 열 냥이라 이번에 여덟 냥 이상으로 올려드려야 함이 마땅하나, 이번에 더 좋은 해삼이 나왔으니 일단은 저번과 같은 여섯 냥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판매상황을 봐서 나중에 정산하겠습니다.”
“그것도 좋소.”
“언제나 그렇듯 화통하시군요. 매번 감사합니다. 금으로 계산해서 드리고 판매가 될 때마다 정산하겠습니다.”
나중에 일본 관동 해삼을, 그리고 최종적으로 홋카이도 해삼을 들여오면 명나라의 해삼 상인들은 집단으로 까무러칠 것 같았다. 위에 프리미엄급 상품이 진입하면 장기적으로 흑해삼과 봉래 해삼의 가격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어쨌든 이로써 고정적인 해삼 무역망은 갖춰졌다. 다음 거래부터는 계복이나 다른 이에게 시켜도 될 것 같았다.
그 동안 이민호가 일일이 상품을 갖고 다니면서 계약까지 체결했는데 이제 보따리상은 질렸다. 상단 사람들이나 이민호의 가문 종들, 그리고 미카나 겐타로도 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규모가 큰 거래를 할 때는 이민호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고산국의 궁성은 빠른 속도로 지어졌다. 아직 성벽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안쪽에 거주할 주택 몇 채는 완성됐다. 본전의 내장공사가 한창이라 이민호는 객사 역할을 하는 별궁에 자리를 잡았다. 미카와 하녀들도 해중국에서 이쪽으로 옮겨왔다. 이민호는 요즘 무역은 고산국 이름으로 하고, 전쟁은 해중국 이름으로 할까 고민했다.
다음 날 하루 푹 쉰 대동계 사람들에게 농지와 집을 나눠주고 고산국의 수취체계를 설명해주었다. 장기적으로 지주의 토지겸병이 없을 것 같다며 다들 좋아했다. 이 시대에 병작반수에 군역, 공납, 부역이 없다면 농민에게 아주 유리한 제도였다.
그러나 지내다 보면 크고 작은 불만이 생기고, 특이한 사람들의 가슴에는 역심이 싹트리라는 것쯤은 이민호도 예상했다.
“그대가 정 수찬의 아들인가? 조선에는 절대 돌아가지 마라.”
“엄친의 뜻과 같으니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옥남이라 불러주십시오, 왕이시여. 이제 저는 조선과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왕이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마라.”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충성을 바칠 이유가 없고 뒤엎어도 된다는 주장이 역성혁명론이다. 이와 비슷하게 왕의 혈통세습을 부정한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은 유자혜의 주장이었다.
당시에는 혁명적인 발상이며 역적으로 비판을 당할 만한 주장이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상과 흡사했다. 현대인인 이민호는 공감했지만 수시로 조선에 들락거려야 하는 입장에서는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의 존재가 무척 껄끄러웠다.
“쯧! 아비처럼 천하를 거스를 팔자로구나. 무슨 말이나 일을 하고 싶더라도 먼저 많이 배운 다음에 하여라. 정 수찬의 수준에 도달한 다음에야 네 마음껏 주장을 펼치라는 뜻이다.”
“그 수준에 도달하기 어렵겠지만 명심하고 정진하겠습니다.”
사실 열두 살 이민호가 스물 넘은 사내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인생의 선배로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여진족 아이들은 궁성에 모두 거주시켰다. 충분히 사격훈련을 시킨 다음 사내아이들 전부와 계집애들 일부는 친위군으로서 궁궐 수비와 척후를 맡겼다. 이들이 새로운 나라에서 군의 주축이 될 것이다. 물론 지휘는 이민호나 계복이 맡을 예정이었다.
나머지 여진 여자 아이들은 미카가 가르치면서 희망에 따라 시녀나 궁성 하급관리로 삼기로 했다. 호닌과 굴마훈은 여진어로 양과 토끼라는 뜻의 이름인데 이 둘이 이민호의 시녀 겸 근접경호를 담당했다.
“구룬 한께서는 엔두링게 한이 되실 겁니다.”
“뭔 소리야? 못 알아듣겠으니 조선말로 해.”
이민호가 둘과 첫 대면하면서 호닌이 한 말이었다. 이민호가 묻자 호닌과 굴마훈은 살짝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왕 전하는 성 황제 폐하가 되실 것이라는 축원이 담긴 인사였다.
이민호는 군인과 관리의 녹봉 체계를 만들어 매달 지급했다. 세금 수취와 창고 관리, 관리와 군인에게 녹봉 지급을 해야 하기에 고산국에서 가장 처음 생긴 부서가 호조와 비슷한 호국이었다. 명나라나 조선과 같은 6부 혹은 6조 체계 그대로 본뜬 다음 등위를 깎은 부서명이었다.
조선인, 여진인, 일본인, 그리고 원주민들이 고산국 궁성 안팎으로 돌아다녔다. 다들 갖가지 민족 고유의 옷을 입고 다녀서 이민호가 보기에 좋았다. 군인이 아니라면 의복의 통일성보다는 다양성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여자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옷차림을 두고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대만의 여름은 무척 더워서 만주족의 기마용 전통 의상인 치파오 길이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짧아졌다. 그리고 어깨가 드러난 민소매가 선호됐고 길어야 반소매였다. 치마가 허벅지까지 갈라진 것에 더해 짧기까지 하니 고산국의 치파오는 만주에서와 달리 꽤나 섹시한 의상으로 변했다.
그러나 치파오가 아무리 관능적이라 해도, 케타갈란족과 아타얄족 여성들의 짧은 원피스에 비하면 대단히 단정한 편이었다. 낯이 두꺼운 계복도 얼굴을 붉히며 슬쩍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계복아! 저기 원주민 여자들한테 빤스, 아니 속옷을 입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허리를 숙일 때마다 안쪽이 다 보여서 너무 민망하잖아.”
“제 머리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 가슴과 거시기는 반대하네요, 도련님.”
“좀 더 두고 생각해보자.”
“예. 좀 더 오래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남자들이 이렇게 소극적이라 결국 미카와 조선인 여자들이 나서서 원주민 여성들에게 속옷을 배급해 반강제로 입혔다. 비싼 면포와 비단이 쓸데없이 속옷 만드는데 들어가자 이민호는 한숨을 내쉬었고, 계복은 눈물을 흘렸다.
고산국 궁궐 완성을 앞두고 원주민 부족 여러 곳에서 젊은 여자들을 새 궁궐에 보냈다. 일부는 우호의 의미로 보내고 일부는 결혼 동맹을 노린 것 같았다. 대만 북부 원주민 부족들은 모계사회의 유풍이 강한 집단들이라 이민호의 씨를 받아오기 위해 스스로 온 여자들도 있었다. 이민호는 정확한 의도를 몰라 그들을 시녀로 삼아 매달 녹봉을 주고 매달 며칠씩 휴가를 받아 고향 마을에 자유롭게 왕복할 수 있게 해두었다.
궁궐에 사람이 남으면 미카가 알아서 일손이 부족한 곳에 배치했다. 다들 경험이 없어 처음에는 많이 삐걱거렸으나 이제는 업무분담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 요리하는 사람과 음식을 옮기는 사람이 따로 있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민호는 기뻐했다. 이 정도면 처음과 비교해 상전벽해 수준이었다.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여러 가지 말이 혼용됐지만 자연스럽게 조선어가 공용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원주민들에게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다들 열심히 조선말을 배웠다. 해중국에 주로 배치된 일본인 농민들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조선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민호는 돌아온 날 밤부터 매일 미카를 안았다. 몸이 아주 나긋나긋해서 좋긴 한데 관계 도중에 내내 우는 소리를 내는 게 특이했다. 한국에서 젊었을 때 하반신 친일이어서 동영상을 자주 봤던 이민호는 일본 여자들이 행위 중에 우는 것이 아무래도 종특인가 했다.
“그런데 너희들 이럴 때는 밖에 좀 나가있지 그러니?”
“왕에게 하늘 아래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호닌과 굴마훈이 동시에 대답했다. 이민호는 침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미카의 하녀들, 그리고 침대 바깥에 소총을 들고 서 있는 여진족 시녀들이 신경 쓰였다. 군주는 무치(無恥)라는 소리는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았다.
일본인 하녀, 이제는 시녀가 된 사무라이의 딸들이 수건을 들고 침대 안에 들어오려 해서 이민호가 화들짝 놀랐다. 항상 고분고분하던 하녀들이 이럴 때만은 강압적으로 나와 결국 이민호는 아랫도리를 홑이불 밖으로 내놓고 말았다. 내전(內殿)의 일은 시녀에게 맡기라는 미카의 말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오두막에서 미카를 안았던 때가 좋았다.
고산국 왕궁에서 이민호와 관련된 모든 격식과 절차가 명나라 황궁을 따라 하고 있었다. 아직 인원이 부족해 모든 것을 따라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확립될 것이다.
그 해 가을, 옥사(獄事)가 있었다. 황해도 관찰사가 안악과 재령에서 몇 명을 체포한 다음 비밀 장계를 올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조정에서는 의금부 도사 유담과 선전관에게 군사들을 딸려 보내 정여립과 일당을 체포하도록 했다. 검열 이진길이 정여립의 조카라 해서 입시(入侍)에서 제외되고 결국 나중에는 하옥됐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경상도와 황해도에서 피바람이 불었다. 주로 동인들이 피해자였지만 일부 서인들도 죄 없이 끌려가 죽었다. 때마침 관기와 이별해서 눈물을 흘린 관리도, 형장이 혹독해서 고개를 돌린 대신도 역적을 동정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알고 있던 기축옥사보다 규모가 대폭 축소됐다. 역사와 달리 정여립은 진안군 죽도에서 죽지 않고 선전관 이용준과 내관 김양보 등에 의해 체포돼 의금부까지 끌려와 국문을 받았다. 사실을 실토하라는 추관 정철이 고문을 반복해 죽이고 말았다.
천하를 공물(公物)이라 하고, 임금은 요순시대처럼 혈통보다는 능력에 의해 양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는 이렇게 죽었다. 이민호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우의정 정언신은 정여립의 9촌 인척으로서 역적과 교류가 있다 하여 파직되고 1591년에 유배지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