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14. 입조 =========================================================================
“맙소사! 이런 끔찍한 일이!”
“어떡하죠, 도련님?”
“배를 세워라! 사람들을 구해야겠다.”
이민호가 지시하자 사공들이 배에 고정됐던 쇠줄을 밖으로 던져버리고 사공들이 상앗대로 운하 밑바닥을 찍고 버텼다. 잠시 후 배가 멈춰 서고, 앞에서 인도하던 관리가 탄 배가 다가왔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얼른 쇠줄을 교체해서 계속 운항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배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무슨 소리요? 사람들을 먼저 구하시오.”
“운하에서 배를 운행하다 보면 숱하게 일어나는 사고입니다. 사신께서는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저들은 우리를 돕다가 사고를 당했소, 불행한 일을 겪은 저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야겠소.”
이번 사고로 부역에 동원한 명나라 백성들 중에서 사망자 셋에 부상자 열둘이 나왔다. 이민호는 운하 옆에 천막을 쳐서 사망자들을 안치하고 부상자들을 구호했다. 이민호가 자비로 비싼 관을 구입했다.
유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와서 이민호는 유족들을 일일이 만나 위로하고 부의금을 전했다. 부상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도 위로금을 건네주었다. 다리와 팔이 잘렸던 두 사람은 의원의 도움을 받아 출혈을 멈췄으나 밤새 고열로 고통 받다가 끝내 숨을 거뒀다.
대운하 근처에 사는 백성들은 부역이 무거워 평소에도 불만이 많았다. 게다가 요즘은 황제가 파견한 광세사가 돌아다니며 민폐를 끼치고 다녔다. 광산이 있다는 핑계로 농사짓던 주민들을 내쫓거나 부역에 동원해 고생시키는 시기였다. 언제 반란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일정이 늦어 이만 출항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백성들이 끌어당기는 쇠줄에 배를 맡기고 싶지는 않군요.”
운하를 운영하는 관리가 독촉하자 이민호는 일단 수용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백성들이 인력으로 배를 끌어당기다가 사고가 나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조공하는 소국이라지만 나라 이름을 걸고 사행(使行)을 하는 입장에서 고산국이라는 신생국에 대한 명나라 백성들의 여론도 신경 써야 했다.
“사신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운하를 돛단배가 자력으로 운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배가 자칫 운하 벽에 부딪치면 배도 깨지지만 운하도 다칩니다. 운하를 관리하는 제 입장에서 절대 허용할 수 없습니다.”
“돛 말고도 소가 돌리는 바퀴가 있으니 그것으로 가겠습니다. 키를 조종해 정밀하게 운항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아니! 작은 나라에서 오셨으면 큰 나라 관리의 말을 따라야 할 것 아니오? 절대 허용할 수 없소.”
옥신각신하는 중에 예부 주사가 찾아왔다. 그는 이민호가 고집부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충분히 이해해주었다.
“고산국 예국 참판의 말씀처럼 좁은 운하 수로에서도 자력 운항이 가능하다면 해봅시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원래 하던 대로 하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사 대인.”
그때부터 선두 배에 탄 이민호가 선미루 높은 곳에 설치된 타륜을 직접 잡고 배를 조종했다. 그 사이 사공이 망루에 올라 수로 방향이 바뀔 때마다 막대기의 방향을 바꿔 이민호에게 알려주었다.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었으나 사람들이 끌던 때보다 배가 훨씬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도련님! 키를 선수루로 옮기면 안 됩니까? 힘을 효율적으로 전달시키기 위해서 뒤에 있는 것은 알겠는데 이럴 때는 조금 위험하네요.”
“글쎄. 아직은 선미루에 타륜이 있는 게 나아. 선미루를 높이면 무게 중심이 올라가고, 낮추면 앞이 안 보이고. 고민이 많다.”
좁은 수로에서의 운행은 사람들이 끄는 것보다 키를 돌리는 것이 훨씬 나았다. 예부 주사는 물론 운하 관리도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사공들도 자신감을 갖고 이민호에게서 타륜을 넘겨받았다.
사행선단은 대운하를 타고 계속 북진했다. 예부에서 호의를 베풀어준 덕택에 큰 도시에서는 관청의 독립된 건물인 객사에서, 작은 마을에서는 관청에서 묵었다. 사실 예부의 주사가 사신단을 안내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특혜였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주사의 품계가 낮다고 우습게 볼 수 없었다.
대운하 수로가 거치는 큰 도시에 정박할 때마다 상인들이 배에 몰려들어 무역을 요구했다. 중간에 들르는 도시에서 공식적인 책시를 열 수는 없으나 고산국 사신단에 편의를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예부 주사가 무역을 허용했다.
그러나 사신단은 항저우에서 이미 무역품 대부분을 처분했기에 영지버섯과 봉래 해삼 약간 말고는 팔 물건이 없었다. 상인들이 팔아달라고 하소연하고 이민호와 신라방 상인들이 헛기침을 하고 있을 때 명명이 실망한 상인들을 끌어 모았다.
“고산국 특산품 해삼과 전복, 해중국 특산품 판유리와 거울이 있어요! 아주 큰 자지도 있어요!”
“우와! 이건 반드시 사야 해!”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것은 아니고, 명명은 지역 상권 크기에 맞춰 딱 적당한 양만 풀었다. 명명이 데리고 온 하녀들이 상인들과 능숙하게 거래하는 사이 이민호가 뒷골을 잡았다. 고산국 사신단이 항저우에서 사행무역으로 팔았던 물건을 명명이 되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삼과 전복, 유리와 거울 등은 부피가 적은 편이라 명명과 하녀들의 개인 짐으로 알고 넘어갔었다.
“왜요? 항구도시에서 헐값에 다 팔아버린 이 대인께서 바보죠. 해산물과 외국 특산품은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비싸지는 걸 모르세요?”
“항저우에서 우리 물건을 산 상인들이 여기에 왔다가 못 팔거나 손해 보면 어떡해? 길게 봐서 신용이 중요해.”
“항저우 상인들은 장강을 타고 올라가서 상행을 한답니다. 그리고 사행무역에서 판 물량이 적어서 항저우와 남경에서 벌써 다 소화됐을 거여요.”
이민호가 고개를 돌리자 신라방 장 점주가 쩔쩔 매고 있었다. 장 점주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동안 이민호가 상거래에서 주도권을 잡고 갑질을 하는 바람에 이민호가 하는 일에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이민호가 신라방 상인들에게 요구한 것은 사실 이득이 아닌 정보였는데, 상하 관계가 고착되면서 정작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넘어간 것이다. 실책을 알아차린 이민호는 속이 쓰렸다.
“설마 홍삼도 갖고 있는 건 아니겠지?”
“홍삼은 조선 사신단에서 알까봐 다 광동과 복건으로 보냈어요.”
“잘했다. 할 말이 없다.”
이런 식으로 북경에 도착할 때까지 머무는 도시마다 상행을 하니 고산국 사신단보다 명명이 되팔아서 얻은 이익이 더 많았다. 배가 아픈 이민호가 생떼를 써서 명명이 거둔 이익 2할을 운송료 명목으로 뜯어냈다. 어이없게도 이 수수료만으로 황금 10만 냥에 달했다.
명명이 사행무역품의 일부를 사서 되파는 것만으로도 사행무역 판매금 총액을 넘어서버렸다. 그래서 이민호는 재주넘는 곰이 된 느낌이었다. 명명이 되놈이나 왕 서방은 아니었지만, 왕 서방의 딸은 맞았다.
“멍멍아! 이렇게 많이 벌어서 뭐할래?”
“시집갈 때 가져가야죠!”
알고 보니 몸값은 아니더라도 이민호에게 오기 전에 부친에게 장사밑천을 받았다고 한다. 10년 가까이 상단을 위해 일하고 부친이 해적에게 잡혀있는 동안에도 꿋꿋이 상단을 지키고 동생들을 잘 교육시켜준 보상이었다.
“나한테 시집올래?”
“헹! 나 싫다면서요?”
“싫다고는 안 했어!”
명명이 이민호가 보기에 미운 짓만 골라서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과 원주민 반반으로 구성된 취타대에게 명나라 사람들 취향에 맞는 곡을 연습시키고, 아미족 원주민들의 민속춤을 좀 더 야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도시에 들를 때마다 거창하게 공연을 열었다. 물론 무료였다. 공연이 열린 곳마다 거대한 악어와 화려한 극락조 두 마리가 두고두고 아주 오래도록 회자됐다.
극장이나 희대에 몰려온 백성들은 이국적인 공연을 공짜로 보고 나서 황제 폐하의 공덕을 칭송했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세계 최강대국 명나라에 대한 애국심만은 확실히 높아지는 것 같았다.
공연 마지막에 고산국 국왕과 왕비, 직할군들도 출연시켜 명나라 사람들에게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덕택에 사신단은 여러 도시에서 이민호가 원하던 친선사절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할 수 있었다.
“도련님. 뿌듯하고 즐겁긴 한데 제가 마치 광대가 된 기분입니다.”
“나도 그래.”
공연을 마치고 객사로 돌아와 고산국 관복을 벗으며 이민호가 투덜거렸다. 공연 참가는 이민호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명명 아가씨가 도련님께 뭔가 토라질 일이 있었나봅니다.”
“그래? 그런데 웬 아가씨야? 멍멍이지.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여자가 사랑을 원하는데 남자가 채워주지 못할 때 토라진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그저 콱 한 번 눌러줘야 합니다.”
“그, 그럴까?”
그 날 늦은 밤에 이민호는 그저 순수하게 이야기나 할까 하고 명명의 침소에 찾아갔다. 그러나 하녀 둘이 커다란 언월도를 들고 방문 앞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기가 죽어 그냥 돌아왔다. 주인이나 하녀나 무슨 여자들이 그리 힘이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고산국으로 돌아간 다음 미카의 시녀들하고 한 판 붙여볼까 고민했다. 내기를 한다면 이민호는 미카와 네이의 편이었다.
산동성 경계에 접어들어 제남 가기 전, 곡부 남쪽 휘산호 남양진을 지나갈 때였다. 북경까지의 일정에서 절반을 이미 지났다.
- 쿠웅~
외륜선 세 척이 널따란 호수에서 명나라 배를 따라 한 줄로 가는데 갑자기 배에 충격이 오더니 멈춰 섰다. 첫 번째 외륜선에 탄 사람들 절반이 넘어지는 순간 이민호가 선수루로 뛰어올라갔다.
“무슨 일이야?”
“배 밑에 뭐가 걸렸습니다! 물속에 말뚝 여러 개를 박아놓은 것 같습니다.”
흙탕물로 뿌연 물속을 상앗대로 휘젓던 사공이 보고했다. 배밑판에 침수가 없다고 다른 사공이 올라와 보고했다. 외륜선 양쪽 바퀴가 제자리에서 돌며 물보라를 하늘로 뿌리고 있었다. 앞서 갔던 명나라 운하 관리선이 돌아왔고, 사공들이 어쩔 줄 몰랐다.
외륜선이 크다지만 좀 더 작은 크기의 명나라 세곡선이 왕복하는 경로였다. 다른 상선들도 자주 지나는 곳인데 물속에 말뚝이 있다니 어쩐지 수상했다. 역시나 사공이 버드나무 그늘 아래 호숫가를 가리키며 외쳤다.
“수적이다!”
“전투 준비! 직할군 전원 선미루와 선수루 배치!”
계복이 지휘하는 사이 판자로 지붕을 씌운 작은 배가 외륜선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위험을 알아차린 호닌과 굴마훈이 좌우에서 이민호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이민호는 평소와 달리 뒤에 누가 붙어있는 것을 느꼈다. 발육이 덜한 것으로 보아 명명이었다. 명명은 어느새 화승에 불을 붙인 피스톨을 양손에 쥐고 있었다. 도끼가 더 어울릴 텐데 뜻밖이었다.
“쏴!”
- 타탕! 탕! 탕!
직할군 병사들이 총격을 가했으나 수적의 배는 판자 위에 모래주머니를 쌓아두어서 거의 피해를 못 줬다. 양쪽에 달린 노를 빠르게 저어 수적 배가 외륜선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직후 연속된 작은 진동이 배를 통해 느껴졌다.
- 쿵! 쿵! 쿵!
“저것들 뭐하는 거야? 화공이다. 불 꺼!”
수적들이 횃불과 불붙은 짚더미를 외륜선 갑판 위에 던져대고 있었다. 얕은 지붕 옆으로 팔만 잠깐 나왔다가 던지고 다시 숨는 바람에 병사들이 총으로 맞히지 못했다. 그러나 화공은 승선원들의 눈길을 끌고 긴장감을 높였을 뿐 실제적인 위협은 되지 못했다.
그 사이 명나라 관리들이 사신선을 버려두고 도망갔다. 싸움에 보탬이 되지 못할 것 같아 이민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수적들이 배 밑 부분을 도끼로 치고 있습니다. 구멍을 내서 조공품을 훔쳐가려는 것 같습니다!”
============================ 작품 후기 ============================
입조는 2편 남았고 다음 챕터 1591년은 후딱 넘어간 다음 임진왜란에 들어가겠습니다.
오전에 한편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