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5 27. 순행 =========================================================================
만찬은 이민호 일행이 묵는 건물 아래층인 시장 관사 1층의 넓은 홀에서 열렸다. 근대 유럽과 비슷한 화려한 색상의 군복을 입은 민희와 민영이 왼쪽에는 검을, 오른쪽에는 상아로 손잡이가 장식된 권총집을 찬 채로 앞섰다.
이민호와 주상아는 나란히 계단을 내려왔다. 주상아의 시녀 네 명이 화려하게 치장한 주상아의 드레스 자락을 들고 뒤따랐다.
- 쿵! 쿵! 쿵!
흰색 가발을 쓴 집사가 끝이 뭉툭하게 생긴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치자 문 안쪽의 만찬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 사이 이민호는 주상아 공주와 팔짱을 끼었다. 왕실 시종장 흉내를 내고 있는 집사가 만찬장을 향해 외쳤다.
“포르투갈의 벗이며 마카오대학교의 재단이사장이시며 해남도의 공작이시며 고사니아 왕국의 국왕이신 미노 고 폐하, 그리고 그 분의 배우자이신 밍(Ming) 제국의 공주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이 양쪽으로 열린 다음 이민호와 주상아 공주가 만찬장에 입장했다. 만찬장에 가득 모인 포르투갈 하급 귀족들과 상인, 모험가, 선교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이민호에게 경의를 표했다.
시장이 만찬 주최자로서 맨 앞에 서서 인사를 올렸다. 마카오대학 출신인 고산국 예국 소속 통역관이 통역을 맡았다.
“저희 마카오를 보살펴주시는 폐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두 번째로 방문해주시니 저희들은 더할 수 없이 기쁩니다.”
“포르투갈은 고산국의 맹방이며, 마카오 상인 여러분은 고산국의 사업 동반자요. 앞으로도 함께 잘 해나갑시다.”
“감사, 감사합니다.”
귀족들과 상인들이 몰려와 서로 먼저 인사하려고 아우성쳤다. 호위를 맡은 민희와 민영이 곤란해 할 때 다행히 시장이 정리해주었다. 이민호는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들부터 차례로 소개를 받았다.
이곳도 마닐라처럼 결혼적령기의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중년 부인과 꼬마 아가씨들까지 만찬장에 파트너로 참가했다. 어쩌다 하나 있는 처녀들은 콧대가 높아질 대로 높아져 하급 귀족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마날라에서 몇 안 되는 에스파냐 처녀들의 마음을 앗아간 옥남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민호는 남유럽에 라틴계 영향이 강해 포르투갈에는 검은 머리가 많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그 반대로 금발이 더 많았다. 이베리아반도 북서쪽에 오래 전에 지중해민족이 살았더라도 신석기 시대에 켈트족으로 교체되고 이후 게르만족의 침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칼리파 세습왕조인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남부 에스파냐에 무어인의 영향이 강했지만 레콩키스타 이전에도 포르투갈 지역은 백인 영주들이 통치하거나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워 독립국을 유지했다.
인사가 대충 끝나자 이민호는 시장과 유력자들을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마카오 상인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것만은 분명한데 뭔가 불안감이 느껴져서 이민호가 직접 물어보았다.
“그런데 시장! 상인들의 얼굴이 밝지 못합니다.”
“항상 저희 포르투갈 상인들을 굽어 살피시는 국왕폐하께 외람되오나 말씀 올리겠습니다. 아프리카 희망봉과 인도양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이슬람 해적들의 해적행위가 극에 치닫고 있습니다. 고산국과 명나라, 그리고 향료제도와의 무역은 분명히 이익이 많이 나는 사업이나 돌아가는 상선 절반 정도가 해적들에게 노략질당하고 있습니다. 노련한 선원들도 인도양과 아프리카 서해안을 지나는 것을 겁낼 정도입니다.”
“포르투갈은 몰루쿠제도의 향신료를 말래카해협을 통해 싣고 가지요?”
“그렇습니다. 향료무역에서 큰 이익이 난다는 사실을 아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조만간 말래카해협을 공격하고 몰루쿠제도를 차지하려 할 것 같습니다.”
“지도를 보니 네덜란드 배들이 편서풍을 타고 온다면 말래카해협이 아니라 자야카르타로 올 것 같소.”
“으음.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들을 막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고아에 배치된 포르투갈의 함대가 약해 불가능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02년 근대식 주식회사로 설립될 예정이었다. 이 회사는 현대의 자카르타인 당시 자야카르타 또는 순다끌라빠라는 이름을 바타비아로 바꾸고 인도네시아 지역을 식민 지배한다. 그 과정 중에 몰루쿠제도에서 포르투갈과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독점을 유지한다.
회사 설립 이전에도 네덜란드와 영국은 꾸준히 동아시아로 진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네덜란드 탐험가 린스호텐은 1583년 희망봉을 돌아 포르투갈령 인도 고아에서 대주교의 서기로 6년 동안 일했다. 그가 귀국하고 소책자 2권을 출판하고 나서 네덜란드와 영국 항해가들이 동인도제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네덜란드가 향료제도에 진출한 것은 1595년의 일이었다. 1596년 호우트만 형제는 자바, 수마트라, 발리 등의 지역 지도자들과 무역협정을 맺고 향신료를 가득 싣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고, 그 후 많은 상인들이 동남아시아로 몰려들었다. 네덜란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인도네시아 지역을 모두 무력으로 점령해 식민통치를 하게 된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600년 연말에 엘리자베스 1세의 특허를 받아 조직되고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물리친 자신감으로 과감하게 인도양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향료제도인 몰루쿠에서 네덜란드에게 축출되는 등 동아시아에서 고전하다가 인도 점령으로 방향을 튼다. 나중에는 청나라와 아편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민호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아시아 진출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시대 영국은 무력과 아편 판매를 앞세워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이익을 추구하는 파렴치한 국가였다. 네덜란드도 인도네시아에서 한 짓이 영국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함대가 약하면 해협에 요새를 세워서라도 막아야 하지 않겠소?”
“저희 포르투갈은 인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북유럽 쪽에서 용병을 대거 고용했는데도 다른 나라와 경쟁하기 어렵습니다.”
이민호는 마카오 시장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인구가 적어 쉽게 확장과 발전을 할 수 없는 것은 고산국도 마찬가지였다. 포르투갈이 그 적은 인구로 이제까지 해상무역왕국을 유지해온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현재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이민호의 고산국과 관계가 괜찮은 편이었다. 두 나라가 처음에는 개념이 없어서 명나라나 일본을 무력으로 정복하려다가 상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다음부터는 얌전하게 변했다.
고산국은 처음부터 두 나라와 훌륭한 무역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맺었다. 물론 고산국이 방어가 허술해 보였다면 포르투갈은 아니더라도 에스파냐는 고산국 궁궐을 기습해서 약탈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에스파냐와 관계가 안 좋은 것은 알지만 일단 지금은 같은 군주를 모시고 있지 않소? 에스파냐와 협력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 같소.”
“에스파냐 총독은 마닐라에 가만히 있어도 명나라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 상인들이 상품을 가져오니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으려 합니다.”
“향료제도와 명나라의 차와 비단, 도자기 무역으로 이익이 많이 나는 만큼 영국과 네덜란드는 반드시 올 것이오.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소?”
“저희들은 아시아 바다의 패자이신 국왕폐하의 자비에 기댈 뿐입니다.”
시장과 마카오의 유력자들이 이민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만찬에 참가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이쪽을 관심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주상아 공주는 하급이나마 귀족부인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공주가 착용한 보석 장신구들이 화제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평소에 보던 것보다 보석의 크기가 무지막지해서 귀부인들이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아시아의 바다로 온다면 포르투갈의 패배는 예정돼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카오 상인들은 동맹 또는 보호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그 대상은 고산국이었다. 명나라는 북방을 지키기도 버거워 남쪽 바다를 지킬 수군을 유지하지 못했다. 당연히 포르투갈이 동맹을 맺을 대상은 그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고산국뿐이었다.
그러나 인도 일부 지역이나 말래카해협 주변에서는 사실 포르투갈이 식민 제국 행세를 하고 있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다를 것 하나도 없는 짓을 하기도 했다. 이민호는 그들이 화약을 팔아 일본 처녀들을 노예로 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배에 가득 싣고 남아메리카로 갔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고산국의 국왕으로서 감정을 배제하고 정치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장기적으로는 류큐왕국처럼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밑에 두고 부리고 싶었다. 에스파냐는 현재 유럽의 강대국이었지만 점점 국세가 기울어가고 있어서 절실히 동맹국을 원할 때였다.
“나는 일본 해적들에게 시달린 조선 출신이라 그런지 해적들을 극도로 증오합니다. 일단 말래카와 자카트라에 대한 방비를 단단히 하고 나서 인도양의 해적을 청소합시다. 해적을 몰아낸 후 포르투갈과 고산국이 힘을 합쳐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통제하는 게 어떻겠소?”
“말래카해협도 아닌 아프리카 희망봉 말씀입니까?”
시장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인도양에서 해적이 창궐하고 있으니 그 해적들을 진압해야 상선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지 않겠소? 그렇다면 드넓은 인도양이 아니라 희망봉 주변에서 막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오.”
“맞는 말씀입니다만, 희망봉에 요새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인도양의 해적을 소탕해야겠소. 고산국 전선 20척이면 인도양의 바다를 통제할 수도 있으니 포르투갈도 협력하겠소? 해적들을 진압하고 계속 무역을 해야 할 것 아니오?”
“그,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해적소탕전에 저희들도 당연히 참가하겠습니다. 하오나 중요한 일인 만큼 고아의 부왕에게 보고를 하겠습니다.”
“좋소! 그때 조약을 맺읍시다. 올해 여름에 내가 직접 고아에 갈 수도 있소.”
시장과 유력자들의 얼굴에 돌연 화색이 돌았다. 인도 고아에 주재한 부왕도 마카오 상인들과 거의 같은 의견일 테니 쉽게 동의할 것으로 이민호는 예상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에게도 골칫거리였던 팽호 섬의 대규모 해적들을 몰살시킨 고산국 전선의 위력은 이 일대에서 아주 유명했다. 많아야 서너 척씩 돌아다니는 인도양의 해적선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팽호도 해적 토벌은 외륜선 시절에 했던 일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강력한 선체에 함포를 각기 4문씩 탑재한 천자 전선을 열 척 넘게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민호는 스케일이 좀 컸다. 영국 해적선들이 아프리카 남단이 아닌 남미를 돌아 태평양으로 진입할 수도 있으니 서쪽뿐만 아니라 동쪽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리고 남아메리카 남단은 에스파냐와 협력해서 막을 용의가 있소. 에스파냐의 반응이 어떨 것 같소?”
“에스파냐 놈들은 영국 해적들에게 심지어 태평양 연안의 도시들까지 약탈당하고 있으니 반드시 협조할 것입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이끄는 해적선들은 카리브해 연안에서만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드레이크는 1577년 기함 골든 하인드 호를 비롯한 5척의 선단을 이끌고 남미 마젤란 해협을 돌아 페루와 칠레의 에스파냐 식민도시들을 약탈하기도 했다. 은 26톤을 실은 에스파냐의 카카푸에고 호도 이때 약탈당했다.
보물을 약탈한 드레이크는 태평양을 횡단해 몰루쿠제도를 경유하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영국으로 귀환했다. 마젤란에 이은 두 번째 세계 일주였다.
“그런데 폐하! 저희들의 이익이 걸린 인도가 있습니다만.”
“나는 육지는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소. 포르투갈도 무굴제국과 잘 지내고 있지요?”
설마 함께 무굴제국을 정복하자는 이야긴가 하고 놀란 이민호는 한 발 뺐다. 고산국이 작으면서도 해양강국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도 대륙을 정복할 힘은 절대로 없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왜군을 몰아내야 하고 조만간 일본 원정을 앞둔 고산국이 다른 지역에 대규모 지상군을 파병할 여력은 없었다.
============================ 작품 후기 ============================
협상이 제일 쓰기 어렵습니다.
일단 떡밥은 이렇게 깔아놓고 임진왜란을 종식시킬 예정입니다.
오전에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