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5 15.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사람들 =========================================================================
“그래. 잘했다. 의원들은 어땠어?”
“어휴! 말도 마십시오. 여진족은 선봉장을 시켜야지 웬 의원입니까? 일반 병사들보다 앞장서서 싸우면서 부상자를 후송하고 치료까지 하고. 제가 장수 입장이라 그런 용감한 병사를 차마 욕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의원이라 문제죠. 하여튼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고 상이나 두둑이 내려주십시오.”
“기껏 의술을 가르쳤더니 이놈들이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다니!”
“한 놈은 군의관으로 남고 싶어 하고 다른 놈은 아예 전투부대 배속을 바라던데요? 저는 일단 거절했는데 아마 도련님 찾아와서 떼를 쓸 것 같습니다.”
“미친놈들! 도시에서 사람들 병 고치면서 후학들을 키우라니까 말을 안 들어. 얼른 병원이나 차려줘야겠다.”
원정군에 마카오에서 선교사들에게 의학을 배우고 돌아온 여진족 서양의원 두 명과 복건성 출신 한족 의원 한 명이 군의관으로 따라갔다가 무사히 귀환했다. 전투 중에 다수 발생한 부상자를 군의관들이 잘 처리하자 군의관이 전투 현장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든 장병들이 인정하게 되었다. 사실 군의관과 의무병을 아직 분리하지 못해 전투현장에 군의관이 돌아다니게 만든 것은 잘못이었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시전부락 생존자들이 불쌍해서 뭔가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비싼 돈 들여 의술을 가르쳤더니 이 모양이었다. 이민호는 앞으로 여진족들에게 활동적인 일만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새 장비는 어때? 직접 써보니까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
“예. 장비 결속하는 것에 특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덤불 사이에서 박박 기면서 총질하고 싸운 경우가 많아 탄창이나 야전삽 같은 것들이 많이 거치적거렸습니다. 위치를 바꾸거나 결속 방법을 달리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통은 네 가지 중에 뭐가 제일 나았어?”
“사실 물통이 제일 문제였는데 호리병은 아주 쉽게 깨지고 자기로 만든 것은 잘 깨지진 않았는데 너무 무겁습니다. 쇠로 만든 것은 물에서 냄새가 나고 놋쇠 물통은 얇게 만들다 보니 잘 깨지거나 찌그러집니다.”
“군기시 대장장이들하고 협의해서 놋쇠 물통을 개선해 봐. 너무 크면 병사들 고생하니까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야 할 거야.”
“저도 당연히 알죠. 뭐든지 과하면 개고생합니다.”
어떻게 보면 직접 싸워야 하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사소한 장비들이 전투력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장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오랜 사용 시간과 실전 투입 경험, 그리고 상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자본 투입이 필요했다.
“이런 건 갖가지 상황을 겪어가면서 계속 꾸준히 고쳐야 해. 귀찮더라도 신경 좀 써.”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른 장비도 소소하게 개선할 부분이 많습니다. 군기시 장인들하고 이야기해서 새 장비 견본을 만들어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어쨌든 잘했다. 고생했으니 얼른 돌아가서 마누라들 엉덩이나 두들겨줘라.”
“그 동안 그 부족 때문에 찝찝했는데 잘 됐습니다. 그 부족 영역을 피해서 많이 우회해야 하거나 경비 소요가 만만치 않았거든요. 이제 내부 문제로 싸울 일은 없겠죠.”
“글쎄. 그건 모를 일이지.”
드디어 대만 섬 전체가 이민호의 수중에 완전히 들어왔다. 그 사이 원주민과의 전투는 불과 두 번, 혹은 계복 혼자서 케타갈란족 용사들을 때려눕힌 것까지 쳐서 겨우 세 번에 불과했다.
원주민들을 직접적으로 6천 명쯤 죽였으나 이민호는 원주민들을 굶주림에서 구해주었다. 덕택에 아이들이 더 많이 태어나서 더 많이 살아남았다. 이민호는 그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이민호는 자기가 원주민들에게 침략자, 잘해야 정복자라는 인식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대만의 원래 주인인 원주민들에게 냉정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민호가 계복이 원정 갔던 이야기나 더 들어보려고 밤에 원수부에 찾아갔다. 무려 사흘 동안 큰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졌는데도 직접 참가하지 못한 묘한 아쉬움 탓이었다.
대문을 지나 중문에 들려 하는 이민호를 경비병이 황송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로막았다. 원수보다 국왕의 군령이 높다고 호통을 치려다가 생각나는 게 있어 입을 다물고 담장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더워서 창문을 죄다 열어놓고 계복이 밤일을 하고 있었다. 근육질의 계복 혼자서 여자 넷을 번갈아서 아주 죽여주고 있었다. 둘을 눕히고 둘은 그 위에 엎어놓고 왔다 갔다 하는 계복을 보며 이민호가 많이 배우고 돌아갔다.
그날 밤 이민호는 공주와 미카의 방에 연거푸 들러서 고생 좀 시켰다.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을 떠나 이민호가 이런 미인을 가까이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생각보다 깊이 공주에게 빠져들었다.
공주는 미인이라는 자각이 없어 더욱 순종적이었고, 침대에서 부끄러워하면서도 결국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그런 공주를 이민호가 더욱 예뻐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주만의 조금 특별한 점도 있었다. 전족을 하거나 하이힐을 신은 여성이 걸을 때 중심을 잡기 어려워 그곳 근육이 단련된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공주는 전족을 하지는 않았지만 황실 고유의 기술로 아주 작디작은 발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주가 아무리 예뻐도 이민호는 하루에 한 번이라는 규칙은 반드시 지켰다. 그래서 미카에게 갔는데, 공주가 온 이후 미카가 아주 적극적으로 변해 이민호만 더 즐거워졌다.
미카는 아직도 아이가 안 생겨 더욱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미카는 고산국의 후계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어서 사내아이를 낳아 병법을 가르쳐 가문을 되찾을 생각뿐이었다.
이민호는 미카 가문의 영지를 지도에서 찾아본 적이 있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큐슈 중부의 작은 영지라서 이민호가 보기에 되찾더라도 지키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니 이민호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킬 생각이었다. 미카의 꿈이 더 빨리 이루어지도록 이민호는 더욱 열심히 밤일을 했다.
임진왜란을 일 년 앞두고 이민호는 경상도 남해안의 가마를 돌며 도공들에게 고산국으로 옮기라고 설득하러 다녔다. 임진왜란 초기에 피난 갈 시간을 얻지 못한 경상도 도공들이 일본에 많이 납치됐던 것을 기억하고 그들을 미리 빼돌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찾아간 가마에는 도공들이 없었다. 남은 가족들에게 물어보니 산성과 읍성을 개축하는 부역에 동원됐다는 것이다. 도공들의 신분이 천민이 아닌 양인인 것이 이럴 때는 안 좋게 작용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뭘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돌을 지고 나른다고요?”
“예, 나리. 대장장이라면 몰라도 그런 곳에서 도공이 할 일이 따로 있겠습니까?”
이민호는 어이가 없었다. 도공들이 만드는 백자와 옥 도자기 몇 개의 가격이라면 산성이나 읍성을 새로 쌓고도 남았다. 그런데 그런 비싼 몸값의 도공들이 부역에 끌려 나가서는 단순히 돌을 나르는 잡부에 불과했다.
“수령이나 아전들도 좀 그렇네요. 그 동안 많이 받아먹었으니 웬만하면 부역을 빼주지 말입니다.”
“감사또 영감의 추상같은 명령에 수령들이 벌벌 떨어서 예외가 없습니다요.”
“혹시 지금 경상감사가 누구요? 홍 대감이라면 그럴 분이 아니신데.”
“익성군 홍 대감이 건저문제 이후 정철의 일당이라 하여 부령으로 유배를 간 다음 부제학 김 영감이 다시 감사로 내려왔습니다.”
“아! 홍 대감이 그렇게 되셨어요? 쯧쯧!”
작년에 중추부에 들렀을 때 머리가 허연 도사 같은 노인이 앉아있기에 인사했었는데 알고 보니 판중추부사 홍성민이었다. 김수 다음 후임자로 경상감사로 왔다가 다시 김수에게 자리를 되돌려 준 셈이었다.
경상감사 김수는 경상도 백성들 전체를 성곽을 고치는 부역에 내몰았다. 한창 바쁜 농사철에 백성들을 교대로 부역에 동원하자 경상도의 인심이 아주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부역은 이후 내내 겨울까지 계속돼 다들 너무 힘들고 추워서 엉엉 울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부역에 동원된 사이 과로나 사고로 죽은 사람들도 많아 그 원망은 고스란히 김수에게 쏠렸다. 그러나 전쟁을 앞둔 급박한 시기에 성을 고치지 않을 수 없으니 김수에게도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도 너무 혹독하게 백성들을 다룬다는 평가가 많으니 김수가 일을 그리 잘한 것도 아니었다.
그 사이 경상도의 장인들이 총동원돼 무기를 수리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만들어냈다. 물력이 부족할 때 상인들이 나서서 도와야 특혜를 얻기 쉽기 때문에 해동상단도 철과 구리를 경상감영에 바쳤다. 임진왜란 초기에 병사들이 무기를 다 버리고 도망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민호는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해 속이 쓰렸다.
이민호는 경상감영을 찾아갔다. 경상도는 땅이 넓어서 여러 번 좌우도로 나뉘었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감영의 위치도 경주, 상주, 성주, 안동, 진주 등으로 수시로 옮겨 다녔다. 임진왜란 후반기에는 대구에 감영이 설치됐다가 정유재란 때 무너지고 다시 안동으로 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대구로 고정된다.
이민호는 먼저 명함 단자를 감영 동헌에 보낸 다음 객사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감사 김수가 버선발로 뛰어 나오다시피 했다.
“이 첨지 아닌가? 도대체 이곳에 무슨 일인가?”
“하하! 순사 영감께 청탁이라도 하려고 왔습니다.”
관찰사, 즉 감사가 가진 몇 가지 겸직 중에서 순찰사의 권한이 가장 커서 흔히 순사(巡使)라 불렀다. 일본 경찰 순사(巡査)와는 한자가 달랐다. 감영도 순영이라 불러 경상도 감영에서 취합하거나 내보낸 기록들을 모아 엮은 책에 <경상순영록>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예끼! 이 사람, 농담 말게. 전쟁이 일어날 판인데 무슨 청탁인가? 자네가 항상 국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나도 잘 아니 무슨 일인지 일단 들어나 보세.”
부제학을 지낸 김수는 품계에 비해 명망이 높은 선비였고, 이민호는 지금까지 해온 일로 인해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이름이 높았다. 내수사를 실제로 움직이는 실세로 소문이 난 요즘은 이민호의 배경도 만만치 않게 되었다. 이민호가 김수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민요의 도공들을 고산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흐음. 관요가 아니라면 내가 딱히 막을 수는 없겠지.”
“감사합니다, 영감.”
“사실 요즘 경상도에 도공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일세. 인구가 늘어나면서 점점 농지가 부족해지니 백성들이 다른 일이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하겠지. 지금 부역에 동원돼 일하고 있다 하더라도 원하는 만큼 데려가게. 내가 고을 수령들에게 보일 문서를 써줌세.”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부역에서 빠지는 도공들 숫자만큼 품삯을 주고 다른 백성들을 고용해 일꾼 숫자를 채워 넣겠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쉽지.”
경상감사 김수가 일필휘지로 고을 수령들에게 내보일 명령서를 작성했다. 깡마른 노인인 김수가 전혀 생긴 것 답지 않게 웅혼한 기상을 필체에 실어 글을 써 내려갔다. 옆에서 구경하는 이민호는 무척 신기하게 느꼈다.
“정말 명필이십니다. 이 서류를 가보로 남기고 싶어집니다.”
“허허! 주상전하의 글씨만은 못하지만 나도 글씨 좀 쓴다네.”
선조 임금의 필체는 한석봉의 글씨체를 닮았다. 임금의 얼굴을 못 본 사람들도 글씨체만 보고서도 호감을 느낄 정도였다.
“요즘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너무 힘들어 합니다, 순사 영감.”
“그런 이야기 나도 자주 듣고 있네만, 왜놈들이 침략한다는데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순사 영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나기 전부터 벌써 이렇게 민력이 진탕되면 나중에 실제 전쟁이 났을 때 어떻게 백성들을 전쟁에 동원하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다른 방도가 없지 않은가? 나도 그게 고민일세.”
그러나 경상도 관찰사로서 경상도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적의 침략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백성이 힘들어할까 두려워 전쟁 준비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적행위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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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중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2:23시에 한 페이지 추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