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3 26. 동해여진 =========================================================================
잠시 후 말 3천 필이 지축을 울리며 달려왔다. 말들은 무거운 갑주로 무장한 기병이 타는 전마로 쓰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체구에 지구력도 좋을 것 같은 훌륭한 품종이었다.
예허부의 목부들이 말을 울타리 안에 차곡차곡 몰아넣었다. 몽골족 피가 많이 섞였다더니 이민호가 볼 때 예허부 목부들의 기마실력은 참으로 뛰어났다.
이제 당장 필요한 말 숫자는 대충 모은 것 같았다. 고산국 승마보병들이 쓸 전마 숫자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전라좌수영과 제주도 목장에서 빌린 말을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경상우병영에서 쓸 말도 준비되었다.
그런데 말떼 뒤에 더 많은 인마가 몰려왔다. 말을 탄 사람들 가운데에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가 하얀 갈기를 휘날리며 뛰는 백마 여덟 필에 끌려오고 있었다. 구경하는 이민호를 민희가 충동질했다.
“주인님이 마중 나가주시면 동가공주님이 기뻐할 거여요.”
“민희는 왜 그리 적극적이야?”
“여진족 역사에서 지금까지 나온 최고 미인이에요. 동가공주님을 차지한 다음 주인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동가공주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어도 이민호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의용공주 주상아는 명나라 황실에서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이민호에게는 모든 면에서 최고의 미인이었다.
이민호가 살았던 시대와 다르고 지역이 다르니 여진족들이 입을 모아 동가공주가 천하제일 미녀라고 해도 이민호가 생각하는 미인상과 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민희가 다른 이야기를 꺼내 이민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인인 것도 이유긴 하지만, 만약 동가 공주님이 누르하치 어른에게 시집가면 건주여진과 예허족이 동맹을 맺게 되잖아요. 그럼 여진족이 너무 강해져요.”
농경민족 입장에서는 기마민족은 반드시 분열되어야 한다. 여진족 일만이 모이면 천하가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은 한족들이 자주 하던 이야기였다. 이 시대 여진족의 인구는 다 합해서 50만에서 100만 사이에 불과했으나 명나라와 조선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나중에 여진족이 몽골을 끌어들이고 요동에 거주하는 한족을 백성으로 받아들여 세력을 불린다 해도 명나라 인구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역사에서 결국 여진족이 명나라를 집어삼켰다.
몇 백 년 전부터 명나라에서는 여진족을 동원해 몽골의 배후를 위협하는 역할을 맡기면서도 여진족이 통합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누르하치가 지금은 주위 여진족들을 하나하나 통합해가면서 명나라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도 있었구나. 하지만 싫어. 그리고 그런 이유라면 반드시 내게 올 필요는 없고 다른 부족에 시집가도 되잖아.”
“좋은 여자라면 주인님이 차지하시지 다른 부족에게 내줄 필요가 있나요?”
“어쨌든 필요 없어. 계복아! 네가 마중해라.”
“헤헤! 예.”
이민호가 지시하자 계복이 갈팡질팡하더니 등자에 발도 제대로 못 올렸다. 간신히 말안장에 오른 계복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계복이 착용한 방탄복 중에서 낭심보호대가 앞으로 번쩍 들려 있었다.
“계복아! 침 좀 닦고. 아직 얼굴도 못 봤으면서 뭐가 좋다고 난리야? 상대는 열 살짜리 꼬마야!”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소문을 워낙 자주 들어서 눈을 감아도 그 아름다운 얼굴이 상상이 됩니다. 땅에 발을 딛지 않고 날아다닌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런 미녀라면 이슬만 먹고 살 테니 아마 사실일 겁니다.”
“얼씨구? 이슬 좋아하네. 미녀라도 똥을 싸야 살지.”
이민호는 참이슬 생각이 간절했다. 와인과 몇 가지 과일주는 물론 희석식 소주도 이미 개발해놓았다. 명나라든 유럽이든 상품화시키면 경쟁력은 충분했다. 그러나 아직 고가품 취급을 받는 유리병에 담을 수 없으니 도자기에 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계복이 화려한 대원수 제복을 정돈하면서 기마병 몇 명과 함께 마중 나갔다. 그러나 계복은 마차는 물론이고 호위병들에게까지 무시당했다. 마차는 창문도 안 열리고 계속 시장을 향해 달려왔다.
행렬 앞에서 손을 들었으나 싹 무시당한 계복이 잠시 서 있다가 마차를 뒤따랐다. 마차 주변을 달리는 수많은 기마병들은 화려한 갑옷 위에 질 좋은 가죽옷을 덧입고 있었다. 이들은 죄다 동가공주의 호위병을 자처한 여진족 추장 또는 그 아들들이었다.
마차가 드디어 시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황금마차의 문은 열리지 않았고, 젊고 잘 생긴 추장이나 후계자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줄을 맞춘 다음 몸을 숙여 동가 공주를 위해 마차 문 앞에 인간 양탄자를 깔았다.
“맙소사! 저게 무슨 지랄이야?”
이민호의 솔직한 감상평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시녀들이 먼저 내린 다음 얼굴을 면사로 가린 어린 아이가 문에 타나났다. 이민호가 보기에는 그냥 어린 아이였다. 남녀 성별을 따질 필요조차 없는 그저 어린애에 불과했다.
동가공주가 남자들의 등을 가볍게 밟으며 사뿐사뿐 걸어왔다. 땅을 밟지 않고 날아다닌다는 소문은 약간 과장되긴 했으나 사실이었다. 굥주의 발에 밟힌 추장이나 유력자들이 황홀한 듯 몸을 떨었다. 나중에 일어난 놈들을 보니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동가공주가 이민호 앞에서 살짝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천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산국 국왕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후룬 예허부 예허나라 씨족의 부시야마라입니다. 패륵의 딸인 거거라는 높은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문명국의 국왕이신 전하께서 보시기에는 한낱 천한 야만인 계집에 불과할 것입니다.”
동가 공주는 예허나라가 씨족이라 간단히 설명했지만 정확히는 몽골어로 태양이라는 뜻인 나라 할라의 예허 무쿤 소속이었다. 후룬 4부는 모두 나라 씨족이며 기원을 몽골로 두고 있었으며, 특히 울라부와 하다부는 동일한 몽골인 조상에서 분리됐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다 똑같은 사람인데 야만인과 문명인의 차이가 어디 있겠소? 말 3천 필을 잘 받았소. 상등품 말 한 필에 은 4냥 또는 백미 4석으로 거래하고 있으나 더 좋은 품종인 것 같으니 은 6냥 또는 백미 6석으로 거래하면 어떨까 싶소. 만약 가격에 불만이 있다면 말의 장점을 내게 이해시키시오. 다시 알아보고 단가를 약간 더 올려줄 수도 있소.”
“국왕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국왕전하 앞에서 제가 얼굴을 면사로 가리는 것은 실례인 것 같아요.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이민호는 상거래를 마치는 대로 동가공주를 보내려 했다. 그러나 동가공주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시녀들이 양쪽에서 다가와 공주가 얼굴에 쓴 면사를 살포시 떼어냈다. 공주의 얼굴을 본 이민호가 조금 놀랐다.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인데도 공주의 미모는 대단했다. 현대인의 기억과 취향을 가지고 있는 이민호에게도 충분히 아름다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의 미모는 사춘기가 지나서 더 빛날 수도 있고, 평범한 얼굴로 변할 수도 있다고 알고 있었다. 이민호는 앞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어린 소녀의 얼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지금까지 말 100필 당 비단 한 필을 선물로 드리고 있었소. 그러니 공주께 비단 30필을 드리겠소. 다른 추장들도 다들 받아갔으니 사양할 필요 없소.”
“감사하옵니다.”
공주가 생긋 웃었다. 민희가 여진어를 통역해주면서 몽롱한 눈길로 면사를 벗은 공주의 얼굴만 살폈다. 이민호는 같은 여자인 민희가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동가공주가 이민호와 시선을 맞췄다. 이민호는 예쁜 여자아이와 눈을 맞추니 무척 즐거웠고, 몇 년 후에 공주가 어떻게 변해 얼마나 미인이 될지 몹시 기대됐다.
“채색 구슬도 몇 개 드리겠소. 여기까지는 정해진 관례이니 사양하지 마시오.”
“어머! 아름다운 구슬이에요.”
이민호가 유리구슬을 건네주면서 동가공주의 하얀 손끝과 살짝 마주쳤다. 짜릿한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동가공주가 살짝 미소 지으며 부끄러워했다. 공주로 태어나 정략결혼의 도구로 쓰이는 동가공주가 새삼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왕궁에 황금 몇 백만 냥이 쌓여있는데 그까짓 쇳덩이 열심히 모아봤자 어쩐지 부질없는 짓 같소. 군대도 일만을 간신히 모아서 훈련시켰는데 사실 사람이 평생 살아가는데 군대란 별로 필요가 없소.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공주는 이런 내 고민을 이해해줄 수 있겠소?”
“고생하셨군요. 저는 전하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이민호의 고민을 공감해주는 공주의 눈이 촉촉이 젖었다. 이민호는 공주에게 고맙고도 한 편으로는 공주를 슬프게 해서 가슴이 아팠다.
“고맙소. 당신은 훌륭한 여자요. 왠지 모르겠지만 감사의 표시라고 해도 좋소. 공주에게 황금을 나눠드리고 군대를 넘겨드려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소. 아니 다 드리, 억!”
민희가 이민호의 허리를 꼬집었다. 이민호는 감히 동가공주와 대화하는 중에 방해하는 민희를 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드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린 이민호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마터면 동가공주의 미모에 넘어가 다른 추장이나 유력자들처럼 재산을 홀랑 털릴 뻔했다.
마치 무협지의 섭혼술에 당한 기분이 든 이민호가 경계하며 혹시 미혼향이나 그런 물질을 사용 중이지 않는지 공주를 의심했다. 그러나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남만주의 들판에서 그런 것이 효과를 볼 수는 없었다. 손끝이 마주쳤을 때 바늘에 독을 묻힐 수도 있다고 의심했으나 이민호가 중독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민호가 다시 동가공주의 미모를 살폈다. 공주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어쩐지 지켜줘야 할 것 같았으나 방금 전처럼 홀딱 넘어가지는 않게 되었다.
차차 주변 사람들이 이민호의 시야에 들어왔다. 노인부터 애들까지 다들 동가공주의 미모에 홀려 있었고, 동가공주의 호위병들은 이민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동가공주 그대는 요물이오. 이런 식으로 다른 남자들을 홀려 군대와 재산을 강탈했소?”
“어머나! 전하께서는 보통 남자들과 다르시군요. 저는 남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다들 자의적으로 제게 갖다 바쳤을 뿐입니다.”
동가공주가 최대한 화사하게 웃었다. 소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공주는 아름다웠다. 아직 성숙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고귀한 생명체로서 그 매력을 최대한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였다. 다른 남자들은 빠져 들겠지만 이민호는 보통 남자들과 달랐다. 영화배우나 탤런트, 그리고 아이돌 가수들의 매력에 빠져본 적이 있는 이민호는 공주가 그저 아주 예쁘다는 생각만 들었다. 동가공주가 가수로 데뷔해서 음반을 낸다면 음반과 포스터 정도는 사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과 망상을 혼동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름답소. 하지만 그것뿐이오.”
“훌륭한 여자 호위를 두셨군요.”
옆에서 민희가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희는 좋은 호위였다. 낮이나 밤이나. 하지만 민영은 안절부절못했다.
“민영이 왜 그래?”
“주인님의 전 재산과 군대를 동가공주님에게 바쳐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는 제가 이상해요.”
이민호는 민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동가공주에게 구혼을 하는 추장들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남자로서 미녀를 얻고자하는 욕망은 어느 남자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동가공주는 웬만한 남자라면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그 구혼자가 족장인 부족의 사람들이 족장이 미녀를 얻는 일에 쓸데없이 적극 협조하고 나섰다는 사실이었다. 동가공주의 미모에 넘어간 족장이 평소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무리수를 두는데도 말리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 부족 여자들이나 심지어 구혼자의 부인들도 동가공주를 얻는 일에 적극 협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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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더 올리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