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16화 (65/1,000)

00116  18. 고산국에서의 보름  =========================================================================

태감이 칙사로 오면서 황제에게 지침을 받고 병부와 협의한 내용이 있었다. 태감은 전에 약속했던 기병 천 명을 초과하는 병력에 한해 고산국이 자체적으로 군량을 공급하는 대신 병사들의 월봉과 보급품 값을 은으로 계산해 명나라에서 지급해주기로 약속했다.

수군을 동원할 경우 배를 삯 내는 값까지 계산해준다고 했다. 달마다 정산하기로 했으니 원정 기간이 길어질수록 계속 늘어난다.

“사실 5천도 힘드오. 말 타고 총을 쏘는 기마병 2천, 300명 이상이 타는 큰 전함 열두 척에 해병, 아니 수군 2천과 사공 500. 이 정도가 지금 고산국의 한계요.”

“일단 1차 출전은 그렇게 하시고, 추가로 모집하면 증원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추가 병력은 어렵지만 어떻게든 해보겠소. 비용을 따지자면, 병사들의 월봉만 해도 일 년에 20만 냥은 들어갈 것 같소. 말 값과 배 값은 훨씬 더 들어갈 것이오. 그러니 천조에서 지원해줄 군자금은 매년 백은 100만 냥이 어떻겠소?”

이민호는 말 타고 총을 쏘는 기마병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기마술이 딸려서 말에서 내려 싸우는 승마보병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원 총병이었으므로 이 당시 기준으로 전력은 매우 강한 축에 들었다. 해병은 간수군과 달리 해상전투보다는 상륙 후 지상전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사공 일부는 현재 수군으로 전환 중이며 화포 사격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 당시 고산국의 직할군은 기마병과 해병, 수군 구별 없이 월봉으로 은 석 냥을 기본으로 해서 근무 연차에 따라 매년 은 2전씩 추가됐다. 수군으로 아직 전환하지 않은 사공의 월봉은 절반인 은 한 냥 다섯 전이었다. 명나라가 모병제와 징병제가 뒤섞인데 반해 고산국은 완전한 모병제로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월봉도 명나라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

고산국 직할군은 상급 규정도 상세히 정해져 있었다. 공성상, 파진상, 투주상 등으로 나누고 1급에서 5급으로 세분해 해당하는 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며 최고액은 250냥이었다. 보훈 규정도 세세해서, 전사자는 은 100냥을 유족이 수령하고 부상으로 인한 퇴직자는 평생 의료 지원 외에도 부상 정도에 따라 50냥부터 20냥까지 일시금으로 받았다. 그리고 사상자 본인 또는 유족은 따로 일반 농민이 경작하는 농지의 두 배를 더 받았다.

현재 고산국에서 도공이나 장인 같은 기술자 다음으로 좋은 직업이 군인이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기대한 만큼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 군인이 아무리 월봉을 많이 받더라도 전쟁터에 끌려가 목숨이 오락가락한다는 특유의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전하! 겨우 4, 5천 명을 동원하는데 운영비가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그 정도 병력이라면 황실에서는 매년 백은 20만 냥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대명의 월은은 기마병은 2냥, 보병은 1냥 5전이 기준입니다. 물론 쌀과 콩, 건초를 추가해주기는 하지만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20만 냥이라. 장거리 원정이 될 텐데 군자금으로서는 턱없이 부족하오.”

별궁 운영비 명목으로 공주에게 매년 들어가는 돈이 20만 냥이었다. 이민호의 상행 규모가 워낙 커서 그렇지 20만 냥은 이 시대 명나라 같은 대국 입장에서도 큰돈이었다.

명나라의 1년 세입 또는 예산을 국초에 은 2백만 냥에서 장거정 이후 4백만 냥 또는 비공식적인 세금까지 합하면 일시적으로 2천만 냥까지 추산한다. 말기에는 1670만 냥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과중한 세금 때문에 이자성의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명 말기에는 건국 초기에 비해 둔전이 감소해 군비가 매년 천만 냥 정도 들어갔다. 과도한 군비 지출이 명나라의 목을 조른 셈이었다.

그에 반해 황제의 내탕금은 5천만 냥 이상이었다. 숭정제가 자살하고 나서 이자성의 반란군이 황실을 털어보니 은 3700만 냥, 금 150만 냥 외에 수많은 보석이 있었다.

이민호는 최소한 별궁의 매년 운영비보다는 더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을 생각해 명나라가 되도록 전비를 많이 쓰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럼 50만 냥. 나도 밑지는 거요. 무역에서 혜택을 좀 주셔야 할 거요.”

“으음. 좋습니다. 무역 확대 문제는 황상께 상주하여 예부에 통보를 하겠습니다. 대신 공주 마마를 최소 열흘에 한 번은 안아주셔야 합니다.”

“궁궐에 있는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안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이민호가 손을 뻗자 공주가 습관처럼 이민호 무릎에 올라 안겼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안겨 공주도 깜짝 놀라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이민호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험! 험! 공주 마마 체통을 지키셔야죠. 국왕전하께서는 멀리 원정을 가실 일이 많으니 그게 걱정입니다. 부디 공주 마마를 잘 보살펴주십시오.”

병력과 군자금에 대한 협상이 끝나자 환관이 칙서 한 장을 더 펼쳤다. 협상이 잘 이뤄질 것에 대비해 미리 작성된 칙서들 중 하나였다. 협상이 일정 단계씩 진척될 때마다 북경까지 왕복할 수 없으므로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해 칙서도 여러 종류를 준비하는 것이 관례였다. 격이 떨어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통이 불편한 전근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

“황상폐하의 성은을 입어 국왕전하께서는 흠차 제독 남북 수륙 관병 어왜총병관 이주도독부 좌도독(欽差提督南北水陸官兵禦倭摠兵官夷州都督府左都督) 겸 이국공으로 제수되셨습니다. 직접 인솔하는 병력이 적은데 비해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지만 국왕이시니까 이 정도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황도의 병부와 조선에 파견될 최고 지휘관인 총독군문 외에 다른 명나라 장수나 관리의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일개 무관직인 도독이라 하나 국왕전하께서는 병부와 총독군문과는 수평관계이니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의하여 군무를 수행하시면 됩니다.”

“영광이오. 대단한 책무를 맡아 어깨가 무거워지오.”

다른 젊은 환관들이 도독 인장(印章)과 영패, 귀도, 참도, 독전기 등을 가져와 이민호에게 바쳤다. 한 사람의 직함에 제독, 총병, 도독이 다 들어가 있으니 신분을 나타내는데 필요한 물건이 많았다.

도독은 정1품 무관직 관품이며, 오군도독부에 각자 좌도독과 우도독이 있었다. 그 밑에 도독동지, 도독첨사 등의 관직이 있었으나 5군 도독부는 병적 관리만 맡고 실 병력을 지휘할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원래는 실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후기에는 무관의 관품을 나타내는 겸임직이나 명예직으로 인식이 변했다.

총병관은 보통 성 단위 지역에 주둔하는 대규모 실 병력을 지휘하는 고위 무관이었다. 그 밑으로 부총병, 유격장, 참장 등이 병력을 나눠 지휘했다. 같은 총병의 직임을 맡았다 해도 관품은 각자 도독, 도독동지, 혹은 도독첨사가 될 수 있었다. 실록에 도독이라 호칭된 명나라 장수가 있더라도 실제로는 도독동지나 도독첨사에 불과한 경우가 흔했다.

제독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과 병력 전체에 대해 총지휘권을 가진다는 뜻이다. 제독은 이 시기까지 오직 문관만이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년 하반기에 보바이의 난을 진압하러 가는 이여송에게 제독섬서토역군무총병관(提督陝西討逆軍務總兵管)이라는 무관 최초의 제독 칭호가 붙음으로써 제독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칭호로 변해갔다. 명나라 군제에서 무관 지휘관 위에 반드시 문관이 자리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흠차는 황제가 직접 임명하고 특정 사안이나 임무에 한해 황제의 대리권을 맡았다는 의미이다. 명나라를 이은 청나라의 외교관계에서 흠차대신은 전권대사로 이해하면 된다. 명나라에서 무관에게 흠차 칭호가 붙을 경우 이것만으로도 다른 무관들에 비해 여러 가지 특권을 보장했다. 흠차 유격장이 병력을 이끌고 이동 중일 때 직급상 상급자인 부총병이 멀리까지 마중 나가 정중히 인사한 사례가 있었다.

“좋군요. 그런데 이국공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국왕전하께서 고산국 예국 참판직을 칭하며 직접 입조하셔서 받은 관작 아닙니까? 황상께서 국왕전하의 정체를 알면서 미리 드린 관작입니다.”

“그랬소? 하지만 과인이 손해 보는 기분이요.”

“무관 관직으로는 더 이상 승진할 관작이 없습니다. 전공을 세우시더라도 태보 같은 명예직만 뒤에 붙겠지요.”

“그럼 내가 친정을 안 하는 게 낫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언제나 공주 마마와 함께 계십시오.”

그러나 고산국의 전체 군사력을 원정 보내면서 이민호가 직접 참가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전술 단계의 지휘는 계복 등에게 맡기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했다.

칙사가 돌아가기 전에 황실에 바칠 공물과 칙사 개인에게 주는 선물을 바리바리 싸주었다. 칙사가 오가는 것도 무역의 한 종류였다. 칙사가 옥 도자기 값으로 얼마를 들고 왔든 상관없이 좋은 공물과 선물을 줄수록 더 많은 것이 되돌아오기 마련이었다.

황제에게는 조선 홍삼과 봉래 해삼 각각 몇 근씩, 황태후와 황후, 후궁들에게 보낼 선물로는 전복과 옥 도자기, 백저포를 잘 포장해 봉인했다. 칙사에게는 은이 가장 확실한 선물이었고, 체면상 몇 번 사양하더니 공주가 권하자 받아들였다.

칙사를 수행한 환관과 무관들에게도 여비로 쓰라고 조금씩 찔러 주었다. 고산국 사신들이 북경에 조공 갈 때 명나라에서 여비를 받으니 이런 것들이 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오고 가는 인정이었다. 이민호가 기술자였을 때는 관심도 두지 않던 것을 국가를 운영하다 보니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지난해부터 완도에서 매달 말린 전복을 보내왔다. 2년산이면 상품성이 충분한데 일부는 3년짜리라 꽤 컸다. 자연산 전복이 주먹 만해지려면 10년은 걸리는데 반해 양식 전복의 성장 속도가 훨씬 빠른 편이었다. 또한 수심이 8미터에 달하는 깊은 바다에서 키워 육질이 자연산처럼 두꺼웠다.

정확히 같은 크기의 전복끼리만 따로, 하나씩 한지로 싼 다음 한산모시로 다시 포장했다. 원가로만 따지면 포장비가 훨씬 더 들었으나, 무역을 통해 비싼 은을 내고 사야 하는 명나라 상인과 부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작년에 조선 조정에 상소를 올려 완도 양식장에 부과될 세금으로 궁궐과 관아에 소요되는 전복의 양 이상을 바칠 테니 어민들의 전복 공납을 없애 달라고 청했고, 허락을 받아냈다. 바닷가 어민들이 그토록 고생해서 전복을 잡아 관아에 바쳐도 중간에 다 새고 실제 궁궐에 들어가는 양은 얼마 안 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조정에서는 약간의 논란 끝에 허가를 내주었다.

전복 공납 과정에서 뇌물을 받던 대신이 있더라도 정해왜변 때 전복 공납에 시달리다 왜구에게 붙은 사화동의 사례 때문에 선뜻 반대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3년 전에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조건으로 정해왜변 때 왜구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사화동의 쇄환 문제를 내걸자 일본이 사화동을 조선에 보냈고,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참수됐었다. 사창과 소금 전매 덕택에 고을 수령과 아전들의 생활이 풍족해졌으므로 지방 관아들의 반발도 적었다.

이렇게 해서 어민들이 바치는 공물 목록에서 전복을 빼는데 성공했다. 전복을 무한정 공납으로 바치면서 그 동안 힘겹게 살아온 바닷가 백성들이 이민호를 미륵의 현신으로 떠받들었음은 물론이었다.

완도의 전복양식장이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한 지난해부터 명나라 남부의 전복 유통망을 이민호가 완전히 장악했다. 품질도 좋고 특유의 다시마향을 좋게 평가한 명나라 상인들이 특등품으로 인정해주어 적은 양이지만 다른 전복보다 몇 배나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수급을 조절해 높은 가격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완도 양식장이 워낙 커서 확장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전복 양식장은 해중국에도 있고 류큐왕국에도 있으니 자칫 공급과잉을 걱정해야 했다.

다만 다시마가 자라지 않는 해중국과 류큐왕국의 전복은 가격이 좀 떨어졌다. 해중국에서는 출하 전에 수조에 전복을 모아 완도에서 양식한 다시마를 먹여 향을 높이는 시험을 하고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전복 양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직 몰라 양식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명나라에서 소금과 쌀, 비단과 차 시장이 규모가 가장 크지만 극히 일부 품종의 차를 빼고는 실속이 별로 없었다. 다만 주변 산업의 생산유발 효과와 고용 측면에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홍삼과 해삼, 전복과 옥 도자기는 원가가 적게 들고 단가가 비싸 거래량에 비해 거래액이 큰 알토란같은 시장이었다. 그런 핵심시장을 이민호는 단 몇 년 만에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다.

고산지대에서 차나무를 열심히 번식시킨 결과 작년부터 조금씩 찻잎이 생산되고 있었다. 차를 대량 재배해 제대로 상품화하기엔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차는 몽골이나 유럽에 수출할 계획이었다.

아리수 하구에 건설 중인 요새에서 궁궐로 파발을 띄웠다. 서양 범선이 나타났다는 급보였다.

============================ 작품 후기 ============================

역시나 오전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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