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5 22. 출정 =========================================================================
22. 출정
이민호는 황제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일단 고산국으로 떠나서 원정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민호가 원하는 것이 무역을 위한 적절한 위치의 항구라는 사실을 정확히 아는 황제가 조금 무서워졌으나 당분간 그의 뜻에 따라주기로 했다.
방답진 남쪽의 무인도인 연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 동안 연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선 말고도 고산국에서 출발한 전선 다섯 척이 선착장에서 이민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고산국의 장인들이 밤을 새며 만든 기관을 설치하고 시험 운항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배였다.
여섯 척이 모이니 제법 든든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아직도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산도대첩 때 왜군이 동원한 군선 70여 척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버겁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인들을 교육시켜 추가 배치하면서 2교대로 밤낮 없이 기관을 만들도록 했다. 기관 장인들은 고산국에서 도자기 장인들과 함께 최고의 월봉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까만 배다!”
꼬마 설비가 처음 보는 양식의 배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설비는 혜진과 많이 친해져서, 혜진이 동생 삼기로 했다. 설비는 아이답게 요리를 잘하는 혜진을 가장 좋아해서 민희와 민영이 섭섭하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언니! 우리 고산국으로 가는 거야?”
“응. 겨울에도 춥지 않은 곳이니까 지내기에 괜찮을 거야.”
혜진이 대답하며 설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혜진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고산국이 여름에 무척 덥다는 말은 절대로 설비에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음력으로 7월 24일, 양력 8월 30일이라 아직 여름이었다. 물론 고산국의 여름은 조선보다 훨씬 더 길었다.
이민호는 매년 초 포르투갈 상인에게서 서양 달력을 사서 음력과 병기한 달력을 인쇄해서 사용했다.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달력을 개편하자 로마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그레고리력을 즉시 받아들였다.
이민호는 선두무상의 안내에 따라 새로 건조된 기함에 처음으로 탑승했다. 군선이 다 그렇듯 편의보다는 튼튼함에 주안점을 두어 모든 것이 투박했다. 생활하기에는 불편하겠지만 이 시대 해전에서는 이보다 든든한 배가 없을 것 같았다.
기함에는 바로 옆 함장실보다 넓은 함대 사령관실이 따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집무실이 있고 간단한 회의를 할 수 있도록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물론 의자를 바닥에 고정시킨 방식이었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침실이었다. 커다란 3인용 침대가 한쪽 구석에 있고 반대쪽에도 2인용 침대가 따로 놓여있었다. 그 용도를 짐작한 혜진이 잠시 이민호를 쏘아보았고, 이민호가 되도 않을 변명을 했다.
“험! 험! 편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일부러 크게 만들었어.”
“그런데 여긴 목욕하는 방인가요? 군선에서는 공간을 아껴야 한다면서 잘도 이런 시설을 만들었군요. 그런데 욕실이 왜 이리 넓을까요?”
“응. 더울 때 시원하게 목욕하면 좋잖아.”
물론 사령관실에만 있는 시설이었다. 이민호는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삐질삐질 땀만 흘렸다. 혜진이 뭐라고 더 따지려는 순간 설비가 침대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녀서 혜진의 신경이 분산됐다.
그 틈에 이민호가 얼른 방에서 빠져 나왔다. 다른 귀인들과 달리 혜영과 혜진은 본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민호가 감당하기 조금 벅찼다.
배는 이미 연도에서 출항해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여섯 척으로 함대 세력을 이룬 전선들은 곧바로 고산국으로 향하지 않았다. 선두무상은 이민호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미 습관이 된 것처럼 뱃머리를 대마도 방향으로 돌렸다. 당연히 이민호도 말리지 않았다.
이민호는 항해 도중에 6명의 여수들과, 지휘관이 없는 동안 선장 역할을 맡는 6명의 선두무상, 그리고 기함에 배치된 항해사와 항법사를 기함의 함교로 소집했다. 항해사와 항법사는 마카오에서 공부하고 서양 범선에서 실습을 마친 젊은이들이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연막탄은 충분히 가져 왔겠지?”
“예! 국왕전하의 명을 받들어 유탄 사수 일인당 스무 발씩 쏠 수 있는 양을 가져왔습니다. 명령을 내리시면 분배를 하겠습니다.”
“좋아! 이번 작전은 전에도 그랬듯이 적 인원 살상이 아니라 대마도에 쌓인 보급품, 특히 군량을 불태우는 것이 목표다. 가급적이면 왜군과의 교전을 피하는 게 좋다. 그러나 대마도 근해의 경비가 대폭 강화된 만큼 왜선들과의 싸움은 불가피할 것이다. 작전을 마친 다음에는 왜선이 격파되지 않았더라도 내버려두고 신속히 빠져 나올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국왕전하께 질문이 있습니다.”
“해보게.”
직할군 해병 여수들은 간수군으로 시작한 사람이 절반, 고산국에 이민 온 다음에 직할군에 입대한 사람이 절반이었다. 여수는 지휘관급인 만큼 전투 경험도 중요하겠지만 승진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었다.
전투나 훈련으로 다들 힘들 때에도 다른 병사들을 잘 챙겨주는 사람, 즉 현대 군 조직에서 부사관에 적합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대정과 여수를 맡았다. 이 시대에 125명 정도의 소규모 군 조직에 장교나 귀족급을 지휘관으로 선임하지 않았다.
직할군은 아직 자율적인 판단을 내리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장교가 필요한 조직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규모 원정을 떠난다면 장교가 부족해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이민호는 예상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장교는 고산국 통틀어서 이민호와 계복, 둘뿐이었다.
사관학교를 만들고 싶었지만 교수 요원도 부족하고, 학생들을 모집하기도 어려웠다. 아직 고산국 백성들의 지적 수준이 너무 낮았다. 현재 최 선생이 중등학교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으니 사관학교 설립은 중등학교 학생들이 졸업할 몇 년 후에나 가능했다.
“저희들 대부분의 고국은 조선입니다. 국왕전하께서 조선을 위해 싸우신다면 저희들도 기쁘게 참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직할군이 명나라의 영하로 출정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고국이 왜적의 침략을 받아 위태로운 시기에 과연 외국을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쭙고자 합니다.”
“좋은 질문이다. 원래 명나라의 황상께서는 왜군이 조선을 침공할 경우 요동 기병 5만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 병력을 모아 조선을 도와주기로 하셨다. 그러나 현재 영하에서 발배가 반란을 일으켜 거의 반년을 끌면서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보내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일단 영하의 반란을 제압해야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도와줄 수 있다. 직할군은 발배의 반란 진압에 참가한 다음 요동총병과 함께 조선에 가는 것이 계획이다.”
“제가 보기엔, 직할군 전체를 조선에 투입하면 대국의 도움 없이도 왜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수의 질문에 이민호가 속으로 뜨끔했다. 병력이 적어 단독으로는 어렵더라도 조선 관군과 의병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왜군을 격파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직할군의 능력을 높이 본다는 것은 좋다. 자신감이 넘친다는 증거니까. 그러나 장기적인 전략으로는 명나라 군대를 조선에 끌어들여 공동운명체로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명나라와 혈맹이 되면 일본과 여진은 물론 저 강대한 남만국들이 함부로 조선을 침공하지 못할 것이다. 답이 되었나?”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이민호는 그저 명나라에게 군비 소모를 강요함으로써 더 쇠약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이런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군비를 많이 사용할수록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하고,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커진다.
명나라는 지금도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군비지출 부담이 큰 편이어서 국가 재정을 짓누르고 있었다. 여기에 원정까지 감행하면 정상적인 세입으로는 국가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복건성 바로 앞의 섬에 나라를 세운 이민호 입장에서 명나라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나라였다. 명나라를 분할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원래 역사처럼 자칫 건주여진이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기에 이민호는 여진족을 신경 쓰고 있었다.
군량은 평안도에 충분히 준비했으니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서 횡포를 부릴 가능성은 확 줄어들었다. 백성들이 군량을 나르다가 지치거나 굶어 죽을 일도 없었다. 이민호는 보바이의 난 진압에 참가하면서 조선에 파견될 명군을 원래 역사의 명나라 원정군과 전혀 다르게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대마도가 멀리 보이는 곳에 함대를 정선시키고 저녁 식사를 했다. 예전과 달리 해가 지고도 왜선들이 돌아다녀서 엄원항이 보이는 곳에 정박할 수가 없어 대마도 서쪽 해상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병사들을 초저녁부터 일찍 재웠다. 이번에도 대마도 엄원항을 야습할 계획이었다.
이민호도 일찍 자고 나서 한밤중에 일어났다. 품에 안겨서 새근새근 자는 혜진을 조심스럽게 눕힌 다음 사령관실에서 빠져 나왔다. 새벽이 멀지 않은 시각에 전선 여섯 척에 나눠 탄 여수들과 선두무상, 그리고 대마도에 정찰을 보낸 탐망선장이 기함의 함교에 모였다.
“밤중에도 엄원항 주변 바다에서 돌아다니는 왜선이 소선 다섯 척입니다. 포구에 정박 중인 배들 200여 척 중에서 즉시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서인지 병력이 가득 탄 배가 대선과 중선 도합 30척 정도입니다. 엄원항 포구에는 군량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수고했다. 이제 자러 가도 좋아.”
이민호가 해도판으로 이동해서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유탄 최대사거리인 한 마장 안쪽까지 엄원항으로 접근한다. 각 전선의 함포는 아군 전선에 접근하거나 총격을 하는 왜선을 쏘고, 만약 더 이상 해상에서의 저항이 없을 경우 나머지 배를 무시하고 즉시 지상 공격으로 전환한다. 각 여의 유탄사수는 지상에 쌓인 군량을 불태우는 것이 최우선 임무이며 소총수는 각 여수의 상황 판단에 따라 임무를 맡는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가자!”
여수들과 선두무상들이 단정을 타고 각자 전선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기함을 선두로 전선 여섯 척이 엄원, 이즈하라 항으로 향했다. 전선에 등화관제를 확실히 시키고 그믐에 가까워 왜군 경비선들은 전선 여섯 척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엄원항에 접근하는 6척의 소함대가 어둠 속에서 갑작스럽게 마주친 것은 노꾼 20명과 조총병 8명이 탄 정규 편제의 고바야였다. 희미한 그믐달 아래에서 당황한 조총병들의 움직임이 함교에서 다 보였다. 조총병들이 첫 발을 쏘기도 전에 함수 함포가 불을 뿜었다.
- 콰쾅!
“으아악!”
가까운 거리라 한 방에 명중했고, 배 중간에 구멍이 뚫린 고바야는 물이 콸콸 새면서 단숨에 침몰해 버렸다.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왜인들을 내버려두고 전선 여섯 척이 이즈하라 항으로 접근했다.
포성이 울리자 이즈하라 항 곳곳에서 불이 켜졌다. 왜선 200여 척 중에서 30척에서 횃불을 환히 밝히면서 병력이 상갑판으로 다급히 올라갔다.
바로 이들이 대마도 방어함대인 것 같았다. 나중에 겐타로를 통해 들어보니 대마도에는 5월 이후 70척 정도가 방어함대로 배치됐었는데 바로 며칠 전에 부산포가 공격받으면서 절반 이상이 부산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함포 사격!”
- 콰쾅!
새로 만든 군선 세 척에는 사방으로 방호가 잘 된 3인치 함포가 함수에 2문, 함미에 2문이 탑재돼 있었다. 선미루와 선수루에 함포 1문씩 탑재하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무장이었다.
처음에는 주포 하나를 5인치로 하려다가 이 시대에는 과잉화력인 것 같아 모든 함포를 3인치로 통일시켰다. 나중에 서양 범선들의 선체가 커지는 시기에 맞춰 5인치로 개장하기로 했다.
전선 여섯 척에서 쏜 포탄이 왜선들을 하나씩 직격했다. 상자 같은 모양의 야구라(矢倉)가 터져 나가면서 상갑판이 폭삭 주저앉았다. 상갑판에서 조총병들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대부분이 바다에 빠졌다. 포탄을 직격 당한 노꾼들은 태반이 죽었을 것이다.
각 함포가 두 번 사격하고 나서 더 이상 목표를 찾을 수 없었다. 왜선에 탄 조총병들이 미처 한 발도 쏘기 전에 왜선 30척이 격파돼 버렸다. 이민호가 전선이라 이름붙인 배들, 특히 신조함 세 척은 이 시대 바다의 먼치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