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0 25. 차가운 바다, 뜨거운 땅 =========================================================================
태화강변에 왜군 기마무사 400여 명이 쓰러져 있었고, 주인 잃은 말도 200필 가량 도망가지 않고 남았다. 말은 체구가 작은 일본 말이거나 조선의 짐말이라 가치가 별로 없었지만 기마무사들이 착용한 화려한 갑옷에는 이민호도 욕심이 좀 났다.
“저게 다 돈이잖아요. 왜장 갑옷 한 벌에 얼만데요. 가문 문장 지우고 일본에 가져가서 팔아도 되잖습니까?”
“비싸긴 하겠지만 여긴 적지야. 아군을 위험에 빠뜨릴 필요가 없어.”
계복이 아깝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지만 이민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왜군 1만여 명이 주둔하는 적지에서 한가롭게 전리품을 획득할 여유는 없었다. 바다를 누벼야 할 전선으로 좁은 강에 들어온 것부터 불안했다.
전선 8척이 태화강을 거의 빠져 나올 때였다. 이민호는 깜빡 잊었다는 듯이 배를 해안에 대고 왜인 포로 60명을 풀어주었다. 죽었다 살아난 왜인들이 굽실굽실 절을 몇 번이나 하더니 무작정 바다에서 먼 쪽으로 허겁지겁 뛰어갔다.
“도련님이 웬 일로 왜적의 수급을 안 베세요?”
“전공 보고하려면 앞으로 최소 한 달을 배에 보관해야 하잖아. 시체 썩은 냄새 맡기 싫어.”
“익숙해지면 그 냄새도 나쁘지 않습니다.”
“싫다!”
다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이때는 경상좌수군이 붕괴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재건은 꿈도 못 꾸고 있었다. 경상도 동해안에 왜선들이 돌아다닐 것 같아 이민호가 김학에게 물었다.
“경상좌도 대부분이 왜적에게 점령됐다는데 어디에 내려드리면 되겠소?”
“왜군이 낙동강을 타고 안동에도 들어왔다고 합니다만 바닷가 지방의 경우 왜군이 경주까지만 올라왔습니다. 그 이상은 이상하게 왜군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북쪽으로 가서 내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함경도에도 왜군이 있지 않소? 동해안 길 타고 올라간 것이 아니요?”
“가등청정은 한성에서 함흥 방향으로 진군했다고 들었습니다.”
“아하! 그렇죠.”
안동, 의성, 영천, 경주에는 왜군이 들어와 노략질했으나 경상도 북부 동해안에는 아직 왜군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강원도를 공격한 제4군도 한성에서 춘천, 원주 방향으로 진군했다. 목표가 함경도든 강원도든 경상도 동해안을 따라 북진한 왜군 부대가 아예 없었다는 사실이 이상해서 이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상좌도 해안지방처럼 강원도 영동지방에서도 왜병이 한 발짝이라도 발을 들인 지역이 아직은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 1593년 6월에 왜선이 평해군에 나타나 난리가 난 적이 한 번 있었으나 관군이 출동해 왜병 8명을 죽이고 나머지를 생포했다. 관군에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왜병들이 며칠 동안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표류한 탓에 저항을 못한 것 같았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꼭 살아남으시오!”
이민호는 조선인 포로들을 영해군 바닷가 포구에 내려주었다. 배에 있는 동안 잘 먹이고 쌀과 소금까지 나눠줬더니 포로들이 감사의 표시로 절을 한 다음 떠났다. 이민호가 뱃전에 나와 다른 병사들과 함께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나 고향이 먼 포로 몇 십 명은 전라도나 경상우도로 가길 원했다. 여자와 아이들뿐이라 내몰 수도 없어서 당분간 배에 남아 있으라고 이민호가 허락해줬다. 김학은 배에서 내리는 같은 고을 사람에게 편지를 써주고 배에 남았다.
“김 출신은 어째서 남았소?”
“어느 누구도 감히 울산왜성을 공격할 엄두를 못 냈는데 대감께서는 일만여 왜군을 전혀 개의치 않고 공격하셨습니다. 의병으로서 고향과 가족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나 왜적을 토벌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대감 밑에서 싸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보아 하니 조선 왕실에 충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젊은 무장의 뜨거운 피가 전장으로 내모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켜온 조선과의 암묵적인 합의를 깰 수 없으므로 아무나 이민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일본 전국시대 해안지방의 성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거나 포구를 끼고 건설됐다. 육지 쪽에서의 공격에 무척 강한 면모를 보이지만 바다에서 화포로 공격을 할 경우 방어할 대책이 없었다. 이민호처럼 공격 수단을 갖춘 사람이 바닷가 왜성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도 반드시 공격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미안한데 여기 배에 탄 사람들은 다 고산국 사람들뿐이오. 정 돕고 싶거든 삼도수군 통제영에 가서 간수군으로 등록하시오.”
“그렇다면 저를 고산국 백성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가세가 기울어 집안에서 소유한 농지가 없으니 저를 꺼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좋소. 출신이라 하나 고산국과 군제가 전혀 다르니 일단 훈련병부터 시작하시오. 무과급제자시니 말은 탈 줄 아시겠구려?”
“시전부락 토벌에도 참가했습니다. 말씀을 미처 못 드렸지만 대감께서 간수군 기마병들을 지휘해 오랑캐 소굴로 돌진하는 것도 봤습니다.”
“전우셨구려. 함께 싸웁시다.”
이민호는 김학을 기마병에 소속시켰다. 그런데 배에 탄 기마병이 할 일이라곤 빈 총으로 사격 연습하는 것밖에 없었다. 대정이 6연발 기병총을 분해해서 내부 구조를 보여주자 김학이 감탄을 연발했다.
배를 몰고 해안에서 떠나 먼 바다로 나왔다. 다시 함경도 방향으로 북진할까, 아니면 아이누 섬으로 갈까 이민호가 잠시 고민할 때 계복이 건의했다.
“도련님! 전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맞다! 그럼 은점에서 돈 좀 빼가야지.”
이번에는 계복이 권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선 8척이 동쪽으로 항로를 틀었다. 항해사가 침로를 세밀히 계산해 선장에게 보고하고, 선장은 조타수에게 변침을 지시했다.
이와미 은광 앞바다에 도착하니 이미 밤중이었다. 일단 척후를 상륙시켜 은광 지역에 대한 정찰을 시키고 저녁을 준비했다. 두 시간쯤 지나서 해병 척후들이 돌아왔다.
“경비가 지난번보다 많이 강화됐습니다. 은광까지 초소가 세 군데나 새로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은광을 복구해서 밤에도 은을 채굴해서 정련을 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주민들을 대거 투입했겠군. 수고했다.”
은광에 대한 공격 시간을 새벽으로 잡고 계복, 여수들과 함께 지도를 보면서 작전을 짰다. 그 사이 해병들에게는 잠을 재웠다. 작전 회의를 마치고 이민호도 선실로 돌아와 풍성한 민영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일찍 잤다.
“도련님! 계 대원수께서 오셨어요. 출동할 시간이에요.”
“뭐? 몰라. 졸려.”
민영이 이민호를 불렀다. 이민호가 잠결에 고개를 돌려서 보니 군복을 차려입은 민희가 선실 문밖에서 기다리는 계복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민호는 너무 졸려서 그냥 잤다.
- 타앙~ 탕~ 콰아앙~
아련히 꿈결처럼 들리는 소리에 이민호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후다닥 일어났다.
“어떻게 된 거야?”
“도련님은 새벽잠이 그리 많으면서 어째서 또 새벽 작전을 계획했어요? 계 대원수가 지휘하기로 했어요.”
“깨우지 그랬어?”
“당연히 깨웠죠. 그리고 주인님은 당연히 다시 주무셨죠.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던데요?”
민희가 어린이는 잠이 많은 법이라고 놀리는 사이 민영이 식판을 들고 들어왔다. 새벽잠이 깊게 드는 체질이 바뀌지 않아 정말 큰일이었다.
아침밥을 대충 떠먹은 이민호가 서둘러 군복을 입고 함교로 나갔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고, 은광 쪽에서 총성과 폭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모리 가문에서 은광을 경비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배치했다는 척후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총성이 멈추더니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해병들이 어깨에 작은 상자를 지고 내려왔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북쪽 니마(仁万) 포구 쪽에서 총성이 울리더니 포구 전체가 불타오르며 화광이 검은 하늘에 충만했다. 니마 포구는 이와미 은광에서 채굴해 정련한 은이 배에 실리는 항구였다. 새벽 여명이 하늘에 번질 때 계복이 함교로 돌아왔다.
“새벽에 못 일어나서 미안. 혹시 사상자는 있어?”
“사상자는 없습니다. 왜놈들의 성에서 한쪽 구멍을 터놓고 빠져 나오는 대로 조졌습니다.”
이민호가 새벽에 못 일어난 일은 계복은 항상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계복이 새벽에 선실에 들렀을 때도 이미 알고 예의상 물어본 것뿐이었다. 수원에서 살 때도 이민호가 새벽에 아침운동을 하겠다고 깨워달라고 했다가 좋은 소리 들은 적이 없었다.
“다행이네. 부산포처럼 사상자가 생기면 어쩌나 했어.”
“이번에는 갱도 안쪽 깊이 세 군데를 순차적으로 무너뜨렸습니다. 복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정련소도 자근자근 부쉈습니다.”
“잘했다. 얼마나 돼?”
“천 관, 10만 냥쯤 됩니다.”
1관이 3.75kg이니 천 관이면 3.75톤이다. 그러나 대규모 거래에 익숙해진 이민호에게는 푼돈으로 보였다.
“쳇! 위험을 감수했는데 그 정도뿐이군.”
“울산에서 죽은 왜장들 갑옷을 팔면 이것 다섯 배 정도는 할 겁니다.”
“그만 해. 잊어 버려.”
일본 전국시대의 갑옷이 화려한 것은 신분과시 목적이 아니라 사무라이들이 홍보 목적으로 갑옷에 지나치게 투자한 때문이었다. 영주에게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 출세할 수 있는 시대였으니 갑옷에 과도하게 치장을 하곤 했다.
“은광 공격에 참가한 자는 30냥, 배에서 대기한 자는 20냥이다. 맞지?”
“예. 전에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똑같이 주면 좀 그러니까 계복은 300냥, 여수는 100냥, 대정은 50냥을 받는 게 어때?”
“주시면 받겠습니다.”
전선 8척은 북쪽을 향해 떠나고, 은은 즉각 분배됐다. 김학은 가만히 있다가 은 20냥을 받아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해적이 아니오. 해병이든 누구든 매달 월봉을 받소. 하지만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큰 이익이 나는 작전을 수행했을 때는 이익을 나누기도 하오.”
“제가 잘 모르겠지만 깊은 뜻이 있는 줄로 믿겠습니다, 전하.”
“고산국이 아직도 개척 중이라서 그렇소. 금방 적응할 거요.”
조선군도 승리 후에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니까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노략질한 재산을 나누는 것은 왜구와 다름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이민호에게 자격지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민호는 일본 지도를 살폈다. 이와미 은광에 버금간다는 산음의 이쿠노(生野) 은광을 공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은광이 해안에서 60km쯤 떨어진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어 해병 천 명과 기마병 300기로는 역부족이었다. 사도(佐渡) 금은광은 아직 광맥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겐타로가 보낸 보고서에 언급이 없었다.
“일본 해안을 따라 가면서 큰 포구에 정박한 배를 태운다.”
이민호가 일종의 무제한 작전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전선 8척은 혼슈 북부 해안을 따라 동진하며 오다, 이즈모, 사카이미나토, 후쿠이, 이시카와 등의 포구를 불태웠다. 왜병들이 막으러 오면 쏴 죽이거나 멀리 쫓아버렸다.
가끔 영주들이 세키부네 한두 척과 고바야 여러 척을 몰고 바다에서 대항했으나 전선 8척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 당시 일본의 해안 영지에는 상시 운용하는 군선이 몇 척 없을 때였으니 바다로부터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어째서 아무 죄 없는 가난한 어부나 상인들의 배를 불태우는 거요! 전쟁은 조선에서 벌어지지 않았소? 여기는 평화로운 곳이니 제발 내버려두란 말이오! 나는 물론이고 백성들도 전화에 휘말리고 싶지 않소!”
중소 영주 한 명이 작은 배를 몰고 이민호가 탄 전선에 와서 항의했다. 이민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째서 왜병들은 아무 죄 없는 조선의 농부들을 죽이고 처를 겁간했느냐? 전쟁이 일어났으면 너희들도 조선인들이 당한 참화를 똑같이 겪어야 할 것이다.”
그냥 강간만 했다면 차라리 나은데 왜병 수십 명이 한 여자를 돌려가면서 덮쳐서 끝내 여자를 죽이곤 했다. <정만록>에 따르면 왜병들은 이런 식으로 포로가 된 조선 여자 수십 명을 죽였다. 이런 경우 강간이 아니라 재미로 간살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럴 리가 없소! 기강이 확실히 잡힌 일본군이 외국의 백성을 함부로 죽이거나 겁간할 리가 없소. 혹시 있다 해도 극소수 비열한 자들이 저지른 짓이오.”
“비열한 자들을 막지 않았으니 너희들도 똑같이 비열한 자들이다. 조선에서 당한 자들과 똑같이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조금 멍청하지만 착한 영주 같아서 죽이지 않고 내버려뒀다. 포구가 불타는 동안 영주가 뱃전에 꿇어앉아 울었다. 훈련병 김학도 울었다.
이민호는 일본 어부에 대해 좋은 감정이 없었다. 일본 어부라면 독도의 강치를 몰살시키거나 돌고래를 학살하는 인상만 깊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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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