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5 24. 진주성 전투 =========================================================================
“민영이 뺨에 밥풀 묻었다.”
“꺄아~ 주인님!”
이민호가 밥풀을 떼어 자기 입에 넣자 민영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민희가 얼른 자기 뺨에 밥풀을 붙이고 이민호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이민호는 그 밥풀도 떼어서 먹었다. 이렇게 둘은 작은 애정 표현에도 적극적으로 반응해서 더욱 정이 갔다.
“주인님! 해서여진을 공격해서 동가공주를 빼앗아 장가드세요.”
“뭐? 건주여진이 커지고 있어서 걱정인데 해서여진과 동맹을 해도 부족할 판에 어째서 새로운 적을 만들어야 해? 전쟁을 일으켜 여자를 빼앗아오면 당연히 욕먹지 않나? 그리고 동가공주는 부족장들이 노리는 미인이니 수많은 부족을 적으로 돌리게 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동가공주는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 전쟁을 일으킨 헬레네 정도의 미모일 것 같았다. 그런 미녀를 잘못 들였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 같아 욕심 내지 않기로 했다. 양귀비와 서시, 달기와 포사 같은 경국지색의 미인들이 어떻게 나라를 망하게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민호는 의용공주 주상아에게 푹 빠진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같이 있을 때만 잘해주고 공주를 궁궐에 놓아둔 채 여기저기 잘만 돌아다녔다.
“오히려 반대에요. 주인님의 강함을 알게 된 해서여진의 여러 부족들이 주인님의 충성스런 동맹군이 되어줄 거여요.”
“이해하기 어렵군.”
청나라 태종 황태극은 몽골의 맹주인 린단칸을 치고 그 부인들을 후궁으로 들이면서 그 전까지 치열하게 저항했던 몽골 부족들에게서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 외에 청 태종은 몽골족 후궁을 7명이나 받아들였는데 그 중에는 자매 혹은 고모와 조카 관계도 있었다.
동가공주가 아무리 아름다워 진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경국지색이라 하더라도 이민호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압록강 건너의 건주여진이라면 몰라도 그 북쪽에 자리 잡은 해서여진 여자를 평생 만날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 이제 교대하자.”
이민호가 먼저 일어나 둘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동문 쪽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민호는 성문 옆 돌계단을 통해 장대로 올라갔다.
“주인님! 고산국 병력으로 밀어붙이면 금방 이길 수 있지 않을까요?”
“저번에 대마도에서 봤잖아. 숫자 차이가 워낙 많이 나면 우리도 피해가 커질 테니 정면 대결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아. 그리고 적당히 아슬아슬하게 이겨야 왜군이 원수를 갚겠다면서 다시 진주성으로 몰려오게 돼.”
“이길 수 있을 때 확실히 이기는 게 좋지 않아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년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진주성에서 이번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크게 벌어질 거야.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이민호는 이번 진주성전투에서 왜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원래 역사와 비슷하게 조금 힘겹게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래야 조만간 남부지방으로 퇴각할 왜군들이 전력을 기울여 진주성을 다시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원래 역사의 진주성 2차 전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를 이번 전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으로 잡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공격을 퍼붓고도 모자라 다음 날도 아침 일찍부터 왜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서장대 쪽은 경사가 아주 가팔라서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북장대 쪽은 가파른 언덕에 성벽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연못이 동서로 길게 이어져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역시나 동문 방향으로 공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직전 경상감사 김수가 본성의 동문인 촉석문 바깥에 남강을 따라 외성을 둥그렇게 쌓았다. 그러나 진주목사 김시민은 성을 지킬 병력이 너무 부족해서 외성은 처음부터 방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외성 안에 있던 집들을 허물고 목재와 기와 등은 내성으로 옮겨 외성은 황량한 들판으로 변해 있었다.
날이 밝아서 보니 동문 밖 외성의 성벽이 밤새 전부 허물어져 있었다. 왜군 지휘부가 본격적으로 동문에 병력을 투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간밤에 왜군 진영에서 준비한 거대한 공성장비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진주성 안에서 군사와 백성들이 술렁거렸다.
“이 대인께서 성안에 계시다. 무엇이 두려우랴?”
진주목사 김시민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전쟁으로 인해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공짜로 식량을 퍼줄 정도로 부자이며 세 나라에서 왕이거나 고관대작의 지위에 오른 이민호가 진주성에 들어왔으니 질 리가 없다는 주장이 의외로 잘 먹혀들었다.
아직은 규모가 작더라도 고산국이라는 한 나라의 왕이며 명나라에서 문무에 걸친 고관대작이며 조선에서도 높은 품계를 지닌 이민호가 죽을 자리로 들어왔을 리가 없다는 믿음이 모두에게 있었다. 또한 만약 진주성이 위험해지면 남강 건너편 진채에서 즉각 원군을 보내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진주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그 전에 이민호는 진주성에 남은 여자와 노인들을 다리를 통해 잠시 피난시키자고 김시민에게 권했다. 직접 전투에 나서지 않더라도 3만 대군의 공격이 밤낮으로 집중된 자그마한 성에 민간인들이 있다 보면 긴장감으로 인해 쉽게 병 들 것 같아서였다. 포성과 함성에 놀란 소와 개가 유산을 하는 마당에 진주성 안에 사는 것이 사람에게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곤양군수 이광악은 민간인들이 빠져나갈 경우 군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민간인들이 피난하는 것을 반대했다. 비정하긴 하지만 이광악의 주장이 합리적이어서 이민호는 더 이상 권하지 못했다.
김시민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여자들과 노인들에게 군복을 입혀 성벽을 돌게 만들었다. 진주성에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민호가 뒷목을 잡았으나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성을 지키겠다는 장수들의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말리지 못했다.
- 타타탕!
- 탕! 탕!
어제와 달리 왜군의 화력이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왜군에 조총병이 워낙 많다 보니 장전에 시간이 몇 배나 걸리는 화승총이 퍼붓는 화력이 동문에 투입된 1100정의 보병총을 압도할 정도였다. 이민호도 시간이 갈수록 긴장하게 되었다.
왜장들은 보병총의 관통력이 예상보다 높다고 판단해서 총탄을 막는 죽방패의 굵기를 늘렸다. 기존 죽방패에 대나무 몇 개를 더 묶는 것만으로 방패의 방어력을 간단히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넓고 두꺼운 판자로 만든 방패가 보병총에 자꾸 뚫리니 판자 두 개를 붙이고 그 사이에 흙을 두텁게 채워 넣어 어느 정도 방어력을 높였다. 이런 간단한 변화만으로도 보병총의 효율이 뚝뚝 떨어졌다.
- 타탕! 탕!
왜군 조총병들이 엄호 사격을 하는 가운데 커다란 구조물이 덜컹거리며 진주성 동문으로 다가왔다. 조선인들이 산대(山臺)라고 부르는 3층짜리 공성탑을 왜병들이 밀어 진주성에 접근시키고 있었다. 그 위에서 조총병들이 진주성 성첩을 내려다보며 조총을 발사했다.
간수군들과 흑인 보병들이 응사했으나 밑에서 위로 쏘는 총탄은 잘 맞지 않았다. 철판으로 공성탑 상부를 둘러 총탄이 산대 내부로 관통되지도 않았다. 왜군 조총병들의 사격이 계속되자 위험을 느낀 민희와 민영이 이민호를 몸으로 덮었다.
- 뻐엉! 콰작!
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김시민이 급히 데려온 화포장들이 현자총통을 산대에 명중시켜 산대의 상부구조 일부를 부숴 버렸다. 철판이 우그러지고 조총병들이 몸을 드러내자 간수군과 흑인 총병들이 일제히 발사해서 몰살시켰다.
마지막에는 김시민이 지시해 화약을 종이에 싸서 풀로 묶은 것을 군사들이 산대에 던졌다. 결국 산대가 불타오르며 시커먼 연기가 푸른 하늘을 가렸다. 잠시 후 산대가 무너져 불덩이로 변했다.
“적이 몰린 대나무방패 뒤쪽에 유탄 쏴!”
- 투웅~ 쾅!
이민호가 지시하면 대정이나 여수가 유탄발사기 사수에게 목표를 지정했다. 띄엄띄엄 세워놓은 방패판과 죽방패 뒤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왜병들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었다.
10월 9일, 왜군이 진주성에 대해 총공세를 펼쳤다. 이런 식으로 공성전이 계속되다간 결국 자기들이 패할 것을 아는 왜군이 모든 자원을 한꺼번에 쏟아 부었다.
밤새 참호를 파서 진주성까지 접근한 왜병들이 날이 밝으면서 본격적으로 성벽 아래를 파고들었다. 성벽을 무너뜨리겠다는 의도를 명백히 드러낸 왜병들 머리 위로 끓는 물이 쏟아졌다. 화상을 입고 땅바닥에서 나뒹굴던 왜병들이 화살이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
- 투퉁! 퉁!
대완구에서 날아간 비격진천뢰 열 발이 왜병들이 집결한 곳에 떨어지며 지지리도 운이 없는 왜병 두 명이 머리가 깨졌다. 그러나 죽지만 않는다면 미리 쓰러진 왜병들이 차라리 운이 좋은 편이었다.
- 콰쾅! 쾅!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왜병들의 몸을 갈가리 찢었다. 비격진천뢰의 도화선 길이가 제각각 달라서 한참 나중에 터지기도 해서 왜병들은 한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왜군은 물러서지 않고 더더욱 동문으로 몰려들었다. 진주성은 풍신수길이 직접 지시한 목표였으니 만약 패하면 진주성 공성전에 참가한 영주와 무사들의 미래는 없었다. 이들은 필사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 쾅!
흑인 보병들이 수류탄을 여장 위에 올려놓고 툭 밀었다. 밑으로 굴러 떨어진 수류탄은 땅바닥에 닿아 튀어 오른 다음에 공중에서 터졌다. 수류탄이 터질 때마다 성벽 밑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왜군들이 떼죽음 당했다.
그래도 왜병들은 끊임없이 성벽을 오르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간수군이나 흑인 총병보다 흑인 방패병들이 싸움을 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흐음.”
“음.”
그 시간에 이민호는 경상우병사 유숭인과 함께 촉석루에 앉아 있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 멋진 기와지붕에 덮여 있었던 촉석루는 여자들이 기와를 다 뜯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흙더미를 드러낸 초라한 모습으로 변했다.
이민호와 유숭인은 남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사천으로 이어진 길에는 여전히 보급용 수레만 왕복하고 있었다. 오늘도 말이 오지 않았다. 제때 못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병상! 저런 비루먹은 말이라도 괜찮다면 기병들을 태우겠소?”
“어휴! 대인께서 말씀하신 날 제가 한 번 타고 몰아봤습니다. 저를 태우고는 제대로 뛰지도 못하더군요. 기병이 아깝습니다.”
“그렇죠? 쩝!”
이민호가 입맛을 다셨다. 승마보병들을 저런 저급의 말에 태우고 다녔으니 그 동안 얼마나 창피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와~”
“왜적이 몰려온다! 막아!”
이때 북장대 쪽에서 갑작스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민호가 고개를 돌려서 보니 왜군이 북쪽 성벽을 타 넘고 있었다. 활을 쏘던 진주 군사들까지 창과 칼을 들고 막아섰다. 그러나 성벽을 넘는 왜병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북쪽 성벽은 가파른 언덕 같은 지형이고 성벽이 낮아 뛰어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못이 해자처럼 성벽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어 많은 병력을 투입하지 못하는 곳이었는데 왜군이 연못물을 다 빼고 나서 공격을 시작한 것 같았다.
성 북쪽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조선군이 밀리는 모양새였다.
“어? 어? 안되겠습니다. 말 없는 기병이라도 보내야겠습니다.”
“병상은 잠시 기다려보시오.”
이민호가 성 중앙을 가리켰다. 해병 여수가 계속 지켜보고 있다가 진주성에 입성하고 나서 처음으로 출동 명령을 내렸다.
“속보!”
며칠 동안 촉석루 부근에 대기하면서 이만 잡던 해병 400명이 북쪽 성벽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에도 북장대를 지키는 조선군이 성을 넘은 왜병들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백병전이 한창인 북벽에 도착한 해병들은 가까이 있는 왜병은 총검으로 찌르고 멀리 있는 왜병은 총으로 쏴서 죽였다. 숫자는 적어도 전투력 차이가 많이 나서 왜병들이 다시 성 너머로 밀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