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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53화 (102/1,000)

00153  22. 출정  =========================================================================

간수군이 착용하는 방탄복은 방탄판을 가슴 부위에 통째로 넣고 빼는 방식이었다. 이와 달리 직할군의 방탄조끼는 필요에 따라 몇 가지 부위를 탈착하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보통 적지에서 이동할 때는 방탄조끼 안에 흉갑만 착용하고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고는 견갑과 배갑도 붙였다.

칼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흑인 방패병들은 완갑과 슬갑도 착용했다. 당연히 방어 장비가 너무 무거워서 아무리 힘 좋은 흑인이라도 빨리 움직이기 어려웠다. 행군 중에도 힘겨워 하는 이들을 보고 이민호는 흑인 보병도 기마보병으로 만드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가 워낙 넓으니 나중에 백인들을 아프리카에서 몰아내거나 흑인노예를 잡아와 백인 노예상에게 파는 몇몇 흑인 왕국들을 무너뜨릴 때 이들을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노예로 잡혀올 때 이미 가족과 마을을 잃은 흑인 병사들은 노예에서 해방된 후에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그들을 왕이나 귀족을 시켜준다면서 꾸준히 설득하는 중이었다.

“어서 불화살 뽑고 불 꺼!”

이민호가 천막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숙영지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병사들이 천막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불을 끄러 다녔다.

영하성에서 몰래 빠져나온 반란군 기병들이 숙영지 주변을 포위하고 불화살을 퍼부어 여기저기서 화재가 발생했다. 그러나 여러 여수들의 지휘 아래 사방에 직할군들이 배치돼서 차분히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 사이 일부 병력은 뒤로 빼서 화재를 진압했다. 물이 부족해 물을 끼얹어서 끄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불이 붙은 나무를 땅에 눕히거나 모래 또는 두꺼운 담요로 불길을 덮어 진화하는 방식이었다.

“야습을 당하니 역시 무섭네.”

“풋! 아니에요.”

호위대를 이끄는 민희와 민영이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쿡쿡 웃었다. 이민호는 말실수를 했나 고민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습이 무서운 점은 적의 규모와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었다. 보통은 그렇게 말하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군 위치를 알기 어려우니 대규모 적에게 병사 개개인이 포위, 고립됐다는 착각을 심어주고, 아군이 주변에 있더라도 다들 겁에 질린 꼴만 보게 되니 전체적으로 사기가 떨어지고 공포심이 전염된다는 것이다. 이때 겁에 질린 병사가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숙영지 밖으로 도망가면 거의 확실히 죽게 된다.

역사를 살펴보면 야습을 가한 적이 소규모인데도 숙영 중이던 대군이 혼란에 빠져 큰 손실을 입거나 심지어 패주하기도 했다. 천산산맥 남쪽 타림 분지를 두고 중국 역대 왕조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싸울 때는 전체 병력과 기병세력이 항상 부족하던 중국군이 야습을 성공시켜 결정적인 승리를 거머쥔 적이 많았다.

그에 반해 몽골 기병이 야습을 시도한 경우는 드물었다. 대신 야습에 대한 대비는 언제나 확실히 했다. 이렇게 야습을 하는 것을 보면 영하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발배라는 몽골 출신 부총병은 기마민족과 농경민족 양쪽의 전투 방식 모두에 적응한 자가 틀림없었다.

- 피융! 딱!

이민호의 얼굴 옆으로 뭔가 지나가더니 나무에 화살이 꽂혔다. 호위대가 뒤늦게 방패를 들고 황급히 이민호를 가렸고, 민영이 얼른 몸을 안아서 감쌌다.

호위대가 사방을 경계했으나 어두운 밤에 모래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조금만 거리가 멀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유시인지 노리고 쐈는지 알 수 없었다.

- 깡!

“몽골족이 쓰는 화살입니다. 저격이 확실하니 어서 피하십시오.”

호위병 하나가 방패에 부딪쳤다가 떨어진 화살을 집어 들었다. 화살깃에 주인의 표식이 있는 것이 몽골이나 여진, 아니면 조선의 방식과 흡사했다.

“이쪽은 불빛에 노출되고 저쪽은 숨어있어. 시간이 갈수록 불리할 거야. 이봐, 전령!”

이민호가 뛰어가는 전령을 불러서 대원수 계복의 위치를 묻고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계복이 주변 전황을 살피면서 명령을 내리고 반대편에는 전령을 파견해 전체 원정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계복아! 얼른 조명탄 쏴라!”

“예! 도련님. 그게 있었죠. 각 대별 유탄발사기 사수, 순차적으로 조명탄 1발씩 발사! 양쪽 대에게 명령을 전달해!”

계복은 다른 유탄발사기 사수들처럼 조명탄을 밤에 쏴본 적이 없었다. 발사 훈련이 항상 낮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총성과 거세게 몰아치는 모래바람 때문에 계복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전령들이 다시 사방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계복이 이민호의 머리를 눌렀다.

“도련님! 몽골 기병들이 하마해서 포위 공격하고 있으니 고개 숙여요! 얼핏 봤는데 숫자가 장난이 아닙니다.”

“어? 그래.”

이민호가 자세를 낮추고 챙이 넓은 방탄모를 앞으로 숙였다. 솥단지 모양의 투구는 이 시대 동서양에서 흔히 썼기에 촌스럽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명탄 쏜다! 시선 돌려!”

- 투웅~ 펑!

공중에서 조명탄이 연속 터지면서 주변을 환히 밝혔다. 조명탄은 강한 모래바람에 의해 옆으로 날리면서 천천히 낙하했다.

순간적인 섬광에 잠시 시야를 잃은 몽골 기병들이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괴로워했다. 하늘에 뭔가 날아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길이 뒤쫓다가 한 순간에 눈이 멀어 버렸다.

“쏴!”

- 타타타타탕! 쾅!

이민호가 살짝 고개를 들고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계복이 본 것이 확실히 맞았다. 숙영지에 몰려든 적의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저런 대규모 병력으로 어째서 진작 야전을 시도하지 않았는지 이민호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면 영하 지역에 많이 사는 후이족(回族)이 명나라 진압군의 약탈을 견디다 못해 최근에 대거 반란에 가담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병이 말에서 내리고, 비록 잠시지만 시력까지 잃었으니 직할군 승마보병이나 해병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적의 대군이 뜻밖에 가까이 접근한 것에 놀란 승마보병들이 수류탄을 연속 던져 몽골군을 일단 숙영지 바로 밑에서 멀리 몰아냈다.

전투가 한참 동안 이어졌으나 한 번 밀린 몽골 반란군은 다시 숙영지로 접근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몽골군은 결국 숙영지 공격을 포기하고 짙은 어둠과 모래바람 속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 불에 홀랑 타버린 천막이 50동이 넘어서 보급을 새로 해줘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이여송이 숙영지를 방문한다는 소리를 듣고 천막 안에서 일어나던 이민호가 깜짝 놀랐다. 잘 때는 몰랐는데 이민호가 자던 천막 곳곳에 끝이 뾰족한 화살이 최소한 50개는 박혀 있었다.

먼 거리에서 쏘는 바람에 화살촉과 화살대는 확실히 천막을 뚫었으나 끝에 달린 화살깃이 두터운 천막 천에 걸려 완전히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사실 이 정도면 화살 위력이 충분히 약화돼서 얼굴에만 맞지 않는다면 다칠 일도 없었다.

“방탄조끼 다시 입으세요, 주인님.”

“응.”

민희와 민영이 준비한 방탄조끼와 부위별 방탄복을 이민호가 몸에 걸쳤다. 밤중에 놀라고 아침에도 놀라서 이번에는 얌전히 말을 들었다.

천막 밖으로 나온 이민호가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숙영지 바깥에 숱하게 널려있는 몽골군 또는 반란군의 시체들은 그렇다 치고, 숙영지 곳곳이 온통 화살로 가득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여송이 수하 장수들을 이끌고 숙영지를 방문했다. 이여송을 상대로 허세를 부릴 좋은 기회였다. 이민호가 손을 벌려 천막에 빼곡히 박힌 화살들을 가리키며 이여송에게 물었다.

“이 제독! 혹시 화살이 필요하십니까?”

“전하께서는 마치 제갈량처럼 말씀하십니다. 화살이 10만 개는 충분히 될 것 같습니다. 주신다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현재 직할군에서 활을 쏘는 사람은 민희와 민영밖에 없었다. 심지어 시전부락 여진족의 어린 전사였던 감불과 감동도 이제는 활을 전사의 집을 꾸미는 장신구로만 사용했다. 명나라 군대에도 각궁을 쓰는 자들이 많으므로 화살 10만 개는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직할군 병사들이 화살을 뽑아 끈으로 묶는 동안 이민호가 이여송을 데리고 지난밤의 격전지 주변을 돌아보았다. 총탄에 맞거나 수류탄 파편에 맞고 죽은 반란군 수백 명이 숙영지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적이 이렇게 많이 몰려온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전하. 사실 어젯밤에 모든 진영이 동시에 야습을 받았습니다. 마 총병의 진영은 절반 이상이 불타고 인명피해도 크게 났습니다. 아마도 하투의 몽골족이 추가로 지원 온 것 같습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회족이 반란에 가담한 것 같지는 않습니까?”

이민호가 숙영지 아래를 가리켰다. 가죽장화를 신은 몽골족 시체들 사이에 터번을 쓴 후이족 시체가 다수 널려 있었다. 이여송이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영하의 백성들 중에서 절반 이상이 이슬람을 믿는 회족이었다. 만약 회족이 본격적으로 반란에 가담한다면 5만에 불과한 진압군은 순식간에 쓸려버릴 수도 있었다.

“말도 안 됩니다! 황은을 입고 영하에서 산 지 수백 년이 넘는 회족이 오랜 경쟁자였던 몽골인들의 반란에 가담할 리가 없습니다!”

“야습을 하러 온 적 병력의 규모나 저 회족의 시체를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수백 년 동안 섞여 살았다고 하지만 회족들의 얼굴은 한족과 조금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자! 얼굴을 보세요.”

매부리코는 한족이나 몽골족에게 드물었으나 회족에게는 흔히 나타나는 용모상의 특징이었다. 회족은 한족이나 주변 다른 민족들과 혼혈이 되어 백인의 특색이 거의 사라졌으나 유독 매부리코만 남았다.

“으으! 만약 사실이라면 이것은 몹시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저들이 몽골족의 반란에 가담했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병사들이 회족 주민들을 상대로 약탈을 했겠지요. 원래 이곳에 주둔하던 병사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선부나 대동 등 외지에서 온 군사, 혹은 산서에서 새로 징발된 병사들은 이민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군의 기강을 바로잡겠습니다. 전하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여송이 이민호에게 사죄의 절을 한 다음 황급히 물러났다. 그를 따르는 장수들의 낯빛이 아주 시퍼렇게 변해 있는 것을 보니 이여송이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역시나 영하를 포위한 명군의 모든 진영에 숙군의 바람이 몰아쳤다. 백성을 약탈했다는 혐의를 쓰고 체포된 병사들이 차례로 참수되거나 심하지 않았을 경우 등짝에 채찍질을 당했다. 이여송의 군에서 100여 명의 군사가 목이 잘려 길거리에 효수되자 이때부터 다른 군에서도 함부로 약탈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이여송은 회족 백성들에게 사과하며, 명나라 병사에게 약탈당한 회족 백성이 있다면 군에 피해보상을 신청하라는 내용으로 급히 방을 붙였다. 실제로 피해보상이 이루어지자 회족들이 반란에 가담하는 경우가 확 줄어들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 군사들이 약탈한 것을 두고 조선의 문반 관료들이 변명을 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명나라와 달리 조선의 길가에 음식을 파는 가게가 없고 은이 유통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명군이 은을 갖고도 음식을 구하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약탈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곳 영하에서는 전쟁 중에도 음식 가게가 많이 열려있고 은도 유통되고 있었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음식이나 물건을 살 수 있는데도 일부 군사들은 감시의 눈길을 피해 백성들을 약탈했다.

한몫 잡을 생각이 없더라도, 군사들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약한 백성들을 더욱 못살게 구는 인간들은 어딜 가나 있는 법이었다. 이들은 전체 군사들 중에서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소수의 인간들을 막지 못하면 전체적인 군사 전략이 실패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라크전에서 미군이 민사심리전에 엄청나게 많은 예산을 쏟아 부었지만 관타나모에서 이라크 포로들을 학대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한 장이 퍼지면서 미군의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버린 사례가 대표적이었다.

이민호는 혹시나 해서 기마대를 소집했다. 여진족 출신 감동과 감불이 지휘하는 2개 려, 250명은 승마보병과 달리 진짜 기마대에 가까웠다. 물론 승마실력이 대원마다 차이가 있어서 완벽하게 기마대로 활용하기에는 아직 어려운 점이 있었다.

“보급로 좀 살펴보고 와라. 회족 원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절대 안 된다. 알지?”

“물론입니다, 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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