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3 19.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 =========================================================================
19.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
“사흘 전 새벽에 부산포성 앞에 커다란 별똥별이 떨어져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고 왜적들이 최소 300명 이상 떼죽음을 당했다더군. 부산포에 정박한 왜선도 수십 척이 불타올랐다네. 통지 자네는 그 일에 대해 아는 게 있는가?”
“그렇습니까? 왜적들이 천벌을 받았군요. 하하하!”
전라좌수영의 남문인 진해루 2층에 앉아 작전을 논의하던 이순신이 갑자기 이민호에게 물었다. 이민호는 어물어물 대답한 다음 이순신의 시선을 피해 먼 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력 5월 말이라 바다 건너편 두산도의 녹음방초가 우거지고 제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역시 아는 게 있군. 솔직히 털어놓게.”
“화약을 잔뜩 쌓아둔 곳이 관리 소홀로 불이 나서 폭발한 모양입니다. 왜적들이 남만초라 불리는 담배라는 것을 향처럼 태우며 그 연기를 들이마신답니다. 화약통 옆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불을 낸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민호가 타고 온 고산국 제1전선은 방답진 남쪽 연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민호와 민희, 민영만 방답진을 통해 좌수영에 왔고 계복이 연도에 남아 병사들과 사공들을 지휘하고 있으니 이들이 떠들어서 소문이 났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부산포성 화약 폭발사건의 목격자들이 이들 말고도 많아 이민호 입장에서는 비밀유지를 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어부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웬 시커먼 배가 부산포에 들어간 다음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고, 그 검은 배는 다시 나왔다고 하네. 자네 배가 아니었나?”
“제 배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순신이 쯧쯧 혀를 찼다.
“다섯 곳에서 동시에 승첩 장계가 떴다네. 자기들이 왜적들 몰래 화약에 불을 질러서 한꺼번에 폭발시켰다고 말일세. 경상감사는 누구의 전공이 맞는지 몰라 허둥대고 있어. 그러나 노지에 화약을 쌓아뒀다 해도 왜적들이 경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을 터, 그자들 말을 믿기가 어렵네.”
“동시에 다섯 곳에서 그런 일을 시도했다가 동시에 성공시켰을 수도 있지요. 이번에는 언제 출항하실 예정입니까?”
이민호가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이미 성공한 작전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었다. 이민호는 그저 고산국의 배가 조선의 허락 없이 참전해서 왜군과 싸우고 있다는 소문이 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출항은 전라우수영 배들이 도착할 유월 초사흘일세. 통지 자네가 겸손한 것은 나도 잘 알지만 남에게 전공을 넘기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닐세. 만약 가짜 전공을 내세운 자가 상을 받아 나 대신 전라좌수사로 온다고 생각해보게.”
“헉! 그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절대 안 됩니다!”
1596년 12월 12일에 거제현령 안위가 주도해 부산포의 왜군 진영에 방화를 한 일이 있었다. 실록 1597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이순신의 서장에 따르면 안위의 명령을 받은 박의검이 불을 질러 가옥 천 채, 화약창고 두 곳, 군량 2만 6천 섬, 왜선 20여 척을 불태우고 왜인 24명이 불타 죽었다고 한다. 동시에 안위와 군관 2명이 부산포에 잠입해 불을 질러 군량, 군기, 화포 등을 불태우고 왜인 34명을 불타 죽게 했다. 그리고 이 화재를 보고 경상수영 도훈도 김득 또한 불을 질러 나머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곳에서도 자기들이 방화를 했다고 주장했고, 이순신이 하옥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이조좌랑 김신국의 서장이 실록 1597년 1월 2일자에 요약되어 남았는데 도체찰사 이원익의 군관 정희현의 심복인 부산 수군 허수석이 방화를 주도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때 조정 대신들은 부하 장수 안위의 허위보고를 이순신이 사실 확인도 안 한 채 그대로 서장을 올렸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김신국은 12월 25일까지 한성에 있어서 현장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고 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원익의 <오리집> 속집 2권에는 이원익이 부산포 왜영 방화사건 이후인 12월 26일에 사천에서 이순신과 만나 부산에서의 작전을 놓고 회의를 한 기록이 있다. 이원익도 부산 왜영에 불이 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방화를 틈타 비밀리에 부산포에서 모종의 작전, 이를테면 왜장 암살 계획을 준비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안위가 나중에 그 일로 인해 처벌을 받지 않았고 선조 임금도 안위의 전공으로 인정했으니 이순신의 서장에 언급된 것처럼 안위가 방화사건을 주도해 성공시켰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이나 김신국의 서장에 등장한 인물들이 전원 부산포 왜영 방화 사건에 참가한 것이 나중에 사실로 드러났다. 이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원익과 이순신이 미리 방화계획을 세워두고 시간에 맞춰 부산포의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서장에서 자기는 전혀 상관없다는 식으로 안위의 공만 내세웠다.
이것은 1월 말 선조 임금의 발언에서 확인된다. 실록 1597년 1월 27일, 선조 임금은 부하 장수 안위의 공을 이순신이 차지하려 했다는 식으로 비난하고, 남의 전공을 빼앗았으니 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식으로 이상하게 논리를 전개했다. 그 뒤로 이순신이 어떻게 됐는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이번 부산포 왜영 폭발사건은 명백히 이민호가 일으킨 일이었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시도하는 중이더라도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런 계획을 진행 중에 실제 폭발이 일어나고, 실행 주체와의 연락이 끊겨 상부에서 성공한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좋게 말해서 그렇다는 이야기지 이런 일은 웬만해서는 남의 전공 빼앗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1596년 12월의 부산포 왜영 방화사건의 경우 조정 대신들 모르게 완벽히 비밀리에 작전이 실행되고, 전공을 훔치려는 자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특이했다.
“판옥선보다 크고 돛이 안 달린 검은 배라면 자네가 타는 배밖에 없네.”
“윽! 예. 할 수 없군요. 저번 해전이 끝나고 고산목으로 돌아갈 때 대마도 이즈하라, 그러니까 엄원 포구에서 왜군이 쌓아놓은 군량을 불태운 것도 저입니다. 이번에 부산포에서 화약을 터뜨린 일도 마찬가집니다. 고산목에서 방답으로 오는 길에 부산포에 먼저 들러서 화약이 쌓인 곳에 포 한 방을 쏜 것뿐입니다.”
“역시 자네는 안 보이는 곳에서도 열심히 싸우고 있었군 그래. 통지 자네의 우국충정에 내 진정으로 감탄했네.”
“하지만 남들이 공을 탐한다 해도 내버려두십시오. 제가 고산국 전선을 타고 다니며 싸우고 있다고 소문나면 안 됩니다.”
“알겠네. 이해하겠네.”
말 나온 김에 잘 됐다 싶어 이민호가 절영도의 해안 포대에 대해 이순신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왜적들이 절영도 언덕에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을 배치해 제 배에 포를 쐈습니다. 왜적도 아닌 조선인들이 포를 다루기에 한 방 맞아 피해가 조금 있었습니다. 혹시 다음에 부산포를 공격할 때 주의하셔야 합니다. 간수군들을 먼저 상륙시켜 포대를 제압한 다음 부산포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으음. 포구 앞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면서 쏘는 대포라. 그것도 하필 대형 화포인 천자, 지자총통이라니 곤란하군 그래.”
“역시 이번에 부산포를 치러 가실 예정이었군요.”
“반드시는 아니고 상황을 봐서 쳐야지. 지금 경상도 바다에 들어와 노략질 중인 왜선이 많아서 이번에는 힘들지도 몰라. 하지만 부산포를 쳐서 왜군의 군량 공급을 끊어야 이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겠나?”
왜군의 상륙 교두보인 부산포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도 수군에게 부산포를 공격하라고 임진년부터 수십 차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20여 척에 불과한 전라좌수영 함대가 출동할 때마다 중간에서 왜선들을 만나고, 나중에는 왜군이 안골포 등 해안에 왜성을 쌓음으로써 조선 수군의 활동이 제약되고 말았다. 이순신이 작정하고 부산포를 공격한 것은 두 번이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경상도 남쪽 바다를 침범한 왜선들을 빨리 정리하고 일부 판옥선들이 가덕도에서 낙동강을 막는 사이에 주력 함대가 부산포를 쳐야 할 것 같습니다.”
“전라우수영에서 이번에 만약 40척 넘게 와준다면 충분히 가능할 걸세. 하지만 순찰사가 섬진강과 전주를 지켜야 한다면서 전라우도의 수군을 많이 빼갔네.”
“그럼 안 되는데 말입니다. 조정에 장계를 올려 육군에서 수군 병력을 빼가지 말라고 건의해 주십시오. 그리고 순찰사께 말씀드려 전라우도에서 수군 진포 몇 개를 좌수영으로 넘겨받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현재 전라좌수영이 규모가 너무 작아 작전에 지장이 많은데 이런 식으로 수군을 자꾸 빼앗기면 앞으로 아무 것도 못합니다.”
“맞는 말일세. 하지만 육군도 지금 너무 다급하니까 내가 나서서 강하게 저지할 수도 없고, 고민이 많다네.”
예정보다 며칠 빠른 5월 29일 새벽에 전라좌수영 함대가 여수에서 출항했다. 전라우수영 함대와 6월 3일에 만나 함께 출항하기로 약속했으나 왜선들이 점점 경상도 서쪽 해역으로 몰려온다는 급보를 받고 긴급 출항할 수밖에 없었다. 판옥선 여섯 척을 전라좌수영 방어를 위해 남기고 거북선 한 척을 포함한 전선 23척, 대형 외륜선 8척이 화살촉 모양의 첨자찰진을 형성하고 동쪽으로 빠져 나갔다.
경상우수영 함대의 판옥선 20척이 남해현 앞 바다에 떠서 기다리고 있었다. 경상우수영에 판옥선 네 척이 더 있었지만 아직 수리를 마치지 못했고 격군 숫자도 부족해 20척만 출동할 수 있었다. 아직 캄캄한 새벽인데도 사후선과 탐망선이 수시로 경상우수영 좌선에 왕복하면서 왜선의 동향을 전하고 있었다.
경상우수사 오응정이 사후선을 타고 전라좌수영 좌선으로 접근했다. 그 사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부장급 이상 지휘관을 소집하기에 이민호와 이응화도 작은 사후선을 타고 좌선에 올랐다.
“이 동지 영감! 처음 뵙겠소. 전라좌수영에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그때마다 이 동지께서 안 계셔서 말이오.”
“경상우수백께 처음 인사 올립니다. 그 동안 다른 곳에 있어서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품계도 높으신 분이 제게 어인 인사란 말이오? 하하! 우리 앞으로 잘해봅시다. 이 동지께서 이렇게 나타나셨으니 왜적들에게 악몽이 시작되겠습니다, 그려.”
경상우수사 오응정과 이민호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경상우수영 함대는 오응정의 노력 덕에 빠르게 재건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동안 전라좌수영과 해동상단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민호는 남들 모르게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첨지에서 벗어나나 싶더니 이번에는 동지였다. 동지중추부사가 정식 명칭이고 약칭이 동지인데 마치 독립군이나 공산당원이 동료를 부르는 호칭 같아 들을 때마다 좀 거슬렸다. 물론 同志와 同知로 한자는 달랐다.
“이 동지 영감! 올해는 유채 작황이 안 좋아서 필요한 양을 못 채울 것 같소. 그리고 전쟁이 났으니 아무리 유채밭이 원래 황무지라 해도 감자나 고구마를 심어서 식량을 조금이라도 더 마련해야 할 것 같소.”
1차 출정 때 육전에 동원됐던 순천부사 권준이 이번에는 수군으로 와서 핵심 보직인 중위장을 맡았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원래 위치인 전부장으로 돌아갔다.
“아! 괜찮습니다. 소포의 해동상단으로 보내주시면 약속대로 일만 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혹시 백미 10만 석을 1년 동안 보관할 창고가 순천부에 있다면 그 중에 2만 석을 순천부에 드리겠습니다.”
“만들겠소! 창고가 없다면 당장 만들어야지요. 고맙소.”
순천부사 권준이 이민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창고 건물 건축비와 관리비가 많이 들므로 전체 쌀의 5분의 1을 준다 해서 비싼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순천부 입장에서는 남는 인력을 창고 경비나 관리에 동원할 뿐이니 손해 볼 것은 전혀 없었다. 이민호는 이런 식으로 쌀을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방에 분산시켜 보관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다른 수령, 장수들과도 쌀 보관 문제를 협의했다. 기근이 심하다는 내년에 한꺼번에 쌀을 수송하기 어려우니 남해안 창고에 미리부터 쌀을 들일 계획을 이렇게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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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작은 해전은 간단히 넘어가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