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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19화 (68/1,000)

00119  18. 고산국에서의 보름  =========================================================================

“서반아 사람들이 무척 흉포하다고 들었는데 여기서는 의외로 얌전하네요.”

“응. 유럽 애들이 다 그렇듯이 약한 세력은 무력으로 정복하고 강한 세력 앞에서는 신사인 척해. 착한 척하는 겉모습에 속으면 절대 안 돼.”

이민호는 배를 드러내고 자는 혜진의 잠옷을 내려준 다음 다시 혜영을 껴안았다. 2~30미터나 되는 야자수들을 옮겨 심어 낮에도 시원한 곳이 궁궐이었다. 밤에는 환하게 달빛이 비쳐 오히려 따스하게 느껴졌다.

“설마 포르투갈 사람들도요? 벌써 몇 년째 아무 사고 없이 무역을 하고 있잖아요? 주인님이 마카오에 대학도 세웠잖아요.”

“우리가 그들보다 강하니까 못 쳐들어오는 거야. 인도 고아를 점령하고 말래카왕국을 멸망시킨 놈들이 포르투갈이거든. 인도양의 노예상인들이야.”

자금이 부족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중국과 일본, 또는 몰루쿠제도의 향신료를 끼운 중개무역을 통해 비단과 도자기 구입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거의 맨손으로 아시아에 온 영국은 해적질을 하거나 동남아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싸구려 열대 해삼을 중국에 팔아서 비단 구입 자금을 마련했다.

그에 반해 에스파냐는 멕시코에서 가져 온 은으로 비단과 도자기, 차를 구입해 다시 멕시코로 보냈다. 그러니 에스파냐가 가장 여유 있게 무역을 한 부류라고 할 수 있었다.

“신부나 선교사들은 무척 자상한 분들이던데 설마 안 그러겠죠?”

“마카오에서 대포 발사를 담당하는 자들은 수학을 제대로 배운 선교사들이야.”

네덜란드는 1601년부터 마카오를 빼앗으려고 꾸준히 공격을 가했다. 가장 결정적인 전투는 1622년에 벌어졌고, 이때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으로 마카오를 공격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직원, 선원, 군인, 모험가, 인도인, 흑인노예들로 이뤄진 800여 명의 대군이 이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인들은 조선의 용인전투나 쌍령전투에 필적하는 대참패를 당하고 쫓겨났으며 지휘관과 선장들을 포함해 유럽인 사상자만 약 300명에 달했다. 바로 그때 아담 샬 등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대포 발사를 맡아 결정적인 활약을 했다. 조선에서도 스님들이 의승군을 일으켜 싸웠으니 어느 종교든 승려들이 전쟁에 참가한다 해서 이상하게 볼 것은 없었다.

“서양 사람들은 다들 무섭군요.”

“서반아나 포르투갈 정도면 양반이야. 네덜란드 놈들은 걸핏하면 상선을 습격하는 해적이야. 마찬가지 해적인 영국 놈들은 푼돈 좀 벌자고 남만 여러 나라를 멸망시키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았어.”

이 시대에 서양이란 명나라 남쪽 바다 건너편의 여러 나라들, 그러니까 남만국들 중에서도 서쪽에 위치한 나라들을 뜻했다. 대월국이 공식 명칭인 안남, 나중에 태국이 되는 시암, 말래카, 인도 등이 모두 서양이었다. 서양은 청나라 초기까지 포르투갈이 중국 정부에 내세운 국명이기도 했다. 이 당시 남만(南蠻)이나 서양이 반드시 백인들 국가만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동양에는 필리핀을 뜻하는 여송과 브루나이, 술루왕국 등이 속했다. 동서양은 남지나해에 접하거나 말래카해협을 통해 왕래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과 명나라, 일본은 당연히 동양에 포함되지 않았다.

“외국 사신들이 방문할 때 직할군들에게 경계를 철저히 서라고 주인님이 그렇게 강조하신 이유가 있었군요. 괜히 사신들 앞에서 사격 시범도 보였지요.”

“응. 여송 마닐라에도 처음에는 무역하자고 접근했다가 기회 봐서 다 쏴죽이고 점령한 거잖아. 상대가 약하다고 판단하면 즉시 때려잡는 놈들이 서반아야.”

“왕 귀인에게 들었어요. 마닐라가 남만 무역의 중심지였는데 서반아가 점령한 다음부터는 무역이 많이 위축됐다고 들었어요.”

“그냥 무역만 했으면 많은 이익을 얻었을 텐데 명나라 상인들이나 원주민들과 싸워서 점령지를 유지하느라 많은 비용을 써야 하잖아. 멍청이들이지.”

“그래도 영토가 넓어지면 좋잖아요. 조차지를 더 많이 요구하지 그러셨어요?”

아쉬운 건 이민호가 더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자니 도저히 뒷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관리도 못할 영토 있으나 마나야. 나도 솔직히 말해서 병력이 많으면 필리핀은 물론이고 주변 약한 나라들 다 점령하고 싶다. 백성들에게는 잘해줄 자신이 있으니까.”

“고산국에 와서 보니까 조선인 이주민들이나 원주민들이 아주 행복해 보여요. 주인님이 더 많은 백성들을 보살펴주길 바라지만, 그래도 전쟁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

“가능하면 전쟁을 피하는 게 좋겠지만, 생각대로 되지만은 않을 거야.”

대화 도중에 어느새 혜영이 잠이 들었다. 이민호는 혜영의 머리를 쓸어 뒤로 넘겼다. 언제나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고, 이곳에서도 주변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살아야 했다.

“말 한 마디 잘못해서 2백만 냥을 날리셨다면서요? 호호호!”

“멍멍이 너 너무 즐거워하는 것 같다? 그리고 금광과 은광이 있어서 그 이상 뽑아먹을 테니 걱정 마.”

쌀 수입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하던 왕명명이 오랜만에 궁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왕명명이 이민호를 놀려먹을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아! 그 돈이면 내년에 조선과 복건에서 쌀 한 푼 나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을 정도로 많은 쌀을 나눠줄 수 있을 텐데요.”

“그만해. 안남에서 일은 잘 됐어?”

“예. 대월국의 남북 정권에서 내년까지 한시적으로 단립종 쌀만을 세금으로 받겠다고 결정했어요. 유구국 상인들이 해안 도시마다 방문해 볍씨를 나눠주고 있어요.”

이민호는 내년에 조선과 복건성에 대기근이 발생한다고 부친에게 듣고 준비 중이었다. 굶어죽기 직전의 사람들이 단립종과 장립종 쌀을 구별해서 먹지는 않겠지만, 이민호는 뒷말이 나올까봐 이런 노력까지 아끼지 않았다. 실컷 퍼주고도 쌀이 맛없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이왕이면 단립종 쌀을 조선에 보내주고 싶은 것이다.

복건성을 비롯한 명나라 남부에서는 장립종 쌀을 주로 먹었다. 장립종 쌀은 안남과 시암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수급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우리 뜻대로 잘 됐군. 그런데 그런 폭력적인 세금 정책이 통한다는 게 더 무섭다. 안남 농민들은 먹지도 않을 단립종 쌀을 재배하는 거잖아? 그런데 조총을 왜 그리 많이 팔았어? 안남 사람들 다 죽을까봐 무섭다.”

“남북 정권의 내란뿐만 아니라 대월국 후 레 왕조의 응우옌 정권이 남방으로 확장을 추진 중이라 자금과 무기가 많이 필요하거든요. 주인님이 유구국을 위해 만든 조총은 너무 비싸지 않아 대월국에 딱 적당한 것 같아요. 대월국의 기술수준으로 복제하기에는 살짝 어려운 수준이라 잘 팔리고 있어요.”

이 당시 대월국은 남북으로 분열돼 북부의 찐 정권, 남부의 응우옌 정권 사이에서 내란이 진행 중이었고, 그 와중에도 응우옌 정권은 남방 참파 방향으로 영토를 확장 중이었다. 대월국의 남북 정권에서 쌀 수출을 빌미로 집요하게 무기를 요구하는 바람에 고산국이 양쪽 모두에게 무기상인 역할을 하고 말았다.

고산국에서 대량 생산한 저렴한 총과 화약이 대월국의 남북 양쪽 정권에 절반씩 들어가 군사들을 무장시켰다. 일부 조총은 참파로 흘러 들어가기도 했으나 참파는 워낙 약해서 응우옌의 군사들에게 매번 밀려나기만 했다.

왕명명은 수시로 북부의 동낀(東京)과 남부의 아이뜨, 그리고 시암에 들러 쌀 수입에 박차를 가했다. 조총 판매대금을 제하고도 수입액이 많아 쌀 매입 대금이 이미 은 백만 냥을 넘어섰고 유구국과 신라방 상선으로 모자라 광저우의 명나라 상인들 배까지 쌀 수송에 투입됐다.

이민호는 복건 상인 출신인 왕명명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명나라 민상, 월상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대만을 개척했던 정지룡, 정성공 일가의 예에서 보듯이 광동과 복건의 명나라 상인들은 구심점만 제대로 갖춘다면 거대한 해양세력이 될 역량을 갖고 있었다. 잘하면 강력한 우군이 될 수도 있으나, 잘못하면 끝없이 싸워야 할 세력이었다.

“지금까지 3백만 석이라. 연말까지 5백만 석은 넘겠군. 산골마다 감자와 고구마를 심었으니 조선 사람들이 아무리 대식가라 해도 설마 이 정도면 되겠지.”

“그건 모르는 일이예요. 만약의 경우에도 대비해야 해요.”

이 시대에 나라 전체로는 식량이 넘치더라도 지역적으로 심각한 기근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대량의 쌀을 시기를 놓치지 않고 필요한 곳에 수송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 멍멍이 너만 믿는다. 이리 와. 뽀뽀!”

“흥! 저는 가만히 있을 테니 주인님이 오세요.”

“어쭈? 공을 세웠다 이거지? 좋다. 내가 가주마.”

이민호가 못 본 사이에 왕명명이 많이 성숙해졌다. 이민호는 왕명명이 더욱 성숙해질 수 있도록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쯧쯧!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이 오라에 묶인 채 이민호의 집무실에 끌려 들어왔다. 아리수 강 하구 요새 건설 현장에서 일반 노무자로 일하던 정옥남은 얼굴을 알아본 계복에게 붙잡혀 궁궐로 끌려왔다고 한다. 정옥남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조선에서 보지 못하던 건축 양식이라 직접 건설에 참가해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등대 건설에도 며칠 일했었고 별궁을 건설할 때도 노무자로 일했었습니다.”

“자중하고 공부나 하라니까. 쯧! 이곳에 조선 출신 백성이 많다. 네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도 꽤 있을 거야. 만약 네가 이곳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조선 왕실에 알려지면 나는 뭐가 되겠어?”

“역적으로 몰려서 혹시라도 조선에 계셨다간 잡혀서 참수당하시겠지요. 죄송합니다.”

이민호가 화들짝 놀랐다. 이민호는 그저 체면을 구기거나 정치적 공세를 받아 곤란해질 정도로 예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 이상이었다. 정옥남의 판단이 옳았다. 그래서 이민호는 진짜로 화가 났다.

“알면서 남의 목숨 갖고 장난을 쳐? 내가 후계도 정하지 않고 조선에서 죽어버리면 이곳 고산국에 간신히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들 생활은 어떻게 되겠어?”

“정말 죄송합니다. 제 딴에는 나름대로 분장을 한다고 했습니다. 계 대원수의 눈썰미가 너무 뛰어난 탓이지요.”

정옥남은 요새 건설 현장에서 돌을 수레에 싣다가 감독을 나온 계복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가 걸렸다. 계복은 이를 심각한 사안으로 여겨 정옥남을 바로 궁궐로 끌고 왔다.

“네가 이렇게 천방지축 돌아다니니 이곳 고산국에 두고 있기 어렵다. 내가 위험하고 백성들이 위험하다. 너희 아버지 때문에 조선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초를 겪었는지 정녕 모르느냐?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이 있더라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국왕전하께서는 저를 국외로 추방하시렵니까? 사실 저를 참수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참수라. 사실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겠지.”

정옥남은 아버지 정여립의 피를 이어 원래부터 뜻이 큰 남자였다. 농사나 짓게 해서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민호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었다. 마카오의 대학에 보내려다가 혹시라도 소문이 잘못 날까봐 두려워 그저 서양의 책만 가져다주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정옥남은 어학 능력도 출중한 편이었다.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는 물론 라틴어도 기본적인 독해 능력이 있어 라틴어 성경을 줄줄 읽을 정도였다. 건축에도 관심이 많고 군사적 능력은 아비 밑에서 이미 터득한 뒤였다.

이민호가 보기에 정옥남은 사실 왕재로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현대 기술을 빼고 객관적인 정치 능력만으로 평가하자면 이민호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이제 보니 너는 참 잘 생겼구나. 옥남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다른 신분으로 활동해야 하니 새로운 이름을 내리겠다.”

“이름을 내려주신다니 영광입니다.”

이민호는 정옥남을 어떻게든 써먹기로 했다. 웅지를 품은 남자를 작은 농촌 마을에 가둬두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내버려뒀다간 정말 큰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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