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12. 확장 =========================================================================
해 뜨는 새벽에 해전을 시작해서 지금은 해가 중천에 걸렸다. 아직도 움직이는 해적선은 이제 절반 이하로 줄었다. 그러나 해적선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공격해왔다.
외륜선에 탄 간수군들도 어느덧 지쳐갔다. 쏴도 쏴도 해적들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몰려왔다.
“이야아아!”
- 탕!
이민호가 소총에 실탄을 장전하는 중에 괴성이 울렸다. 갑판에 갈고리를 걸고 명나라 해적이 칼을 휘두르며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민호는 권총을 빼서 해적을 쏘고 나서 다시 소총을 장전했다.
간수군과 여진족, 직할군 등 모든 고산국 군사들은 총구 밑에 총검을 꽂고 전투에 임했다. 멀리 있는 해적에게는 소총을 쏘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드는 해적은 총검으로 찔렀다. 사방에서 배에 기어오르는 해적들 탓에 정신이 없었다.
“첨지 영감! 서쪽에서 웬 배들이 몰려옵니다. 명나라 군선 같습니다.”
돛대 망루에서 사공이 보고하자 이민호가 방아쇠를 당긴 다음 고개를 돌렸다. 손은 총탄을 장전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사공도 망루에서 소총을 쏘느라 바빠서 미처 못 봤는지 배들은 수평선 아래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민호는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저길 봐라! 서쪽 바다에서 명나라 수군이 지원하러 왔다! 해적들을 끝까지 추격해 모두 죽여 버리자!”
“와아! 천조의 지원군이다!”
간수군들이 힘을 내서 다시 열심히 소총을 쏘아댔다. 조선 사람들은 대국의 것이라면 뭐든지 크고 강한 줄 알았다. 간수군들은 해적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명나라 수군이 지원하러 왔으니 전투가 곧 끝날 것으로 믿었다.
그 사이 해적들도 명나라 군선을 발견하고 잠시 소란이 일어났다. 어떤 배는 계속 외륜선을 공격하고, 어떤 배는 명나라 군선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몇몇 배들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주하는 배들이 점점 늘어났다.
잠시 더 기다리자 자중지란에 빠진 해적들이 전투를 멈추더니 팽호도가 있는 남쪽으로 일제히 달아났다. 해적선들이 공격할 때는 두목이 없더라도 큰 상관이 없었으나 불리한 순간에 전체 해적선들을 통제할 사람이 없어 이런 일이 생겼다.
“추격하라!”
해적들이 모두 쓰러져 주인 없는 배를 밀어내면서 외륜선 다섯 척이 공세로 전환했다. 잠시 틈이 생기자 사공들이 날라 온 미숫가루를 한 잔씩 마시며 군사들이 아주 잠깐씩 숨을 골랐다. 소모한 실탄과 수류탄이 다시 충분히 보급되고 나서 간수군들이 다시 힘을 내어 총을 들었다.
이민호는 이번 전투에서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가 지금은 여유를 되찾았다. 다른 간수군들은 소총을 조준해 사격하느라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직 해적들이 고산국의 병력보다 더 많았다.
“감불아! 저 큰 배에 해적 두목이 타고 있을 거야. 선미루의 선장실이나 배밑판을 수색해서 혹시 보물이 있으면 가져와라.”
이민호가 여진족 몇 명을 단정에 태워 보냈다. 활과 총으로 무장한 여진족들이 줄사다리를 갑판에 걸친 다음 용감하게 올라갔다. 이들이 갑판에 오르고 잠시 뒤에 총소리가 몇 번 울렸다.
그 사이 외륜선 다섯 척은 도주하는 해적선들을 추격했다. 바다 전체가 해적들이 흘린 피로 인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외륜선의 커다란 바퀴가 돌면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마침 역풍이 불어 외륜선의 속도가 더 빨라지면서 도주하는 해적선들을 따라잡았다. 이민호가 외륜선을 해적들의 앞으로 몰게 해 도주로를 차단하도록 했다. 선수루와 선미루에 가득 배치된 소총병 간수군들이 해적들에게 총탄을 퍼부었다.
- 타탕! 탕! 탕!
큰 배들은 이미 탑승자들 대부분이 죽어서 이곳에는 작은 배가 더 많이 남았다. 그 배들에는 조총수가 몇 명 없어 화력이 약한 편이었다. 겨우 한두 정의 조총을 갖고, 정확도와 사격 속도가 압도적인 소총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후 전투는 일방적인 양상으로 흘러갔다. 시간이 갈수록 전력 차가 급격히 벌어졌다. 살아날 길이 막힌 해적들의 사기가 뚝 떨어져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총탄에 맞아 죽어갔다. 버티다 못한 해적들이 무기를 버리고 외륜선을 향해 절을 했다.
“첨지 영감! 해적들이 항복합니다.”
“계속 쏴! 해적 포로는 없다고 했다!”
이민호가 지시하자 무기를 버린 해적들에게 다시 간수군들이 총탄을 퍼부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해적들이 배 구조물 뒤에 숨거나 바다로 뛰어들었다.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달했을 때 명나라 수군이 도착했다. 명나라 것은 무조건 크고 강하다고 믿었던 간수군들의 기대와 달리 판옥선보다 작은 사선 열 척에 나머지는 연락선으로나 쓸 만한 작은 배들이었다. 명나라 군선에는 중형선에 해당하는 사선(沙船)과 소형선에 해당하는 호선(虎船)이 있었다.
이때는 해적들이 거의 몰살당한 뒤였다. 명나라 수군 병졸들이 조총과 활을 해적선에 들이댔으나 살아있는 해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선실 안에 부상자들이 소수 숨어 있겠지만 아직 선내 수색을 할 때가 아니었다. 갑판에 깃발이 잔뜩 걸린 사선 한 척이 이민호가 탄 외륜선에 접근했다.
“본작은 대명의 복건 순무어사요. 귀관은 어느 나라의 수군 대장이시오?”
“본관은 고산국의 남도 수군절도사 이라고 하오. 국왕 전하의 명을 받고 해적을 토벌하러 왔소.”
원래 관리들끼리 처음 만나면 관직명과 이름을 쓴 단자를 서로 교환해야 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지금은 전투 중이고 배를 접현시키기 어려워 약식으로 인사만 나눴다.
팽호도는 확실한 명나라 영토라기에는 좀 부족한 감이 있었다. 역대 중국 정권이 섬에 대해서는 그다지 영토 야욕을 부리지 않았으나 중국 어민들이 팽호도에서 어로작업을 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팽호도에 해적이 창궐할 경우 가끔 수군을 보내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팽호도에 대해 확실한 영토 의식을 갖고 꾸준히 관리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복건 순무는 팽호도가 명나라 영토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작은 섬에 욕심 부렸다가 괜히 해적 토벌에 대한 책임만 생기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이 섬에서 굴 양식을 해볼까 아주 살짝 욕심이 생겼다. 대만해협 중간에 있어 등대를 세우기에도 딱 좋은 위치였다. 하지만 경제적 가치는 별로 없었다. 명나라가 해적 진압을 조건으로 고산국에 이 섬을 떠넘길까 두려워 이민호가 말을 아꼈다. 쓸모없는 섬을 갖기 위해 위험을 부담하기는 싫었다.
“고산국이라면 저 섬 북쪽에 새로 생긴 나라 아니오? 새로 입조가 허락됐다고 들었소. 축하하오!”
얼토당토않은 곳에서 전혀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
“소문만 잔뜩 돌고 정작 조칙을 전하는 대명의 사신은 고산국에 오지 않았소. 국왕 전하께서 목을 빼고 기다리신다고 전해주시오.”
“아하! 어쩐지 하문의 부두에 배를 댄 조사(詔使)가 허둥지둥 육지로 뛰어갔다 했더니 야만족을 만났다가 놀라서 도망친 모양이오.”
나중에 알고 보니 명나라 사신이 몇 달 전에 고산국에 한 번 왔었다고 한다. 그때는 섬 중간쯤에 엉뚱한 곳에 내렸다가 돌아갔다. 어느 과격한 야만인 부족의 영역에 내렸다가 공격을 받아 혼쭐이 났다고 한다. 아마 그게 파폴라 부족일 테니 하마터면 사신의 목이 잘려 꼬챙이에 꽂힐 뻔했다.
“수급을 이토록 많이 얻다니, 정말 대단하오. 절도사께 경하드리오.”
아직 해적들의 목을 베지도 않았는데 순무가 부러워하는 티를 팍팍 냈다. 만약 명나라 병력이 많으면 외국군에게 겁을 줘서 빼앗아가는 것이 보통일 텐데 고산국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탈취하기는커녕 몇 개 달라는 말도 못 꺼냈다.
“순무 대인께서 비록 늦게 오셨지만 싸움에 참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그러니 전과 일부를 나눠드리겠소.”
“그래도 되겠소? 절도사께서 힘껏 싸워서 얻으신 것을 말이오. 그런데 어째서 아직 수급을 취하지 않으십니까?”
수급에 욕심이 난 순무(巡撫)가 침을 꼴깍 삼켰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적선 백여 척에 죽은 해적이 못해도 수천 명이니 수급을 베어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면 승진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사실 순무는 조선 관직체계로 따지면 이미 당상관에 해당하는 고위 관직이었다.
명나라 초기에 임시직이었던 순무는 15세기 중반 상설직으로 전환돼 각 성 전체 또는 일부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쥐고 있었다. 명나라 황제가 지방의 반란을 우려해 각 성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철저히 분리시켰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기에 국한되고 지금은 총독이나 순무가 성 하나 또는 여럿의 전권을 잡고 있었다.
임진왜란 후반기에 명군을 지휘한 경리 양호의 직책이 경리조선순무였다. 순무들 대부분은 그 어려운 명나라 과거에 합격해 진사로 관직을 시작한 문관이었다.
이민호는 이 많은 해적 전사자들을 어떻게 하나 하고 잠시 고민했다. 더 이상 호구 짓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해적들의 수급을 베어도 이민호에게는 써먹을 곳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적의 머리를 벤 것을 수급이라 하는데 상급자에게 가져가 전공의 증거로 삼는다. 옛날에 적의 머리 하나를 베어올 때마다 계급을 하나씩 올려줬다고 해서 수급(首級)이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왕이나 다름없으니 누구에게 보고해서 전공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고산국 입장에서 앞으로 자주 마주칠 명나라 고위 관리인 복건 순무에게 시원하게 퍼주기로 했다.
“고산국에는 일부 야만인들이 사람 목을 베어 꼬챙이에 꿰는 악습이 있었소. 국왕 전하께서 그 악습을 없애기 위해 절대 사람의 목을 베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소. 그래서 저들이 비록 흉악한 해적들이라 하나 우리는 시체에서 목을 베지 않을 것이오.”
“고산국은 듣던 것보다 교화가 많이 된 나라이구려.”
이민호가 수급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순무는 천천히 물에 가라앉는 시체를 보면서 아까워 죽으려 했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 것이 마치 식인종을 보는 것 같아 이민호는 등골이 서늘했다.
“그러니 순무 대인께서 수급을 다 가져가서 천조에 순무 대인의 승첩을 보고하는 증거로 삼으시오. 더불어 아국의 전과도 좋게 이야기해주시면 서로에게 좋지 않겠소?”
“오오! 본작이 다 가져가도 되겠소? 정말로 우리가 함께 싸운 것으로 인정해주는 거요? 고맙소! 고맙소, 절도사!”
명나라 수군은 오늘 해전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민호가 모두 양보하더라도 순무의 인간성에 따라 좋으면 반반, 나쁜 놈이면 9대 1, 심하면 10대 0 정도 비율로 전과를 보고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순무가 뜻밖에 청렴결백해서 3대 7로 오히려 고산국의 전과를 더 크게 명나라 조정에 보고했다. 덕택에 고산국이 북경에 입조할 때 명나라에서 편의를 많이 봐주었고, 조공 횟수도 작은 나라에게는 과할 정도인 1년 1공으로 결정됐다.
명나라 수군이 해적선에 올라 수급을 베거나 물에 빠진 시체를 건져 올리는 동안 이민호는 외륜선 다섯 척을 이끌고 팽호도에 들이닥쳤다. 길게 늘어선 섬 지형으로 인해 동그란 만을 이뤄 내해는 파도가 잔잔했다.
포구에는 작은 배들 300여 척이 서너 줄 겹치면서 길게 늘어서 있었고, 땅에는 기와집 몇 채와 수많은 오두막으로 큰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 어로작업이나 해적 영업을 하러 나간 배들이 더 있을 테니 천 척이라고 말한 원주민의 보고가 지나친 과장은 아닌 것 같았다.
해적과 그 가족들을 합쳐 만 명은 충분할 것 같아 원주민의 보고가 전혀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 말을 이민호가 믿지 않았으니 더 이상 정보가 들어오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이민호는 이번 일을 통해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