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81화 (130/1,000)

00181  26. 동해여진  =========================================================================

이민호는 송화강 유역에 사는 여진족 여자들이 머리 장신구로 쓰는 가화(假花)를 만들 붉은 비단을 많이 준비했으나 비싸서 잘 팔리지 않았다. 올해는 여진 지역에 심한 흉년이 들었고 건주여진을 비롯해 전쟁이 잦아서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적은 편이었다.

“주인님! 이것은 송화강에서 채집되는 진주라고 해요. 바다에서 나는 진주보다는 질이 떨어지지만 쓸모가 많다고 저 추장이 주장하고 있어요.”

“듣던 것보다 품질이 괜찮군. 가격이 적당하니 가지고 온 것을 모두 사겠다고 전해라. 민희와 민영이 어때? 예쁜 것 몇 개 가질래?”

“헤헤! 주인님이 몇 개만 직접 골라주세요.”

민희와 민영이 여진말을 통역하면서 이민호를 따라다녔다. 이민호는 민희와 민영에게 진주목걸이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완벽한 원형의 진주는 어쩌다 하나 있었고 대부분은 반구형, 또는 찌그러진 모양이었으며 크기 또한 작았다. 색깔 또한 분홍색과 갈색 등등 여러 가지로, 나쁘게 말해서 색깔이 탁했고 좋게 말해서 다양했다.

서양 예술사에서 17세기의 바로크 양식은 포르투갈어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에서 나왔다. 지금은 어느 정도 값을 받을 수 있으나 바다에서 양식하는 진주가 대량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올 경우 담수진주의 미래는 암울할 것으로 예상됐다. 이민호는 해중국과 해남도에서 진주 양식을 계획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국왕전하 덕택에 식량 외에 철제 농기구도 사갈 수 있겠습니다. 라고 하네요.”

“족장이나 유력자에게는 비단 몇 필씩 공짜로 줘. 이익은 충분히 내고 있으니 좀 풀어도 돼.”

“혹시라도 여진족들이 주인님을 만만하게 보고 속일까 걱정돼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가격을 내가 결정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고산국에서 생산한 비단이 명나라에서 만든 것보다 품질이 좋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해.”

여진족 족장을 비롯한 유력자들이 말 이외에도 다양한 상품을 가져와서 거래 규모가 점점 커졌다. 그런데 준비한 농기구 중에서 아이누족에게 인기가 좋던 괭이와 삽이 아니라 보습이 가장 잘 팔렸다. 아이누족과 달리 여진족은 땅을 깊게 갈아엎는 심경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여진족들은 소가 부족해서 말을 연결해 보습을 끌게 했다.

여진족도 철을 생산해 철제 농기구를 만들지만 금속가공기술이 떨어지는 편이라 고산국산, 실제로 조선산 농기구의 품질이 훨씬 우수했다. 쇠로 만든 가마솥을 구하는 여진족들이 많았으나 조선이 전쟁 중이라 재료로 쇠가 많이 들어가는 솥은 상품으로 준비하지 못했다.

여진족들은 말과 진주 외에도 여러 가지 물건을 가져왔다. 양가죽으로 만든 옷인 양구와 크고 작은 사슴가죽, 즉 대녹비와 소녹비, 그리고 고급스런 수달피와 모시로 만든 베 소청포(小靑布)를 판매했다.

이민호는 이 물건들을 조선이나 명나라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대량 구입했다. 수달피는 추운 북경으로 보내고 소청포는 광동이나 절강으로 보내 한산모시 아래 등급으로 판매할 계획이었다.

평소에 건주여진이나 해서여진에게 싸게 팔고 소금 등을 비싸게 사느라 손해를 많이 보던 동해여진 부족들은 이번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래서 말과 청포, 각종 모피와 산삼 등을 있는 대로 다 갖다 팔고 이민호가 가져온 모든 물건을 사려고 발악했다.

그러나 배에서 내린 물건이 고개를 넘어 끊임없이 시장으로 실려 왔다. 쌀과 소금, 면포는 전선들이 계속 실어 나르고 있으니 앞으로 얼마든지 팔 수 있었다.

그 동안 건주여진으로만 일방적으로 흘러가던 상품의 흐름이 끊기고 일시에 두만강 동쪽으로 쏠렸다. 그래서 계복이 살짝 걱정했다.

“도련님! 설마 건주여진을 이런 식으로 말려죽이실 셈입니까?”

“아니. 아직 건주여진을 망하게 하지는 않을 거야. 이번에는 간을 보고 앞으로는 물량을 조절할 예정이다.”

계복이 갸웃거렸다. 계복은 기마병을 지휘해 여러 방향으로 척후를 보내는 일을 맡고 있었다.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여진 지역에 들어와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불안했던 것이다.

“누르하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인간이 내년까지는 이쪽으로 올 여력이 없을 거다. 내부를 다지고 해서여진과 맞서는 것만 해도 버거울 때야.”

“그럼 다행입니다.”

건주여진이 통합되면서 긴장한 것은 명나라뿐만이 아니었다. 건주여진과 전통적인 경쟁자였던 해서여진의 예허부도 동맹을 끌어 모아 건주여진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역하는 중에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민호와 거래하러 온 여진족들이 오자마자 고산국 은화로 물건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아오지 추장! 저것은 고산국에서 발행한 은화 아니오?”

“예. 전하께서 오시기 전부터 여진족들 사이에서도 가끔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산국 은화는 은 한 냥에서 조금 부족하지만 거래할 때는 한 냥으로 쳐주고 있습니다. 일정한 무게를 보장한다는 정은이라 해도 무게와 은 함량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차라리 고산국 은화를 더 신뢰하는 편입니다.”

“끄응!”

이민호의 옆모습이 새겨진 은화나 금화를 볼 때마다 이민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축통화가 아닌 치부 수단이거나 거래상 표준으로 삼는 기준 화폐에 불과했지만 만주 지역까지 퍼져 있는 것을 보고 이민호는 살짝 놀랐다.

은이 대량으로 유출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민호도 이곳 시장에서 거래의 편의를 위해 어느 정도 은화를 풀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은을 흡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다. 전선에 모피와 진주, 산삼과 청포뿐만 아니라 금과 은도 차곡차곡 쌓였다.

구입한 말이 3천 마리를 넘어서자 외양간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더 이상 말을 둘 곳이 없었고 말먹이 사료가 당장 문제됐다. 면포 한 필로 좁쌀 1석 몇 말을 살 수 있었지만 추운 겨울이라 기본적인 사료인 건초를 구하기 어려웠다. 이민호가 기마병을 보내 두만강 서쪽 경원부와 북서쪽 온성부에 연락을 취했다.

경원부에는 말을 가져가라는 내용으로, 온성부에는 주변에서 말 수백 마리를 이끌고 영내를 통과하는 여진족들은 무역을 하기 위해 이동 중이니 걱정 말고 통과시켜달라는 내용으로 전령을 보냈다. 배가 정박한 만에서는 경흥부와 조산보가 훨씬 가까운데 북쪽 고개 너머에서 시장을 여는 바람에 경원부가 더 가까워졌다.

다음 날 오전 마침 경원에 돌아와 있던 경원부사 오응태가 기병 50기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시장으로 달려왔다. 조선군이 여진족 토벌에 나선 줄 알고 놀란 여진족들이 바짝 긴장했으나 오응태는 여진족들을 무시하고 이민호에게 곧바로 달려왔다.

“제독총병관 대인! 인사 받으십시오.”

“아니! 이건 과례인 것 같소만.”

오응태가 여진족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땅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이민호에게 절을 올렸다.

“대인께서는 원래 높은 분이기도 하지만 여진족들에게 아주 높은 분으로 보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대인을 만만히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소.”

이민호가 오응태를 일으켰다. 오응태는 무관치고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 이민호 입장에서 부담이 되기도 했다.

“난리 이후 전마가 부족하다고 정 평사에게 들었소. 계산은 나중에 하고 전마를 몰고 가서 각 진에 나눠주시오.”

“전마 3천 필을 외상으로 주신다고요? 이렇게 많은 전마를 주신다니 너무 고맙습니다만, 지금 보유한 전마도 있으니 나눠주고도 남겠습니다.”

“남으면 남쪽에 보내거나 백성들에게 더 비싸게 팔면 되지 않겠소? 각지의 성곽을 수리해야 할 테니 군자금으로 쓰시오. 공짜가 아니오. 언젠가 갚아야 하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전마의 가격이 급등했다. 이민호는 여진족에게서 면포 50필에 사서 조선에 500필에 팔 생각이었다. 평상시 전마 상등품 가격이 면포 500필이니 싸게 파는 셈이었다.

만약 말 값을 제대로 받는다면 단숨에 열 배 장사를 하게 됐다. 두만강 바로 건너편에 경원부가 있고 말을 인수하러 경원부사가 직접 왔으니 유통비용도 거의 들지 않았다.

명나라에서 조선과 여진족의 개별적 접촉을 금지하고 조선 스스로 조공무역을 제외한 여진과의 무역을 금했기에 이민호에게 이런 기회가 생겼다. 누르하치가 세력을 키운 것도 건주여진이 여진 전 지역의 무역을 독점한 탓이었는데 명나라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마가 3천 필이나 되니 정상적인 함경도의 군대 운용비에서는 절대로 구입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더욱이 지금은 임진왜란 이후 함경도가 탕패된 직후라 절대로 말 값을 치를 자금이 없다는 것을 알고도 이민호가 말을 넘겼다.

“말 값을 못 갚을 텐데요. 단천이나 안변의 금광을 대인께 하사하라고 조정에 주청할까요?”

“조정에서 허락해주지도 않을 테고 만약 허락하더라도 세금으로 절반을 뗄 거요. 귀찮소.”

명나라에서 조공으로 바치라고 할까 두려워한 조선 조정에서는 조선에서 금이나 은이 나지 않는다고 국초부터 주장했다. 그래서 금과 은 채굴을 거의 하지 않고 민간에 허가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금과 은 채굴을 민간에 어느 정도 허가하고 세금을 받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하게 된다.

“허허! 그렇다면 대인께서 그냥 공짜로 군사들에게 나눠주시고 함경도에서 임금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전한다면 좋아할 수령이나 백성들이 많을 겁니다.”

“행여 농담이라도 그런 불충한 말씀은 다시는 입에 담지 마시오.”

이민호가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춰 경고했다. 그러나 오응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여진 땅에서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농담은 아닙니다만 대인께서 뜻이 없으신 것 같군요. 하지만 지금은 뜻이 없으시더라도 결국 시대가 대인을 부를 것입니다.”

“역적이 되기도 싫고, 무엇보다 귀찮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오.”

“하하! 과연 그러시군요.”

경원부 소속 기병 50명이 말 3천 필을 능숙하게 몰고 서쪽으로 향했다. 이민호는 함경도 기마병이 여러 모로 몹시 탐이 났다. 함경도 기병은 궁기병으로서도 일품이지만 만약 이민호가 가진 화약무기와 결합한다면 여진이나 몽골 기병보다 훨씬 나을 것으로 평가됐다.

경원부사 오응태가 다시 바닥에 무릎 꿇고 절하는 인사를 마치고 떠나갔다. 그러면서 경고를 남겼다.

“요즘 노토부락 여진족들이 설치고 다니니 주의하십시오. 그놈들은 두만강을 넘어 함경도 여러 지방을 노략질한 도둑놈들입니다.”

오응태가 경고한 내용은 바로 다음 날 현실화되었다. 들판을 가득 메우며 기마병 800기 가량이 시장이 열린 들판으로 몰려왔다.

시장에 모여든 주변 마을의 여진족들이 허겁지겁 숨었다. 이 지역 여진족 세 마을은 기마병을 집결시켜 대응할 준비를 갖췄으나 다 합해서 200기 정도에 불과해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다. 계복이 이끄는 기마병 300기가 앞으로 나서는 동안 무역하러 온 자들은 일단 관망했다.

“나는 여진족의 용사이며 7개의 커다란 마을을 직접 지배하는 대 패륵 노토다. 누구 마음대로 여기서 장사를 하라고 했느냐?”

중년의 여진족 추장이 으리으리한 포형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 조선의 고위 장수나 입을 두석린갑과 비슷한 화려한 갑옷이었다. 계복이 말을 타고 앞으로 나섰다.

“나는 고산국의 대원수 계복이다. 말을 구하러 여진족의 땅에 왔다. 네가 노토라면 여기는 너희 영토가 아닐 텐데?”

“나는 왜장 가등청정을 물리친 강맹한 기병을 갖고 있으며 두만강 주변의 모든 여진족들의 종주권을 가지고 있다. 서쪽에서 누르하치 그 애송이가 기세를 올리는 모양인데 나는 누르하치도 우습게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혹시 시장을 약탈할 생각이라면 후회하기 전에 그 생각을 접는 게 좋을 거다.”

계복이 슬쩍 뒤를 돌아보기에 이민호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토성에 야포 2문이 발사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 외에 토성을 지키는 1개 려의 해병들을 제외하곤 전원 시장에 집결해 언제든 지원 사격을 가할 태세였다. 기병은 노토부락이 몇 배나 많지만 보병을 합하면 비슷하거나 이쪽이 더 많았다.

“기마병 겨우 300기 가지고 가소롭구나. 그러나 이 지역에서 모처럼 열리는 무역이니 방해하지 않겠다. 다만 판매액 절반을 세금으로 나에게 바쳐라!”

“싸우자!”

“뭐라고? 이봐! 싸우면 양쪽 모두 손해다. 너희들도 장사를 계속하고 이익을 나눠먹는 게 낫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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