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29화 (78/1,000)

00129  19.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  =========================================================================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왜선에서 얻은 전리품을 살펴보면 왜적들은 분명 경상도 남해안의 지도를 갖고 있단 말일세. 비록 부정확하다지만 충분히 해로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쓸 만한 지도일세.”

“어쩌면 우리 수군이 동쪽에서 활동하는 동안 서쪽으로 살짝 빠져 나가서 경상우수영이나 전라좌수영을 공격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전략에 밝은 이억기가 의견을 제시했고, 매사에 신중한 오응정도 동의했다. 조선 수군이 주요 전력인 함대를 출동시킨 사이 텅 빈 수영을 왜군들에게 털린다면 차후 작전에 나서기 어려워질 것이다. 연합함대가 급히 돌아온다 해도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면 되니 지상전에 강한 왜군이 충분히 선택할 만한 전술이었다.

이 당시 전라 좌수영과 우수영은 320명, 각 수군 진포는 200명 또는 150명이 성에 남아서 지키도록 규정이 만들어져 있었다. 수영과 수군 진포는 각기 분산됐으니 왜군이 집중해서 공격한다면 쉽게 함락할 수도 있었다. 만약 빈집털이를 당한다면 남의 군영에서 쌀을 꾸거나 아직 익지 않은 곡식을 베어 먹으면서 싸워야 할 수도 있었다. 이민호가 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수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백성들이 흩어질 우려가 있었다.

“당항포가 워낙 길게 육지 안으로 이어져서 왜적들이 이를 서쪽으로 빠져 나가는 해협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소?”

이응화가 의견을 말했지만 적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라 이민호 빼고는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전쟁 초반 부산포와 김해에 상륙한 왜군은 3로로 나누어 곧장 한성으로 향했다. 왜군의 침략과정을 살펴볼 때 왜군은 사전에 첩자를 파견해 조선의 지리에 대해 철저히 조사, 연구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육지의 경우였고, 이 시대에 정확한 해도를 만들기는 어려웠다. 해도를 보면서 항해하다가 착각해서 당항포로 잘못 들어갈 수도 있었다. 이는 1594년 3월 왜선 31척을 불태운 2차 당항포해전으로 입증됐다.

“일단 견내량을 지나 진해로 갑시다.”

이순신이 정리하고 연합함대를 출항시켰다. 탐망선이 조심스럽게 견내량을 지나면서 해협 양쪽을 수색했다. 견내량 서쪽은 야산이고 동쪽 거제도 방향은 너른 벌판이 있는데 적이 매복한 곳은 없었다.

탐망선에서 이상이 없다는 신호가 오자 대소 150여 척에 달하는 함대가 거제도와 고성 사이의 좁은 해협인 견내량을 지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인 것을 떠나 해협을 통과하는 시간도 한참이나 걸렸다.

“아버지! 그런데 왜 진해로 간다는 거죠? 왜선은 당항포에 있다지 않습니까?”

“당항포 앞이 진해잖아. 저번에 적진포에서 왜선을 잡을 때 진해 바로 앞을 지나가지 않았느냐?”

“그랬던가요?”

이민호는 옛날 사람들의 지리적 스케일이 크다고 생각했다. 일반인에게 진해라고 하면 벚꽃놀이를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이민호는 해군 사관학교와 옛날의 해군 작전사령부, 그리고 잠수함전단을 떠올렸다. 해군 작전사령부는 부산으로 옮겼다.

견내량을 지난 연합함대의 수십여 판옥선들은 돛에 바람을 가득 안고 북쪽으로 항해했다. 이민호는 자꾸 북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히 진해로 간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함대는 창원 방향으로 북진하고 있었다. 지난달에 해전을 벌였던 적진포 앞을 지나자 북쪽 섬들 사이로 바닷가 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가 진해다.”

“네......”

“크크! 몰랐구나.”

옛날 진해의 위치는 대동여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대의 창원시 진해구가 옛날의 웅천이며, 이 시대 진해현은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일대였다.

“기마대 천여 기가 진해성 밖 들판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기치로 미루어 아군 같습니다.”

선두무상이 보고하자 연합함대가 일시 정지했다. 이순신이 사후선을 보내 알아보려고 하자 이민호가 자원해서 대형 외륜선을 해안에 붙였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기마병이 진 친 곳으로 향했다.

남도의 기마병이라 함경도 기병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정예 기병들이었다. 이민호가 보기에 이들이 그 동안 쌓은 실전 경험도 풍부한 것 같았다.

병력은 천여 기라는데 말과 사람이 함께 있으니 3천이 훨씬 넘어 보였다. 이민호가 말을 타고 접근하자 군막에서 장수들이 나왔다. 이민호가 장수들 중 하나를 알아봤다.

“유 군수 영감! 이곳에 어인 일로 계십니까?”

“오! 이 동지 아니시오? 오랜만이오. 오! 수군과 함께 오셨구려.”

“예. 3도 연합함대가 당항포의 왜적을 치러 왔습니다. 유 군수께서는 여기서 어떤 적을 노리고 계십니까?”

함안군수 유숭인이 이민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민호는 유숭인과 보급이나 가족의 피난 문제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무관인데도 군수를 역임하느라 문반 당상관 품계를 가진 그는 전쟁이 나면서 가족을 한성의 본가로 보냈다. 그러나 왜군이 먼저 진군하면서 한성으로 가는 길이 막히고 중도에 식량도 떨어지자 온가족이 길가에서 울고불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하동에서 배를 타고 전라좌수영에서 피난 중이었다.

실록에 기록된 김성일의 치계에서는 함안군수 유숭인이 함안 백성 100여 명을 이끌고 왜군을 공격해 쫓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경상감사 김수와 함께 근왕하러 한성으로 향하는 바람에 함안이 왜구 소굴이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유숭인은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천여 기병을 거느리며 싸우고 다녔다.

기마병이 총 1,100기라고 했는데 자기 고을을 적에게 점령당한 일개 군수가 거느릴 병력이 절대 아니었다. 유숭인은 경상우병영 5위장 중의 한 명이라 다른 고을의 기병도 함께 지휘했기 때문에 이런 대규모 병력 유지가 가능했다. 수하 장수들 중에는 사천현감 정득열, 가배량권관 주대청 같은 경상우수영 수군 장수들도 있었다. 주대청은 진주성을 지키다가 나왔다고 한다.

“소관은 진해현을 공략하러 왔는데 왜적이 이미 배를 타고 도망가 버렸소이다. 당항포에 왜선 26척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야습을 할까 고민 중이라오.”

“그렇다면 수군과 함께 공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물론 삼도 연합함대의 주장이신 전라좌수사께 여쭤봐야 하겠지만 유 군수께서 합세하시면 기뻐하실 겁니다.”

“저야 물론 좋지요. 사실 적세가 너무 강해서 함부로 칠 생각을 못하고 있었소. 기마병이 수군 군선을 공격하는 것은 영 껄끄럽지 않소? 그런데 당항포의 저 왜놈들은 수군 주제에 남무묘법연화경이라는 깃발을 달고 있소. 그건 이 동지가 저번에 발간한 책에 나오는 청정의 깃발 아니오?”

“그렇다면 저들은 수군이 아니라 가등청정의 육군이 배를 타고 이동한 것입니다. 육지에서 싸울 때도 절대로 적이 수군이라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잘 알겠소. 이 동지께서 우리가 합세해도 되는지 주장께 여쭈어 주시오.”

이민호가 좌선으로 돌아가 경상우병영 기마병의 합세 사실을 알렸다. 이순신은 무척 기뻐하며 여러 가지 지시를 내렸다.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도망가면 곤란했는데 기마병 천여 기가 합세해주다니, 아주 잘 됐네. 통지 자네는 병력을 이끌고 저기서 하선해서 기마병과 합세해주게. 자네 춘부장께는 이 좁은 물목을 배로 지켜달라고 전해주게. 나머지 배들은 즉시 당항포로 가서 왜선들을 쳐부수겠네.”

“알겠습니다!”

대형 외륜선 한 척마다 탑승한 1개 려 5개 대 중에서 이번에도 3개 대씩 뽑아 총 600명을 당항포로 들어가는 길목의 북쪽 해안에 상륙시켰다. 적진포해전에서 왜군들을 몰아붙여 항복을 받아냈던 작은 반도의 바로 북쪽이었다.

삼도 연합함대는 벌써 당항포로 진입해 왜선들에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유인 작전 같은 건 없었다. 작전 목표는 왜선을 부숴 왜군들이 배를 버리고 지상으로 도망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민호는 간수군들을 둘로 나눠 한 부대는 당항포의 북쪽 길로 보내고, 나머지 이민호가 직접 지휘하는 300명은 해안을 따라가는 길에 배치해 지상전 채비를 갖췄다. 간수군들을 나눠 이동시키는 사이 진해현 들판에서 진을 철거한 기마병들이 북동쪽에서 몰려왔다. 이민호는 말을 타고 유숭인 옆에 서서 당항포에서 왜군들이 쫓겨 오길 기다렸다.

“이 동지께서는 왜군이 패해 이곳 동쪽으로 온다고 확신하시는 것이오? 사실 나는 말이오. 조선 수군이 왜군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수군이 왜선 몇 척을 잡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지금 당항포에 정박한 적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요.”

“반드시 우리 수군이 이길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배를 불태우면 왜적들이 갈 곳이 없지 않습니까? 남쪽은 바다, 북쪽은 진주성입니다. 우리는 편히 기다리다가 수군에게 얻어맞고 도망쳐오는 놈들을 때려잡으면 됩니다.”

- 퍼벙! 펑!

멀리서 포성이 연속 울리며 아련한 진동이 이곳까지 메아리쳤다. 유숭인이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기마병이 왜선에 탄 적을 공격할 방법이 없으니 지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저쪽에서는 전쟁이 한창인데 우리는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야 하다니, 전혀 새로운 경험이오. 수군들에게 미안한 기분이 드오.”

“유 군수의 병력은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서 실컷 활약하실 수 있으니 기대하십시오.”

간수군 300명과 기병 1,100명은 수군과 왜군이 싸우는 한나절 동안 기다리면서 연신 하품을 해댔다. 이민호는 기마 척후병 둘을 외륜선이 정박한 곳으로 보내 밥을 해오라고 시켰다.

한 시간쯤 지나 외륜선에서 밥을 해서 주먹밥과 육포를 보내주었다. 먹을 사람이 많아 기마 척후병 네 명은 물론 민희와 민영까지 동원돼 두 번이나 왕복하고서야 다들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밥 안에 몇 가지 반찬과 양념을 넣고 깻잎으로 싼 주먹밥이었다. 이민호가 깻잎을 벗기고 김에 싸서 먹으라고 기마병들에게 알려주었다. 이런 주먹밥은 경상우도의 기마병들이 생전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정말 맛있소. 이 동지가 계시는 곳에는 비싸지 않은 재료로 만든 산해진미가 넘쳐난다는 소문이 있던데 과연 그렇소이다.”

“같은 재료라도 맛있게 먹어야지 입과 배가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주먹밥은 어쩔 수 없이 먹는 최악의 야전 식사였다. 목이 멘 이민호가 수통을 열고 물을 들이켰다. 유숭인도 호리병에 담은 물인지 술인지 모를 액체를 마셨다. 유숭인이 그 액체를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감탄사를 내뱉는 것이 몹시 수상쩍었다.

“김해와 창원이 왜적에게 함락됐다고 들었습니다. 경상우도 곳곳에도 왜적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우병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 김해와 창원의 경우 왜적들이 떼로 몰려와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병사는 지금 거창에 계시오.”

이때 경상우병사는 조대곤이었는데 임진왜란 초기 김성일로 교체됐다가 다시 조대곤이 맡았다. 늙고 겁이 많다고 평가가 나쁜 인물이었다. 조대곤은 현재 거창에 있는데 휘하 군졸들이 다 도망가서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거창은 김면의 의병군이 주둔하고 산척 7천여 명이 활동하는 곳이라 경상우도에서도 무척 안전한 편이었다. 산척의 지도자들이 홍학장군, 청학장군이라고 자칭하고 산길마다 매복해 왜군을 많이 쏘아 죽였다는 소문을 이민호도 들었다.

“유 군수! 고성과 사천 같은 경상도 남해안에 왜적들이 100명 단위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수군이 지나갈 때 마주쳤으면 잡았을 텐데, 그때마다 숨거나 도망 다니는 모양입니다. 유 군수가 그들을 잡은 다음 장계를 올리면 위에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음. 그것은 원래 병마절도사가 직접 하거나 아니면 여러 장수들에게 나눠서 지시해야 할 일이지요. 이 동지께서는 지금 나더러 경상우병사를 해보라고 권하는 것이오?”

현재 경상우도에서 활동하는 장수들 중에서 함안군수 유숭인과 곤양군수 이광악, 거제현령 김준민 등이 가장 뛰어난 무장들이었다. 진주판관 김시민은 파직당한 진주목사 이경 대신 병력 천여 명으로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밀양부사 박진에 대해서는 평가가 많이 엇갈렸다.

이민호는 원래 역사에서 1차 진주성 전투 때 진주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문 앞에서 최후까지 싸운 경상우병사 유숭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병사가 진주성에 들어올 경우 주장이 바뀌어 호령이 통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하여 진주목사 김시민은 유숭인의 입성을 거부한다. 유숭인은 왜군의 대군을 맞아 진주성 밖에서 왜군들과 싸우다가 전멸했다.

그런데 그 전에 경상우병사 유숭인은 2천여 병력을 이끌고 노현과 창원성에서 왜군 2만여 명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계속 밀리다가 마지막으로 진주성을 찾았다. 유숭인이 며칠 시간을 벌어준 덕택에 진주성은 방비를 단단히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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