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61화 (110/1,000)

00161  24. 진주성 전투  =========================================================================

“천조의 황제폐하께서 소장을 아시고 상까지 내려주시다니, 기분이 묘하군 그래.”

선조실록 임진년 9월 15일 자에는 7, 8월 사이에 조선 전역에서 진행된 왜군과의 전투, 특히 승첩한 내용을 중심으로 요동에 자문을 보내면서 그 내용이 기록됐다. 강화도에 주둔하는 전라병사 최원, 의병장 김천일, 월곶진첨사 이빈 등이 한강과 양화도 등지에서 올린 승첩, 권응수가 경상좌도의 의병들을 이끌고 대승리를 얻은 영천 전투, 승병장 영규가 청주성을 탈환한 승첩 등이 언급됐다.

그런데 선조 임금은 명나라에 승첩을 보고할 때마다 명나라 조정에서 조선 장수들에게 상을 내리니 미안하다면서, 승첩 보고를 명나라에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는 조선 각처에서 왜군과 전투 중이며 명나라 원병이 속히 와주길 바라는 뜻에서 그런 승첩 보고를 한다는 식으로 설득해 자문을 보낼 수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권율도 행주대첩의 전공으로 경략 송응창이 상을 내렸고, 병부상서 석성이 황제에게 보고해 황제가 권율을 칭찬하는 조서를 내린 적이 있었다. <백사집 권율 묘지(墓誌)>에 나온다. 선조실록 임진년 7월 6일에도 그 전에 공을 세운 조선 장수들에게 명나라 조정을 대신한 요동도사가 은 20냥씩 상으로 보낸 기록이 있다.

이런 식으로 명나라 황제 또는 조정에서 조선 장수들에게 상을 내린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 이순신이 명나라 황제에게서 상을 받은 데에는 이민호가 황제와 알현할 때 보고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보바이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 황제는 이민호에게 주애공의 직첩을 직접 내려주었다. 그때 황제가 조선 장수들의 활약상을 물었고, 이민호는 아는 것은 다 말해주었다.

황제는 특히 수군에 관심을 드러냈는데 이는 왜구들처럼 왜군이 배를 타고 산동이나 천진에 상륙해서 바로 북경으로 쳐들어올까 두려워한 탓이었다. 이민호는 그 기회에 이순신의 지위를 탄탄히 해주려고 좋은 말을 많이 해주었다. 물론 과장할 필요도 없이 사실 그대로만 전해줘도 다른 장수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만약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요. 동창 소속 환관들이 일을 제대로 안 했거나, 황제폐하가 인의 장막에 가려 있다는 뜻이니까요. 아마 명나라에서 조선에 간세를 많이 파견해서 전쟁 진행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는 옛날 왜구들이 해안지방을 호되게 노략질한 때문인지 육전보다는 수전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명목상 속국이라지만 대명과 조선은 다른 나라인데 우방에 간세를 파견하다니. 전쟁 중이라 어쩔 수 없을까? 그런데 주애공은 누군가? 설마 통지 자네인가?”

전쟁 전에 일본이 조선을 향도로 앞세우고 명나라로 쳐들어간다는 식으로 선전활동을 꾸준히 펼쳤다. 명나라와 조선을 이간질시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명나라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이 선전 책동에 넘어간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황제와 병부에서는 조선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주장한 반면, 조정 대신들 일부는 조선과 일본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병력을 잃을까 걱정했었다. 그래서 조선 내부를 정탐할 필요가 있었고, 수시로 사신과 관리들을 공식적으로 파견하면서 동시에 비공식적인 수단도 많이 동원했다. 현재 조선에는 황실이나 병부에서 보낸 첩자 말고도 각 성의 순무나 총독이 보낸 간세도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예. 이국공은 고산국왕의 명예직에 불과한데 주애공을 받으면서 해남도를 간접적으로 다스리게 됐습니다.”

“그러다 혹시 자네가 명나라 황제폐하께 코 꿰이는 거 아닌가? 지금이야 덕을 많이 볼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는 발목이 잡히거나 견제당하지 않을까 걱정되네.”

이순신은 순수한 무인이었지만 정치 쪽에서 군사 분야에 미치는 강한 영향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이 이렇게 이민호의 앞날을 걱정해줘서 이민호는 무척이나 고마웠다. 이민호는 황제의 권력을 대신 휘두르다가 결국 황제에게 목이 베인 환관들처럼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미 꿰인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영하에서 일어난 발배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거든요. 하지만 당근이 워낙 커서 사양을 하지 못했습니다. 조서에도 언급됐지만 황제폐하의 명령으로 이번에 고산국 병력 7천여 명을 이끌고 왔습니다. 지금 연도에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오오! 그거 잘 됐군. 요즘은 왜군들이 수전을 기피하는 바람에 김해 죽도나 가덕도처럼 우리가 육지로 들어가서 싸워야 했네. 간수군 천 명으로는 조금 부족한 참이었는데 마침 잘 됐네. 자네가 병력을 이끌고 육지에서 움직이면서 수군과 협동작전을 한다면 아주 큰일을 할 수 있을 걸세.”

“저도 그걸 기대하고 왔습니다만, 조선 조정으로부터 아직 아무런 허락도 못 얻었습니다. 명나라 황실에서 조선 조정에 칙서를 보냈다고는 하지만 제가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오는 것을 조정에서 꺼리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조선에 오기 전에도 이민호는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아직도 조정에서는 응답을 해주지 않았다. 이민호도 이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아예 명나라 원군의 일원으로서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음. 안타깝지만 나는 양쪽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겠네.”

“어떻게 이해하시는데요? 저는 몹시 궁금합니다.”

이순신이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씩 웃었다. 왕실이나 문관들에게는 몹시 예민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무인인 이순신은 쉽게 넘겨버렸다. 이민호가 조선의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이순신이 잘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민호의 부친은 통제부사라는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중위장이 아니라 여전히 유군장으로 활동했다. 간수군을 지상상륙군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지만 이응화가 가급적 몸을 낮추는 것으로 이순신은 이해하고 있었다. 고산국 국왕의 부친인 이응화가 조선에 남은 것 자체가 인질의 의미도 있었다.

“알면서 그러나? 통지 자네가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만 활동하면서 조정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

“하지만 가급적 빨리 한성을 수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팔다리 다 묶어놓고 싸우라고 하면 솔직히 짜증납니다.”

“알겠네. 내가 칙명을 받았다는 내용을 보고하는 장계를 올리면서 자네 이야기도 하겠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불만이 있더라도 섭섭하게 여기지 말게.”

“저도 눈치가 있으니 형님 앞에서만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자네가 조선 수군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다면 조방장 직함을 떼는 게 좋겠네.”

“역시 그게 좋겠습니다.”

며칠 후 이민호는 삼도수군통제영 조방장의 직함을 체차해달라는 사직소를 조정에 올렸다. 명나라와 조선의 이중 속국인 고산국이 아니라 명나라 주애공 직함을 받은 제독총병관으로서 명나라 원군과 함께 지상전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달았다.

장계가 올라가자 조선 조정에서 이 민감한 문제를 두고 꽤나 시끄러웠다. 그리고 얼마 후 이민호가 명나라 벼슬을 받은 것을 축하한다는 식으로 답장이 내려왔다. 그러나 교지나 명령서 형식이 아니라 황제의 신하인 동등한 제후끼리 주고받는 자문 형식이었다.

그 이후 이민호는 조선 조정과 문서를 주고받을 때 상소나 장계가 아니라 자문(咨文)을 보냈다. 그리고 이민호가 머무는 곳을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주애공부라고 불렀다. 이제는 조선 조정에서도 이민호를 조선의 문관이나 장수가 아니라 명나라 공작 겸 장수로 대우해준 것이다.

이민호는 이순신, 다른 장수들과 함께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진주성이 내륙 깊이 있어서 이번 작전을 수군이 지원하기 상당히 어려울 것 같았다.

“왜군의 증원군이 배를 타고 오는 것은 수군이 웅천과 거제도 사이에서 틀어막을 걸세. 헌데 사천에 다시 왜군들이 들어와 진을 쳤네. 자네가 가진 병력이 상륙하기 전에 수군과 합동으로 이곳을 먼저 쳐야 하네.”

“그렇게 여러 번 당했으면 됐지, 도대체 왜 자꾸 사천왜성에 왜군들이 몰려옵니까?”

이민호가 회의 탁자에 펼쳐진 지도를 살폈다. 웅천의 안골포처럼 바다로 툭 튀어나온 곶 지형이라면 조선 수군을 견제하기 위해 왜군이 진을 칠 수도 있었다. 가덕도라면 낙동강을 지키기 위해 점령하고 가덕진 성이나 천성보 성을 지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천에서 왜군이 진을 친 지역은 저번에 사천해전 때와 같은 곳, 바다가 육지 쪽으로 한참 들어간 곳이었다.

“사천왜성이 왜 중요하냐면, 배에서 내린 병력이 진주성에 도달할 가장 짧은 경로이기 때문일세. 사천왜성에서 출발하면 주변 산악지대 사이로 난 평지 도로를 이용해 진주로 금방 갈 수 있다네.”

“조선 수군이 상륙전을 펼친 다음 육지로 진입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 설마 왜군은 우리가 그럴까봐 걱정해서 사천에 진을 친 겁니까?”

“우리야 간수군 빼곤 수군이 육지에 상륙한 적이 거의 없었지. 하지만 왜군들에게는 그게 기본 전술일지도 모르지.”

“아! 맞습니다. 왜놈 수군은 배를 타고 싸운 경우는 드물고 주로 배에서 내려서 싸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수군이 정규군이라면서 하는 짓은 왜구들하고 똑같군.”

수군을 해병상륙군처럼 운용하는 왜군 입장에서는 진주성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천왜성을 사수해야 했다. 일본에서도 전국시대에 수군끼리 배 타고 해전을 벌인 경우도 있었지만 수전의 전투 양상은 지상전과 거의 흡사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수군이 해전보다 상륙전을 더 중시하니 근대 해군에 비해 해상전투의 중요도가 떨어졌다. 다만 바다를 막아 보급을 끊는다거나 병력을 적 배후에 상륙시킨다는 점만 수군다웠다.

임진년 내내 조선 수군이 상대한 일본 수군은 대부분 그런 정규군의 수군이거나, 수송함대 또는 수송선에 육군 병력이 탄 배들이었다. 사실 왜구도 알고 보면 해상전을 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상전을 많이 하는 편인데, 다른 육군에 비해 해상전에 익숙하다는 점이 달랐다.

마쓰우라, 아리마, 고토, 오오무라 등 큐슈 북서부 해안과 도서 지방의 영주인 일본의 해적 두목들은 고니시 밑에서 싸우며 현재는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풍신수길 밑에서 후네부교(船奉行)를 맡았던 고니시를 비롯해 대부분 수전을 장기로 하는 기독교 영주라는 특징이 있었다. 히라도와 이키 섬의 영주인 마쓰우라만 불교도였다.

추수하러 집에 돌아갔던 전라좌수영 수군이 10월 1일에 통제영에 다시 집결하고 10월 3일에 전라우도 수군이 통제영 앞바다에 모였다. 연합수군이 동쪽으로 출동하면서 남해현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상우수영 수군과 합세했다.

전라우수영에서 판옥선 55척을 끌고 왔고 경상우수영의 재건작업도 착실히 이루어져 이번에 출동하는 판옥선만 110척에 달했다. 그 외에 유군 소속의 대형 외륜선이 12척이고, 사후선과 협선은 판옥선의 숫자보다 많았다. 충청도에 왜군의 진격로가 걸쳐 있어 아직 충청수군은 합세하지 못한 시기임에도 삼도수군 연합함대의 위세는 대단했다.

여기에 이민호가 이끄는 고산국 함대가 가세했다. 전선은 8척에 불과했지만 대형 외륜선이 10여 척이며 서양 범선들이 12척에 달했다. 이민호는 항해 중에 일부러 단정을 내려서 선척 수를 한 번에 너덧 배로 부풀렸다. 삼도수군 연합함대와 고산국 함대가 합치니 배가 300척이 넘어갔다. 순천부와 남해현, 광양현과 하동현 사이의 바다가 배로 꽉 들어찼다.

“만세! 만세에! 만세~”

바다 주변의 산에 오른 백성들이 연합함대의 진로를 따라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처음에 국왕전하 천세로 시작했다가 어느덧 삼도수군 만세로 변해서 듣는 수군 장수들은 민망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잘못된 구호를 말리지 않았다. 장수들과 병사들 모두 뿌듯한 감정을 느꼈다.

백성들 중에는 수군의 가족도 있고, 임란 초기부터 고생하는 경상도 피난민들도 섞여 있었다. 백성들은 수군의 무운과 가족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10리를 넘게 걸어서 따라오는 백성들을 보는 이민호의 가슴이 찡했다.

============================ 작품 후기 ============================

에휴~ 또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전에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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