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1화 (30/1,000)

00081   14. 입조  =========================================================================

계복이 고개를 내밀고 수적들의 움직임을 확인한 다음 보고했다. 황제의 소유물을 도둑질하려다가 역적으로 몰릴지도 모르니 정말 간이 큰 수적들이었다. 이 시대 배들에는 격벽을 설치하지 않아 배 밑 부분 아무 데나 구멍을 뚫으면 어디든 통할 수 있었다.

“장비와 작전 양쪽 모두 준비를 철저히 한 수적들이군.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보는 내가 기분이 좋다.”

호닌과 굴마훈이 옆에 딱 붙어 서 있다가 이민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소총을 쏴도 목표가 안 보이니 딱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마치 성문 위에 있으면서 외부를 단단히 감싼 적의 공성 장비에게 하릴없이 성문을 공격당하는 느낌이었다. 그 사이 계복이 계단으로 움직였다.

“도련님! 밑으로 내려가서 잡겠습니다. 저것들이 싸움은 피하고 조공품 몇 개만 쏙 뽑아가겠다는 속셈이 틀림없습니다.”

“배에 구멍 뚫릴 때까지 기다리려고?”

명나라 관리들에게 보일 것을 각오하고 이민호가 사공에게 손을 까딱거렸다. 사공들 중에서 이민호가 배에 탈 때는 선두무상, 평상시에는 선장이 수류탄 두 개를 가져왔다. 선두무상이 소리를 지르자 직할군들이 일제히 여장 아래로 몸을 숨겼다.

“수류탄~”

- 쾅!

선두무상이 고개를 내밀어 목표를 확인하고 다시 두 번째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수적의 배 지붕은 첫 수류탄 폭발에 구멍이 뚫린 채 무너져 있었다.

전에 수류탄을 철질려라고 부르는 선두무상에게 들어보니 이른바 철질려, 즉 질려포통이 명종 대에 왜구가 이런 식으로 공격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된 무기라고 했다. 이민호는 명나라에서 이번에 쓴 수류탄에 대해 문의하면 조선에서 만든 질려포통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명나라에서 화약을 만드는 곳은 환관들이 관할하는 병장국이다. 그리고 화약무기를 운용하는 군대의 지휘도 환관이 맡았다.

“또 수류탄~”

- 쾅!

“크아아아악!”

“지붕이 무너졌다. 쏴!”

계복이 여장 너머로 소총 총구를 내밀며 외쳤다. 이때 직할군들 모두 휴일 방파제에 빼곡히 달라붙은 낚시꾼들처럼 소총을 배 밖으로 내밀고 총을 쏘았다. 그리고 두 번째 외륜선이 접근하면서 선수루의 직할군들이 사격에 참가했다.

- 타타타탕!

배에 탄 수적들은 도끼 외에는 칼과 창만을 들고 있어서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삽시간에 몰살했다. 물에 뛰어들던 수적은 허공중에서 총탄에 맞아 물에 빠졌다가 등부터 떠올랐다.

전투가 끝난 이후에 이민호가 여장 밖으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었다. 작은 배에 이십 명 넘게 바글바글 타고 있던 수적들은 한꺼번에 죽어 나자빠져 시체가 켜켜이 쌓였다. 배 맨 앞에는 덩치가 큰 수적이 커다란 도끼와 함께 쓰러져 있었다.

“전투 끝. 주변 경계.”

계복이 지시하자 병사들이 다시 사주경계에 나섰다. 저 멀리 호수 주변 갈대밭에 숨어있던 수적들이 배를 버리고 땅에 올라가 흩어지고 있었다. 숫자가 꽤나 많아 최소 300명은 넘어 보였다. 이민호가 지시해서 소총을 쏘게 해 멀리 쫓아버렸다.

수적들은 처음 한 척으로 공격해서 반응을 살피다가 대규모 공격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신선의 화력이 너무 강해서 포기하고 도망친 것 같았다. 항저우에서 올라오는 사신선의 소문을 듣고 약탈하려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민호 뒤에 찰싹 달라붙어있던 왕명명이 폴짝폴짝 뛰며 수적의 배를 구경했다. 그 다음에 명명의 눈은 직할군들이 쥐고 있는 소총으로 향했다.

“어머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버지가 본 게 맞았어. 생긴 것만 비슷하지 총이 전혀 다르네요? 화승과 불접시가 없어요. 총구에 화약을 안 넣고 뒤에 이상한 걸 넣어서 다시 쏜다 했더니 총알과 화약이 결합된 거군요?”

“응. 당분간 모른 척해라.”

조선 함경도 장수들은 물론 명나라 수군 중에서도 그 차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명명은 화승총과 후장식 소총의 차이를 단번에 알아봤다. 명명의 아버지가 상행을 위해 남만인들이 많은 마카오나 말래카를 자주 왕복했다 해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플린트락이나 후장총, 탄피 총탄이 개념만 나왔지 아직 일반화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더라도 쉽게 베끼지는 못하겠어요. 화약을 폭발시키려면 불이 필요할 텐데 쏘는 순간에 만들어내나 보군요.”

“용수철 만들기가 좀 어려워서 그렇지 실물만 있다면 비슷하게 복제할 수 있을 거야.”

“제가 대장간에서 일 해봐서 아는데 말처럼 쉽지 않겠어요. 어머! 방금 한 말은 잊어버리세요.”

이민호는 첫 인상에서 느낀 그대로 왕명명을 고산국의 대장간에 배치해버릴까 아주 잠시 고민했다. 부두에서 짐을 하역하는 노무자를 시켜도 잘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명명 앞에서 그런 생각을 입으로 꺼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사공들과 이야기하면서 물속 깊이 박힌 말뚝을 빼기보다는 배를 후진했다가 말뚝이 박힌 지역을 피해서 운항하기로 결정했다. 그 전에 도끼에 맞은 곳을 살피려고 사공들을 태운 단정을 내렸다. 그 사이 물살에 밀려 수적선이 서서히 멀어져갔다.

“하나 둘, 22명. 휘산채 수적이라면 포상금이 꽤 많을 걸요? 어머! 저 덩치는 소두목일 텐데. 와! 도끼가 아주 크고 멋져! 저거 나 줘요! 네?”

“잊어버려라. 새 걸로 만들어주마.”

“유명한 악당이 쓰던 무기는 희소성이 있어서 더 비싸요.”

옛날 사람들이 다 그렇듯 하도 시체를 많이 봐서 그런지 명명이 별다른 혐오감을 표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민호의 마음에 걸렸다. 사실 이민호가 유별난 것이지 어느 나라든 이 시대에는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부친의 죽음을 직접 봤음에도 불구하고 혜진은 시전부락 정벌에 참가해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고 몹시 불편해했다. 혜영은 그 나이에도 생선 배를 가를 때 눈을 질끈 감아 칼에 손을 베기 일쑤였다. 이민호는 혜영, 혜진 자매와 훨씬 진한 공감대가 형성된 셈이다.

“국왕 전하와 사신께서는 무사하십니까? 미리 막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사신선에서 조금 떨어진 것을 제발 위에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그 동안 조금은 기고만장하던 명나라 운하 관리들이 이민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역시 직접 실력을 보여줘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수적들에게 공격받는 사신을 버리고 도망간 것은 참수를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큰 죄였다.

이번 일은 1560년 조선 사신단이 머물던 여양역이 여진족 1만 명에게 포위됐던 사건과 규모만 작고 비슷했다. 그때 명나라 역승이 항복하려 하자 조선 역관 곽지원이 역승을 꾸짖으면서 명나라 관병의 귀를 화살촉으로 뚫고 주리를 틀어버렸다.

여진족 일만 명보다는 조선 역관에게 더 겁을 먹은 역승이 성에 군사들을 올려 보내 경계하는 사이 사행을 따라온 조선 군관들이 편전을 쏘아 여진족을 물리쳤다. 이민호가 예전에 방답의 귀양지에서 부친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사신단을 수행하는 군관의 정원은 7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휘산채 수적들이 한동안 뜸하더니 오랜만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제대로 호위를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소, 대명의 영토가 워낙 넓으니까 가끔은 이런 일도 있지 않겠소? 누가 오늘 일을 묻거든 다 함께 싸운 것으로 하겠소.”

“관대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주변 관아에 연락해 수적들을 호송하겠습니다.”

명나라 관병들이 수적들의 목을 베는 사이 이민호는 사공들과 함께 배를 점검했다. 잠시 도끼질을 당했지만 배 현측에 워낙 두꺼운 판자를 쓴 탓에 당장 수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팽호도 해적들과 싸웠을 때 대포에 맞아 뻥뻥 뚫리면서 얻은 교훈이 대형 외륜선 건조에 적용됐다.

그러나 충격을 받은 부분이니 장기적으로 관찰이 필요했다. 이민호는 사공들에게 중간 개삭 때 도끼에 찍힌 판자를 반드시 교체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시대에 배의 방수를 위해 기름에 반죽한 석회를 쓰고 나무를 갉아먹는 바다벌레를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배 밑 부분을 연기로 그을렸다. 그러나 이민호는 타르를 써서 방수제 겸 방부제 문제를 해결했다. 무연탄인 화순 석탄으로부터 콜타르를 만들지 못해서 조만간 대만에서 유연탄 광산을 개발해 콜타르를 생산할 예정이었다.

외륜선 세 척은 호수와 운하 수로를 타고 북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아열대지역에서 벗어나고부터 북쪽으로 갈수록 날씨가 추워졌다. 아미족은 고산족이라 추위에 강했고 여송국 출신인 국왕은 감기에 걸려 콜록거렸다. 왕비는 더운 지역 출신이었지만 피하지방을 두툼하게 저장하고 있어 추위를 타지 않았다.

이민호는 갑판에 올라와 있는 시간이 극도로 줄어들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선장실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지냈다. 호닌과 굴마훈이 교대로 이민호를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따듯하게 품어주었다.

“이 정도가 딱 선선한데 주인님은 왜 그리 추위에 약하세요? 어머! 귀여우셔라!”

숫처녀 가슴을 쪽쪽 빨아대는 이민호를 굴마훈이 아기에게 젖 먹이듯 꼭 껴안아주었다.

“추위를 이기려면 고기를 주로 드시고 특히 비계를 많이 드세요.”

“살찌잖아.”

“영웅이 되시려면 타인을 압도할 풍채가 있으셔야죠.”

“이 나이에 그건 좀......”

굴마훈이 귀엽다고 이민호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민호가 다른 때는 하나도 안 귀엽지만 추위를 탈 때만 여자들이 귀여워했다.

12월 초순, 고산국 사신단은 예정보다 훨씬 일찍 북경 동쪽 퉁저우에 도착했다. 퉁저우(通州)는 이름 그대로 장강과 황하를 잇고 강남의 산물을 북경으로 운반하는 대운하의 종점이면서 동시에 지상 운송 수단이 북경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이민호가 그 동안 수고한 운하 관리들에게 홍삼 한 뿌리씩을 선물하자 다들 감격해서 눈물을 뿌렸다. 앞으로 매년 대운하를 이용해야 하니 이 정도 선물은 큰 지출이 아니었다.

외륜선 세 척을 조백하를 통해 텐진으로 내려 보냈다. 한 달 넘게 대운하를 통해 배를 타고 와서 끔찍하게 지겨운 것도 있고, 겨울 추위에 운하 수로가 얼거나 황하의 물이 마를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황하는 겨울에 수량이 풍부하지도 않고, 상류에 얼음이 얼면 물길이 막혀 하류에는 해빙기까지 갈수기가 지속됐다.

사실 운하는 안전하긴 해도 지극히 비효율적인 수로였다. 항저우에서 텐진까지 바닷길로 갈 경우 산동반도를 우회하더라도 대략 1500km, 하루 200km만 가더라도 8일 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운하로 가면 두세 달은 족히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게다가 수로 준설과 수벽 보수 등 관리를 꾸준히 해주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수로가 막힌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고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탓에 급히 대량의 운송이 필요할 경우 운하는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만약 북경 인근에서 기근이 발생하면 곡창지대인 양자강 하류 지역에서 쌀을 모아 보내도 제 때에 맞출 수가 없었다.

명나라 초기에는 바다를 통해서도 조운이 가능했다. 강을 통해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토사가 얕은 바다에 쌓여 매일 같이 해저 지형이 바뀌더라도 먼 바다를 통해 우회하면 해운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규모 해양세력이 독립을 도모할 경우 견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해운을 주도하던 소수 가문은 조정에 의해 처단되었다가 나중에 복권되기를 반복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