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6 27. 순행 =========================================================================
“국왕폐하! 무굴제국의 악바르 황제는 말이 통하는 합리적인 분입니다. 폐하께서 무역과 동맹을 제안하시면 황제는 기쁘게 응할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는 아직 인도 남부와 실론 섬을 정복하지 못했으므로 국왕폐하께서 약간만 도와주신다면 반드시 보답을 해줄 것입니다.”
“무굴제국을 도와 인도를 통일시켜주고 스리랑카, 그러니까 실론 섬을 얻자는 뜻이오? 그 와중에 포르투갈은 인도 전체의 무역 독점권을 얻자는 것이 목적인 것 같소만.”
“그렇습니다. 저희는 인도에서 무역 거점인 상관 여러 곳과 무굴제국의 향신료 독점 무역권을 얻고 싶습니다. 폐하께서는 실론의 영토와 백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론 섬은 국왕폐하께서 인도양을 제패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향과 육두구 때문에 몰루쿠제도가 더 유명해졌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인도대륙에서 생산되는 향신료는 세계 시장의 과반수를 점하고 있었다. 인도 대륙에서 생산되는 후추 단일 품목만 독점해서 유럽에 팔아도 남미에서 은을 대량으로 채굴하는 에스파냐가 부러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마카오 시장은 이민호를 자꾸 무굴제국과 엮으려 했다.
고산국 상선이 지금 당장 유럽으로 가서 향신료무역을 할 수 없으니 포르투갈에게 어느 정도 이익을 주어야 했다. 왜군을 몰아낸 다음 일본 정벌을 준비하는 기간에도 인도양으로 진출해 바쁠 것 같았다.
“실론 섬이라. 인도양을 제어하는데 그리 큰 땅이 필요할지 모르겠소. 그러나 넓은 땅을 갖는 게 나쁜 건 아니니 한 번 국서를 보내 무굴제국 황제의 의향을 물어보겠소.”
쓸데없이 큰 실론보다는 차라리 자그마한 몰디브 섬에 중간 기항지를 두는 편이 방어하기에 나을 것 같았다. 물론 사이클론이나 해일에 휩쓸릴까 두려워 몰디브를 쉽게 선택할 수는 없었다.
“아프리카 동쪽 마다가스카르 섬도 기항지로 적당합니다. 이곳도 반드시 점령해야 합니다.”
“시장! 기항지가 필요한 곳마다 일일이 정복할 수는 없지 않소? 점령지가 늘어날수록 원주민의 반란을 진압하고 요새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벅찰 거요. 기항지가 정 필요하다면 마다가스카르 근처 작은 섬을 점령하거나 아니면 그곳 원주민들에게 이익을 주면서 협의를 하는 편이 낫소.”
“휴우~ 자본과 인구가 적으니 이런 불편함이 많습니다.”
“부족할수록 전력을 집중해야지 어쩌겠소.”
사람들이란 생각이 비슷해서 여력만 있다면 필요한 걸 다 갖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킬 곳이 많아져서 전력이 분산되는 것이야말로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명나라는 만리장성 곳곳에 배치한 80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 때문에 군대 유지비를 감당 못해 스스로 붕괴되고 있었다. 실제로 적이 쳐들어올 때는 그 병력이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했다.
“포르투갈은 마카오 외에도 몰루쿠제도, 말래카해협, 그리고 인도 고아를 장악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항상 병력이 부족하다고 들었소. 포르투갈 본국에서 떠난 병력이 더 많지 않았소?”
“폐하께서도 잘 아시는군요. 사실 아시아에 들어온 포르투갈 모험가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은 버마입니다.”
“버마라고요? 포르투갈이 버마를 점령했다거나 식민지로 지배한다는 말은 전혀 못 들어봤소.”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저희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버마와 아유타야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 사이 많은 희생이 있었지요.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버마에 집착하는 거요?”
“보석, 그 중에서 루비입니다.버마에서 루비를 비롯한 보석이 많이 난다는 사실을 알고 보석을 거래하고 싶지만 쉽지 않습니다. 지역 정세가 계속 불안해서 상인들이 쉽게 내륙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로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하!”
15세기부터 채굴을 시작한 버마 북부 모곡(Mogok)광산은 여러 세기 동안 세계 최대의 루비 산지였으며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그리고 1990년에는 몽슈에서 산출된 루비로 인해 버마가 세계 루비 생산량의 9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1498년에 인도양에 진입한 포르투갈은 1530년대부터 버마에 민간인으로 이루어진 군사력을 꾸준히 투입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모험가들은 보석 광산을 장악할 기회를 노리며 버마 남부 양곤 건너편 모뜨마에 자리 잡고 해적질을 하거나 여기저기 용병으로 팔려가 싸움질을 했다.
그러나 1542년 버마 따옹우의 따빈슈웨티에게 7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모뜨마가 함락 당하고 포르투갈인들은 몰살당한다. 물론 이때 버마군에도 포르투갈 용병들이 종군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포르투갈 모험가 수백 명이 버마의 속국 아라칸이나 버마에 용병으로 고용돼 아유타야를 침공하는 전쟁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냥 돈 주고 사서 유럽에 팔면 안 됩니까?”
“저희들도 도둑 같다는 생각을 하며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운송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유럽과 가격 차이가 최소 4배는 넘어야 겨우 본전치기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버마나 아유타야 사람들은 보석을 유럽인에게 팔 때 자기들끼리 거래할 때보다 훨씬 비싸게 부릅니다. 도저히 채산이 안 맞습니다.”
“그럼 산지 광산을 점령하고 싶은 거요?”
“강대국인 버마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저희도 압니다. 그래서 버마의 권력자 밑에서 용병으로 싸우다가 전공을 세워 상으로 모곡 지역을 영지로 받는 것이 저희들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마카오 시장이 인도차이나 반도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간단히 요약해줬다. 분열된 세력들이 복잡하게 싸우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현재 아유타야에는 흑태자 프라야 나렛으로 유명했던 왕자가 버마로부터 1584년에 독립한 다음 1590년에 나레쑤언 왕으로 즉위해 국경을 확고히 지키고 있었다.
섬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해 조선을 도와주려 한다는 명나라 조서의 내용은 전혀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레쑤언 왕이 실제로 명나라에 조공을 하면서 임진왜란 참전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유타야의 군선이 바나나보트와 비슷한 수준임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참전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이런 이벤트를 통해 독립을 국제적으로 공인 받게 되었다.
그리고 1592년 말에 버마의 황태자 민치스라가 대군을 거느리고 아유타야를 침공하고 있었다. 1593년 1월 초순인 현재 아유타야의 수도 서쪽 농 싸라이에서 두 나라가 국운을 걸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이 이 전쟁에 개입할 건가요?”
“상황에 따라 달라질 테지만 버마는 군사 강국이라 겨우 수백 명에 불과한 포르투갈 용병대가 함부로 개입하기 어렵습니다. 포르투갈 용병대를 이끄는 필리페 데 브리투라는 모험가가 버마의 속국이며 남서부 해안지방인 아라칸에 고용되어 있습니다.”
버마가 군사강국이라는 시장의 설명에 현대인의 상식을 갖고 있던 이민호는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당시 버마는 현대의 태국인 아유타야는 물론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을 속국으로 거느린 인도차이나 반도 최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장이 코끼리 이야기를 해서 이민호가 깜짝 놀랐다.
“우와! 버마와 시암 양쪽에서 코끼리를 전쟁에 동원한다고요?”
“예. 1563년에 버마의 버인나웅 대왕이 아유타야를 점령했을 때 코끼리 2천 마리 이상을 동원했습니다. 왕과 왕비, 왕자들도 코끼리를 타고 싸웁니다.”
“왕비가 전쟁에 나가 싸우다니 대단하군요.”
“예전에 아유타야의 왕비가 왕을 위기에서 구해주고 대신 전사한 적도 있습니다.”
통역에게 말을 전해들은 민영이 공감했는지 눈물을 글썽였다. 이민호가 민영의 손을 꽉 쥐어주었다.
동남아시아의 코끼리병 군단은 알렉산더 대왕과 싸운 페르시아보다 훨씬 발전한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코끼리에 머리부터 등과 엉덩이에 각자 한 명씩 세 명이 타고 코끼리 옆에 보병 4~8명이 호위했다. 병사별로 역할 분담이 잘 되어 있고 여러 가지 무기를 쓰고 있었다.
대화가 진행되는 중에 주상아 공주가 이민호에게 다가왔다. 공주에게 살짝 허리를 굽혔다가 세운 시장과 유력자들은 일단 공주의 미모에 놀라고, 그 다음 화려한 보석 장신구에 더 놀랐다. 멀리서 봤을 때 놓쳤던 것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렇게 엄청나게 큰 루비를 본 적이 없습니다. 고산국왕 폐하께서 세계 제일의 갑부라는 소문이 있던데 오늘 보니 그 소문이 확실히 사실 같습니다.”
“공주님의 왕관에 박힌 루비가 170캐럿은 확실히 넘겠습니다! 드디어 영국 왕관 임페리얼 스테이트 크라운에 박힌 흑태자의 루비가 2위로 밀려나겠군요. 하하! 통쾌합니다.”
주상아 공주가 사람들의 반응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민호에게 몸을 붙였다. 그런 주상아의 어깨를 이민호가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통역이 말해주고서야 루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공주가 안심했다.
그러나 이렇게 큰 것은 루비가 아니라 당연히 첨정석, 스피넬이었다. 사실 스피넬이 루비보다 더 희귀한 편이었으나 어쨌든 루비는 아니었다. 영국 왕관에 박힌 것도 루비가 아닌 스피넬이었다. 스피넬 같은 보석은 버마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살 수 있었지만 이 시대에는 루비로 취급돼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다.
그리고 이것은 천연 스피넬도 아니었다. 이민호가 시험 삼아 초크랄스키법, 즉 결정 인상법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합성한 대형 인조 보석이었다. 베르누이 성장법으로 잘 알려졌듯이 보석이 결정화되는 자연환경과 비슷하게 만들어 원료를 주입해 인공적으로 보석을 합성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는 아직 아는 사람이 없을 테니 이민호는 보석을 유럽에 대량으로 팔까 고민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인조 보석을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금 당장은 보석상인들조차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장래에 인조보석이라는 사실이 들통 날 게 빤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는 고산국이 겨우 돈 몇 푼 때문에 사기꾼 이미지로 먹칠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은근한 빛이 나는 다이아몬드가 좋던데 유럽 사람들은 선명한 빨간 루비를 더 좋아하더군요.”
“빛을 비추면 화사하게 반사해서 요즘 다이아몬드의 가격이 올라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폐하! 그러나 같은 캐럿이라면 루비보다는 못하지요. 역시 최고의 보석은 루비입니다.”
“이 루비의 가격을 따지자면 얼마쯤 하겠소?”
이민호가 공주의 왕관에 박힌 빨간색 보석을 가리켰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공주의 머리에 있어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멀리 해외로 나온 무역상들은 기본적으로 보석 감정 능력이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수군거리더니 조심스레 평가를 내렸다.
“정밀 감정을 해야 자세한 가치를 파악할 수 있겠지만 크기와 색을 봐서 못해도...... 물론 주인을 제대로 만나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습니다만.”
“뭐 어떻소? 팔 것도 아니니 편하게 말씀하시오.”
“은으로 따지면 최소 20만 냥은 넘을 것 같습니다.”
“겨우 20만 냥이오? 별 거 아니군요. 내가 바가지를 쓴 모양이오.”
“아닙니다! 최소로 잡았을 때 이야깁니다. 분명 저 루비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폐하!”
포르투갈 상인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민호는 2700억 원짜리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말도 들었으니 그 이하는 별로 비싼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민호가 공주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왕관에 싸구려를 달아줘서 미안하오. 사과하는 의미로 다음에 좋은 보석을 구하면 반드시 공주에게 선물로 주겠소.”
“저는 사치를 싫어해서 이것으로도 괜찮습니다, 전하.”
“어허! 공주가 백성들을 가련히 여겨 검소한 것은 알지만 너무 소박한 장신구만 달면 왕실의 위신이 서지 않아요.”
통역관이 이민호와 공주의 말을 포르투갈어로 통역해주자 만찬장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휘청거렸다. 물론 만찬장에 오기 전에 미리 약속된 대사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염장을 지르고 이민호와 주상아가 만찬장을 빠져 나갔다. 높은 사람들이 먼저 떠나주는 것이 파티에서의 예의였다. 마카오의 유력자들과 상인들은 인도양의 해적 소탕이나 버마 이야기는 다 잊어먹고 루비에 대해서만 떠들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