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04화 (153/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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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출병

“오리, 오리!”

“꽥꽥!”

“병아리!”

“삐약! 삐약!”

노란색 아동복을 입은 아이들이 줄을 맞춰 선생님을 따라 걸었다. 궁궐 집무실 창문에서 내려다보는 이민호는 유치원 아이들이 귀여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가 안색이 홱 변했다. 저 아이들이 보통 유치원 원아들이라면 좋겠지만 죄다 내명부 소속이며 언젠가 후궁이 될 여자아이들이라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애들이 귀엽긴 한데, 마누라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나이와 성장 정도에 따라 여진족 열 서넛에 아이누족 두 명이 유치원에 배정됐다. 나머지 대부분은 초등학생 나이였고, 중학생도 몇 명 있었다. 이민호는 중학생 나이의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세일러복을 입히려 했다가 체구가 작아 포기했다. 보모가 필요한 나이에 시집온 아이들이 불쌍했다.

선생들은 신분이 높은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학생들은 추장 딸들이라 기본적인 교육은 받았는지 솜이 물 빨아들이듯 잘 배우고 있었다. 여자이며 어린 나이라서 외국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말을 금방 배우는 것은 다행이었다.

“10년은 더 키워야겠어요.”

혜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민호가 없을 때 대신 국정을 이끌어가야 할 혜영 입장에서는 후궁이 많을수록 안심하고 일을 나눠 시킬 수 있으니 더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린아이들만 많으니 교육시키기 위해 기존 후궁이나 경호대 인력을 빼야 해서 인력난이 더 가중됐다.

“쟤들 교육과정에 이 세상에는 시집가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해줬으면 좋겠어.”

“그래도 궁궐을 안 떠난다니까요. 포기하고 받아들이세요.”

“나중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도 그게 걱정돼요.”

마카오에서 교육 받은 학생들이 꾸준히 돌아오고 있어서 행정과 교육 인력은 적당히 충원되었다. 이제는 6국의 수장들인 참판이나 통령인 혜영이 현장으로 직접 가서 판단해야 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중앙 행정조직만 간신히 갖췄을 뿐 지방행정은 거의 자치 수준으로 주민들에게 떠맡기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촌장이 지역 유지 수준을 넘어 지배자로 성장할 가능성마저 엿보였다. 촌장들이 지역 사회에서 백성들을 다스리다 보면 법적인 권한을 넘는 남용이 아니라 왕처럼 권한 행사를 하려는 자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었다.

혜영은 그런 촌장들이 눈에 띄면 가차 없이 다른 마을로 이사 보냈다. 촌장들이 출신 지역에 따라 조선인은 양반처럼, 일본인은 영주처럼, 여진인은 추장처럼 행동한 것뿐이니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곳은 전혀 다른 나라인 고산국이었다.

“지난 1월 9일에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어요.”

“경략 송응창, 제독 이여송이라. 명군이 처음으로 제대로 해냈군.”

지난 7월에 요동부총병 조승훈이 기병 3천으로 섣불리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병력만 죄다 잃고 요동으로 내뺀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병력을 다수 동원해 신중히 사방에서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고 외성부터 차근차근 공략해 왜군을 대동강 너머로 밀어낼 수 있었다.

이민호가 해동상단에서 보낸 보고서를 접었다. 그 동안 이민호는 평양성 전투에 참가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에서도 뭔가 전공을 세워야 조선 조정에 큰소리를 칠 수 있기 때문에 이민호는 일부러 참전하지 않았다. 이민호 입장에서는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오래 머무를수록 좋았다.

이민호는 그 동안 명나라 조정에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고 출전을 늦추고 있었다. 지난 11월에 이민호가 여진족을 제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덕택에 명나라 조정에서 이민호의 말발은 상당히 먹혀들었다.

명나라 원정군 중심으로 평양성이 탈환됐으니 이민호도 이제 조선에 가서 얼마든지 활개치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1월 중순이었다. 조선으로 출병할 시간이 다가왔지만 이민호는 당장 떠나지는 못했다.

“복건 순무와 약속은 잡았지?”

“예. 언제라도 오시래요. 포구에서 주인님께서 배를 타고 오시길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겠대요.”

궁궐 앞 넓은 연병장에 집결한 병력을 계복이 이끌고 훈련장으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다음 이민호가 혜영에게 말했다.

“고구마 온상이 준비됐으면 바로 출발하자.”

“준비는 됐지만 모종은 내륙용으로만 써야 해요. 복건성이 따뜻하고 가까우니까 고구마 줄기를 많이 따 가기로 했어요.”

“응? 씨를 뿌리거나 고구마를 잘라서 온상에서 키워야 하는 것 아냐?”

이민호는 고구마를 감자와 비슷한 작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나마 감자와 달리 씨를 뿌려 재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온상은 서리가 내리는 추운 곳에서 보온을 위한 장치였다. 배에 가득 싣고 가야 하므로 질그릇 화분에 난 고구마 싹을 종이로 사방을 덮은 물건을 일만 개나 준비했다.

“고구마는 줄기를 자른 순을 옮겨 심어서 뿌리만 내리면 수확할 수 있어요. 복건성은 겨울에 따뜻하고 바닷가나 섬에는 서리가 내리지 않으니 줄기를 바로 잘라서 땅에 심으면 돼요. 물론 내륙 지방은 서리가 내리니 온상이 필요해요.”

“그렇게 좋은 곳인데 어째서 백성이 굶어 죽는 거야?”

이민호는 알고도 답답해서 그렇게 물었다. 복건성은 바닷가 가까운 평지에만 농지가 있고 내륙지방으로 들어가면 산간지방이나 다름없었다. 복건성은 산 8할, 물 1할, 논 1할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산이 많았다. 물도 많아서 해안 평지 농사에서 쌀농사는 잘 되지만 산간지방에서 키울만한 작물이 없다는 문제가 이번에 기근을 확대시킨 셈이었다.

그 날 오전 이민호는 복건성에서 고구마 재배법을 설명해줄 농부들 20여 명을 전선에 태우고 푸저우로 향했다. 전선은 세 척, 쌀과 잡곡을 가득 실은 수송선이 20여 척이었다.

그 동안 복건 순무가 일당 노동자를 고산국에 송출해준 덕에 고산국 농지와 주거지가 많이 개발됐다. 그러니 순무에게 식량을 선물로 넘겨줘도 이민호가 아쉬울 것은 없었다.

이민호는 기함에 함께 탄 왕명명에게 농담을 걸었다. 함대사령관 침실 앞에 위치한 집무실은 제2의 왕궁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배고프다고 농부를 잡아먹지는 않겠지?”

“확실치 않아요.”

“뭐? 무슨 소리야?”

“복건 일부 지역에서는 사람을 잡아먹고 있어요.”

복건성에서 기근이 심각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고산국에서 식량을 많이 지원해줘서 급하지는 않은 줄 알았다. 그러나 내륙지역에는 아직 식량이 도착하지 않아 기근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멍멍이 너 말이야. 고향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데 불쌍하지도 않아? 너는 그 사이에 돈 벌 생각만 했다며?”

“복건성이 고향이라지만 다른 사람들은 친척도 아닌 걸요.”

“어휴! 뭐라고 해줄 말이 없구나.”

왕명명은 무척 똑똑한 편이고 상인으로서 더할 수 없이 우수했다. 하지만 가끔 보면 이민호가 경악할 정도로 굉장히 이기적인 면이 있었다. 왕명명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아닌 것 같아도 이기적인 중국인의 유전자를 타고 난 것 같아 이민호가 보기에 조금 섬뜩했다.

“멍멍아! 복건성은 일단 고산국 바로 건너편이니까 평소에 친해두는 편이 좋아. 돌아오는 것 없이 돈만 들더라도 말이야. 알았어? 그래야 무슨 일이 있을 때 복건성 백성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인 행동을 하지. 국가안보 차원에서 고려해야 해.”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죄송해요, 주인님.”

“미리 말을 안 해준 나도 잘못이다만, 말을 하지 않더라도 똑똑한 너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을 줄 알았지.”

“저 바보에요. 흑!”

여자의 눈물에 약한 것이 남자였다. 이민호가 왕명명을 가만히 안아주면서 토닥거렸다. 왕명명이 혀를 쏙 내밀며 웃는 것은 이민호가 못 볼 줄 알았겠지만, 사방에 거울이 있었다. 옆에 서 있는 민희와 민영의 표정만으로도 왕명명이 몰래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민호가 눈을 마주치자 왕명명은 모르는 척 슬픈 얼굴로 바꿨다. 화를 참지 못한 이민호가 의자에 앉은 채 왕명명을 무릎 위에 엎드리게 했다. 그리고 치마를 위로 올린 다음 속옷을 밑으로 내렸다.

왕명명은 이민호가 드디어 안아주는 줄 알고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이 자세는 꽤나 에로틱해 보였다. 왕명명이 부드러운 가슴으로 이민호의 하체를 은근히 문질러 자극했다.

- 짜악!

“악!”

이민호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내려치자 왕명명이 비명을 질렀다. 민희와 민영이 슬쩍 고개를 돌려서 봤다가 다시 외면했다. 이민호가 여자든 아랫사람이든 관계없이 손찌검하는 것을 처음 보면서 조금 놀랐다.

이민호가 왕명명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다시 내리쳤다.

“너, 나 속이지 말라고 했지?”

“안 속였어요.”

“금화와 은화에도 내 얼굴을 새기고 말이야. 장난칠 게 따로 있지. 네 마음대로 하는 버릇은 좀 죽여 놔야겠다.”

열 몇 대를 치니까 왕명명이 흐느끼며 울었다. 이민호도 손바닥이 아파서 더 이상 때리지 못했다. 때리면서도 혐오감이 너무 앞서서 이민호가 새로운 세계에 눈 뜰 일은 없었다.

“나는 네 주인이 되기로 했으니 너도 날 주인으로 제대로 모셔야 할 거야. 그게 싫으면 지금 당장 떠나!”

“잘못했어요. 흑흑! 버리지 말아주세요.”

왕명명이 엉엉 울며 매달렸다. 속이 쓰린 이민호가 왕명명의 엉덩이를 살짝 쓰다듬다가 민희를 불렀다. 민희가 미리 약을 준비해놓고 있다가 달려왔다.

“주인님이 저를 안아주지 않으시니까 심통이 나서 그랬어요.”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해?”

“중요해요. 저도 여자란 말이에요.”

왕명명이 나이가 스무 살이 넘었다지만 아직 어려 보여서 딱히 안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은 이민호 기준으로도 예쁜 편이었고 몸매는 이미 충분히 성숙했다.

“알았다. 일단 치료나 해라.”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왕명명을 이민호의 방으로 보내 쉬도록 했다. 민희에게 부축을 받아 들어가던 왕명명이 이민호를 불렀다.

“저기, 주인님.”

“왜?”

“앞으로 안아주시지 않을 거면 가끔씩 엉덩이를 때려주세요.”

“앞으로 절대로 너를 안 때리겠다.”

왕명명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모양이었다. 다음부터 왕명명이 잘못하면 어디 하루나 이틀 가둬놓고 밥을 안 주기로 했다.

푸저우에 도착한 전선에서 이민호가 내렸다. 포구에서 수하 관리들을 데리고 초조히 기다리고 있던 복건 순무 허부원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상견례를 마친 이민호가 고구마 열매를 내밀었다. 고구마를 처음 본 허부원이 샅샅이 살폈다.

“이것이 여송에서 난다는 주서(朱薯)라는 열매군요. 큼직하고 좋습니다.”

“껍질이 불그죽죽하니까 그런 이름도 붙었군요. 남만에서 들여왔다고 번서(藩薯)라고도 합니다. 고산국에서는 흔히 고구마라고 부릅니다.”

1593년 5월에 마닐라에서 고구마를 들여왔다는 복건 상인 진진룡의 설화를 담은 <금서전습록>에서는 이때 복건 순무 이름이 김학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명사>에는 1593년 여름 복건 순무가 허부원으로 기록돼 있다.

김학증은 복건성 전역에 고구마를 퍼뜨리기 위해 다음 해까지 계속 노력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명사>의 기록과 상충된다. 진진룡이 고구마를 들여온 시기를 1594년이라고 한 기록도 있으니 1593년 당시 복건 순무는 김학증이 아니라 허부원일 가능성이 더 크다.

“재배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고, 기근을 구제하기에 이미 늦은 것 아닙니까?”

“고구마는 줄기만 땅에 심어도 금방 자랍니다. 식량과 함께 관리들을 각처에 파견하면서 고산국 농부들을 데려가십시오. 농부들이 자세히 재배법을 가르쳐줄 겁니다.”

“주애공께서 항상 복건에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쌀과 잡곡도 가져 오셨군요. 주애공을 뵐 때마다 제가 무능하다고 느낍니다.”

“허 순무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소. 이번에 우리 함께 열심히 일해서 이 위기를 넘깁시다.”

“감사합니다.”

양광총독 소언지를 이민호가 상방검으로 참수할 뻔했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허부원은 이민호에게 무척 공손하게 대했다. 물론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더라도 지방 관리 입장에서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제해줄 사람에게 공손하지 않는다면 인간성이 의심받게 될 것이다.

============================ 작품 후기 ============================

불쾌한 장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왕명명은 제가 어쩌다 캐릭터를 그렇게 잡았는지 모르겠군요.

오전에 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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