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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75화 (124/1,000)

00175   25. 차가운 바다, 뜨거운 땅  =========================================================================

영동관 책성 동쪽에 해병 600명, 기마병 300명, 아이누족 50명이 포진했다. 여기에 잠시 후 전선 8척이 바다에서 나타나 영동 책성으로 접근했다. 영동(嶺東)이란 마천령 동쪽을 뜻했다.

책성에 남아있던 소수 왜병들이 농성을 할까 말까 고민하더니 전선 8척이 나타나는 순간 미련 없이 뒷문으로 빠져 나갔다. 조선 판옥선을 본 적은 없었지만 판옥선에서 화포를 쏘아 뭐든지 박살낸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왜병들은 책성을 포기하고 도주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들이 판옥선으로 알았던 배는 판옥선보다 화력이 강한 고산국의 천자 전선이었다. 전선에서 함포 몇 발을 쏴서 달아나는 왜병 10여 명을 쓰러뜨렸다. 나머지 왜병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언덕 뒤로 숨어서 달아났다.

이민호는 해병 1개 대를 먼저 보내 책성에 적이 숨어있는지 수색하도록 하고, 나머지 병력은 계속 전진시켰다. 그때 책성 북쪽 얼어붙은 개천을 넘어 기마병 수십 기가 달려오고 있었다.

“흠차제독총병관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북도 병마평사 정문부라 합니다.”

“오! 평사께서 함경도를 거의 수복했다 들었소. 여러 장수들도 고생 많이 하셨소.”

정문부는 1565년생이었으니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았다. 정문부 외에도 경원부사 오응태, 종성부사 정현룡, 고령첨사 유경천이 차례로 이민호에게 인사를 올렸다. 전에 시전부락을 쳤을 때 봤던 얼굴도 섞여 있었다.

함경도 기마병들은 전마부터 말 타는 솜씨, 갑옷과 무장까지 모든 것이 정예롭다는 느낌을 폴폴 풍기고 다녔다. 이민호는 이들에게 욕심이 났으나 이런 정예 기마병을 지휘할 일은 앞으로 없을 것 같았다.

“정 평사는 문관이라고 들었는데 참으로 대단하시오.”

“감사하오이다, 대인! 조선 국왕전하의 어지에 따라 제가 이끄는 관군과 의병의 지휘권을 대인께 바치겠습니다.”

“국왕전하께서 그런 어지를 내리셨던가요?”

“예! 황제폐하께서 칙서를 내리셔서 제독총병관 대인께서 주차한 지역의 모든 관병과 의병, 군량 수송을 맡은 관리와 백성들까지 예외 없이 대인께 소속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국왕전하께서 폐하의 칙서를 팔도에 반포하시면서 칙명을 거역하는 자는 누구든 황법과 국법에 따라 엄한 벌을 받을 거라는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황제가 이민호에 대한 지원을 확실히 해주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민호가 심지어 조선국 도원수까지 지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에게 높은 관작에 비해 겸손하다는 인상을 심기 위해 노력하는 이민호가 실제로 도원수에게 지휘권을 행사할 일은 없었다.

“좀 과한 것 같은데, 황제폐하께서 그런 칙서를 내린 연유가 있겠지요. 잘 알겠소. 하지만 나는 여길 곧 떠날 거요. 정 평사께서 길주성을 공략한다는 소문을 듣고 잠시 도와주러 온 것뿐이오. 그러니 지휘권은 정 평사가 계속 갖고 계시오.”

“신명을 다해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인께서 도와주신다면 길주성에 웅거한 왜적은 이제 다 죽은 목숨입니다.”

이민호는 정문부 등 장수들과 인사를 마치고 영동관 책성으로 향했다. 길주성을 포위한 함경도 관군과 의병들이 그 동안 이곳도 꾸준히 공격했는지 돌이나 통나무에 화포 자국이 나 있고 곳곳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책성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이렇게 통나무 위주로 건설된 성채였다.

“오시자마자 영동관 책성을 점령하셨군요. 그것도 왜적을 밖으로 유인해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성을 빼앗으셨으니 과연 신묘한 술책을 부리신다고 이름나신 대인이십니다.”

“낯 뜨거우니 칭찬은 그만하시오. 혹시 정 평사와 여러 장수분들이 바쁘지 않으시다면 식사나 같이 하시겠소? 밥값으로 그 동안 왜적을 토벌한 이야기나 재미있게 들려주시오.”

“저희들이 어찌 감히 대인 앞에서 전공을 자랑하오리까? 하지만 명이시라면 받들겠습니다.”

해전에서야 공동작전이니 이민호의 전공이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낮게 평가하자면 삼도 수군에 의해 왜선을 모두 잃고 도주하는 패잔병들을 쉽게 잡은 데에 불과했다.

하지만 금산성 전투와 진주대첩 같은 지상전에서는 전공이라는 측면에서 확실하게 조선의 다른 부대들을 압도해 버렸다. 지금까지 지상에서 거둔 대첩에는 모두 이민호가 관련돼 있었고, 그때마다 결정적으로 승부의 추를 기울인 핵심 전력으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지금까지 조선 조정이나 백성들이 모르는 전공을 더 많이 세웠다. 병참보급로의 중심인 대마도를 네 번 공격했고 나고야 성에 포격을 가해 천수각을 무너뜨려 풍신수길을 오사카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상륙교두보인 부산포와 울산왜성을 공격해 더 많은 왜군을 해안에 묶어놓았다. 조선을 침공한 왜병들이 군량 부족으로 굶주리는 이유의 절반 이상은 이민호에게 있었다.

그리고 이와미 은광을 두 번이나 털고 나서 무너뜨렸으며 혼슈 북부 해안을 공격해 해안 지방의 영주들이 풍신수길에 대한 군선과 병력 지원을 줄이게 되었다. 아이누 섬에 가까운 지방의 영주들은 언제 거대한 흑선들이 나타나 성에 포격을 가할 줄 몰라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전쟁 기간 중에 식량 가격이 오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해안을 공격해 배를 불태움으로써 양곡을 운반할 배가 확 줄어들자 쌀값이 폭등했다. 결국 혼슈 몇 곳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게 되어 원래 나고야로 향했어야 할 병력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이민호는 직접적인 전공보다는 일본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차근차근 갉아먹고 있었다.

“의외로 넓군요. 자! 말에서 내립시다.”

영동성 책성 안으로 들어가니 그런 대로 주둔할 만했다. 이민호가 정문부와 장수들을 허름한 건물로 이끌었다. 잠시 후 해병들이 식탁을 차리고 식사는 전선에서 해서 날랐다. 오랜만에 따뜻한 밥을 좋은 반찬과 함께 먹게 된 장수들이 기뻐했다.

식사하기 전부터 정문부가 그 동안 함경도를 탈환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왜병과의 전투 전에 먼저 반역자들을 참수하고 그 중간에 여진족들과도 싸워 몰아낸 정문부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문부는 문장력이 좋아 나중에 문과에 급제하는 사람이라 말을 조리 있고 재미있게 잘 해서 이민호가 이야기에 푹 빠져 들었다.

“그런데 대인! 늦기 전에 들판에 널린 왜적들의 수급과 전리품을 걷으셔야지오.”

“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느라 잊어먹었소. 정 평사께서 걷어서 전공을 부하 장수들에게 나눠주도록 하시오. 위에 보고할 때는 본작과 공동작전을 했다고 하면 될 것이오.”

“예? 그럴 수는 없습니다만.”

“관작이 높은 내가 전공을 세워서 무엇 하겠소? 그 동안 조정으로부터 지원을 못 받고 함경도에서 고생한 장수와 병졸들에게 상으로 내리시오.”

실제 역사에서 정문부는 함경도를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면서도 함경감사와 병마절도사 등에게 시기를 받아 제대로 된 포상을 받지 못했다. 주장이 상을 못 받으면 그 밑에서 싸운 사람들도 포상에서 소외된다. 이민호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혹시 군량이 부족하지 않으시오?”

“영덕의 김 절충이 경상 강원 함경 삼도 소모사가 되어 군량과 소금, 물고기를 부족하지 않게 대주고 있습니다. 김 절충은 모든 공을 제독총병관 대인께 돌리던데 사실입니까?”

의병에 참가할까 말까 고민하던 영덕 어부 김 가는 경상도 동해안부터 함경도까지 배를 타고 다니면서 관군과 의병에게 군량을 보급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절충장군 품계를 받았다. 그를 더 이상 김 가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오! 그분이 절충장군에 오르셨구려. 잘 됐소. 나하고 사업을 같이 하는 분이니 만나면 인사나 전해주시오.”

“역시 대인께서는 조선 팔도의 모든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주시는군요. 감탄했습니다. 아! 그렇다고요.”

칭찬이 조금 더 지나치면 역모죄로 고변당할 수 있어 서로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그러나 종성부사 정현룡이 술잔을 탁자에 내려치면서 흥분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식탁이 어느새 술자리로 변해 있었다.

“누구든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입니다. 누구를 부리든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정여립이 했다는 말과 비슷했으나 원래 출처인 유자혜의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은 임금이 원래는 다른 사람들과 신분 차이가 없었다는 뜻이며, 좀 더 발전하면 군주의 혈통론을 부정하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정현룡의 발언은 기회주의자의 속내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실제로 정현룡이 가토 기요마사에게 항복할 때 이런 편지를 남겨두고 도망쳤다고 한다.

“아니! 이 사람아! 목이 달아나고 싶은 게야?”

“형님!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정현룡보다 다섯 살 많은 경원부사 오응태가 말렸으나 정현룡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정현룡은 애초에 가토 기요마사에게 항복했다가 왜군 진영에서 도망쳐 나온 다음 정문부에게 용서를 받았다.

함경도에서 국경인의 반란에 가담했거나 왜군에 항복했던 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정현룡도 조선 왕조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정문부가 반란에 단순 가담했던 자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만큼 여론이 심각했다.

“마침 이곳은 풍패 옛 고을의 왕기가 살아있는 곳 함경도입니다. 때마침 제독 대인이 오셨으니 여기서 나라를 세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썩은 임금을 몰아내고 새 왕조를 개창하시겠다고 결심만 하신다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술자리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도 놀라서 잠시 눈을 깜빡이던 이민호가 정신을 차리고 고함을 질렀다.

“이 무슨 망발이오? 정 부사는 술이 많이 취하신 것 같소. 이만 술자리를 파하겠소이다.”

“제독 대인! 제 말씀을, 헉!”

오응태가 정현룡의 옆구리에 주먹을 찔러 넣은 다음 숨을 못 쉬는 그를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밖에서 퍽퍽 때리는 소리가 나고 비명과 함께 숨이 끊어질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험! 험! 하도 끔찍한 이야기라서 본작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그런데 저러다 사람 잡겠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정 부사 저 분이 술에 취했는지 혀가 꼬여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저는 못 알아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겠소.”

자리에 남은 정문부는 못 들은 척했고 고령첨사 유경천은 일부러 술에 취해 자는 척 탁자에 얼굴을 처박고 코를 골았다. 술자리가 어색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민호가 기함으로 돌아가려고 나서는데 석축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 둘이 속닥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정현룡이었고, 목소리를 들어보니 다른 사람은 오응태였다.

“훌쩍! 너무하세요. 갈비뼈에 금 갔겠어요. 형님도 이 대감이 왕이 되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야! 사람들 있는 곳에서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그런 자리에서는 제발 좀 닥치고 있어라. 나도 저 호구가 마음에 들고 왕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아니다. 일단 왜적이 물러난 다음에 꼬셔보자. 사나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냐?”

이민호는 두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해주려다가 말았다. 여기서 나서면 저 둘을 역모죄로 고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민호는 현재 무장들과 함경도의 여론을 알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민호는 기함으로 돌아와 따뜻하게 자려고 했다. 그러나 민희와 민영이 아이누족 애들을 껴안고 큰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옆의 작은 침대에 누우며 투덜거렸다.

“쳇! 이래서 애들이 싫어.”

다음 날 아침, 이민호는 해병들을 영동관 책성에 남기고 기마병만 이끌고 정문부 등과 함께 길주성으로 향했다. 100리 가까운 거리에 절반은 산길이라 점심때쯤 길주에 도착했다.

종성부사 정현룡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고 눈가가 퍼렇게 변해 있었다. 경원부사 오응태가 눈치를 줄 때마다 정현룡의 얼굴이 갑옷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길주성 북쪽에 길주 토병 김국신이 보병 2백 명을 이끌고 진을 치고 있다가 나무하러 나오는 왜병을 잡고 있습니다. 의병 원충서는 동쪽 길목에 역시 200명을 이끌고 매복하고 있습니다.”

정문부가 길주성 주변에 포진한 아군 위치를 가리키면서 현재 상황을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10월 30일 이후 정문부 휘하에 병력 3천이 소집되어 지금은 그 대부분이 길주성 포위전에 동원되어 있었다.

여기서 안 보이는 곳에도 길주성 공략을 위해 동원된 병력이 많았다. 척후장 전 만호 강문우와 창의별장 이붕수는 의병들을 이끌고 다른 지역의 왜군들이 길주성을 구원하지 못하도록 길목을 막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어지는 이야기는 오전에 올리겠습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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