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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40화 (89/1,000)

00140  21. 웅치전투  =========================================================================

이민호는 간수군 450명을 이끌고 말에 채찍질을 하며 이치로 달려갔다. 한 번 지나왔던 길이라 며칠 전에 처음 갔을 때보다 훨씬 빨리 전체 간수군들을 이끌고 달릴 수 있었다. 다행히 해지기 전에 이치의 서쪽 고갯길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고개 서쪽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전투에 동원된 백성들이 전사자를 언덕 뒤로 옮겨놓아 관군 전사자 2백여 명이 다섯 줄로 누워 있었다. 부상자도 마찬가지로 후송해서 수백 명이 신음을 흘리거나 비명을 질러댔다. 언덕 너머에서는 총성과 창칼 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간수군의 접근을 부상자를 운송하는 백성들이 보고했는지 권율이 허겁지겁 마중을 나왔다. 권율이 든 칼에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적이 아닌 아군 도망병의 피일 가능성이 컸다.

“지사 대감! 어서 오십시오! 어서! 아주 죽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항상 여유 만만이신 만취당께서 우는 소리를 하시다니, 오늘 신기한 장면을 목도하게 됐습니다.”

“어서요, 대감! 농담할 시간이 없습니다!”

뜻밖에 이치에서는 아직 전투 중이었다. 다이묘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본인이 병력을 이끌고 싸우는 곳인데, 금산성이 공격받는 중에도 물러서지 않으니 이민호는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금산성에서 급히 보낸 왜군 전령이 고경명군에게 차단된 모양이었다.

이민호는 도착 즉시 말에서 내려 간수군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다. 며칠 전에 남기고 간 간수군 2개 대 50명 중에서 벌써 열 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을 입어 전열에서 이탈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25명도 총탄이 떨어졌는지 총검을 꽂아 창병으로 싸우고 있었다.

현대전에서 이 정도 사상 비율이면 전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곳 이치에서는 이민호가 알고 있던 것보다 몇 배나 치열하게 전투가 진행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이치에 투입된 왜군 병력은 부친에게 들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이응화는 왜군이 2천 병력이라 했는데 이민호가 직접 보니 최소 5천은 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권율이 남에게 자랑하지 않는 성격이라 소문도 축소된 것 같았다.

“사격하면서 수류탄으로 적을 밀어내!”

- 타타탕! 타탕!

최후의 방어선에 돌입해서 칼부림을 하는 왜병들이 첫 목표가 되었다. 간수군들은 관군과 뒤섞여 싸우는 왜병들을 신중하게 조준해서 쏘아 죽였다. 그 다음은 목책을 넘어서던 왜병들이 총탄에 맞아 줄줄이 죽어 나자빠졌다. 잠시 후 간수군들이 최후 방어선에 돌입한 왜병들을 모두 몰아낼 수 있었다.

- 콰쾅! 쾅!

그 다음, 목책에 바싹 달라붙어 넘어오는 왜병들에게는 수류탄을 던져서 몰아냈다. 반쯤 무너진 목책에 간수군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아래를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

이민호도 권총을 뽑아들어 칼을 들고 달려오는 왜병들을 쏘았다. 민희는 기병총을, 민영은 보병총을 들고 가깝고 먼 거리에 따라 이민호에게 위협이 되는 왜병들을 쏘아 쓰러뜨렸다.

갑작스런 전황 변화에 놀란 왜군 진영에 당혹스러움이 번져갔다. 이들도 조선군에 새로운 병력이 증원했음을 알아보았다. 같은 숫자라도 나중에 증원군이 오는 편이 사기 면에서 훨씬 나았다.

게다가 이민호가 이끄는 간수군은 소수라도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다. 이미 붉은 피로 내가 되어 흐르던 언덕길이 새로운 왜병들의 시체로 막혔다. 강력한 탄환이 왜병들의 갑옷을 여지없이 뚫었다. 여기저기서 쾅쾅 터지는 폭발 파편에 왜병들이 휘말렸다.

왜병들이 점점 뒤로 밀려나갔다.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지자 간수군들이 퍼붓는 화력이 더욱 강해졌다.

“도련님! 저기 풍선 달고 다니는 기병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말에서 내려 본진으로 달려갑니다. 전령이 맞습니까?”

계복이 가리킨 곳을 이민호가 자세히 살폈다. 장막이 쳐진 곳에서 전령이 무릎을 꿇고 다이묘급 왜장에게 다급히 뭔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그래. 본진 마인 옆에 왜장과 전령이 만나고 있다. 고경명 의병군이 금산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이제야 전해진 모양이다. 저기 저 왜장을 맞히기는 힘들겠지?”

“제가 저 정도 거리에 떨어진 토끼를 쏴서 맞힌 적이 있었습니다.”

계복은 이민호가 인정하는 명사수였다. 가늠자와 가늠쇠를 수정하는 방법과 탄도의 특성을 배운 다음에 계복이 연습을 좀 하더니 이민호보다 훨씬 잘 쏘게 되었다.

“오! 그래? 그럼 어서 쏴!”

“분명히 맞았는데 토끼가 그냥 뛰어서 도망가더군요.”

“끄응! 할 수 없지.”

분명 유효사거리보다 훨씬 먼 거리라서 맞혀도 소용없을 것 같아 왜장에 대한 저격은 포기했다. 그때 왜장이 다른 사무라이들을 불러 뭔가 지시를 내렸다.

이곳 언덕길에서는 아직도 싸우고 있는데 왜군 본진은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언덕길을 가득 메운 왜군도 곧 물러설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적이 물러납니다!”

“이겼다! 어휴~”

왜군이 갑자기 뒤로 물러서자 살아남은 조선군 병사들이 힘에 겨워 축 늘어지기 바빴다. 이민호는 도망가는 왜군들에게 계속해서 총을 쏘는 간수군들을 불러 다시 말에 태웠다.

그 전에 탄약을 보충하려 했는데 이치에 쌓아둔 탄약 상자마다 텅 비어 남은 게 없었다. 근세 전쟁에서 화승총 사수가 열 발 또는 열두 발이면 하루 전투를 충분히 치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간수군들은 장전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화승총 사수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하루라는 단기간에 이 정도 탄약을 소모했다면 총열을 교환해줘야 할 수준이었다.

넋이 나간 간수군 생존자들이 멍한 눈으로 이민호와 계복을 지켜보았다. 이민호는 이들을 사지에 버려둔 셈이 되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너희 생존자 전원에게 최고로 포상을 해줄 것이다. 전사자와 부상자는 최고의 예우를 받을 것이다.”

“휴우~ 그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대감. 저희들은 이제 좀 쉬겠습니다. 저희들한테 적을 추격하라고 하지 마세요.”

이치전투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가했던 간수군들이 축 늘어져 버렸다. 긴장이 풀린 몇몇은 혼절하기도 했다.

“자! 추격하자!”

“어? 도련님! 간수군들은 기마병이 아닙니다! 말에 탔다가 적을 만나면 내려서 싸웁니까?”

“그냥 기마병인 척하고 말에 탄 채로 공격하지 뭐.”

이민호는 둘로 나눈 부대 중 하나를 이끌고 왜병들의 시체가 가득 쌓인 언덕길 양 옆으로 말을 타고 내려갔다. 왜군도 무작정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서, 평지에 이른 곳에서 조총병 수십 명이 대열을 갖추려 했다.

“정지! 승마사격 개시. 계복아! 유탄 쏴!”

- 타타탕! 포옹~ 쾅!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것은 직할군은 가능하더라도 간수군은 아직 꿈도 못 꿨다. 간수군들이 소총을 먼저 쏘고, 장전하는 사이 계복이 유탄을 발사했다.

유탄이 왜군 조총병 대열 한가운데서 터지면서 우수수 쓰러졌다. 파편 몇 개를 맞아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조총을 쏘려던 왜병은 간수군이 조준해 쓰러뜨렸다.

상황 판단이 빠른 왜군들이 장창과 조총을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왜군의 전열이 급속히 무너지자 이민호가 말안장에 달아둔 편곤을 꺼내 들었다. 투구나 진가사를 쓴 왜병들 상대로 제격인 무기였다.

“돌격!”

왜병들이 도망가는 대열 양쪽을 간수군 승마보병들이 뒤따랐다. 대열 뒤에서는 환도와 편곤을 뽑아든 승마보병들이 마치 기마병처럼 왜병들 후미를 치고 달렸다. 간수군들이 휘두르는 편곤과 환도가 왜병의 머리나 등짝을 정확히 가격하지 못해 말발굽에 채여 밟혀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연습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대로 왜군을 추격, 섬멸할 수 있었다.

“우와아~”

함성이 울려 이민호가 잠깐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 이치에서 권율이 이끄는 병사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부상으로 뒤쳐진 왜병들을 단창으로 찌르고 환도로 베며 달려왔다.

이민호도 간수군들을 재촉해 도주하는 왜병들을 계속 짓밟도록 했다. 추격전은 날이 저물 무렵까지 계속됐다.

그 날 밤에 이민호는 이치로 돌아와 숙영했다. 간수군들 모두 얼굴과 머리카락, 수염에 핏자국이 엉켜 있었다. 물론 왜병이 흘린 피였다.

저녁밥을 지어 먹을 생각도 못하고 다들 천막을 대충 세운 다음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민호가 막 천막에 들려는 순간 권율이 불렀다.

“지사 대감! 대첩이오! 수급 3천 개를 베었소이다. 아침에 날이 밝으면 왜적의 도주로를 따라 더 벨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감께 수급 2천 5백 개를 바치겠습니다.”

“저는 필요 없습니다. 만취당께서 다 가지시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대감께서 간수군들을 동원해서 얻은 수급이거늘, 수하들에게 전공에 따른 포상을 받게 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만취당께서 잘 싸운 수하 군사들에게 공으로 나눠주시오. 간수군은 사병이니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인지 대충 알겠소이다. 대감 같은 영웅을 제대로 대우해드리지 못하다니, 소장 무척 안타깝소이다.”

권율을 보내고 나서 5인용 천막 안에서 신발을 벗어 던지고 민희, 민영과 같이 누웠다. 피곤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자고 싶었다.

동시에 성욕이 들끓었다. 죽음 가운데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기뻤다. 잠과 성욕 해결 사이에서 이민호가 결국 선택한 것은 잡낭에 넣어둔 육포였다. 이상하게 성욕은 순위가 많이 밀렸다.

“저도 육포 하나 주세요, 주인님.”

“민희 네가 나를 부려먹을 정도로 지쳤구나.”

“끄응~ 죄송해요. 하지만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요.”

민희가 억지로 일어나려다가 다시 털썩 등을 눕혔다. 민희와 민영은 이민호를 지키랴, 왜병을 잡으랴, 하루 종일 바빴다. 아니, 벌써 이틀째 치열한 전투를 세 번이나 치렀고 그 중간에 산길을 강행군했다. 체력 소진보다는 정신적으로 탈진한 것에 가까웠다.

“씹을 힘은 있어? 내가 대신 씹어서 주지. 입 벌려. 아~”

“꺄악! 징그러워요.”

이민호가 입에서 입으로 반쯤 씹은 육포를 전해주었다. 육즙과 침이 섞인 육포를 민희는 잘도 받아먹었다.

“저도 그렇게 주세요.”

“좋아. 민영이 아~ 해봐.”

이민호가 반쯤 씹은 육포를 민영의 입에 넣고 혀로 희롱했다. 하마터면 민영의 이에 혀를 씹힐 뻔했다.

“제 얼굴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요. 괜찮으세요?”

“응? 민영이 네 얼굴이 피에 젖었어. 괜찮아. 나도 마찬가질 거야. 지금은 자고 내일 아침에 세수해.”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주인님 얼굴부터 닦아드릴게요.”

민영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수통을 열어 수건에 물을 부은 다음 이민호의 얼굴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러나 손길이 느려지나 싶더니 민영이 뒤로 스르륵 무너졌다. 이민호도 민희와 민영을 괴롭히지 않고 곱게 잠에 빠져 들었다.

만약 이 날 왜군에게 야습을 당한다면 꼼짝없이 몰살당할 것 같았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계복이 몇 개 대를 지정해서 불침번을 세운 것 같았다. 하지만 불침번들이 제대로 근무를 설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 창피한 줄은 알고 있었구나? 네놈은 낯이 두꺼워서 창피한 게 없을 줄 알았다.”

“아! 그만 좀 놀려요! 그리고 나한테 제발 이놈 저놈 하지 마십시오! 그 나이 되셨으면 손주들 재롱이나 보실 것이지 야전은 뭐랍니까?”

“이놈아! 나는 손주가 없어서 늘그막에 전쟁놀이라도 하련다. 결과를 봐라! 너는 도망쳤고 나는 끝까지 버텼다. 어떠냐? 어린놈이 감히 까불고 있어!”

“나도 미안해서 밤새 백리 길을 병력을 이끌고 왔지 않습니까? 사위 잘 뒀다고 너무 그러지 맙시다.”

“그깟 장난꾸러기 사위는 없다 치고, 이것을 능력차이라고 하는 거다, 이놈아! 무관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가? 네놈을 참수하자고 감사께 고해야겠다.”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잠이 깬 계복이 천막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광주목사 권율과 나주판관 이복남이 이민호가 자는 천막 바로 앞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권율은 50대 중반, 이복남은 30대 후반이었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씹어대면서도 서로 능력만은 인정하는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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