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206화 (155/1,000)

00206  28. 출병  =========================================================================

이민호가 예전에 고산국 발전계획을 짠 것이 있었다. 1차 목표 인구를 500만으로 잡고 출신 민족별 비중을 한족과 일본인을 1할로 제한했었다. 고산국에 한족 50만 정도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고 봤다.

물론 소수 화교들이 국가경제를 독점해 시장을 뒤흔드는 일을 막아야 하고 화교의 지나친 폐쇄성도 경계해야 했다. 현대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처럼 국가의 부가 온통 화교에게 독점되면 민족국가로서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제적 역량도 어느 정도 갖추면서 이국적인 시가지를 만들어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는 미국이나 유럽의 차이나타운 정도가 딱 적당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고산국은 화교의 고향이 바다 건너 가까운 곳에 있어 화교의 인구와 경제력에 나라 전체가 휘둘릴 우려가 있었다. 이는 매우 민감한 문제로서 명나라 이민자가 많아질 경우 고산국 고위 관료들에게 화교의 위험성에 대해 수시로 주지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대화하니까 문제가 풀리잖아요. 그 동안 주인님은 저를 바깥에 내돌리기만 해서 섭섭했어요. 저는 돈 버는 기계가 아니에요!”

“그랬어? 에구! 우리 귀여운 애기!”

“헤헤!”

이민호가 머리를 쓰다듬자 왕명명이 강아지처럼 좋아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그 동안 왕명명을 돈 버는 기계로 본 것은 사실이었다. 왕명명은 장사를 정말 잘해서 이민호가 거래에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왕명명이 나서야 더 많은 이익을 볼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처럼 전략적인 제휴를 해야 할 경우 반드시 이민호가 나서야 했다.

“해남도에서 나는 해삼은 너무 심했어요. 저를 믿고 비싸게 산 상인들이 손해를 봤다고 난리여요.”

“응? 아열대 해삼이 다 그렇지 뭐. 원산지를 밝히지 않았나?”

“다른 상품에 폐가 될까봐 미리 밝혔죠. 하지만 최고급과 중저가를 같이 취급하면 좋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남도 어민들을 굶길 수는 없지. 그래도 열대 해삼보다는 낫잖아?”

“열대 해삼요? 어휴~ 그 저급품! 해삼을 잡는 시간보다 껍질을 잡아당겨서 돌기처럼 만드는데 시간과 인건비가 더 많이 들겠어요.”

그래도 불멸의 생물이라는 평판이 자자한 해삼이라 적지 않은 값에 팔렸다. 그리고 그런 저가 해삼이라도 구하려고 실제 역사에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아 강제노동을 시켰다.

“광저우에서 상인들에게 들었는데, 마카오에 엄청난 보석이 나타났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공주님이 쓴 왕관이라고 하는데 의용공주님이 쓰신 것 맞죠?”

“홍보석 루비? 응. 그거 내가 줬어.”

이민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왕명명이 너무 부러워했다. 이민호는 왕명명의 튼실한 허벅지를 만졌다. 역시나 튼튼했다.

“와~ 역시 공주님은 미인이라 주인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시네요.”

“멍멍이 너한테도 하나 줄까?”

서랍에서 꺼낸 목걸이를 왕명명에게 걸어주었다. 큼지막한 붉은 루비 주변에 사파이어가 박힌 목걸이였다. 물론 이민호가 만들어낸 인조보석이었다.

“이건, 진품이군요! 못해도 은 50만 냥은 할 거여요. 주인님! 저한테 이런 걸 줘도 돼요?”

보석감정 능력이 있는 왕명명도 구분하지 못했다. 분명히 가짜는 아니고 단지 인공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니 결정구조 자체는 천연 보석과 완전히 동일했다.

“응. 대신에 계약기간 연장한다.”

“얼마든지 연장하세요!”

왕명명이 이민호의 목을 껴안고 매달렸다. 왕명명은 온몸이 통뼈와 근육으로만 이루어졌는지 작은 몸집치고는 좀 무거웠다. 그 사이 가슴이 많이 자라서 만지는 맛이 괜찮았다.

그러나 옆 보조침대에 민희와 민영이 앉아 있었다. 왕명명을 부러워하는 민희와 민영을 불러서 목걸이를 직접 목에 걸어주었다. 민희와 민영이 기뻐서 울먹거렸다. 이민호는 양심에 찔려서 나중에 둘에게 진짜 보석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침대 밑에 있지? 너도 나와라.”

“예, 주인님.”

호위대 중에서 오늘의 침대 밑 당번은 민주였다. 막내 민자보다 2개월 일찍 태어난 여진족 처녀에게도 섭섭하지 않도록 비슷한 목걸이를 주었다.

“헤~ 좋긴 한데 저만 받으면 언니들한테 욕먹어요.”

“다 나눠줄 테니 걱정 마.”

“고마워요, 주인님.”

민주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기뻐하며 다시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궁금해진 이민호가 침대보를 들어서 살펴봤다. 침대 밑에 천을 깔아놓고 그 위에 엎드린 민주와 눈이 마주쳤다.

밤새도록 침대 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호위 일도 힘들 것 같았다. 보석목걸이를 붙들고 좋아하던 민주가 몹시 부끄러워해서 얼른 침대보를 덮어주었다. 전선 안에서까지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침대 밑은 의외의 장소라는 장점이 있다고 나중에 민희가 설명했다.

“세상에! 50만 냥짜리 보석목걸이를 몇 십 명에게 나눠주겠다고요?”

“나는 그 정도로 부자니까. 음하하!”

그러나 아무리 돈이 궁해도 팔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혹시나 팔았다간 천연보석이 아니라는 사실이 언제 들통 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선물 받은 이들에게도 인조보석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기술보다는 착상 자체가 시대를 많이 앞선 물건이었다. 가짜와 인조는 전혀 다르다.

혜영과 혜진에게도 선물하기로 했다. 혜영은 많은 일을 하고 있었고, 혜진은 바쁜 이민호 대신 무연화약과 뇌관을 만들고 있었다. 제조방법 대부분을 가르쳐줘서 시녀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예전에는 복건성이 잘 살기로 유명했다는데 어쩌다 이 모양이 됐어?”

“그야 해금령 때문이지요. 복건은 원래부터 농사짓기 좋은 땅이 아니라서 다들 상업에 주력했는데 왜구들 때문에 내륙으로 강제 이주당해서 완전히 망했죠. 지금은 해금령이 풀렸지만 타격이 워낙 컸어요. 마닐라에 복건 상인들이 1만여 명이나 몰려가서 사는 것은 아시죠? 대부분이 작은 배를 타고 목숨 걸고 광저우와 마닐라를 왕복하는 영세 상인들이어요.”

“쯧쯧!”

이민호는 그들의 운명을 알기에 혀를 찼다. 실제 역사에서 1603년에 마닐라에서 명나라 상인들 2만 5천 명 중에서 2만 4천 명이 에스파냐 군인들에게 학살당했다. 주인 행세를 하는 에스파냐인들과 복건 상인 세력 사이에 비슷한 갈등이 조만간 발생할 것 같았다.

화교 이민사를 논하면서 마닐라에 거주하는 복건성 또는 광동성 사람 수만 명이 1603년과 1639년 두 번에 걸쳐 에스파냐 군사들에게 학살당한 사례를 흔히 든다. 명나라는 이 사건을 알면서도 에스파냐에 전혀 항의를 하지 않았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 당시 명나라는 백성이 영토를 떠나면 더 이상 백성이 아닌 도적으로 판단해 처벌의 대상으로 파악했다. 외국으로 도망갔다가 해적단을 결성해 명나라 해안을 노략질한 경우가 많으니 명나라 조정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었다.

이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해외교포나 재외교민에게 일정한 지위와 권리를 부여해 보호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이 시대에는 아직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이 시대 정부가 해외거주민을 보호하려고 나선다면 오히려 거주국에 대한 내정간섭, 혹은 식민지 종주국 국민들의 특권으로 비판받을 수 있었다. 정부가 해외 교민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나 권리가 아니었다.

“복건 상인들이 아리수 강변에도 몰려와서 살잖아요.”

“그 인간들 떠들어대면 너무 시끄러워.”

이민호는 궁궐 앞 선착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명나라 상인들을 위한 거주구역을 만들어주었다. 일부는 벽돌로 만든 정식 집이었고 일부는 판자를 두른 컨테이너 비슷한 임시 숙소였다.

장사가 잘 되는 동안에는 명나라 상인들은 고분고분했다. 물론 개념 없이 원주민을 등쳐먹다가 걸리면 혼쭐이 나기도 했으나 명나라 상인들은 고산국 해관 관리나 치안을 맡은 병사들에게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익이 줄어드는 순간 그들이 언제든 폭도로 변할 가능성을 이민호는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항구경비대에도 주지시켰다.

“복건성 노무자들보다는 그 상인들이 먼저 고산국 백성이 될지도 몰라요. 잘해주세요.”

“그래? 복건 상인들이라면 언제든 환영할 수 있지.”

현재 고산국에 체류하는 복건 상인들은 어느 나라 국적이 유리한지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왕명명이 듣기로 기본적으로 농지를 제공하는 고산국으로 이민하자는 것이 중론이라고 했다.

고산국 백성이 되는 순간 일정한 넓이의 경작지 주인이 되면서 세금을 빼고도 수확량 2할 5푼을 받을 자격이 자동으로 생기니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고산국에서 토지 매매는 불가능했다.

원주민 거주 지역을 빼곤 고산국 영토 전체를 국유지로서 관리하기 때문에 가족 단위로 나눠주는 토지가 큰 특혜가 되었다. 만약 백성들에게 세금으로 수확량의 5할을 받는다고 하면 이민호가 가렴주구를 하는 폭군이 되겠지만, 그것이 국가 토지라고 하면 선정을 베푸는 셈이 되었다.

특히 다른 직업을 가진 백성들에게 그것은 완전히 불로소득이었다. 조선의 평균적인 자작농이 얻는 수익 이상을 기본으로 얻고 나서 시작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고산국 백성들은 항상 여유가 있었다. 금광을 발견해놓고도 광부를 구하기 힘든 가장 큰 이유였다.

전선에서 나흘쯤 노닥거리는 사이 농부들이 돌아왔다. 20명 다 안 잡아먹히고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도착한 날에 관아 주변에 심은 고구마 줄기에서는 벌써 잔뿌리가 돋아 번식에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전하! 저희들이 산골에서 끔찍한 광경을 많이 봤습니다.”

“이야기하지 마!”

농부들이 저마다 치를 떠는 걸로 봐선 밥맛 떨어질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이민호는 혹시나 농부들이 전염병을 옮아왔을까 두려워 항구 객잔을 빌려 목욕을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힌 다음 배에 태웠다. 기근이 발생한 지역에서는 거의 당연하다는 듯이 전염병이 발생하기 쉬웠다.

“주애공 대인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허 순무도 수고하셨소.”

순무의 표정을 살펴보니 일단 급한 불은 끈 것 같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육로가 개통돼 수레에 쌀을 싣고 가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을 끓여 먹였다고 한다. 어느 지역에서는 도로가 막혔는데도 불구하고 인원을 많이 동원해 기어코 쌀을 전달했다.

그러나 기아가 심한 곳에서는 인명 피해가 많았고, 둥그런 토루 몇 개는 완전히 유령 마을로 변했다. 특히 토루끼리 전쟁이 자주 벌어져 시체 하나 안 남은 곳도 몇 군데 있었다. 그러나 당장 기아 퇴치가 급해 처벌하지 못한다고 순무가 치를 떨었다.

“그 동안 대인을 편안한 객사에서 모시지 못해 한스러울 뿐입니다.”

“다들 바쁜 걸 빤히 아니 부담을 주기 싫었던 것뿐이오. 순무는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시오. 곤란한 사정이 생기면 언제든 고산국 궁궐로 급전을 보내시오.”

“이번에 또 조선에 가십니까?”

“내 고국이기도 하고, 황제폐하께서 관심을 두신 곳이오. 당연히 가야겠지요.”

“대인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순무가 최대한의 공경을 담아 이민호에게 허리를 숙였다. 순무와 작별인사를 나눈 이민호가 마지막으로 전선에 올랐다. 복건성 관리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부두에 몰려와 전선들이 떠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민호가 나중에 알았는데 이때쯤 복건성 해안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작은 배를 타고 고산국으로 무작정 건너갈 계획이었다고 한다. 16세기 말에 수십만의 보트 피플이 발생할 뻔했다.

그러나 이민호와 복건 순무의 적절한 구제책으로 인해 실제로 배를 타고 건너온 사람은 극히 적었다. 고산국 조정에서는 그들을 구호한 다음 고산국 남서쪽 지방으로 보내 정착시켰다. 1년 지나서 수를 세어 보니 2만을 약간 넘겼다.

복건성을 탈출한 자들의 노력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적당한 크기의 도시가 남부 지방에 생겼다. 이민호는 도시 설계부터 도로와 상수원, 하수도 등 인프라를 도시에 깔았고 바닷가 황무지가 비교적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했다.

복건성에는 이 해에도 심한 가뭄 때문에 흉년이 들었다. 그러나 황토에서도 잘 자라는 고구마 덕택에 기근은 발생하지 않았다.

지난해의 7만 명보다 많은 10만 명의 복건성 주민들이 고산국에 건너와서 일했다. 흉년이 지나가면 정식으로 이민을 보내는 문제를 복건 순무와 협의하기로 했다.

그리고 푸저우 항구 옆 언덕에 이민호의 생사당이 세워졌다. 가운데 향불 뒤에는 이민호의 초상이 그려져 있고 왼쪽에는 복건 순무 허부원이, 오른쪽에는 어째서인지 왕명명이 배향됐다. 생사당 건립 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한 왕명명의 농간임을 나중에 알아낸 이민호가 왕명명의 엉덩이를 까고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 작품 후기 ============================

다음 회부터 당분간 전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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