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3 16. 임진왜란 개전 =========================================================================
작전이 끝나고 야식까지 먹으니까 이미 자정이 넘었다. 밤이 늦어서 이민호는 세수하고 발 닦고 침대에 들었다. 외륜선과 달리 공간이 넓은 전선에서는 식수를 충분히 실을 수 있어서 자그마치 민물로 세수까지 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목욕은 못했다.
“주인님! 앞으로 일본 해안을 돌면서 계속 노략질하는 건가요?”
“우린 왜구가 아니잖아? 이곳이 제일 큰 은광이라 왜군의 자금줄을 끊으려고 한 거야.”
이민호의 대답을 들은 민희와 민영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둘은 여진족 출신이라 남의 것을 약탈하는 것에 별다른 가책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강한 자가 좋은 것을 갖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랑스러운 권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일본에서 도둑으로 악명을 높일 것 같아 신경 쓰였다.
조선국 장수로서 고토(五島)를 치고, 해중국 사신으로서 류큐왕국에서 사쓰마와 부딪치고, 이번에는 고산국 국왕으로서 일본 관백의 것을 건드렸다. 어느 나라 소속이든 이민호는 계속 일본과 충돌해왔다. 앞으로도 임진왜란 기간 내내 왜군과 싸우게 될 것이다.
“이왕 바다에 나왔으니 적의 본거지라도 치고 가요. 나고야 성이나 오사카 성 같은 유명한 곳을 공격하면 왜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 거여요.”
“그럼 정규군을 상대해야 해. 그리고 그런 곳들은 적이 너무 많아. 웬만하면 만 명 단위야.”
거절했지만 그래도 고민영의 제안에 이민호도 살짝 솔깃했다. 일본의 본거지를 칠 수 있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소극적인 작전으로 돌아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본거지를 치다가 포위될 수도 있고, 왜군 조총수 수천 명이 한꺼번에 총을 쏴대면 아군에 인명피해가 발생할 것이 우려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직은 왜군을 강하게 압박할 때가 아니었다. 한성이 점령되면서 발생할 대량의 유민을 고산국으로 흡수하고 싶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배 세 척에 탄 사람들 중에 조선인은 삼중 국적자인 나 하나밖에 없어. 직할군은 물론 사공들도 다 고산국 사람들이야. 침략국 일본을 비난하면서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한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외국군이 전쟁에 개입할 명분이 없어.”
“그, 그런가요?”
여진족은 그런 것 따져 가면서 전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문명국이라면 전쟁을 하더라도 명분과 절차를 따라야 했다.
이민호가 임진왜란에서 손을 뗄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다짜고짜 고산국 이름으로 참전해 일본을 치거나 조선을 돕고 싶지는 않았다. 조선을 위해서 이민호는 간수군 천 명과 중형 외륜선 여덟 척, 그리고 사창제도와 감자 등을 준비해두었고, 또 다른 것도 있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생명의 은인들에게 봉사를 해볼까나?”
“어머나!”
둘을 눕히고 산길을 뛰어다니느라 긴장했을 민희와 민영의 다리 근육을 주물러서 풀어주었다. 처음에는 애무라고 착각했던 둘은 시간이 지나면서 편히 안마를 받았다. 건강미 넘치는 쭉 뻗은 다리 네 개가 이민호의 눈을 몹시도 어지럽혔다.
“이제 엎드려주실까요, 손님?”
그러나 종아리가 끝나고 이민호의 손이 둘의 허연 허벅지로 올라가면서 점점 진한 애무가 되어 갔다. 다른 여자들 같으면 몸을 씻지 못했다고 거부했겠지만 추운 지역에 살던 여진족 처녀들이라 크게 개의치 않고 이민호를 받아들였다.
마치 장닭이 암탉의 작은 벼슬을 부리로 물고 교미를 하듯이 목덜미를 핥으며 뒤에서부터 민희의 몸에 진입했다. 민희의 숨소리가 높아지다가 어느 순간 깜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여긴 궁궐이 아닌 전선 선장실이라 방음이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옆방에서 계복이 벽을 두드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좋아?”
“결혼한 여자들에게 듣기론 이 정도까지는 절대 아니었어요.”
“좋다는 이야기지?”
“예. 매우, 특별히 좋아요.”
“음하하!”
민희의 솔직한 대답이 이민호의 사내를 더 자극시켰다. 이민호는 민희를 돌려 눕히고 다시 움직였다. 민희가 두 손을 뻗어 이민호를 꼭 껴안았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어요.”
“응. 나도. 정말 좋다.”
눈을 꼭 감은 민희의 입술을 열고 키스를 나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이민호의 한 손은 민영의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이민호는 아담한 민희도 좋고 풍만한 민영도 좋았다. 물론 다소곳한 혜영도, 말괄량이 혜진도 다 좋았다. 웬만해서는 이민호에게 싫은 여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고산국의 전선 세 척은 왜선들이 분주히 오가는 대마도와 부산포 사이 해협을 피해 새벽에 대마도 남쪽으로 지나갔다. 이즈하라 항 주변의 높은 산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밤새도록 지펴져 불빛을 아주 멀리 수평선까지 보내고 있었다.
원양 항해능력이 떨어지는 이 시대에 해안선을 바라보면서 연안 항해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망망대해로 표류하면 거의 죽었다고 봐야 했다. 대항해시대가 열린 뒤에도 대양으로 나선 유럽 배들도 원양 항해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래서 17세기 초 네덜란드 상선들이 인도네시아에 갈 때는 동일 위도선을 타고 항해하다가 끔찍한 사고도 자주 당했다.
임진왜란 당시 돛 하나짜리 왜선들이 나고야에서 이키 섬, 대마도를 거쳐 부산까지 징검다리 건너듯 가는 것도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섬을 목표로 배 수십 척이 선단을 이뤄 항해할 경우 바람에 따라 선단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일 때까지 며칠씩 걸리곤 했다. 그리고 다시 출발해서, 또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데 며칠씩 걸렸다. 이런 식으로 부산포까지 항해했다가, 다시 또 그런 식으로 모였다 흩어지길 반복하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낙오선 중 하나가 이민호가 이끄는 전선 세 척 앞에 있었다. 이때 왜군의 전투선이나 전투병력 수송선이 아닌 여러 가지 수송선들이 부산진과 나고야 사이를 오갔다. 전쟁이 벌어지면 보통 전투선보다 수송선이 훨씬 많았고 군대를 따라다니는 민간 상인들이 운영하는 배도 있으니 이런 배를 바다에서 만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이 배에 탄 승객들은 매우 특이한 이들이었다.
“오빠~ 싸게 해줄게.”
“뭘 싸게 해준다는 거야? 깔깔깔!”
일본인 사공들이 굽실거리는 가운데 일본인 유녀들이 직할군 해병들에게 대놓고 추파를 던졌다. 잔뜩 긴장해서 소총을 겨눴던 직할군 병사들이 허탈해져서 그저 웃고 말았다.
“도련님. 그냥 보내줘야겠죠?”
“당연하지. 아주 훌륭한 생물학 무기인데.”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매독이 유행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당창, 즉 중국 병이라고 불렀으나 일본에 더 많이 유행했다.
일본 전국시대 무장들 가운데 가토 기요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 등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병으로 죽은 자들이 몇몇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암살했다는 의심을 받게 됐으나 매독의 잠복기가 10년이므로 매독으로 죽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생물학 병기들은 대마도를 향해 떠났고, 전선 세 척은 방답 남쪽 끝 연도로 향했다. 연도에 거의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 콰앙~
“뭐, 뭐야?”
이민호가 탄 전선이 크게 흔들리고 선미루에 서 있던 사공 두 명이 난간을 넘어 물에 빠졌다. 해병들이 두 사람에게 밧줄을 던져 구하고 있는 사이 사공이 아래 선실에서 뛰쳐나왔다.
“선저가 침수되고 있습니다! 물이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젠장! 막아!”
이민호와 계복은 직할군 해병들에게 판자와 천, 못과 망치를 들게 하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따라오겠다는 민희와 민영에게는 배를 지휘하라고 선미루에 남겨두었다.
아래 갑판에 내려가 보니 정말로 선수 밑 부분에서 바닷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민호는 무릎까지 젖는 물을 헤치고 이미 방수 작업 중인 사공들에게 다가갔다.
“이거, 판자!”
“감사합니다. 그런데 구멍이 커서 막기 힘듭니다.”
“어떻게든 막아 봐! 배를 구해야 해.”
강한 수압에 선재가 더 터져 나가고, 바닷물이 본격적으로 펑펑 쏟아져 들어와 사공 몇 명이 그 물살에 휩쓸려버렸다. 다급한 상황에서 계복이 이민호의 등을 떠밀었다.
“도련님! 제가 막아볼 테니 도련님은 위로 올라가십시오! 하지만 이 정도면 배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 배가 어떤 배인데! 엔진, 아니 기관 만들려고 일 년 넘게 수십 명이 고생했단 말이야!”
“다른 배 두 척이 더 있고 조선소에서 계속 만들고 있습니다.”
“배가 문제가 아니라니까! 에잇! 선수부를 포기한다. 모두 물러서! 방수문을 차단하겠다!”
계복이 부상을 입고 쓰러진 사공을 부축해 마지막으로 나오는 순간 이민호가 방수문을 닫았다. 그리고 철문에 달린 핸들을 돌려 잠갔다.
다들 물에 흠뻑 젖은 생쥐 꼴이었다. 그러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배 중간 중간에 격벽이 있었으나 문을 열어놓고 방수작업을 하느라 이곳 창고는 물론 아래 갑판 전체에 물이 한 가득이었다.
“어서 물을 퍼내라!”
직할군 해병들에게 지시한 다음 이민호는 계단을 통해 위로 뛰어 올라갔다. 배가 암초에 좌초됐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고래에 부딪쳤다고 사람들이 떠들어댔다. 이민호는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고래가 화가 났는지 신경질적으로 등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 거대한 고래가 여차하면 배를 향해 돌진할 것 같아 이민호가 지시를 내렸다.
“젠장! 총을 쏴서 쫓아내!”
만약 고래가 달려들면 대포를 쏴버릴 생각이었다. 위기가 닥치자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총알 몇 발을 맞더니 다행히 고래가 배에서 멀어졌다.
이민호는 선미루에 달린 조타기를 잡았다. 임시 선착장이 설치된 연도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배에 침수가 너무 많이 돼 도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물이 위험할 정도로 앞으로 기울고 있었다.
“기관 최대 가속!”
이민호가 전성관에 대고 외치면서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조타기 아래쪽에 기관실이 있으나, 기관에서 나오는 소리가 커서 다들 귀마개를 하고 근무해서 의사소통하기 어려웠다.
땡~ 하고 종이 울리며 바늘이 최대점을 지시하자 기관사들이 엔진을 조작했다. 터빈 회전수가 올라가면서 소음도 커졌다.
배는 빠르게 앞으로 움직였다. 그 사이 다른 전선 두 척이 이민호가 탄 배를 뒤따랐다. 만약 상황이 급해지면 다른 전선으로 옮겨 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터보 샤프트 엔진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위기에서 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은 10만 냥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니,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바다에 버릴까 고민하고 있었다.
“도련님. 이물이 점점 앞으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침몰하겠는데요. 단정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엔진을 구해야 한다고!”
- 위이잉~
설상가상이었다. 배가 덜컹 소리를 내면서 속도가 확 줄어들었고, 배 뒤쪽에서 굉음이 울렸다. 이민호가 고개를 내밀어서 보니 선미루 자체가 물 위에 붕 뜬 상태였다. 무게가 앞으로 쏠려서 바퀴가 물 위로 드러나 배가 추진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전원 고물로 이동!”
150명에 달하는 사공과 직할군 해병들이 배 뒤쪽으로 우르르 움직였다. 이물은 여전히 위태롭게 수면 바로 위에 있었으나 사람들이 뒤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선미루가 조금 내려앉았다.
덕택에 바퀴가 물에 가라앉아 배의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연도가 바로 앞, 100보 거리까지 다가왔다.
“양현 뒤로 전속! 아니, 기관 후진!”
전선은 스크루가 아닌 물갈퀴 방식의 바퀴를 회전시킴으로써 추진력을 얻고 있었다. 기관실 요원이 회전축 동력 전달 장치에 톱니바퀴를 끼워 바퀴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바퀴가 거꾸로 맹렬히 돌아가면서 배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러나 관성 때문에 배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갔다.
- 쿠웅~
“이물이 모래톱에 얹혔습니다. 지금은 밀물이라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 기관 정지.”
손잡이를 당긴 다음 이민호가 털썩 주저앉았다. 하마터면 비싼 배를 잃을 뻔했다. 민희가 손수건으로 이민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 작품 후기 ============================
앞으로 당분간 임진왜란 유명한 전투에 적당히 끼어드는 이야기가 이어지겠습니다.
오늘 연재는 아마 여기까지일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