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4 25. 차가운 바다, 뜨거운 땅 =========================================================================
“만약 남 주기 아까우면 주인님이 안으세요. 호호!”
“됐고! 꼬마들을 두고 무슨 소릴!”
“혹시 알아요? 나중에 경국지색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예쁘게 자랄지.”
이민호가 수건을 살짝 들쳐보니 아이의 종아리와 허벅지에 굵은 솜털이 꽤 많이 나 있었다. 이민호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자 민영이 이민호의 손등을 찰싹 쳐서 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덮었다.
전 인류를 통틀어 가장 털이 많다는 아이누족이라서 아이들인데도 히말라야나 캐나다의 전설에 등장하는 설인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민호는 아주 예전에, 일본 연예인들 중에 서구적인 마스크를 가진 아이누 출신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애들하고 말도 안 통하는데 불편해서 어떡하지?”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민호와 민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입 주변에 문신을 하지 않아서 무척 다행이라고 여겼다.
“저희들 시녀로 주세요. 설비는 맛있는 걸 너무 좋아해서 포기했지만 애들은 저희가 잘 키워볼게요.”
“너희 둘은 차분히 궁궐에 붙어있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키우려고?”
그러나 민희와 민영이 강력하게 요구해서 결국 아이누족 여자아이 네 명을 민희와 민영의 시녀로 두기로 했다. 오갈 데 없는 아이들에게 보호자를 만들어줘야 했으므로 이민호가 반대하기도 어려웠다.
아이들은 장차 희망에 따라 시녀나 호위병으로 키우기로 했다. 민희와 민영이 이민호를 따라다녀야 하므로 궁궐에서 직접 키워줄 유모를 고용할 계획이었다.
“쯧쯧! 이 나이에 집을 떠나야 하다니, 불쌍해.”
아이누족 추장들이야 딸을 훌륭한 신랑감에게 시집보낸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민호가 보기에 젖먹이에서 갓 벗어난 애들이었다. 아직 일일이 챙겨줘야 할 아이들을 남에게 떠맡기듯이 하는 부모들을 이민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난한 지역 사람들은 다 그래요. 하루라도 빨리 입 하나를 줄여야 하니까요. 어쩔 수 없이 생긴 조혼 풍습이니 주인님은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부디 여자들이 다 큰 다음에 천천히 결혼해도 되는 그런 좋은 세상을 주인님이 만들어주세요.”
“미안. 그렇게 할게.”
결국 민희에게 한 소리 들었다. 민영이 시무룩해진 이민호의 팔에 매달리며 격려를 해줬다. 다들 먹고 살 만한 세상이 오면 여러 가지 폐단도 없어질 것으로 믿었다.
“주인님은 반드시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여요.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해중국 해녀들만큼만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거, 쉽지 않을 걸?”
매달 봉급을 받아 여유롭게 생활하는 해중국 해녀들은 이 시대 여자들치고는 극히 예외적으로 경제적, 사회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고산국과 해중국 모두 여초현상이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해중국 해녀들은 국적이나 처녀 여부를 불문하고 시집도 잘 갔다. 결혼해서도 여전히 해녀 일을 하기 때문에 집안에서 발언권도 크다고 한다.
해녀가 인기직종이라 희망자가 많았지만 명나라의 시장 수요를 감안해서 인원을 천천히 늘리고 있었다. 이번에 아이누족에게서 해삼을 수입하게 됐으니 함경도와 해중국의 해삼 양식 사업이 어느 정도 위축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공급보다는 해삼 수요가 훨씬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어서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애들이 있으니 어떻게 하지?”
“뭘요? 어머!”
민희가 아이들을 여자 호위병들이 묵는 옆방으로 옮겨 재웠다. 민희가 돌아왔을 때 큰 침대에서는 이민호가 민영을 알몸으로 만들어 껴안고 있었다. 이민호가 손짓으로 민희를 불렀다.
민희와 민영은 수건을 입에 물고 신음소리를 참아냈다. 기함의 함대사령관실에 방음설비를 했지만 민희와 민영은 예전에 시아버지에게 민망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서 절대 믿지 않았다.
11월 중순에 함경도 해안에 도착한 이민호는 백성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면서 천천히 남하했다. 전선 8척이 해안을 향해 함포를 겨누면서 내려갔으나 해안 분지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난류의 영향을 받는 아이누 섬 남부와 달리 대륙성 기후 지역인 함경도에는 눈이 많이 내려 천지를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회령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국경인은 10월에 이미 처단됐고 국세필도 경성에서 최후를 맞았다. 병마평사 정문부가 관군과 의병들을 이끌고 길주성에서 왜군과 싸우고 있다고 해서 길주로 향했다.
“길주성이 해안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주변이 평지니 기마병을 운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민호는 계복과 기마병 지휘관인 감동과 감불, 해병 여수 8명을 기함에 불러 함교에서 회의를 가졌다. 아이누족 훈련병을 가르치는 김학을 특별히 회의에 참가시켰다.
함경도의 읍성 대부분이 동해안이나 두만강변에 성읍을 두고 있는데 거의 유일한 예외가 길주였다. 해안을 깎아지른 듯한 칠보산이 자리 잡고 있어 길주성은 바닷가에서 20km 정도 떨어진 평야 지역에 위치했다.
“이곳 영동에 왜군 300명이 있다니까 여길 쳐서 점령하고 왜군의 교통로를 끊자.”
길주 남서쪽 영동관 책성은 폭이 좁은 해안 분지에 세워둔 작은 요새였다. 현대 북한에서 김책시 위치였다.
“함포로 무너뜨립니까? 아니면 차후 방어시설을 사용할 것을 감안해 총격전만으로 점령합니까?”
“함경도는 가등청정 군이지? 아마 우릴 모를 테니 성 밖에서 유인작전을 한 번 해볼까?”
“그게 좋겠습니다.”
작전은 즉각 실행됐다. 일부러 영동관 책성에서 안 보이는 해안에 기마병 300기, 해병 600명을 상륙시키고 아이누족 훈련병 50명도 내리게 했다. 미래를 위해 사관생도를 실전에 투입하면 안 되지만 책을 읽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나으니 안전한 곳에서 참관만 하도록 했다.
“쯧! 미곡 창고를 고스란히 적에게 내주면 어떡하자는 거야?”
이민호가 말을 타고 내린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 명천군 해창(海倉), 해로를 통해 함경도의 세곡이 모이는 곳이었다. 창고 건물은 불에 탄 잔해만 남아 있었다. 지난 10월 30일에 군량이 떨어진 길주성의 왜군이 노략질을 한 탓이었다.
“가자!”
척후를 앞에 내세우고 기마병부터 강을 따라 10리쯤 북쪽으로 향했다. 길을 가다 보니 장덕산이라는 곳부터 사방에 치열한 전투 흔적이 역력했다. 목이 잘리고 갑옷과 옷이 벗겨진 왜병들의 시체가 눈에 반쯤 덮인 채 사방에 널려 있었다. 명천 해창에 대한 노략질을 마치고 길주성으로 돌아가던 왜군 수백 명을 함경도군이 포위해 섬멸했다더니 사실인 것 같았다.
“잘 싸우고 있네.”
그러나 길주성이라는 작은 읍성에서 왜군이 조총을 쏘면서 버티고 있어서 정문부군이 점령하기 쉽지 않았다. 이민호는 장덕산을 북쪽에 두고 서쪽으로 향했다. 목표는 정문부군이 포위 중인 길주성이 아닌 영동이었기 때문이다.
산 하나를 넘자 평지가 나타났고 멀리 돌과 목책으로 쌓은 왜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민호는 기병과 해병 대부분을 언덕 너머에 숨기고 해병 1개 려만 이끌고 평지로 내려왔다. 말에 탄 사람은 이민호와 민희, 민영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성에서 사람 그림자만 몇 보이다 말고 반응이 없었다.
“우릴 봤을 텐데 안 나오네.”
“유인작전에 자주 당해서 쉽사리 안 나오나 봐요. 제가 도발을 좀 해볼까요?”
“민희가? 위험하지 않다면 해봐.”
이민호가 허락하자 민희가 가죽 덧옷을 벗어 말안장에 묶었다. 몸매가 제대로 드러나는 갑옷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민희는 기병총을 안장에 꽂아 단추를 잠그고 활을 꺼냈다. 그리고 영동관 책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끼랴앗!"
뾰족한 여자 목소리를 일부러 내면서 민희가 책성 앞에서 말을 달렸다. 그리고 책성을 향해 가끔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가등청정에게 왕자 두 명을 넘길 때 반란에 가담한 자가 영동성에도 있을 테니 말은 제대로 통한 것 같았다.
왜병들이 목책 위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민희에게 조총을 겨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자가 여자인 줄 빤히 알면서도 조총을 겨누는 것으로 보아 왜병들이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 탕! 타탕!
책성에서 하얀 화약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민희는 개의치 않았고, 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쌓인 눈이 튀었다. 민희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책성을 향해 화살 세 발을 연속 날렸다.
말을 멈춰 선 민희가 다시 뭐라고 외쳤으나 여기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를 도발하는 말은 몇 가지 안 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왜병들이 책성 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민희를 향해 조총을 마구 쏘아댔다.
민희는 서서히 뒤로 물러서면서 간간이 활을 쏘았다. 민희가 가진 활은 고급 흑각궁이라 만주나 몽골 각궁보다 사거리만은 확실히 좋았다. 왜병 한둘이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민희가 뭐라고 욕했기에 왜병들이 저렇게 화가 난 거야?”
“그건, 아! 주인님은 모르시는 게 낫겠어요.”
민영이 얼굴을 붉혔다. 함경도나 평안도에 사는 괄괄한 처녀들이 못난 남자를 성적인 언어로 놀리는데 그것은 여진족 처녀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온다. 사격 대형 갖춰! 유탄은 쏘지 말 것! 총탄만으로 상대하겠다.”
이민호가 지시하자 해병들이 3열 횡대로 길게 늘어섰다. 보병총만으로 왜군을 어느 정도까지 상대할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기에 유탄 사격은 금지시켰다.
왜병들이 민희를 쫓아 무질서하게 뛰어오다가 해병 대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왜장의 지시에 따라 대열을 갖췄다. 왜병들은 자기들이 300명이니 조선군 100여 명 정도는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쏴!”
왜병들이 몰려오기 직전에 이민호가 사격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일제사격에도 불구하고 왜병들이 계속 달려왔다. 두 번째 일제사격에 약간 놀랐으나 계속해서 뛰어왔다. 그리고 세 번째 일제사격을 당하자 왜병들이 당황해서 돌격을 멈췄다. 왜군 조총병이 사격을 위해 멈추는 순간 즉시 총격을 당해서 조총병은 이미 하나도 남지 않았다.
왜장이 칼을 휘두르며 뭐라고 고함을 지르고 왜병들이 다시 돌격 자세를 갖추는 순간 네 번째 일제사격이 가해졌다. 이때는 왜병들 숫자가 1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해병들이 장전하는 사이 민희와 민영이 활을 쏘고 이민호도 보병총을 들고 사격에 가세했다. 다시 일제사격이 가해지자 기다란 창을 들고 돌격하던 왜병이 창을 놓치고 쓰러졌다. 창끝이 이민호 바로 앞에 떨어졌다.
“역시 세 배 정도까지밖에 감당을 못하는구나.”
“예. 위험했어요.”
민희와 민영이 앞을 가리면서 총을 겨누고 있었으니 이민호가 위험할 일은 없었다.
“전진!”
이민호가 말을 타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해병들은 가끔 살아있는 왜병을 총검으로 찌르면서 영동관 책성으로 접근했다.
그 동안 숨어있던 기마병을 필두로 나머지 해병들과 아이누족 훈련병들도 언덕을 내려왔다. 그런데 북쪽 길에서 내려오는 기마병이 있어서 이민호가 시선을 주었다.
“전령이오! 대인은 어디 계시오? 전령이오!”
“이쪽으로 와라!”
기마 전령이 말을 세우는 동시에 몸을 날리더니 그대로 이민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군례를 올렸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멋진 착지 동작에 이민호가 몹시 감탄했다.
“10점!”
“예?”
“말 잘 탄다고. 무슨 일이냐?”
“제독총병관 대인! 정 병마평사 문부의 공장을 가져 왔습니다.”
이민호가 문서를 받았다. 장수나 관리가 수사나 병사급 이상의 상급자에게 직품을 적은 문서인 공장을 바치는 것은 곧 방문해서 알현을 신청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민호가 배를 몰고 해안선을 타고 내려왔으므로 정문부도 이민호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책성을 점령하고 있을 테니 언제든 오시라고 전해라.”
전령이 주변에 쓰러져있는 왜병 수백 명을 뒤늦게 확인하고 눈이 휘둥그레 떴다. 이민호가 관직명이 적힌 명함을 전령에게 주어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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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