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4 27. 순행 =========================================================================
이민호가 선두에 서서 내를 건너 길을 따라 북쪽으로 말을 달렸다. 중간에 말에 탄 채 간단히 육포로 요기를 때워야 했다. 산길을 계속 달려 말도 조금 지쳤다.
이민호가 기억하는 것은 탄광이 아니라 바로 이 탄광에서 북동쪽으로 10리 이내에서 발견된 진과스(金瓜石)라는 금광이었다. 20세기 전반에 도로공사 중에 금맥이 우연히 발견됐다는 사실만 기억으로 떠올랐으나 정확한 채굴량은 알지 못했다.
동쪽으로 꺾어서 달리던 이민호는 철장들과 호위대를 이끌고 잠시 산길을 헤맸다. 멀리 동쪽과 북쪽으로 산 그림자가 안 보이는 곳은 바다가 분명할 텐데 진한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원주민 마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비가 너무 자주 오고 거의 항상 안개가 끼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민호는 안개가 자욱한 계곡 안쪽 어느 폭포에 이르렀다.
“박 좌랑! 이 근처 산에서 금이 나올 것 같지 않소?”
“지형과 산 모양으로 봐서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제 미욱한 지식과 경험을 돌이켜보건대 석탄이 나오는 산에는 금광이 없는 줄로 압니다.”
“탄광과 거리가 가깝지만 같은 산이 아닐 수도 있소. 민영아! 저기 폭포 아래 냇가에 가서 누런 돌덩이 하나 집어와라.”
“네. 잠시만요.”
말을 타고 달린 민영이 냇가 주변에서 노란 돌덩이를 집어 들었고, 그 옆 물속에서 눈에 띄는 작은 조각 하나를 더 집었다. 민영이 다시 말을 타고 달려와 이민호에게 둘 다 넘겼다.
이민호는 돌덩이와 작은 조각을 확인한 다음 누런 돌덩이를 철장에게 넘겼다. 돌덩이 중간에 가느다란 금맥이 지나가는 수준이 아니었다.
“전하! 이것은 통째로 금광석입니다. 최소 이 덩어리 두께의 금맥이 있다면 이 근처 어딘가에 엄청난 양의 금이 매장돼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보시오.”
이민호가 납작한 금속 덩어리를 넘겼다. 거의 100퍼센트 금으로 이루어진 금 덩어리, 사금이었다. 박 좌랑이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렸다.
“이로써 확실해졌습니다. 이 근처에 분명히 금광이 있습니다.”
“잘 됐소.”
“그런데 처음 오셨다는 분이 어떻게 이곳에 금이 묻혀있는 줄 아셨습니까? 전하께서는 실로 하늘이 내리신 분입니다.”
“낯 뜨겁소.”
신기하게 대만 섬 최고의 탄광과 최고의 금광이 거의 같은 지역에 있었다. 이민호는 정확한 위치도 모르면서 딱 그것만 기억하고 있다가 금광을 발견하게 되었다.
진과스 금광은 1920년대에 채굴을 시작해서 1987년에 폐광된 곳이었다. 이민호가 듣던 것과 달리 폭포가 황금색으로 빛날 정도는 아니었다.
폐광이 된 다음 진과스의 황금박물관에 220kg짜리 황금덩이를 관람객들이 만져보도록 전시했다. 한 손으로 들 수 있으면 가져갈 수 있다고 했다.
“탄광과 금광으로 통하는 길이 이어지는 곳 분지에 작은 도시를 세워야겠소. 좌랑이 살펴보고 도시 위치와 필요한 인원을 결정하시오.”
“고로를 그곳에 설치할까요? 철광에서 좀 멀지 않습니까?”
“아니오. 고로는 좌랑이 철장들과 협의해서 따로 정하시오. 탄광과 금광의 배후 도시 역할을 할 마을이 필요해서 하는 말이오. 탄광과 금광에도 광부들이 거주할 마을을 세워야겠소.”
탄광도 금광도 다 좋은데, 해녀들이 벌거벗고 작업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최근에 상품화한 망원경이라면 이곳에서 해녀들의 알몸을 훔쳐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계곡은 비가 자주 오고 안개가 끼는 날이 많아 이민호에게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하오나 고산국 백성들 중에서 광부로 힘들게 일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금광은 외국인에게 일을 시켜서는 절대 안 됩니다.”
박 좌랑의 우려에 이민호도 전적으로 공감했다. 금을 훔쳐 본국으로 달아날 기회만 노릴 외국인을 금광의 광부로 취업시킬 수는 없었다. 커다란 금광석에서 뽑아낼 수 있는 금의 양이 사실은 얼마 되지 않더라도 그것 때문에 칼부림이 나고 작업 분위기가 엉망이 되면서 보안 비용이 급증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고산국 백성이 광부를 하면 좋겠지만, 누구나 배불리 먹고 사는 고산국과 해중국에서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힘든 광부 일을 할지, 그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광부의 봉급을 올려주면 광산의 채산성 문제와 다른 직업과의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
“박 좌랑 말씀이 맞소.”
“전쟁포로를 잡아와서 광부를 시키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마카오에서 노예를 사서 광산 일을 시키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끄응! 노예를 즉시 풀어주지 말고 일단 탄광과 금광의 광부로 투입한 다음 월급을 주는 식으로 몇 년 동안 일을 시킵시다. 돈을 모으면 정착할 때 더 유리하겠지요.”
고산국에서 비록 일부에 국한되긴 하지만 직업선택의 자유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인구가 너무 적은 지금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해중국에 들렀다가 다음 날 궁궐로 돌아온 이민호는 마카오에 편지를 썼다. 광산에서 일할 튼튼한 흑인 노예를 많이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양심에 많이 꺼렸다.
평소에는 6국 중에서 예국과 병국이 가장 바빴는데 이제는 공국이 더 바쁘게 돌아갔다. 도시 하나와 마을 두 개를 건설하고 탄광과 금광을 개발해야 했다. 그 전에 먼저 길을 닦아 수송로를 확보해야 했다. 국왕이 이미 승인했으므로 광산의 경제성 조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주인님! 해동상단 대방이 보고서를 보냈어요.”
“응. 어디 보자.”
혜영이 내민 보고서를 이민호가 읽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홍삼 판매대금으로 매 반기마다 보내는 황금 십이지 신장상을 조선 왕실의 요구에 의해 자(子) 신장상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이번에 바친 황금상의 그림을 첨부했는데 쥐머리와 갑주를 입은 사람 몸에 무기는 쇠망치였다.
“왕실 재산은 절대 안 쓰겠다는 거잖아?”
“우리에게 빌린 군량미 수십 만 섬을 갚을 생각이 전혀 없나 봐요.”
“갚도록 해야지. 왕실 소유 금광으로 달라고 해야겠다.”
“예? 조선 국왕전하에게 달라고 하시려고요?”
“아니. 황제한테 부탁하면 조선에 칙서를 보내주겠지.”
황제는 이민호에게 언제나 든든한 동아줄이었다. 황제에게 상주문을 보낼 때 특별히 맛있는 간식을 동봉하기로 했다.
“주인님! 해남도에 한 번 가셔야죠.”
“음. 귀찮지만 부임 인사는 가야겠지. 주인이 없다고 한족 관리들이 토색질을 하면 안 되니까. 주사기가 준비됐으니 이제 가자. 복건순무하고 만날 약속은 잡았어?”
한족 관리들이 잘못하면 려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묘족이 무자비하게 진압하게 된다. 이민호는 고산국이 인구가 너무 적어 고생한 탓에 해남도의 인구가 줄어드는 꼴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는 없었다. 주사기는 진주 인공양식을 위한 소품이었다.
“복건순무는 북경에 급히 갔다가 1월 중순에 돌아온대요.”
“고구마 온상이 준비되면 가지 뭐. 쌀은 보냈지?”
“예. 도시마다 사람들을 고용해 죽을 쑤어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는데 명나라 관리들이 협조를 잘해주고 있어요. 황제폐하의 사위이신 부마도위 고왕 전하께서 나눠주시는 음식이라고 떠들어주고 있어요.”
복건성의 큰 도시는 죄다 해안지대에 몰려 있었다. 복건성의 내륙지방은 주로 산악이라 평소에도 인구가 적었다. 그리고 기근이 들면 농촌지역에서 살아갈 방법이 없어진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게 되어 있었다.
“잘됐다. 혜영이도 같이 갈래?”
“해남도는 명색이 명나라 영토니까 의용공주님하고 같이 가세요.”
“음. 알았어. 그 동안 수고해줘.”
다음 날 아침 기관 네 개짜리 전선 세 척을 이끌고 출항해서 저녁에 팽호도에서 묵었다. 전에는 해적들과 가족 1만여 명이 붐비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았다. 고산국 전선들이 가끔 순찰을 하므로 해적들이 얼씬도 하지 못했다. 가끔 명나라 어선들이 들르는 것 같지만 이 정도는 눈감아주기로 했다.
다음 날은 돛까지 펴고 기관 네 개 모두를 가동해 오후에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가 그 사이에 엄청나게 많이 변했다. 전에는 허름한 오두막이 많았는데 지금은 유럽 어느 도시의 번화가를 방불케 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 오셨다~”
전선에 달린 고산국 깃발과 왕가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보고 포르투갈 뱃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이 소식은 좁은 마카오 전역에 퍼지며 선착장에 마카오의 모든 시민이 몰려들었다. 모험가와 상인, 군인들이 모두 기쁘게 이민호 일행을 맞이해주었다. 최소한 분위기만큼은 마카오가 고산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이민호가 드레스를 입은 주상아를 에스코트하며 배에서 내렸다. 시녀들이 주상아에게 일산을 씌워주었다. 이민호가 고구려 고분벽화 사진에서 봤던, 손잡이 부분이 꺾인 것이었다.
선착장에는 포르투갈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다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고산국 유학생들이 활짝 웃으며 환영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전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프루이스 선교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동 두아르테는 자주 뵙습니다.”
“국왕전하 덕택에 마카오 사람들과 포르투갈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카오가 이토록 번영한 것은 모두 국왕전하 덕택입니다.”
“과찬의 말씀이오, 동 두아르테. 포르투갈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 덕택이지요.”
유학생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자 다들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전선으로는 딱 이틀만 항해해도 되지만 외륜선은 두세 배 정도 시간이 더 걸렸다. 범선을 탄다면 계절 단위로 움직여야 했다. 그러니 유학생들에게는 휴일은 물론 졸업할 때까지 방학도 없었다.
세나도 광장으로 향하다가 포르투갈어로 자비의 성채라는 간판이 붙은 깔끔한 2층 석조 건물을 보고 이민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얼마 전까지 허름한 판잣집이 서 있던 곳이 이렇게 변했다. 성 도미니크 성당도 수도원 옆으로 옮겨 말끔한 예배당으로 다시 세워졌다. 1580년에 완성된 성 바울 성당만은 여전했다.
“자비의 성채와 성 도미니크 성당이 완공됐군요.”
“모두 전하 덕택입니다. 자금이 없어 계속 늦췄다가 고산국과 무역을 한 이후 빠르게 완공했습니다.”
“자꾸 그러지 마세요.”
이민호 일행은 시장 관사에 묵기로 했다. 물론 마카오는 여전히 명나라의 영토였지만 명나라 관리들이 어느 정도 자치권을 보장해주어 포르투갈 상인 대표가 시장이라고 자칭할 수 있었다.
“건물을 참 예쁘게 지은 것 같아요. 별궁보다는 조금 못하지만요.”
의용공주 주상아가 테라스 밖에서 도시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기억하는 마카오라면 음습한 도박의 도시였지만 이때는 활발함이 가득한 신흥 무역도시였다.
고산국 궁궐의 별궁은 르네상스 시대 건축양식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기둥 사이가 널찍널찍하고 창문 폭도 넓었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 양식인 마카오의 건물들은 창문도 좁고 기둥 사이도 좁아 약간 답답해 보였다.
“내가 공주에게 얼마나 신경 썼는지 이제 알겠소?”
“예. 국왕전하께서 남만인들보다 예술적 감성이 풍부하신 것 같아요.”
“고맙소.”
이민호는 그저 기존 서양의 건축물들을 표절해 별궁을 지었을 뿐이었다. 표절한 작품이 독창성을 가진 성당들과 비교되니 미안해졌다.
이민호는 공주의 가는 허리를 안고 입을 맞췄다. 공주가 눈을 꼭 감고 이민호의 혀를 마중했다. 엉덩이를 만지니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만찬이 예정돼 있어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자! 준비합시다. 만찬에서 입을 옷은 화려할수록 좋소. 그리고 남만인들은 홍옥, 그러니까 홍보석이나 금강석을 더 고급으로 친다고 들었소.”
시녀들이 공주의 치장을 돕는 사이 이민호는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선택을 도왔다. 이민호는 공주에게 가슴이 약간 드러나는 벨벳 드레스를 입혔다. 피부가 많이 노출되자 공주가 무척 부끄러워했다.
이민호는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목걸이 여러 개 중에서 드레스 색깔과 다른 사파이어 목걸이를 공주의 목에 걸게 했다. 그리고 중앙에 커다란 루비가 박히고 큼직한 다이아몬드 여러 개로 장식된 왕관을 씌웠다. 거울을 본 공주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제 치장이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가요?”
“당신은 부자로 소문 난 고산국왕의 반려요. 이 정도는 되어야 남만인들이 납득할 것이오. 여긴 명나라 황궁이 아니니 얼마든지 사치스러워도 괜찮소. 그리고 당신은 아무리 사치스러워도 괜찮을 정도로 미인이오.”
의용공주 주상아는 결혼 후 벌써 두 번째 외유라 들뜬 마음이었다. 왕궁의 구석진 방에서 덧없이 한숨이나 쉬며 늙어갈 것으로 생각했다가 이민호가 잘해주니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이렇게 미모까지 칭찬받고 보니 하늘을 날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간신히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