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8 21. 웅치전투 =========================================================================
“그건 뭐하러 가져왔어?”
“이곳으로 왜군이 일만 명이나 몰려온다면서요? 급하면 써야죠.”
계복은 유탄발사기가 달린 소총을 들고 유탄 20개를 꽂은 탄입대를 좌우로 교차해서 어깨에 메고 있었다. 마치 6.25때 중공군이나 산적화된 남미의 좌익 게릴라 같은 모습이었다.
“유탄 쏘는 장면을 남들이 보면 대단하게 생각할 거야. 신기한 무기라고 높은 장수가 달라면 어떡할래?”
“개인 무기를 어떻게 빼앗아갑니까? 장수들 중에서 통제 대감 빼곤 도련님 품계가 제일 높을 걸요?”
“그런가?”
삼도순변사 신립이 전사한 지금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 등의 무관직을 가진 무관들 중에서 통제사와 이민호 부자 빼고는 정2품이 없었다. 그러나 도원수 김명원이 정2품 상계 정헌대부였으니 문관 출신이지만 장수라고 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이긴 해전과 달리 지상전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관군이 우르르 도망가 버리면 일만의 왜군 앞에 우리만 남을 수도 있어요. 도련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런 무기가 노출되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민호는 부산포해전에서 대형 외륜선에 하나밖에 없는 함포를 쓰기도 했다. 그런 강력한 무기를 남들에게 들키기 싫었지만 수군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순신은 부산포 승첩 장계에서 그 함포가 일반 화포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사가 가능한 일반 불랑기포라고 묘사해주었다. 전쟁 시기에는 갖가지 신무기가 쏟아지고, 그와 동시에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므로 사실과 과장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럴 때는 당연히 같이 도망가야지. 나 혼자 결사 항전할 생각은 없다. 불리할 때는 물러설 줄도 알아야지.”
“도련님! 남들 듣는 데에서는 그런 말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나도 바보는 아니거든?”
“정말요?”
계복이 소리 내서 웃었다. 이민호가 그런 계복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찰싹~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으아! 왜 때려요?”
“찰지구나.”
이민호는 간수군들을 이끌고 전주를 지나 7월 2일에 웅치에 도착했다. 웅치, 즉 곰티는 전주 동쪽, 현대 지명으로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에 있는 언덕길이었다.
웅치는 의외로 전주에서 40리 길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었고, 이는 전라도 영역 깊숙이 안쪽이었다. 전주 북동쪽이 산악지역이라 우회로가 없기 때문에 왜군이 전주를 공격하려면 이곳을 지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서 오십시오, 지사 대감! 이토록 불리한 곳에 군사들을 이끌고 도와주러 오시다니, 정말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해남현감 변응정, 의병장 황박 등 주요 장수들이 이민호를 마중 나왔다. 여러 장수들은 웅치 이곳이 죽을 자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민호가 지원을 오자 많이 놀라면서도 무척 기뻐했다.
“정 군수가 주장이시오? 우리 함께 왜적을 막아내고 반드시 살아남읍시다.”
“물론입니다. 용명을 떨치신 이 대감께서 오셔서 소장과 수하 병졸들은 무척이나 든든합니다. 대감께서 주장을 맡아주시길 청합니다.”
“아니오. 늦게 왔으면서 지휘체계를 흩뜨릴 수 없으니 정 군수께서 계속 주장을 맡으시오. 간수군을 유군으로 삼아 대장인 정 군수가 필요할 때마다 활용하면 좋겠소. 물론 정 군수가 유군에 군령을 내리면 내가 직접 지휘하겠소.”
“배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반드시 승리해서 대감께 보답하겠습니다.”
품계나 직급은 이민호가 훨씬 높았지만 전투를 앞두고 주장을 함부로 바꿀 수는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정담을 중심으로 모든 방어준비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민호가 이끄는 병력은 사병(私兵)이나 다름없는 간수군인데다가 정담이 이끄는 군세에 비해 병력도 적었다. 그리고 이민호가 주장으로 나서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민호는 아직은 자제하기로 했다.
“이 판관 아니시오? 이 목사 이 양반은 판관께 군사를 맡겨두고 도대체 어디에 계시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승서를 축하드립니다, 대감. 목사께서는 남원과 그 동쪽 운봉의 방어를 맡고 계십니다.”
이민호가 나주판관 이복남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나주목사 이경록은 군사를 나눠 일부는 직접 이끌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운봉을 지키고 있었고 일부는 나주판관 이복남에게 주어 웅치에 배치했다고 한다.
“중경 형님도 바쁘시군요.”
“지사 대감과 통제 대감께서 승차하신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조정에서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무관들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치와 웅치에서 전투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조정에서는 7월 13일에 나주목사 이경록을 제주목사로, 광주목사 권율을 나주목사로 옮긴다.
이민호는 김제군수 정담의 안내를 받으며 고갯길 주위에 펼쳐진 방어진지를 돌아보았다. 김제, 전주, 함열, 나주 등 여러 지역에서 온 병사나 의병들이 이민호를 호의적인 눈길로 바라보며 환영해주었다. 어느 지역에 살든 조선의 백성이라면 다들 직, 간접적으로 이민호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3단 방어선이라. 하단에서부터 목책을 세워 막다가 적의 공격이 심해지면 차차 후퇴해서 방어선을 두텁게 만들 책략이군요.”
“언덕길에서 방어할 때 가장 기본적인 책략이 아니겠습니까? 적의 주공이 이곳으로 들이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며, 척후를 보낸 결과 실제로 왜적의 대군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병력이 적은데 큰일입니다.”
그래도 이곳 웅치에는 이민호의 병력까지 가세해 3천 명이 넘어섰다. 그에 반해 이치에서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병력은 겨우 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치와 웅치를 지키는 부대들 말고도 조선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부대가 따로 있었다.
“대감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왜군 주력이 웅치와 이치를 공격하는 사이 왜군이 본진을 설치한 금산성을 전라도와 충청도의 관군과 의병이 치기로 했습니다. 5천이 넘는 아까운 병력을 일종의 사석으로 사용한다니 소장은 어이가 없습니다.”
“허! 관찰사 영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소.”
삼도근왕군이 용인에서 어이없게 패해 물러난 이후 전라도와 충청도의 유생들은 전라도관찰사 이광과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을 아주 죽일 듯이 비난하고 나섰다. 지금도 의주로 파천한 조정에 전라도와 충청도 유생들이 보내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었다. 이광과 윤선각을 파직시키라는 주장은 기본이었고, 백의종군을 넘어 심지어 참수하라고 핏대를 올렸다.
의병을 이끄는 자들이 이런 유생들이니 당연히 관찰사의 명령을 받는 관군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전라도방어사 곽영의 부대가 고경명의 의병부대와 함께 행동했지만 치명적인 균열을 만들어서 고경명이 패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충청도도 마찬가지라서 의병들은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이 의병부대를 해산시키는 공작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조헌이 이끄는 충청도 의병은 8월이 되어서야 금산성에 도착하고, 이때는 승장 영규가 승병들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병력도 확 줄어들었다.
결국 이민호가 신경 써야 할 곳은 웅치 한 곳만이 아니었다. 이치의 권율도 적당히 지원해줘야 하고 가능하다면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군이 전멸하지 않도록 도와줘야 했다.
그러나 부친 이응화에게 듣기로 웅치전투와 이치전투, 그리고 금산성전투는 7월 7일부터 거의 동시에 벌어진다고 했다. 이민호가 웅치에서 몸을 빼서 다른 곳을 도와줄 시간이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이민호는 간수군의 지휘를 계복에게 맡겨놓고 일개 대 25명만 이끌고 북쪽의 이치로 향했다. 웅치에서 이치까지 거리는 산길로 100리나 되어 말을 타고 움직여도 거의 하룻길이었다.
저녁에 이치에 도착하니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마중 나왔다. 사지를 지키는 사람들답지 않게 평안한 표정이라 이민호는 조금 놀랐다. 다들 죽기를 각오했으니 더 이상 손해 볼 게 없다는 각오인 것 같아 씁쓸했다.
“대감께서 보내주신 간수군 1개 대는 중요한 곳에 배치했습니다. 듣던 대로 총이 아주 훌륭하더군요. 혹시 병력을 조금 더 지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권율이 이민호에게 부탁했다. 이민호는 권율에 대해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권율은 곧 전라도순찰사가 되어 한성으로 진격, 연말에 독성산성에서 농성전을 벌이고 계사년 2월에 행주대첩을 이룬 다음 도원수가 될 사람이었다. 문관 출신이지만 병법에도 밝았고, 특히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웅치에 왜적의 주력 병력이 올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웅치에 대부분 병력을 배치했고, 저도 웅치에서 적을 막을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이곳은 병력이 너무 적어 불안합니다. 웅치에서 적을 몰아낸 다음 대감께서 즉시 이곳을 구원해주십시오.”
“웅치에서 이기더라도 산길이라서 이치를 지원하기 쉽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달려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잘 버티십시오.”
“고맙습니다. 여기를 죽을 자리로 알고 끝까지 버티겠습니다.”
권율과 이치를 지키는 군사들이 하도 불쌍해서 이민호는 호위로 데려온 1개 대를 이치에 두기로 했다. 소총수 합해서 2개 대 50명이면 그럭저럭 힘이 될 것 같았다. 부친 이응화가 이치는 권율이 확실히 지킨다고 했으니 이번에 과연 역사대로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그 날 마침 해동상단 직원들이 수레를 몰고 와 탄약과 수류탄 상자를 실어 나르는 것을 지켜봤다. 이민호는 직원들에게 즉시 김제로 돌아가서 그만큼 더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시가전과 비슷한 지형의 고갯길 방어전에서 수류탄이 의외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이민호는 다시 웅치로 출발했다. 한숨을 팍팍 내쉬는 이민호를 민희와 민영이 위로해주었다.
“적의 대군을 상대로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사람들이 조선에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요.”
“패배를 각오하고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분들이에요. 여진족 전사들 중에서도 저만한 용사는 드물어요. 그러니 반드시 승리하실 거예요.”
“그래. 이기겠지. 이기고 다들 살아남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주인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말도 터벅터벅 힘없이 걸었다. 웅치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었다.
7월 6일 오후, 동쪽으로 보낸 척후들이 급히 말을 타고 웅치로 돌아왔다. 거의 동시에 동쪽에서 멀리 보이는 진안현 읍성이 불타올랐다. 왜군이 진격해오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고바야카와군의 진격로를 따라 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의 의병이 왜군의 후미를 추격하며 계속해서 들이치고 있었다. 그러나 의병들은 본진을 지켜야하므로 추격전에 동원된 실 병력은 많지 않았고, 그래서 심리적인 효과 이상을 거두지 못했다.
왜군이 저 멀리서 움직이는 것이 웅치 언덕에서 보일 정도였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조선군 방어진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그런데 밤이 깊어질 무렵, 김제군수 정담을 필두로 장수들이 기마병을 이끌고 모였다. 이민호는 혹시나 이들이 도망가는 줄 알고 어이가 없었다.
“정 군수는 어딜 가시는 거요?”
“당연히 왜군 진영을 야습해야지요. 아주 혼을 빼놓고 오겠습니다.”
“왜적들이 야습에 대비하고 있을 수도 있소.”
“적은 먼 길을 걸어와서 피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군의 피해가 예상되더라도 오늘 밤 반드시 야습을 해야 합니다. 방어군의 권리를 행사할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죽으면 대감께 전체 지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기마병 500여 명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진안현 주변에서 총소리가 연속 울리고 왜군 진영 여러 곳이 불타올랐다. 먼 거리지만 바람에 실려 간혹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