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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79화 (28/1,000)

00079   14. 입조  =========================================================================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지난해인 1589년 이후부터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는 태업, 즉 태정(怠政) 중이었다. 황제가 ‘무위의 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태정은 이후 30년간 이어졌다.

만력제는 황태자를 책봉하는 문제로 조정 대신들과 다툰 이후 공식석상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고, 상주문을 처결한 적이 없다고 했다. 황제는 대신들의 청을 받아준 것도 아니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인 것도 아닌, 권력만 손에 잔뜩 쥔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어린 황제에게 엄격했던 표리부동한 스승 장거정은 1582년에 죽었고 2년 후에 황제가 그를 부관참시했다. 그 후 5년 동안 황제는 그런대로 정사를 돌봤었다. 그러나 황태자를 세우는 문제인 쟁국본에서 열 받은 황제는 대신들 엿 먹으라고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버렸다.

그래서 대신이 병이 걸려도 퇴임을 못하고 고관대작 중에서 누가 늙어 죽어도 후임자를 임명하지 못했다. 조정이나 지방 관직 중에 빈자리 천지여서 행정이 마비됐으나 황제는 그 와중에 환관들로 광세사를 삼아 지방에 파견해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중국사를 잘 모르는 이민호는 현재 명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명명에게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명명은 신라방의 장 점주보다 명나라 정치 상황을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만력제가 명나라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임진왜란 때 명군 파병을 결정했다고 알고 있었던 이민호는 황제가 정치에서 손을 뗀 태정이 1589년이 아닌 1599년에 시작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조선 조정과 해동상단에서는 몰랐거나, 알더라도 외교관계나 상행에서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민호에게 소식이 들어가지 않았다.

만력제는 꼽추병을 앓고 있어 공식석상에 나오기를 꺼린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아편중독 소문도 있고 여자가 아닌 남자, 특히 환관들을 침실로 끌어들인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명명이 그런 소리를 했더니 계복이 평했다.

“환관이 된 것도 억울할 텐데 황제 폐하께 엉덩이까지 대줘야 해요? 불쌍하네요.”

“명나라 태감들은 권력자이면서 뇌물을 밝힌다더라. 별로 불쌍하지 않아.”

이민호가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명명이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대인. 하지만 불쾌하더라도 고산국의 장래를 위해 태감들에게 적당히 기름칠을 하셔야 합니다.”

“그럼 멍멍이 너는 뇌물 줄 환관들 명단이나 작성해다오. 홍삼은 곤란하고 뭘 돌려야 하지?”

“이미 준비해왔습니다. 24아문 태감들과 주요 환관들의 이름과 직책, 집 위치와 좋아하는 뇌물 취향까지 기록됐습니다. 보세요.”

“오호! 다들 취향과 취미가 다양하구나.”

명명이라는 상인 소녀는 똑똑하고 눈치도 빠르고 예쁘고, 게다가 힘도 셌다. 황금 오백 냥으로 만든 방탄판을 옆구리에 끼고 계단을 가뿐히 오르는 모습을 봤을 때는 이민호도 질려버렸다.

“멍멍이 혹시 무공 배웠어?”

“여자가 그런 걸 배워서 뭐하겠어요? 저는 가녀린 소녀랍니다. 호호!”

힘 좋은 드워프 소녀 같은 명명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육체적 능력도 훌륭하니 이민호는 명명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저 정도 수준을 갖추기 위해 안 보이는 곳에서 명명이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부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민호는 머리가 아주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고산국 국왕 고봉명이나, 조선시대의 문과 급제자들처럼 경서와 여러 종류의 해설서들을 줄줄 외우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자연현상을 관찰해 뭔가 새로운 법칙을 밝혀내거나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무연탄에서 제대로 화학물질을 뽑아내지 못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끈기가 강한 것도 아니었다. 체력은 아직 성장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 해도 일반인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

이민호가 유리한 것이라고는 조선시대 역사를 어설프게나마 알고 각종 무기체계에 대한 지식이 많다는 것, 그리고 이미 한 번 죽어봐서 딱히 생에 대한 집착이 없어 전쟁터에서도 겁을 안 낸다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총격전 와중에 선수루에 우뚝 서서 지휘하거나, 말을 타고 여진 기병에게 돌격하는 것은 용감해서가 아니라 여분의 삶을 사는 관찰자로서의 여유였다. 그러나 하는 일이 많고 챙겨야 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민호도 요즘은 은근히 몸을 사리게 되었다.

“계복이 무과 시험 봐야지?”

“기창과 기사, 보사를 다 배우긴 했는데, 아무래도 무과는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첨사 나리께 말씀 좀 들어보니 선달이 되면 여기저기 쓸데없이 불러서 일을 많이 시킨답니다. 그냥 도련님 옆에 붙어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고산국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국가반역자 녀석!”

“큭큭! 도련님은 수괴인데요?”

계복을 양반으로 만들어주고 싶었었는데 이민호가 생각해봐도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이민호도 무과 시험을 보려다 포기했다. 임진왜란 중에 병력을 지휘해 한창 왜군과 싸우고 있는데 조정에서 불러 평안도에서 군량 운반을 시킨다면 돌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정에서야 필요해서 부르겠지만 일괄적으로 불러서 일을 시키다 보면 답답한 경우가 많이 생길 게 분명했다. 갑사나 팽배수 등 전문 군종들은 조선 초기에는 신분이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급한 대로 써먹기 좋다고 자꾸 건설과 토목작업에 동원시키다 보니 나중에는 천한 군종이 되어버렸다.

이민호가 침대에 들자 호닌과 굴마훈이 침대에 차양을 치고 얇은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무기를 가까운 곳에 두고 둘이 눕는데 치파오의 옆트임 때문에 굴마훈의 하얀 허벅지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시녀 겸 근접 경호를 맡은 둘이 이민호가 쓰는 침실의 방바닥에서 자는 것이 안쓰러워 침대에 올리고 보니 조금 묘하게 됐다.

“나하고 같이 자는 게 불편하지 않아?”

“헤~ 기뻐요.”

명명은 호닌과 굴마훈을 안으라고 했는데 꼭 그럴 필요 있을까 싶어서 굴마훈에게 물었다. 굴마훈이라는 이름 그대로 앞니 두 개가 굵어서 정말 토끼처럼 귀엽고 순하게 생겼다.

“내가 안아주길 바래?”

“그럼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하지만 구룬 한께서 부담되시면 이대로도 좋아요.”

당시 동아시아 대부분 나라에 일부다처제가 일상이라 딱히 거부감은 없는 것 같았다. 이민호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호닌은 어때?”

“당연히 영광입니다. 그걸 기대하고 시녀로 지원했거든요.”

“내가 너희를 안더라도 왕비나 후궁, 심지어 귀인 대우도 받기 어려울 거야. 사실 나는 왕위에 욕심이 없어.”

“왕위는 전혀 상관없어요. 강한 남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니까요. 읍!”

적극적으로 공략은 안 하더라도 오는 여자 막을 생각이 딱히 없는 이민호는 호닌과 입을 맞췄다. 말을 타면 전혀 달라졌지만 침대에서는 이름과 같이 양처럼 순한 여자였다. 호닌이 눈을 꼭 감고 이민호의 혀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첫 키스의 감미로움을 오래도록 즐겼다.

숨을 헐떡이는 호닌을 눕힌 이민호는 옆에서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굴마훈의 몸 위에 엎드렸다. 이민호는 키가 크면서도 토끼 같은 인상의 처녀와 입을 맞추면서 맨살이 닿는 신체 접촉을 즐겼다. 굴마훈이 하체를 들썩이며 이민호의 몸을 받아들이려 애썼지만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진정시켰다.

“아~ 구룬 한!”

“나 국왕 아니니까 민호 씨라고 불러.”

“제가 어떻게 감히.”

황제의 승은을 입는 후궁이 황제가 움직일 때마다 폐하를 부르짖는 장면을 떠올린 이민호가 속으로 웃어버렸다. 이민호는 자기 여자에게 ‘민호 씨’로 불리는 것이 좋았지만 굴마훈이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자 주인님으로 부르기로 타협을 봤다.

이민호는 호닌, 굴마훈과 교대로 입맞춤을 하다가 아예 둘의 얼굴을 모아놓고 얼굴만 양쪽으로 왕복했다. 현대에 이랬다간 여자들이 합심해서 두들겨 패겠지만 이 시대 여자들, 특히 북방 기마민족의 여자들은 질투를 자제하도록 강하게 요구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니 둘이 이름 그대로 순한 양과 귀여운 토끼 같았다.

다정하게 입을 맞춘 다음 셋이서 꼭 껴안고 잤다. 항저우도 아열대 지역이라 중간에 끼어서 자는 이민호는 더워서 밤중에 여러 번 깨었다. 그때마다 호닌과 굴마훈이 알아차리고 이민호를 지켜주었다.

항저우 객사에서 보낸 지 나흘째 되는 날 예부 주사가 방문했다. 사신단이 드디어 항저우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운하를 관리하는 명나라 관리가 선도하는 작은 배를 따라 외륜선 세 척이 대운하로 진입했다. 며칠 동안 아주 천천히 항해해서 항저우에서 쑤저우로, 그리고 창저우를 지났다. 중간 중간에 호수가 있어 뱃길은 편했다.

양자강을 가로지르고 나서도 계속 배 자체의 힘으로 움직였고, 이민호는 천진까지 이렇게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호수 몇 개를 지난 다음부터 운하의 폭이 점점 좁아지더니, 어느 날 예부 주사를 따라 운하를 운영하는 관리가 배에 찾아왔다.

“여기서부터 몇몇 구간은 운하 수로의 폭이 너무 좁아 사람이 쇠줄을 당겨 배를 끌어야 합니다. 그러니 돛을 내리고 선미 수면 아래의 키를 고정하십시오. 인부들이 배에 쇠줄을 연결할 때 협조해 주십시오.”

“예? 사람이 배를 끈다고요?”

“부역에 동원된 많은 사람들이 운하 양쪽에서 쇠줄로 배를 잡아당길 겁니다. 배가 안전하게 험로를 지날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러나 이민호는 배가 아니라 사람이 걱정이었다. 아무리 부력이 있어서 배 무게 그대로를 끄는 것은 아니라지만 사람 힘으로 잡아당기기에는 대형 외륜선이 너무 무거웠다.

“도련님! 배가 운하를 지날 때마다 주변 지역에서 사람들이 부역에 동원되나 봅니다. 여긴 사람 살 곳이 못 되는군요.”

“정말 그렇다. 힘들겠구나.”

이민호는 계복과 함께 선수루에 올라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끌어당기는 장관을 구경했다. 운하 양안에 각각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배마다 수백 명씩 쇠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관리들이 채찍을 들고 다니면서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의 등짝을 후려쳤다.

마치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노예들이 채찍을 맞아가면서 밑에 통나무를 괸 거대한 돌을 옮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피라미드 건축에는 노예가 아닌 자유민들이 품삯을 받고 일했다고 한다.

배를 잡아끄는 백성들을 보는 것이 이민호에게 몹시 불편했지만 배는 좁은 운하를 지나 북으로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움직였다. 이민호는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현 경계선을 지나며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수고했다고 은을 조금씩 쥐어주었다. 이런 식으로 현 경계선마다 새로운 주민들로 교대하면서 배를 끌었다.

- 피잉! 빠바박!

“아아악!”

“끄으으~”

한 줄로 좁은 운하를 지나던 외륜선 세 척 중 두 번째 배에서 사고가 터졌다. 운하 오른쪽에서 쇠줄을 당기던 사람들이 우수수 쓰러지고 있었다. 팽팽히 당겨진 쇠줄 중간이 터지자 쇠줄 한쪽 끝이 뱃전을 후려친 다음 물에 빠졌다. 그러나 다른 한쪽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날아가면서 쇠줄을 당기던 사람들을 후려쳐버렸다.

머리가 터지거나 등뼈가 드러난 사람 몇은 즉사하고 팔다리를 날린 사람들은 아직 살아남았다. 그러나 시뻘건 피를 철철 흘리면서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아마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려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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