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2 16. 임진왜란 개전 =========================================================================
이민호는 민희와 민영의 호위를 받으며 은광 갱도 주변을 두른 목책 안으로 들어섰다. 총탄에 맞아 죽은 일본 경비병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갱도 입구는 예상보다 훨씬 작고 낮았다. 체구가 작은 남자도 허리를 구부리고 간신히 들어갈 만한 높이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단단한 암석재질인 탓이었다. 수레나 들것은 꿈도 못 꾸고 광부가 은광석을 일일이 등짐에 지고 옮기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런 곳에 끌려와서 일하게 된다면 오래 살기 힘들 것 같았다.
- 타탕! 탕!
바로 옆에서 울린 총소리에 이민호가 깜짝 놀랐다. 갱도 입구 옆, 어둠 속에 숨어서 이민호를 노리며 접근하던 일본 경비병 세 명이 언덕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민호는 뒤늦게 총구를 들이대고 있다가 두리번거렸다. 이민호에게 몸을 바싹 붙인 고민희와 고민영이 권총을 뽑아 들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일본 경비병 하나가 이민호에게 조총을 겨누는 사이 화승줄에서 뿜어 나온 작은 불꽃과 가느다란 연기가 고민희와 고민영의 시각에 포착돼 쏘기도 전에 반격을 당한 것이었다. 민희와 민영은 두만강 너머 매일 같이 지평선을 보고 살던 여진족 출신이라 몽골족만큼은 못해도 시력이나 감각이 무지막지하게 좋았다.
“깜짝이야. 고마워.”
“주인님! 뒤로 조금만 물러서 주세요.
“넵! 경호대장님.”
남자 체면 같은 것은 따지지 않는 이민호가 얼른 여자들 뒤에 숨었다. 적지에서 덤벙거리다가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더 이상 적은 없었다. 이민호는 주변을 살핀 다음 쓰러진 왜군들에게 다가갔다. 한 명은 조총수, 한 명은 창수, 한 명은 검수인 좋은 조합이었다.
하지만 조총에 화승을 쓰는 한 어둠 속에서 기습이 가능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민희와 민영에게 권총 사격 연습을 많이 시킨 보람이 있어서 조총수는 얼굴과 가슴에 한 방씩 맞았다.
“광부들은 모두 나와라! 은광을 폭파시키겠다!”
계복이 은광의 갱도 안쪽을 향해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잠시 후 안쪽에서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소리가 울려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갱도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연락하는 소리 같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좁은 갱도 안에서 사람들 100여 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무기도 없는 민간인들이라 직할군 해병들이 바로 통과시켜줬다. 그러나 계복이 키는 작지만 근육이 탄탄해 보이는 남자를 낚아챘다. 마침 횃불을 들고 있는 광부였다.
“이봐, 잠깐! 당신!”
“예! 예! 무사 나리.”
“다 나왔겠지?”
“그렇습니다요, 나리.”
“이 폭탄을 줄 테니 갱도 입구에서 안으로 100보쯤 들어가서 바위틈에 꽂은 다음 이 도화선 끝에 불을 붙여라. 도화선이 충분히 기니까 너는 그 사이에 빠져 나와라. 뭘 해야 하는지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이 폭탄은 전에 해적들과의 해전에서 썼던 작은 포탄을 네 개 묶어서 기폭장치를 단 것이었다. 계복에게 재수 없이 걸린 남자가 폭탄 더미와 횃불을 들고 다시 갱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민호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폭탄과 횃불,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폭탄이 터질 것 같았다.
“수맥이 있는 곳을 터뜨리면 확실할 텐데.”
그러나 직접 들어가 보지도 않았으면서 수맥이 터져 은광이 물에 잠기길 바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 갱도를 폭파시키면 은광이 다시 정상적인 조업에 들어갈 때까지 최소 몇 달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주변 영지 주민들을 총 동원해서 인력을 아낌없이 투입할 경우 기간이 더 단축되겠지만, 당분간 도요토미는 전쟁 자금이 씨가 말라 초조해질 것이다.
“으아아아아~”
폭탄을 설치하러 갱도에 들어갔던 광부가 횃불 하나만 든 채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 광부는 어리둥절하며 서 있는 해병들을 지나쳐 마을로 달려갔다. 일을 제대로 끝냈으니 계복도 그를 내버려뒀다.
이슬람 광신도라면 폭탄을 안고 적에게 뛰어들었겠지만 저 광부는 정복자에게 순응하는 일본인이었다. 그리고 원해서 광부를 한 것도 아니고 주변 마을에서 끌려와 요역을 하던 자였다. 위험하고 힘겨운 광부 일을 좋아해서 광산을 지키기 위해 저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갱도 입구에서 다들 물러서! 곧 터진다!”
직할군 해병들이 충분히 물러선 다음 갱도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갱도가 구불구불해서 파편이 밖으로 터져 나오지는 않았으나 첫 폭음이 울리고 나서 진동이 여러 번 울렸다.
광산 갱도가 확실히 내려앉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먼지 무더기가 갱도 입구 밖으로 나오다가 가라앉는 순간 이민호가 지시했다.
“1려가 경계하는 사이 2려는 정련소를 무너뜨린다!”
1려는 계복이, 2려는 여진족 감동이 여수를 맡고 있었다. 둘의 지휘 아래 절반이 사방으로 퍼져 경계하는 사이 나머지 절반은 허름한 오두막의 기둥을 뽑았다.
그러나 채광 시설인 정련소 초토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병사들이 하는 것이라곤 회취법으로 은을 뽑는 장비인 쇠 냄비를 바위에 내리쳐 부수고 아궁이를 무너뜨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만약 정련소를 재건하려고 마음먹으면 금방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한심해져서 이민호가 중간에 그만 두게 했다.
“돌아간다. 척후 앞으로! 나머지는 궤짝 하나씩 지고 출발해!”
직할군 해병들이 은이 다섯 관씩 든 궤짝을 짊어지고 산 아래로 이동했다. 중간에 산 너머 반대쪽인 동쪽 도로에서 30~40명, 니마 포구 쪽에서 총소리를 듣고 급히 몰려온 왜군 100여 명을 물리쳤다. 밤이라 대군이 몰려온 줄 착각한 왜군들이 물러났다.
이민호와 직할군들은 앞과 뒤, 주변 숲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10리를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 상륙지였던 마지 백사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한 판 벌였군.”
백사장에 왜인들 시체가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주로 조총수와 궁수들이었는데 전선 세 척이 해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 제대로 공격도 못 해보고 일방적으로 당한 흔적이었다.
그리고 제3 전선 주변에 작은 왜선 한 척이 물살에 떠밀려가고 있었다. 3려 여수이며 제3전선 선장을 맡은 감불이 몰고 온 단정이 모래톱에 닿았다.
“주인님! 어서 타십시오.”
“어. 감불아 근데 저건 뭐냐?”
수원에서 몇 년 지내 이민호와 가족이 된 여진족 청년들은 직할군 해병에 입대한 다음 두각을 드러내 급속 승진했다. 감불과 감동이는 벌써 100여 명을 거느리는 여수가 되어 있었다. 까불이와 깜둥이가 뭐냐면서 이민호에게 이름을 고쳐 달라고 성화를 부렸으나 이민호는 둘이 장가 간 다음 이름을 하사하겠다고 버텼다.
이민호와 민희, 민영이 타자 해병들이 노를 젓는 단정이 제1 전선으로 움직였다. 백사장에 도착한 다른 단정들도 해병들을 싣고 움직였다.
“왜인들 30명쯤 탄 배가 조총을 쏘며 접근하기에 다 쏴버렸습니다. 밤에 잘 안 보이는데 알게 뭐여요.”
“어. 잘했다.”
이민호가 일어서서 왜선 안쪽을 살폈다. 보름이 이틀 지나 조금 찌그러진 달이 휘영청 떠서 바다를 밝히고 있었다.
이민호는 직할군들에게 강의할 때 왜선에서 노를 젓는 자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라고 강조하면서도 가끔 해적 같은 예외가 있다고 밝혔다. 그래서 분간하기 어려울 때는 그냥 다 쏴버리라고 지시한 사람은 이민호였다. 왜선 안쪽을 들여다보니 피 흘리고 쓰러진 자들 중에서 전투원은 채 몇 명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전투 중에 3전선이 암초에 부딪쳐 배밑판 일부가 깨졌습니다. 훈련받은 대로 판자를 대서 구멍을 막고 물을 퍼내고 있습니다. 비싼 배를 깨뜨린 저를 죽여주십시오, 주인님!”
“뭐? 뭐 그래도 괜찮아. 수심 측정도 안 하고 무작정 들이 미는 작전이니까 할 수 없지. 다음부터는 해안에 너무 가까이 붙지 마. 배 운항은 되도록 사공들에게 맡기는 게 좋아.”
“명심하겠습니다.”
사공이라면 그런 실수를 할 가능성이 적겠지만 감불은 바닷가도 아닌 여진족 출신에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전투 중에 약간 무리하다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 이민호는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생길까봐 조금 걱정됐다.
그러나 선장이 아예 해군이라면 항해술을 가르치겠지만 전투나 지상 임무가 많은 해병에게 항해술을 가르치는 것도 문제일 것 같았다. 해군과 해병을 분리시키지 않는 한 이런 일은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해병들이 단정을 타고 전선으로 모두 귀환했다. 무거운 은 궤짝 때문에 단정들이 상륙할 때보다 한 번 더 왕복해야 했다.
그 사이에 이민호는 3전선의 상태를 살피러 갔다. 감불과 사공들이 대응을 잘해서 더 이상의 침수는 없고 지금은 이미 들어온 물을 밖으로 퍼 나르고 있었다. 격벽을 차단한 덕에 기관실로 물이 흘러 들어가지도 않았다. 물에 젖은 선재가 썩어 들어갈 테니 장기간 작전은 어렵겠지만 자력으로 귀환하는 정도는 충분했다.
“이놈들아!”
3전선을 살핀 이민호가 단정을 타고 제1 전선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말 탄 무사들이 백사장에 나타났다. 사무라이들 사이에 조총수가 없어 이민호는 잠시 사격을 하지 말라고 지시해두었다.
그 사이에 흉갑을 판금으로 만든 검은 색의 난반도 쿠소쿠를 입은 사무라이가 소리를 질렀다. 비싼 갑옷을 입은 것을 보니 은광 주변을 다스리는 작은 영주인 것 같았다.
“이 나쁜 도둑놈들아! 은만 훔쳐 가면 됐지 어째서 은광을 무너뜨리고 정련소를 파괴했느냐! 백성들이 피와 땀으로 건설한 갱도였다. 갱도를 복구하려면 또 다시 백성들이 피와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이 없는 너희들은 아느냐?”
“그렇게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은을 캐서 백성들한테 나눠준 적 있어?”
“그건 아니다. 은은 관백 합하와 모리 님에게 바쳐야 한다.”
“공짜로 백성들 끌어 모아 일시키지 말고 품삯이나 줘. 아니면 정식 광부를 고용하든지. 이 백성을 마음으로만 생각해주는 영주야!”
쪽박을 깨서 미안하다는 생각은 하나도 안 들었다. 겐타로에게 들어보니 주변의 일본인 백성들도 은광 때문에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은광을 복구하기 위해 백성들이 대거 동원되겠지만 만약 이민호가 서너 번 더 공격해서 은광을 완전히 무너뜨린다면 주민들이 더 좋아할지도 몰랐다. 현재의 주인인 모리 집안 자체도 주인 가문인 오우치가를 배신하고 은광을 강탈했다.
백사장에서 말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사무라이들을 무시한 이민호는 은 궤짝을 창고에 모두 집어넣은 다음 인원을 확인했다.
인원점검 결과 전원 무사했다. 한밤중에 적지를 치는 것은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오늘은 초반에 기습이 성공해서 큰 문제는 없었다. 이민호는 즉각 서쪽으로 배를 움직였다.
백사장에 남은 사무라이들이 뭐라고 악악거렸다. 추격해 올 배도, 병력도 없으니 욕이나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민호는 그들을 싹 무시하고 떠났다.
“저 사무라이 갑옷이 괜찮은 것 같은데 제가 가져올까요?”
계복이 남의 갑옷을 마치 제 것처럼 말했다. 죽여서 갑옷을 빼앗아 오는 것이 어렵지는 않겠지만 이민호는 갑옷 하나 때문에 수하들을 내보내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내버려 둬. 책임 질 놈을 살려두면 고민 꽤나 할 거야.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살아남고 싶어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몰라.”
이제 전리품을 분배할 때였다. 해적이 아니니 정식으로는 포상금을 하사하는 것이었다.
직할군 해병들 전원에게 은 30냥씩, 사공들에게는 20냥씩 나눠주었다. 팽호도에서 해적을 토벌할 때 치열한 전투 끝에 은 열 냥씩 받은 기억이 있던 해병과 사공들은 다들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직할군은 돈을 벌더라도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염려가 거의 없으므로 이민호가 팍팍 퍼줄 수 있었다.
나머지 은은 군대 운영비로 넣어두기로 했다. 어서 국고와 왕실 재산을 분리해야 하는데 아직 요원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주머닛돈이 쌈짓돈이었다. 물론 이민호에게 돈은 많았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금이 국력으로 전환되기까지 시간이 걸려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