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3 21. 웅치전투 =========================================================================
총 10문에 달하는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이 연속 발사됐다. 커다란 석환이나 철환을 빼고 순전히 조란환만 넣어 발사한 대형 총통 10문의 위력은 가공스러웠다. 왜병들 최소 4백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고 그 중에 절반은 부상 부위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화포장들이 제2탄을 발사하기 위해 장전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왜군이 방어선에 돌입할 때까지 과연 발사할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직도 3천 명이 넘는 왜군들이 대열을 무너뜨린 채 일제히 돌격해왔기 때문이다.
대완구를 맡은 화포장들도 남쪽으로 포구 방향을 돌렸다. 금산성에 아군이 진입해 더 이상 쏠 수가 없었고, 비격진천뢰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 뻐엉!
굉음과 함께 하늘로 치솟던 진천뢰가 땅에 떨어진 다음 떼굴떼굴 굴러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 왜병들이 진천뢰를 슬슬 피해서 지나갔다. 그 진천뢰가 갑자기 터지면서 주변을 지나던 왜병들을 추풍낙엽처럼 날려버렸다.
이민호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폭음 속에서도 전체 간수군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민호가 가진 최대의 장점을 발휘할 때였다. 아직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적이 온다. 워낙 많으니 보병총을 적에게 정확히 조준할 필요 없다. 높이만 수평으로 대충 맞춰서 쏴도 서너 명을 한꺼번에 관통해버릴 것 같다. 탄약 다섯 상자를 비운 대에는 전원 백은 열 낭씩 주겠다! 그러니 열심히 쏘도록.”
“오오! 그깟 다섯 상자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참호를 파고 들어간 간수군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전투에서 모두 이긴 간수군들은 관군이나 의병들과 달리 왜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적이 많이 몰려오고 있어서 조금 걱정했으나 이민호가 상금을 준다는 말에 다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호를 내리면 동시에 퍼부어라. 왔다. 쏴!”
- 타타타타타탕!
참호에 들어선 이민호의 사격 명령에 맞춰 간수군들이 일제히 보병총을 발사했다. 간수군의 월봉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은 두 냥으로 올라서 상금으로 주겠다는 열 냥은 다섯 달 월봉, 평시의 열 달 월봉에 해당했다.
탄약 상자에 실탄 천 발이 들어있으므로 5상자를 비우려면 25명이 200발씩 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일인당 100발씩 휴대하고 있으니 300발씩 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간수군들은 앞으로 몰려오는 왜병들에 대한 두려움도 잊은 채 끊임없이 장전하고 발사했다.
“한 상자 비웠다!”
“우리도! 다들 빨리 쏘고 탄약병은 총탄이 떨어지지 않게 나눠줘!”
내기가 걸리니 간수군들이 눈에 불을 키고 쏴댔다. 총열이 녹든 말든 총이 터지든 말든 이렇게 화력을 퍼부어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여기서 만약 간수군들이 밀리면 의병 본진도 포위당한다. 이민호는 웬만하면 위험한 전투를 회피하려 했지만, 여기서는 숫자만 많은 의병들 때문에 도망치기도 어려웠다. 금산성 남쪽 성벽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가 빨리 끝나고 아군이 도와주러 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왜병들은 동료들이 총탄에 맞아 무수히 쓰러지는데도 끝없이 몰려왔다. 이민호는 외륜선을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던 팽호도의 해적들을 떠올렸다. 해적들과 다른 점이라면 저 왜병들은 정규군인데다 실전으로 단련되었다는 차이였다.
산에서 내려와 들판을 달려온 왜병들은 이제 참호선에서 거의 100보 이내에 들어왔다. 왜병들 중에 조총병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창이나 칼을 들고 달려왔다.
금산성 북문으로 몰래 빠져 나와 몇 시간째 산길을 뛴 왜병들은 이때쯤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지친 왜병들이라도 숫자가 간수군보다 열 배 이상 많으니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대감! 천자, 지자총통 장전 끝났습니다.”
“내 명령 기다리지 말고 빨리 쏴!”
- 퍼버버벙!
각도를 낮춘 화포가 발사될 때마다 쇠구슬 수백 개가 다시 왜병들을 휩쓸었다. 거의 직사에 가까운 포격에 의해 전사자보다 허벅지나 무릎을 맞고 땅에 나뒹구는 왜병들이 훨씬 많았다.
- 콰쾅! 쾅!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간수군들이 수류탄을 연달아 던졌다. 총탄을 겁내지 않던 왜병들도 수류탄만은 몹시 두려워해서 돌격 속도가 약간이나마 줄어들었다.
그러나 오늘만 특별히 네 발씩 지급한 수류탄이 떨어지는 순간 왜병들이 급속히 참호선으로 밀려들었다. 간수군들은 급한 나머지 사격을 못하고 총검으로 찌르는 경우가 늘어났다.
왜병들이 참호선에 본격적으로 들이닥치면서 간수군들 중에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린 사상자가 확 늘어났다. 참호선 안에서 육박전이 벌어지며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했다.
- 탕! 탕! 탕!
민영이 익숙한 솜씨로 보병총을 연달아 쏘고, 민희는 기병총 사격 준비를 마쳤다. 민희가 기병총을 겨누는 옆에 여섯 발씩 꽂힌 문 클립이 다섯 개나 준비되어 있었다. 왜병들이 가까워지자 민희가 기병총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고 조준한 다음, 방아쇠를 연속 당겼다.
- 탕탕탕탕탕탕!
이민호가 입을 떡 벌렸다. 여섯 발을 거의 2초 내에 쏘고 탄피를 한꺼번에 배출한 민희가 문 클립을 통째로 회전탄창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여섯 발을 퍼붓고, 문 클립과 탄피를 한꺼번에 뺀 다음 총알 여섯 발이 꽂힌 새 문 클립으로 갈아 끼웠다.
이민호는 권총을 총집에 넣고 민희가 쓰고 버린 빈 클립에 총탄을 채워주었다. 이민호가 보병총이나 권총을 쏘는 것보다는 이렇게 하는 편이 생존 확률이 높아질 것 같았다.
“끼요오오~”
드디어 이민호가 들어간 참호 앞에도 왜병들이 쇄도했다. 긴 칼을 든 사무라이가 이민호를 노리고 높이 뛰어올랐다. 마침 재장전 중이던 민희는 대응할 수 없었고, 민영이 총구를 사무라이 배에 대고 쏘았다. 그 뒤로 왜병 둘이 달려들고 있었다.
당황한 이민호가 권총집을 더듬거리다가 간신히 권총을 뽑아 연사했다. 왜병 둘과 그 뒤에 따라오던 왜장 하나가 고꾸라졌다. 세 명이 쓰러진 뒤에 나타난 왜장이 칼을 이민호의 가슴팍으로 향한 채 돌진했다. 그 왜장은 민희가 두 발 연속 발사해서 쓰러뜨렸다.
이민호는 민희 뒤에 나타나 창대를 내려치는 왜병에게 총탄을 날렸다. 민영은 이민호 얼굴 옆으로 총구를 돌리고 발사했다. 화끈한 열기가 얼굴에 느껴졌다. 그 뒤로도 세 명이 들어간 참호에 왜병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다른 간수군들은 눈앞에 몰려드는 왜병들을 막느라 고용주인 이민호를 도와줄 겨를이 없었다.
이민호와 민희, 민영은 정신없이 사방으로 총탄을 발사했다. 셋은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었지만 왜군의 칼날과 창날이 눈앞에서 계속 어른거렸고, 참호 주변에는 왜병들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갔다. 현재 전체적인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민호는 선조 임금이고 조선 조정이고 다 무시하고 진작 직할군을 동원해서 왜군을 쓸어버릴 걸 하고 후회했다. 조금만 더 부지런히 엔진을 개발했다면 아예 전쟁을 대마도에서 막을 수도 있었다. 연도에 대기시켜 둔 직할군 1개 여라도 데려왔으면 이런 상황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끼야앗! 커헉!”
왜장이 칼을 내리치고 민희의 대응이 아주 약간 늦었다 싶었을 때 이민호의 눈앞에서 피가 확 튀었다. 충격을 받고 뒤로 약간 물러선 사무라이의 흉갑에 가느다란 화살대가 꽂혀 있었다. 사무라이는 허망한 눈으로 이민호 뒤쪽을 바라본 다음 뒤로 나자빠졌다.
참호에 몰려든 왜병들 대여섯 명을 민희, 민영과 함께 쓰러뜨린 다음에야 간신히 틈이 생겼다. 민희, 민영이 장전하는 사이 이민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권 목사!”
광주목사 권율이 빈 활을 쥐고 있었다. 이민호는 권율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걸 그룹 멤버들 중에서 권유리가 가장 예쁘고 매력이 넘치는 것 같았다.
“대감! 저희들이 돌아왔소이다. 뭐하느냐? 돌격하라! 왜병들은 얼마 안 남았다. 다 쓸어버려라!”
권율이 고함을 질렀다. 치열한 전투를 연거푸 겪으며 악귀 같은 형상으로 변한 관군들이 참호를 뛰어 넘어 왜군들에게 돌진했다.
“간수군, 전진! 관군을 도와라!”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린 이민호가 참호에서 뛰쳐나왔다. 간수군 10개 대가 투입됐으나 지금은 숫자가 약간 줄어든 200여 명이 총검을 앞세우고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관군들과 창칼을 맞대며 싸우고 있는 왜병들을 하나하나 조준해서 쏘아 죽였다.
간수군들은 부상당해 쓰러져 있는 왜군을 훈련받은 대로 총검을 찔러 죽이려다가, 상금 생각이 나서 총을 쏴서 죽였다. 총구가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총열로 적을 찌르면 화상을 입혀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들 열심히 싸웠다. 이민호는 이번 전투에 참가한 간수군 전원에게 은 열 낭씩 주기로 결정했다.
함께 전진하는 권율군과 간수군의 좌우에서 이복남과 황진, 곽영의 관군들이 들이쳤다. 그리고 의병 소속 기마병들이 멀리 뒤쪽으로 돌아 말을 달리며 왜병들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간수군과 싸우느라 이미 절반 이하로 줄어든 왜군의 전열이 드디어 무너지고 있었다.
“도련님 살아계시네요?”
“왜? 내가 살아있어서 실망했냐? 계복이 이 무능한 놈아! 아군이 왜군과 비슷한 숫자인데 간수군 절반을 갖고 가서도 그렇게 시간이 걸려?”
“도련님이 살았으면 됐네요. 그런데 의병 중에서 실제로 싸운 사람이 적지 않습니까? 의병을 전면에 내세웠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 실제로 의병은 전투에 거의 투입하지 못했습니다.”
계복도 나머지 병력을 데리고 들판의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승부가 이미 난 만큼 지휘관이 직접 총을 쏠 일은 없었다.
금산성 남쪽 성벽을 따라서 진행된 전투는 이미 끝났다. 일부 왜병들이 동쪽으로 흩어져 도망가고 의병들이 추격하면서 전과를 확대하고 있었다. 인명 피해가 가장 크게 발생한다는 후퇴 과정인데 왜군은 주요 지휘관들을 전투에서 모두 잃는 바람에 그저 뿔뿔이 흩어지다가 의병들의 창칼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비무장한 왜인 하인들이 땅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으나 왜병과 왜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의병들은 무조건 쳐 죽여 버렸다. 그래서 왜인, 왜병 구분 없이 무작정 동쪽으로 달려갔다. 이곳은 금강 상류라서 갈수기에 물이 얕은 곳은 걸어서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련님! 저 인간 군상들을 보십시오.”
이민호는 계복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병들 일부가 고경명이나 다른 의병장들의 지휘에서 벗어나 왜군의 수급을 베거나 서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왜병과 전투를 할 때는 진군 명령이 떨어져도 뒤에서 머뭇거리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자들은 전투가 끝나고 왜병의 수급 두세 개를 베자마자 의병에서 이탈해 서쪽으로 달렸다. 그 수가 족히 백 명에 달했는데 의병이 5천 명 약간 넘으니 거의 2푼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일반인 중에 사이코패스가 보통 2퍼센트라고 들었으니 딱 맞는 비율이었다.
그들이 의병에 참가한 것도 애국심이 있다거나 전공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에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자들이 소수라도 분명히 있으니 관찰사와 의병장들이 티격태격 싸우게 되었다.
“누구 같은 사람이 백 명이라니, 정말 무섭다.”
조선 조정에서는 수급 하나면 등과, 즉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쳐주고 두 개면 6품관, 세 개면 당상관으로 올려준다는 전교를 팔도에 반포했다. 왜장의 목을 베면 봉훈(封勳)하여 가선대부에 올린다고 했다.
저들은 수급을 챙겼으니 이제 더 이상 의병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여기서 수급을 베어 바치면 의병장들이 전공으로 인정해주지 않지만, 다른 고을에 가서 수령에게 바치면 무조건 전공을 인정해주게 되어 있었다. 제도에는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비열한 자들은 항상 그 빈틈을 노렸다.
고경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수급을 챙겨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의병들을 다시 집결시키지 못했다. 기마병을 동원해 도망병들을 쳐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고경명을 아들 고종후와 고인후가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