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6 19.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 =========================================================================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에잇! 물론입니다! 모든 판옥선에 설치하겠습니다!”
이민호가 며칠 고생할 각오하고 씩 웃었다. 이번 사천해전에서 방탄유리를 씀으로써 이순신이 총상을 입어 전쟁 기간 내내 고생하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드디어 부친 이응화의 소원 하나를 풀어준 셈이었고, 이민호도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방탄유리 제작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판유리를 연화점 이상으로 가열한 다음 실보다 가늘게 뽑아낸 은으로 만든 그물을 유리 중간에 끼워 넣고 압축공기로 급냉 처리한 강화유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강화유리판 사이에 투명한 민어 부레풀을 접착제로 사용해 여러 겹을 붙여 방탄유리를 만들 수 있었다. 조총 사격 시험을 통해 세 발을 견디도록 만들려니 현대의 방탄유리보다 무식하게 두꺼워졌다.
이민호는 조만간 고용인이 되어 중요한 일을 해줄 이순신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이 염가 봉사하기로 했다. 이순신은 반드시 물건 값을 치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절대로 방탄유리의 제 가격을 말해주지 않았다. 일단 강화유리만 해도 일반 판유리 가격의 열 배 정도는 받아야 본전 수준이었다.
“유리 값이 비싸지 않나?”
“모래를 녹이고 석회석을 부어서 간단히 만듭니다.”
“재료값이 싸네? 그걸 통지 자네는 비싸게 팔지 않나?”
“그래서 기술이 중요한 겁니다. 하하하!”
임진왜란 통틀어 조선 수군 전사자 수가 극히 적은데 비해 조총탄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입은 선장급 지휘관 비율이 꽤 높았다. 사거리가 짧은 일본 화살에 맞아 죽거나 다친 사부, 격군들이 있으니 왜선에서 판옥선 선장에 대한 조총 저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갑판 높이가 낮은 왜선에서 사부를 맞히려고 쏜 총탄이 빗나가 높은 장대에 서 있는 선장을 대신 맞힐 가능성도 있었다. 학익진을 형성한 판옥선의 함포가 중앙의 한 점을 향해 일점 집중사를 하듯이, 여러 배에 흩어져서 조총을 쏘는 왜군 철포병들에 의해 의도치 않은 일점 집중사가 이뤄지는 지점이 바로 판옥선 장대였다. 다시 말해서 상갑판의 여장 뒤에서 활이나 총을 쏘는 수군 병사가 왜군 조총의 표적이 될 때, 그 병사 뒤에는 항상 선장이 위치했다.
연합함대는 그날 밤 사천 선창에서 10리쯤 남쪽에 위치한 사천 모자랑포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닻을 내렸다. 저녁을 먹기 전에 이민호가 탄 외륜선에 사후선이 찾아오더니 꼬마 아가씨를 내려놓았다.
적에게서 조선인 포로를 구하면 일단 대장선에 보내는 것이 원칙인 것처럼, 포로를 구한 장수가 그 포로의 구호와 귀환까지 책임져야 하는 관습이 있었다. 갑작스레 혹을 달게 된 이민호로서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저, 아버지. 며칠만 꼬마 좀 데리고 주무실래요? 심부름도 시키고 심심하실 테니 말벗도 하세요.”
“싫다! 그 꼬마가 네 방에서 자야 밤에 조용해질 것 같다. 밤에는 제발 잠 좀 자자 이놈아! 전쟁터에 나온 며느리들 피곤할 테니 적당히 좀 괴롭혀라.”
이민호는 외륜선을 만들 때 방음 문제를 신경 썼어야 했다. 선미루와 선수루에 방을 여러 개 붙여서 배치하다 보니 옆방에서 낸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너무하십니다! 어서 손주를 보고 싶다면서요? 제게 기회를 주셔야 손주를 보여드리죠.”
“전쟁터에서 임신하면 손주 성격이 나빠질 지도 모르니 나중에 편안한 곳에서 애를 만들어라.”
“저는 매일 밤 노력하고 있습니다. 임신에는 운도 작용하지만 꾸준한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아직 하나도 못 낳은 녀석이 노력은 개뿔! 며느리가 여럿이니 밭을 탓할 수도 없겠다. 혹시 너 씨는 괜찮은 거야?”
이민호가 부친과 실랑이하는 사이 민희와 민영이 꼬마를 씻긴 다음 이민호의 방인 부선장실에 데려와 밥을 먹였다. 또랑또랑한 눈으로 세 사람을 지켜보던 꼬마는 민희와 민영이 잘 돌본 덕택에 금방 말문을 열게 되었다.
“엄마 찾아주세요. 흑!”
“어디서 엄마하고 헤어졌니? 집이 어딘지 혹시 기억 나?”
“엄마 찾아주세요. 으앙~ 우리 엄마 돌아가셨어요.”
“저런! 쯧쯧!”
민희와 민영이 펑펑 울어대는 꼬마를 토닥이는 사이 이민호는 이불을 머리 위까지 올리고 억지로 잠에 빠져 들었다. 꼬마가 불쌍해서 뭐라 하지는 못했지만 돌봐줄 사람을 구해서 얼른 떠넘길 예정이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웬일로 이민호가 침대 밑에 떨어져서 자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는 민희와 민영, 그리고 꼬마 셋이서 서로 꼭 껴안고 자고 있었다. 한 침대에 넷이어 자다가 좁아서 이민호만 굴러 떨어졌던 것 같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애가 생기면 남편은 찬밥이 된다더니 맞는 말이었다. 이민호는 무척 섭섭했지만 셋 다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자고 있어서 차마 깨우지 못했다. 아침 발기 때문에 바지를 입기 곤란한 경우는 참으로 오랜만에 겪었다.
6월 2일 오전 왜선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연합함대가 당포로 향했다. 현대의 통영 산양읍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 곳이며, 북동쪽으로 미륵산 정상이 보이는 곳이었다.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당포 선창에는 왜선 아다케가 한 척, 세키부네 대선이 8척, 중선 급에 드는 세키부네와 소선에 해당하는 고바야 합 12척 해서 21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커다란 아다케의 누각에서 비단 휘장이 바람에 휘날리는 사이로 왜장이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비단 휘장에 새겨진 황(黃) 자는 어느 가문의 문장인 것 같았다. 그리고 주변에 세워진 군기의 동그라미 안에 상(上) 자가 있으니 구루지마 수군의 무라카미 군기가 맞았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다른 군기도 섞여 있어서 확실히 연합세력임을 알 수 있었다.
왜군들은 대부분 배에서 내려서 일부는 당포만호진 성에 들어가 노략질을 하다가 급히 배로 돌아와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일부는 당포 입구 양쪽 높은 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연합함대를 발견하고 조총을 발사했다.
“지형이 영 안 좋습니다.”
“민호야! 이곳에서 부상자가 꽤 많이 발생할 거다. 민호 네가 어떻게 좀 해주라.”
예전에 이 해전에 참가했던 이응화도 걱정이 많았다. 이민호는 부산포에 들어갔을 때 절영도 해안 포대에서 쏘는 화포가 몹시 위협적이었던 것이 기억났다. 이민호가 고민하고 있는데 좌선 기패관을 맡은 송희립이 사후선을 타고 외륜선으로 다가왔다.
“이 동지 영감! 좌수사 영감의 명령입니다. 유군은 좌우 높은 언덕에서 조총을 쏘는 왜적을 견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임무를 맡겨서 미안하다는 말씀도 전해 달라 하십니다.”
어려운 것으로 끝나면 상관없는데 전공을 세울 기회가 별로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조총을 쏘는 왜군은 몇 되지 않았으나, 그들을 잡으려면 아군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이봐요, 송 군관. 저놈들이 높은 곳에 있어서 상륙해야겠는데요?”
“견제만 해도 된다고 하시지만 판단은 이 동지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 퍼퍼펑!
이때 조선 수군의 포격이 시작됐다. 이순신이 이응화가 아닌 이민호에게 명령을 한 것은 상륙작전을 바란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함대가 당포에 정박 중인 왜선들을 신나게 두들기는 사이 이민호는 간수군들을 이끌고 좌우 언덕에 상륙했다.
언덕 위에서 왜군들이 끊임없이 조총을 쏴댔다. 이민호는 빗발치는 조총탄을 뚫고 헉헉거리며 겨우 언덕에 올라갔다. 그러나 왜군들은 이미 다 도망가서 하나도 잡지 못했다. 철포병이 보유한 화약이 떨어졌거나 조선 수군에게 공격을 당해 다급해진 왜군 대장이 급히 불러서 퇴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도중에 간수군 두 명이 팔과 어깨에 조총탄을 맞아 외륜선으로 후송됐다. 간수군들이 가슴에 방탄판을 받치고 일차대전 영국군 비슷한 챙이 넓은 철모를 써서 외륜선에서 싸울 때는 거의 문제가 없었지만, 오르막을 공격할 때는 어깨가 전면에 노출되는 문제가 생겼다.
“어이가 없네. 땅에서 왜군이 도망가는 꼴을 또 보게 됐다.”
“누구든 목은 소중하니까요. 도련님, 전투 중에 너무 앞서 나가지 마세요.”
“쳇! 알았어.”
산길을 급히 오르느라 민희와 민영도 좀 지쳤다. 이민호는 병력이 언덕에 집결할 때까지 조금 쉬기로 했다.
반대쪽 언덕도 마찬가지로 간수군들이 왜군들을 쫓아내는데 그쳤다. 다행히 건너편에서는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수군 연합함대가 왜군을 신나게 때려 부수는 것을 잠시 구경하다가 부대를 정렬시켰다. 이민호가 맡은 당포 서쪽 언덕에는 외륜선 네 척에서 간수군이 3개 대씩 내려서 12개 대, 300명이 모여 있었다.
“자! 이제부터 당포성을 치러 가겠다. 척후 앞으로, 그 다음 첨병 대 순으로 정렬해라. 바로 출발하겠다. 숲이 무성하니 적의 매복에 유의하라.”
“동지 영감! 좌수사 영감께서 어서 승선하시랍니다.”
당포만호진 성을 공격하기 위해 막 출발하려는데 언덕 밑까지 달려온 간수군이 큰소리로 불렀다. 김이 팍 샌 이민호가 감정을 실어서 물었다.
“왜에에?”
“남쪽 바다에 왜선 20여 척이 나타났습니다.”
“젠장! 포위되겠다. 얼른 내려가자.”
결국 이민호는 소득도 없이 똥개 훈련만 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여러 번 작전을 수행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전공은 하나도 못 챙기고 부상자만 두 명이 나왔다. 그래도 언덕을 점령하고 조총병들을 쫓아냈으니 패배는 아니었다.
이민호가 병력을 퇴각시켜 기껏 외륜선에 탔는데 이것 역시 똥개 훈련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나타난 왜군 함대는 죽어라고 도망갔고, 뒤늦게 추격에 나선 연합함대는 왜군 함대를 놓치고 말았다. 밤새도록 왜군 함대를 찾아다녔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숨바꼭질이 끝난 저녁에 연합함대는 서쪽으로 물러나 남해도 북쪽 창선도에 정박했다. 마침 해동상단 소속의 중형 외륜선 네 척이 보급품을 전해주기 위해 서쪽에서 오는 길이었다.
상선에서 내린 보급품을 대형 외륜선과 판옥선에 실어 나르고 조선 수군 및 간수군 부상자와 왜인 포로들, 아직도 경상도 남해안에 남아 있다가 판옥선에서 구한 피난민들을 전라좌수영으로 후송하기 위해 태웠다. 보급에 나서준 상선들 덕택에 연합함대의 작전시간이 몇 배로 늘어날 수 있었다.
“이 참에 저 꼬마도 좌수영으로 보내지 그래? 전쟁터는 위험한 곳이야. 아이가 있을 곳이 못 돼.”
이민호가 은근슬쩍 민희와 민영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둘이 이민호의 희망을 짓밟았다.
“설비가 언니들하고 같이 있고 싶어 해요. 그렇지, 설비야?”
“응! 설비는 언니들이 좋아. 오빠는 설비를 버리려고 했으니 싫어!”
삼대독자 이민호는 오빠라는 말을 처음 듣고 기뻐했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그,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언니, 오빠야?”
“설비하고 열 살 차이도 안 나니까요.”
“몇 살인데? 웬만하면 이모라고 부르든지 해.”
“몸집이 작아도 벌써 열한 살이래요. 주인님은 평소와 달리 호칭에 민감하시네요. 설마 이 어린애한테 눈독 들이는 것은 아니시겠죠?”
“제발 부탁인데 다른 곳에 보내면 안 될까?”
민희와 민영을 못 안는 것만 해도 서러운 이민호는 이제 소아성애자라는 의심까지 받게 생겼다. 주변을 지나는 수군들이 힐끗거리며 자기들끼리 뭐라 수군거렸다.
“저희는 주인님을 호위해야 하기 때문에 설비를 키울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런데 주인님이 궁궐을 비웠을 때 귀인 마님들이 많이 외로워하세요. 그건 모르셨죠? 만약 궁궐에 설비처럼 활달한 아이가 있다면 분위기가 많이 밝아질 거여요.”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고, 소포에서 연락선이 뜰 때 태워서 궁궐로 보내.”
“어머! 주인님 너무 냉정하시다.”
민희와 민영이 섭섭하든 말든 이민호는 혹을 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전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다.
상선에서 짐을 하역하고 사람을 태우고 하는 정신없는 작업이 진행되는 중에 이민호는 해동상단 대방을 바닷가에서 따로 만났다. 소포 분점주가 아닌 대방이 와서 이상하다 했더니 역시 몇 가지 중요한 보고를 할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